My style
5회 초.
김인환은 턱을 괸 채 김성훈의 피칭을 보고 있었다.
점수를 못 내더라도 5회까지만 던지게 하고 마운드를 내려오게 만들자는 작전은 실패했다.
김성훈의 오늘 피칭은 물이 올랐다.
바깥쪽에 꽉꽉 들어차는 150km/h의 포심 패스트볼은 돌덩어리다.
김인환이 올 시즌 들어 타격 폼을 바꾸면서 바깥쪽을 강화했다지만 여전히 아웃코스는 까다롭다.
설령 공을 쳤다고 해도 배트가 밀린다.
김인환이 제아무리 타고난 장사라고 해도 배트가 가볍고 얇으니 소용없었다.
다른 투수들의 공은 펑펑 쳐 냈지만 묵직하기로 정평이 난 김성훈의 포심은 어림없다.
“후우.”
김인환의 한숨에 유선호가 물었다.
“아이고, 그래가 땅이 꺼지것나?”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뭐고? 와 한숨을 그리 쉬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요.”
“무슨 방법?”
김인환이 김성훈을 가리켰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치던 대로 치자니 어떻게 해도 답이 안 나올 거 같고, 타점을 앞에다 두고 치자니 그건 아닌 거 같고.”
“앞에다 두고 치는 건 왜 안 되는데?”
“제가 타점을 앞에 두면 변화구에 너무 약해서요.”
“자가 변화구를 을매나 던진다고. 직구가 한 7할인데 무슨 변화구 타령을 해쌌노.”
“그래도요.”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 안 될 거 같으면 되는 거로 바꾸는 게 맞지, 안 되는 걸 그대로 밀고 가는 게 맞나?”
김인환은 포수 장비를 주섬주섬 입고 있는 송석현을 가리켰다.
“석현이 보니까 되든 안 되든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더라구요. 저도 석현이 따라 하면서 득을 본 것도 많기도 하고 하니까…….”
“그래서 석현이가 안 되던 때가 언제 있었는데?”
“……음.”
“자는 자고, 니는 니지. 참고할 것만 참고해라. 자랑 니랑 다르다 안 카나.”
김인환이 우물쭈물했다.
아직도 부족한 게 많다고 자평하지만 시즌 초와 비교하면 환골탈태다.
송석현과 함께 훈련하면서 극적으로 변화를 준 덕이었다.
히팅 포인트를 뒤에 두고 가장 얇고 가벼운 배트로 끝까지 공을 보면서 친다.
때때로 타석에 붙거나 앞에 서는 등의 변화를 줬으나 기본적인 타격 폼은 바꾸지 않았다.
“사람이 백이면 걸음걸이도 백 개다. 걸음걸이도 사람마다 다른데 빠따 휘두르는 건 오죽 다를끼고? 어제랑 오늘도 다른 게 빠따다. 니가 그때그때 맞춰서 해야지 그렇게 하면 안 돼. 기본을 지키는 거랑 외곬수랑은 달라, 인마.”
유선호의 얘기에 김인환은 머리가 띵했다.
그때그때 다르다?
자신은 왜 지금의 타격 폼을 가졌지?
바깥쪽에 약하고 변화구에 약하다 보니 이를 타개하기 위해 만든 스윙이다.
즉, 바깥쪽 변화구에 강한 스윙이다 보니 바깥쪽의 빠르고 강한 공에는 약하다.
바깥쪽의 빠르고 강한 공을 치려면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고 타이밍을 더 빠르게 두면 될 일이다.
“직구를 노렸는데 체인지업이 오면 어쩌죠?”
김인환의 물음에 유선호가 피식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헛스윙 함 하는 거지. 그게 무서워서 안 할 끼가? 열 개 중에 세 개 치면 칭찬받는 게 타자 아이가? 체인지업 오면 헛스윙 돌려. 자는 뭐 주구장창 체인지업만 던질까 봐 그라나?”
순간 김인환은 뒷목이 짜르르했다.
무섭다는 말.
애써 외면해 왔던 말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장님 소리를 들을까 봐, 짐 덩어리로 손가락질받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어떻게든 삼진을 안 당하기 위해, 헛스윙을 안 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 시즌 초와 지금은 다르다.
자신은 고트의 3번 타자이자 클린업의 주축으로 인정받았다.
바깥쪽 변화구라는 약점이 이제는 극복됐는데 왜 계속 집착하지?
이제는 몇 경기 못 한다고 2군에 내려갈 일은 없잖은가?
“아……!”
김인환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인환과 눈이 마주친 사람은 최재완이었다.
“재완이, 네 배트 좀 줘 봐.”
“이거요?”
김인환이 최재완의 배트를 쥐더니 이리저리 살폈다.
“이거 무게 몇이야?”
“900g이요.”
“너 예비용 하나 있지?”
“네. 있는데요.”
“나 좀 빌려줄 수 있어?”
“지금요? 지금 쓰게요?”
“어, 오늘만 좀 쓰자.”
“형, 경기 중에 배트를 바꾸려고요?”
“빌려줄 수 있는 거지? 그것만 말해 줘.”
“빌려야 주는 건데……. 경기 중에 배트 바꾸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게다가 더 무거운 배트는 아닌 거 같은데. 투수도 김성훈이잖아요. 공도 빠른데 더 무거운 배트는 좀…….”
김인환은 최재완의 말을 끊고 배트를 가져왔다.
“됐어. 이거면 돼.”
5회 말 수비 후 클리닝 타임.
김인환은 복도로 나가 스윙했다.
900g은 중심 타자가 쓰기엔 조금 가볍다.
하지만 860g을 쓰다가 900g을 쓰다 보니 물속에서 스윙하듯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김인환은 스윙을 하고 또 했다.
하면 할수록 예전의 감각이 돌아왔다.
배트 스피드에 집착할 필요 없다.
모든 공을 쳐 낼 필요는 없다.
자신은 송석현이 아니다.
귀신같이 공을 고르고 기가 막힌 노림수로 투수의 허를 찌르는 타자가 아니다.
자신의 장점은 압도적인 힘.
변화구에 치중하다 보니 강점이 희석됐다.
천하의 김인환이 상대의 포심 패스트볼에 밀린다?
작년까지만 해도 김성훈은 자신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피했다.
변화구를 놓친다고 해도 대놓고 들어오는 포심을 놓칠 순 없다.
7할의 실패를 인정하자.
3할.
세 번 중에 한 번만 쳐 내도 내 승리다.
* * *
6회 초.
무사 만루.
정용욱은 타석에 들어선 김인환에게 물었다.
“밥 먹다 체했냐? 왜 얼굴이 허여멀게졌어?”
“…….”
김인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용욱은 한마디를 더 하려다 입을 닫았다.
김인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기 말을 무시한 게 아니다.
경기에 집중하고 있다.
‘포심, 아웃사이드.’
무사 만루라고 어렵게 갈 필요 없다.
김성훈의 구위는 아직 죽지 않았고 공의 개수도 여유가 있다.
오늘 김인환은 김성훈의 구위에 완전히 눌렸다.
김성훈은 무사 만루라고 떠는 놈이 아니다.
자신에게 김성훈의 장점을 꼽으라면 제구나 돌직구, 슬라이더를 꼽지 않을 거다.
평정심.
몸 쪽 공에 인색하다는 점 하나 빼면 완벽한 투수다.
“김성훈 선수, 자세를 잡습니다.”
“초구 중요합니다. 아주 중요해요.”
김성훈이 공을 던지자 김인환도 스윙했다.
팡!
-스트라이크!
공이 들어간 다음에 지나가는 배트.
김인환이 숨을 내뱉었다.
“…….”
스트라이크를 잡았건만 정용욱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풍압(風壓)이 다르다.
전 타석까지만 해도 날카로운 채찍 같던 바람이 지금은 도끼가 지나간 것처럼 묵직하다.
갑자기 왜?
“김인환 선수의 스윙이 늦습니다. 타이밍이 안 맞아요.”
“김성훈 선수의 직구가 152km/h가 나오네요. 피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는 얘기거든요.”
“오늘 김인환 선수가 김성훈 선수를 상대로 타이밍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용욱은 제2구로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김성훈이 고개를 저었다.
포심에서도 타이밍이 늦는데 굳이 체인지업을?
정용욱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불안감에 다시 한번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김성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김성훈 선수, 제2구!”
같은 코스로 오는 체인지업.
김인환은 이번에도 스윙했다.
-스트라이크!
“또 김인환 선수가 헛스윙을 합니다.”
“오늘 김성훈 선수의 체인지업이 좋네요. 잘 떨어지는데요?”
정용욱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헛스윙을 했는데 무섭다.
방금 전의 스윙은 스쳐도 간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사정없었다.
‘체인지업.’
어쩔 수 없다.
다시 한번 체인지업.
김성훈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젓진 않았다.
체인지업이 잘 먹힌 걸 봤잖은가.
팡!
김성훈이 던진 체인지업이 미트에 들어왔다.
김인환은 스윙하지 않았다.
배트도 내지 않았다.
“김인환 선수, 체인지업을 골라 냈습니다.”
“코스가 좋았는데 저걸 어떻게 참았을까요?”
참아 낸 게 아니다.
김인환은 이번 공은 버렸다.
자기가 배터리라면 어떨까, 생각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타자가 체인지업에 헛스윙 했다.
체인지업 하나 더 던지기 좋은 타이밍 아닌가.
만약 포심이 들어와 삼진을 먹는다면 물러나면 그만이다.
뒤에는 송석현이 있다.
내가 해결하지 않아도 뒤에는 더한 놈이 있지 않은가.
나는 내 스타일대로 내가 원하는 공을 친다.
포심 패스트볼.
힘은 힘으로 부숴 버린다.
‘체인지업.’
세 번째 체인지업 사인.
김성훈은 대답 대신 로진백을 만졌다.
에둘러 거절하는 사인.
정용욱은 다시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팡!
김인환은 이번에도 치지 않았다.
공을 던질 때부터 체인지업이 느껴졌다.
조급함을 버리니 세상이 보인다.
투수만 보이는 게 아니라 주자들도 보이고 야수들도 보이고 관중도 보인다.
나는 그동안 뭘 보고 있었을까.
야구장을 이렇게 관조하는 게 몇 년 만이던가.
아니, 처음이던가?
‘포심, 아웃사이드.’
삼 연속 체인지업을 던졌으니 이젠 별수 없다.
빠른 공이다.
탕!
김인환의 배트에 맞은 공이 3루 밖으로 크게 휘어져 나갔다.
파울.
“김인환 선수의 타이밍이 여전히 늦습니다.”
‘체인지업.’
빠른 공을 보여 줬으니 체인지업 하나를 더 간다.
김성훈은 무표정으로 사인을 보고 있었으나 정용욱은 그게 싫다는 표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더라도 사인은 바꾸지 않는다.
느낌이 안 좋다.
김인환의 스윙이 불쾌하다.
김성훈은 외곽에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김인환의 배트가 돌았다.
툭.
배트 끝에 맞은 공이 바닥에 튕겨 라인을 나갔다.
파울.
무릎을 꿇은 김인환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야, 인환이. 그걸 건드네.”
정용욱이 다시 한번 말을 걸었으나 김인환은 요지부동.
완전히 경기에 빠져들었다.
씨익.
김인환이 갑자기 미소 지었다.
정용욱은 영문을 몰랐으나 섬뜩했다.
김인환은 안경을 추켜올렸다.
방금은 직구 타이밍에 배트를 돌렸는데 체인지업인 걸 보고 걷어 냈다.
상대의 변화구에 속았는데 파울을 만든 거다.
보인다.
상대의 공이 보인다.
안경을 쓰니 이렇게 훤히 잘 보이는데 왜 그동안 아등바등했는지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체인지업을 급하게 걷어 내느라 몸에 쥐가 날 뻔했지만 오히려 짜릿했다.
이거구나.
벽을 넘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체인지업.’
또 체인지업이다.
김성훈은 목을 돌리면서 사인을 외면했다.
타자가 포심을 못 치고 있다.
왜 자꾸 피해 가는가?
정용욱은 다시 사인을 냈지만 김성훈은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심판이 빠른 진행을 하라고 사인을 보냅니다.”
“아무래도 중요한 순간이다 보니 사인 교환이 길었죠?”
김성훈이 손가락을 어깨에 가져다 댔다.
포심.
포심을 던지겠다는 선전포고.
정용욱은 미트를 들었다.
마운드 위의 투수야말로 주인공 아닌가.
중요한 순간엔 투수의 뜻을 따라 줘야 한다.
“후.”
손의 로진을 입으로 털어 낸 김성훈이 힘껏 공을 던졌다.
탕!
힘찬 소리와 함께 공이 직선으로 날아갔다.
“파울! 파울입니다! 1루 관중석으로 총알같이 날아갔습니다.”
“이번엔 김인환 선수가 너무 급했네요. 스윙이 빨랐습니다.”
김성훈이 1루를 돌아봤다.
파울이지만 무시무시한 타구였다.
공이 부서지는 거 같았다.
왜 정용욱이 집요하게 체인지업을 요구했는지 알 거 같다.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김! 인! 환!”
김인환의 귀에 응원가가 흘러들어 온다.
타석에서 응원가를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있던가?
김인환이 배트를 가볍게 쥐었다.
삼진은 삼진일 뿐.
후회 없이 스윙한다.
‘체인지업.’
‘포심.’
‘체인지업.’
‘포심.’
‘체인지업.’
‘포심.’
정용욱과 김성훈이 사인이 계속 엇갈렸다.
정용욱은 명치가 꽉 막혔다.
저 파울을 보고도 정면 승부한다고?
김성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맞더라도 들어간다.
그게 자신이 여태 해 왔던 야구니까.
포수는 결국 투수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공을 던지는 건 어디까지나 투수다.
김성훈이 다리를 들었다.
슬라이드 스텝 없이 전력을 다해 공을 던졌다.
오늘 최고 구속 156km/h이 찍힌 공이었다.
공은 자로 잰 듯 미트를 향해 세차게 날아갔다.
김인환의 배트도 이미 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