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22화 (122/201)

시즌은 이제부터

김인환이 나오자 페가수스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다.

승부.

오늘 경기 내내 죽을 쒔던 타자다.

조진호와의 통산 전적도 좋지 못하다.

정용욱은 벤치의 사인을 받고도 망설였다.

작년의 김인환과 올해의 김인환은 다른 인물이다.

작년까진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타자였다면, 올해는 빠른 배트 스피드로 존에 오는 공을 놓치지 않는 타자다.

조진희야 김인환의 배트 스피드가 무색하게 더 빠르고 강한 공으로 윽박질렀지만 조진호도 통할까?

느린 공을 제구와 체인지업으로 보완하는 투순데?

정용욱은 우선 간을 보기로 했다.

‘체인지업, 아웃사이드.’

조진호의 체인지업은 국내 최고의 반열에 올라 있다.

서클 체인지업으로 우타자에겐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공을, 좌타자에겐 아래로 더 가라앉는 공을 구사한다.

같은 서클 체인지업으로도 궤적의 변화를 줄 수 있는 서클 체인지업의 달인이 조진호다.

초구 체인지업으로 타자가 무얼 노리는지 살펴야 한다.

“투수 던집니다!”

조진호가 던진 체인지업이 브레이킹이 걸리면서 떨어졌다.

김인환은 그대로 스윙했다.

탕.

배트에 맞은 공이 3루 방향으로 날아갔다.

파울.

정용욱이 입술을 모았다.

“초구는 파울. 김인환 선수가 아쉬운 표정을 짓습니다.”

“아쉽죠. 타이밍만 잘 맞췄다면 그라운드 안에 집어넣을 수 있었을 텐데요.”

확실히 다르다.

조진호의 체인지업을 건드렸다.

체인지업을 밀어서 3루 방향 파울을 만들었다.

정용욱은 다시 한번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김인환의 배트는 다시 따라 나갔다.

“……흡!”

김인환은 도중에 배트를 멈췄다.

정용욱이 심판을 쳐다봤지만 스트라이크 콜은 없었다.

“김인환 선수, 참아 냅니다. 참아 내요.”

“조진호 선수의 체인지업을 참아 내는 건 정말 쉽지 않은데 말이죠.”

정용욱이 콧바람을 살짝 뿜어냈다.

아니다.

위험하다.

지금 김인환과 조진호는 천적 관계나 다름없다.

히팅 포인트를 뒤에 둔 스윙 스피드가 빠른 타자와 느린 공으로 승부하는 투수.

정용욱은 바깥쪽으로 연이어 공을 반 개씩 빼며 김인환을 유인했다.

“김인환 선수, 끝내 참아 내고 1루로 가네요.”

“인내심이 많이 생겼네요, 김인환 선수.”

“타석에는 송석현 선수가 들어옵니다.”

응원단장의 선창으로 응원가가 시작됐다.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송석현의 등장에 팬들이 한목소리로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들리시나요? 지금 여기 한국시리즈 아니죠?”

“응원가 소리가 대단하네요. 송석현 선수가 얼마나 고트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지 잘 알 거 같습니다.”

“잠실의 왕이라는 소리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거 같습니다. 정말 엄청난 응원가네요.”

“만루에 송석현이 나왔다. 그럼 뭐, 고트 팬이 아니더라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페가수스의 감독은 뒷짐을 졌다.

정용욱이 일부러 김인환을 피했다.

송석현이 쉬워서?

아닐 거다.

정용욱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다.

타석의 김인환을 보고 생각이 바뀐 거다.

김인환이 지금은 더 무서운 타자다.

무사 만루.

우타자 바깥쪽으로 빠지는 서클 체인지업은 병살을 노리는데 최적의 공이다.

1점을 내주더라도 병살로 아웃 카운트를 챙긴다.

뒤 타자 유선호는 선구안은 몰라도 아직 타격감은 살아나지 못했다.

타격감이라는 게 2군 경기 좀 뛴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1군에서 2주, 4주는 뛰어야 감이 생기는 법이다.

유선호 뒤에는 최재완, 오진영으로 이어지는 물타선이다.

병살이든 플라이든 상관없다.

안타만 내주지 않으면 이번 이닝은 무사히 넘길 수 있다.

설령 정용욱의 판단이 착오라고 한들 상관없다.

야구는 확률의 스포츠 아닌가.

정용욱은 실점 확률이 가장 낮은 선택을 했다.

뒤돌아보면 정용욱의 선택은 승률이 높은 편이었다.

“배터리의 사인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타석에 송석현이 들어선다면 당연한 거죠. 요새 팬들 사이에선 선수들의 등급을 나누는 게 유행이라죠? 송석현 선수는 탈인간계라고 합니다, 하하. 신계라는 거죠.”

“스무 살의 선수가 이 정도로 잘했던 적이 있나요?”

“데뷔하자마자 이 정도로 잘했던 선수는…… 한 선수밖에 없겠네요.”

“신 위의 신 같은 선수죠.”

정용욱은 초구를 신중하게 골랐다.

송석현은 공을 많이 지켜보는 타입이다.

그렇다고 대끔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가다 홈런 맞는 경우도 많다.

공을 지켜보는 타입이지만 노림수를 갖고 기다리는 타자.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체인지업이지만 변화구를 계속 던지면 카운트에 몰리게 된다.

‘포심, 아웃사이드.’

일단 공 하나를 찔러본다.

조진호의 공이 정용욱의 미트에 그대로 꽂혔다.

-스트라이크!

“초구 스트라이크를 뺏는 조진호 선수! 완벽한 제구였습니다.”

“저렇게 존에 딱 들어오면 참 치기 애매하죠. 아니 칠 수가 없죠. 초구부터 저런 공에 배트가 나간다면 안타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초구를 빼앗기게 되면 송석현 선수의 머리도 복잡해지겠네요.”

송석현이 숨을 골랐다.

흠잡을 데 없는 교과서적인 폼이다.

저 폼에서 포심과 체인지업을 던지니 타자 입장에선 무슨 공이 올지 알 도리가 없다.

우타자 입장에서 도망가는 서클 체인지업은 최악의 상성.

송석현은 타석에 바짝 붙었다.

“초구 스트라이크 하나를 뺏어 왔는데 조진호 선수가 여기서 어떤 공을 던질지.”

정용욱은 송석현이 타석에 바짝 붙자 침음을 흘렸다.

조진호는 바깥쪽 코스로 승부 보는 투수다.

느린 공으로 몸 쪽 공을 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송석현이 저렇게 바짝 붙는다면 바깥쪽 웬만한 코스는 다 배트로 칠 수 있다.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서클 체인지업도 칠 수 있단 얘기다.

정용욱이 사인을 바꿨다.

조진호는 사인을 보고 미간을 좁히더니 결심을 굳혔다.

“자, 조진호 선수의 2구는 뭘까요?”

조진호가 던진 공은 바깥쪽으로 빠지는 포심처럼 보였다.

송석현은 그대로 공을 지켜봤다.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빠져오다가 마지막에 휘어서 존에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투 스트라이크! 백도어 슬라이더로 타자의 허를 찌릅니다!”

“조진호 선수가 슬라이더를 잘 안 던지는데 지금은 깜짝 놀랐습니다. 저런 슬라이더가 들어오면 타자는 할 게 없죠.”

“무사 만루 상황에서 투 스트라이크를 뺏기고 마네요.”

투 스트라이크를 뺏었지만 정용욱의 표정은 어두웠다.

밑천을 다 드러낸 셈이다.

조진호는 커브도 던질 줄 알지만 열 개 중에 하나 던질까 말까다.

김인환도 어렵지만 송석현도 어렵다.

그래도 승부해야 한다.

‘포심, 아웃사이드.’

정석으로 밀어붙인다.

조진호의 예의 자로 잰 듯한 공이 미트를 향해 날아온다.

스트라이크존에서 조금 빠진 공.

송석현이 배트를 내밀었다.

탕!

“중견수! 중견수! 중견수! 중견수가~~~~ 잡습니다! 3루 주자는 홈으로! 세이프! 2루 주자도 3루까지 세이프! 이러면 1사 1, 3루가 만들어집니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1점을 따라가는 플라이가 나왔습니다.”

“고트 입장에선 최선의 결과가 나왔네요. 물론 만루 홈런이 나왔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언제나 홈런을 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득점을 올렸다는 게 중요한 거죠.”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안타를 뽑아내는 송석현 선수.”

“이게 4번 타잡니다. 홈런을 쳐야 4번 타자가 아니라 타점을 올리는 선수가 4번 타자예요.”

페가수스 벤치도 고트 벤치도 한숨을 돌렸다.

서로 최선의 수를 뒀다.

페가수스는 송석현을 1점으로 막았고, 고트는 어쨌든 1점을 따라갔다.

오늘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여기, 유선호의 타석일 거다.

유선호만 지나면 물 타선이다.

아직 배팅 감각이 안 올라온 유선호는 충분히 상대할 만한 선수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외곽에 꽂히는 포심에 유선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제구가 좋은 투수다.

최고 구속 140km/h 언저리로 정상급 불펜으로 군림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팡!

제2구 체인지업은 볼.

제3구 포심 패스트볼은 파울.

제4구 체인지업도 파울.

제5구 슬라이더는 볼.

제6구 체인지업은 파울.

제7구 포심 패스트볼은 볼.

정용욱이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히 해라, 좀.”

“그러니까 공 하나 달라고.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징글징글한 놈. 쉬어도 그 빌어먹은 눈은 여전하구나.”

유선호의 장점은 통산 타율 3할의 타격 솜씨가 아니다.

통산 출루율 4할 4푼의 저 미친 선구안이다.

1군 경기에서 제대로 뛴 지가 언제던가.

팡.

‘볼, 아웃사이드.’

조진호의 회심의 슬라이더는 볼이었다.

유선호는 배트를 놓고선 한마디를 남기고 1루로 뛰었다.

“친구끼리 공 하나를 안 주냐.”

1사 만루.

3-2 상황.

여전히 위기 상황이지만 나쁘진 않다.

조진호라면 최재완, 오진영 정도는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

‘체인지업, 아웃사이드.’

초구는 우타자 바깥쪽으로 빠지는 서클 체인지업으로 유인한다.

최재완은 여지없이 배트를 돌렸다.

이를 본 김정률이 입맛을 다셨다.

“급해, 급해. 마음이 급해. 공 하나 봐도 되는데 일단 달려드네.”

송석현이 말했다.

“그래도 스윙이 달라졌어요. 스윙 각이 예전보다 낮아져서 어중간한 변화구는 궤적에 다 걸릴걸요.”

“다른 투수면 모를까, 조진호는 어렵지.”

“재완 형도 조금만 침착하게 공을 보면 좋은 텐데.”

“그게 쉬우면 다 야구 잘하게? 피지컬이 좋아도 그게 안 돼서 망하는 애들이 수두룩 빽빽이야.”

1사 만루지만 고트 벤치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최재완, 오진영에 거는 기대가 적은 탓이었다.

-스트라이크!

“하, 저 백도어 슬라이더 큰일이네. 오늘 우타자는 저거 못 치겠는데? 쟤 자신감이 붙었네, 자신감이 붙었어. 이게 다 송석현 너 때문 아니냐.”

“제가 왜요?”

“네가 아까 저걸 못 치니까 쟤가 기 살아서 던지는 거 아냐.”

“그게 왜 제 탓이에요?”

“어쭈, 이놈이 야구 좀 잘한다고 이제 기어오르네?”

김정률과 송석현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최재완은 공 두 개를 걷어 내며 노볼 투 스트라이크를 유지했다.

정용욱은 끈질기게 버티는 최재완을 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이 패스트볼.

구속은 느려도 볼 회전이 좋아 살아 오르는 느낌이 있다.

조진호가 공을 던졌다.

타자 어깨 높이를 넘어오는 공.

탕!

최재완이 짧은 스윙으로 투수 정면으로 밀어 쳤다.

“3루 주자! 홈으로! 홈으로! 2루 주자까지 홈으로! 홈으로! 홈에서~~~.”

김인환이 미끄러지면서 손으로 홈 플레이트를 스쳤다.

정용욱의 미트가 막아 보려 했지만 이미 김인환이 지나간 후였다.

“세이프입니다! 최재완 적시 2타점 2루타! 순식간에 역전을 만들어 냅니다.”

“최재완 선수! 포효하네요. 크게 세리머니를 합니다.”

“오늘 경기의 MVP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좋은 수비를 보여 주더니 결승타가 될 수도 있는 안타를 쳐 냈습니다.”

함성훈 감독이 박수를 보냈다.

됐다.

최재완도 슬슬 틀을 깨고 있다.

김인환, 송석현에게 눌렸던 재능이 뒤늦게 피어오른다.

강타자는 아니지만 장타자의 재목을 지닌 선수가 최재완이다.

우산효과가 타선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

고트의 시즌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바로 지금,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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