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e of ace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잠실의 3루 응원석에 K가 줄지어 걸렸다.
조진희는 6회까지 1실점으로 막아 내곤 마운드를 내려갔다.
“조진희 선수! 오늘 탈삼진 아홉 개를 뽑아내면서 고트 타선을 꽁꽁 묶었습니다.”
“이게 바로 에이스죠. 상대 타선을 완전히 묶어 버리는 투구를 보십쇼. 오늘 홈런 하나 맞은 게 옥의 티일 뿐입니다.”
“송석현 선수가 오늘 분투했지만 아쉽게도 앞뒤에서 돕질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죠. 좌타자에게 유난히 강한 선수가 조진희 선수 아니겠습니까. 오늘 고트에는 좌타자가 셋이 있었는데 모두 상위 타선에 있었습니다. 이지성, 김인환, 유선호. 1번, 3번, 5번 타자들이 조진희 선수를 상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서 고트의 타선이 막혀 버렸습니다.”
“유선호, 이지성 선수가 트레이드로 왔지만 오늘도 송석현 선수는 외롭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유선호, 이지성 선수가 컨디션을 끌어올리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조진희 선수의 호투가 눈부셨지만 정천운 선수도 훌륭했죠? 1위 팀 페가수스를 상대로 6이닝 3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를 해냈습니다.”
“상대가 페가수스가 아니었다면 빛이 났을 텐데 아쉽네요. 하지만 다음 경기를 기약하기엔 충분히 좋은 성적이라고 봅니다.”
7회 초 마운드에는 투수 김정률이 올라왔다.
“3-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김정률 선수가 올라오네요.”
“함성훈 감독, 필승조 투수들을 아끼는 감독이었거든요. 그래서 비판도 많이 받았구요. 웬만해선 이기는 상황 아니면 투수들을 잘 투입하지 않는데, 오늘은 지고 있는데도 투수를 올립니다. 그것도 페가수스 상대로 말이죠.”
“저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경기 승산이 있다고 보는 거죠.”
페가수스의 타선은 2번 타자 심창규부터 시작됐다.
심창규는 배트를 쥐고 다리를 넓게 벌렸다.
“스탠스를 넓힙니다. 강한 타구를 날려 보겠다는 건가요?”
김정률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오직 송석현의 손가락에만 눈을 뒀다.
‘싱커.’
외곽이든 안쪽이든 상관없다.
아래로만 던져라.
송석현의 미트가 홈 플레이트를 가리켰다.
김정률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다가 허리를 푹 숙였다.
김정률의 손이 바닥을 스쳤다.
팡!
-스트라이크!
심창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방금 싱커는 날카로웠네요.”
“김정률 선수의 주특기죠? 최근 0점대 방어율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거 같습니다.”
“경기 수는 많지 않지만 0점대 방어율이라는 건 의미가 있죠.”
함성훈이 주먹을 쥐었다.
투수코치 연우식이 말했다.
“지금 정률이가 가장 페이스가 좋은데 지금 꺼낸 건 좀 과한 거 아닐까요?”
“선발은 우리가 밀려도 오늘 불펜은 우리가 더 좋은 편입니다. 정률이가 그동안 많이 쉬었으니 상황을 봐서 9회까지 맡겨 볼 생각이에요.”
“그렇게 길게……. 괜찮을까요? 타순이 돌면 정률이도 어려울 텐데.”
“안 된다면 바꿔야죠.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시험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언더 핸더 김정률의 포텐. 상대 타선이 페가수스라면 더 좋죠.”
연우식은 혀를 내둘렀다.
4위보다 7위가 더 가까운 순위다.
감독 대행이라지만 최근에는 언론의 포화도 거세지고 있는 와중에 선수를 키워 낸다.
배짱이 두둑한 걸까, 아니면 감독 대행이라 무서울 게 없는 걸까.
-스트라이크! 아웃!
“김정률 선수의 삼진! 하늘로 솟구치는 커브에 심창규 선수도 헛스윙을 합니다.”
“김정률 선수, 싱커만 좋은 게 아니라 커브도 좋네요. 오늘 컨디션이 저 정도라면 페가수스도 어렵겠는데요?”
심창규는 타석에서 물러서면서 다음 타자 김한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빡세다.”
김한성은 김정률의 초구를 어퍼 스윙으로 올려 쳤지만 중견수 쪽 플라이였다.
4번 타자 김욱이 숨을 고르며 타석에 섰다.
“좋은 거 하나만 줘, 후배님.”
“노력해 보겠습니다.”
김욱의 넉살에 송석현은 바깥쪽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부웅!
“헛스윙! 초구부터 힘차게 돌린 김욱 선숩니다.”
“제대로 노렸던 거 같은데 124km/h 체인지업이 들어갑니다.”
김욱은 헬멧을 고쳐 썼다.
“좋은 거 하나 달라니까 우리 후배님이 짓궂네.”
“좋은 거 하나 드렸잖습니까. 먹기 좋게 잘 드린 거 같은데요.”
“그러면 이번엔 직구 하나 줘 봐. 괜찮지?”
“네. 그럼요.”
송석현이 미트를 위로 들었다.
김정률이 공을 던졌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공.
김욱은 숨을 한번 참았다가 배트를 돌렸다.
-스트라이크!
“투 스트라이크! 지금은 스윙이 늦었습니다.”
“저건 완전히 속았죠. 방금 전 타석에서 김욱 선수가 인상적인 커브를 봤었거든요. 지금도 위로 솟구치는 커브가 올 줄 알고 한 타이밍 기다린 건데 직구가 왔습니다.”
김욱은 하하, 웃어 버렸다.
“오늘 이 코스에 두 번을 당하네.”
“직구 드렸잖습니까.”
“그래. 진짜 직구를 주네.”
“후배를 너무 못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 너무 못 믿었네. 그런 의미로 이번에도 직구 콜?”
“예, 그럼요.”
김정률의 다음 공은 바깥쪽으로 뻗어 오는 빠른 공이었다.
김욱은 욕심을 버리고 가볍게 밀어 쳤으나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구 삼진! 김정률 선수가 4번 타자 김욱 선수를 상대로 삼진을 뺏어 냅니다.”
“저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참 좋네요. 각이 날카로워요.”
김욱은 배트를 쥐곤 송석현을 내려다봤다.
“실망이야, 후배님. 거짓말이나 하고 말이야.”
“방금 직구였는데 모르셨어요? 살짝 휘는 직구였습니다.”
김욱이 웃음을 띠며 벤치로 돌아왔다.
타격 코치는 김욱을 보며 핀잔을 줬다.
“뭐가 그리 좋아서 실실 웃어?”
“재밌어서요.”
“뭐가 재밌다고.”
“앞으로 고트랑 할 때 재밌을 거 같아요.”
5번 타자 김성현은 김정률 상대로 풀 카운트까지 갔으나 싱커에는 여지없이 땅볼을 쳤다.
-아웃!
“김정률 선수, 깔끔하게 세 타자를 잡아냅니다.”
“김정률 선수를 보고 있자니 꼭 예전 모습을 보는 거 같네요. 고트의 황태자 김정률 말이죠.”
“우완 파이어볼러의 상징 같은 선수였는데 지금은 언더 핸드 투수가 됐습니다. 세상 참 재밌네요.”
김정률이 마운드에서 내려와 송석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송석현은 주먹으로 가볍게 부딪쳤다.
“오늘 공 어때?”
“에이스는 달라도 뭐가 다른데요?”
에이스,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김정률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짜식이, 아부는.”
7회 말. 페가수스에서도 투수를 올렸다.
불펜 투수 조진호.
조진호가 몸을 풀자 페가수스 응원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조진호! 조진호! 조진호! 조진호!”
“조진호 선수의 인기가 대단하네요. 선발도 마무리도 아닌데 불펜 투수가 이만큼 인기 있는 경우는 없는 거 같습니다.”
“조진호 선수는 페가수스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죠. 데뷔 때부터 전천후로, 마당쇠로 뛰면서 어느덧 12년 차 아닙니까? 마무리도 아닌 불펜 투수가 이렇게 롱런하는 경우는 드문데. 게다가 통산 방어율도 3점대에 이릅니다.”
“정말 어디 갖다 놔도 제 몫을 해내는 최고의 불펜이죠?”
“그렇습니다. 공은 빠르지 않아도 정교한 제구와 체인지업은 조진호 선수의 상징입니다. 오늘 페가수스가 조진호 선수를 올렸다는 건 반드시 잡고 가겠다는 심산 같습니다.”
“스콜피언과 울브스가 바짝 뒤쫓고 있으니 페가수스도 힘을 내야죠.”
조진호는 마운드에 올라오자마자 고트의 하위 타순을 세 타자 범타로 잡아냈다.
세 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던진 공은 단 10구였다.
“조진호 선수가 페가수스 팬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 있네요.”
“이렇게 되면 경기 후반이 더 재밌어지네요. 불펜의 핵심이 되는 두 선수 간의 대결입니다. 동갑내기 양 선수의 대결이 어떤 결말로 끝날지 궁금하네요.”
8회 초.
페가수스에선 정용욱이 나왔다.
오늘 경기는 1루타 하나.
정천운의 페이스에 말려 타격감을 잃은 차였다.
“후배님. 좋게, 좋게 가자고. 불쌍하고 늙은 선배를 가엽게 여겨 줘야지. 안 그래?”
“네, 알겠습니다.”
초구는 몸 쪽 바짝 붙는 싱커였다.
무릎 쪽으로 날아온 공에 정용욱은 화들짝 놀라 몸을 뺐다.
“쏘리.”
김정률이 정용욱을 보며 입을 뻥긋했다.
정용욱은 피식 웃고 말았다.
“섭섭하네. 우리 같은 포수끼리 이러기야?”
“오늘 정률 선배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습니다.”
“이 공이? 안 좋다고?”
제2구도 몸 쪽 싱커.
정용욱이 삼유간을 보고 쳤지만 3루수 최재완의 글러브 끝에 걸리고 말았다.
-아웃!
“까다로운 타자 정용욱 선수를 잡아내네요.”
“방금은 빈 공간을 잘 노렸는데 최재완 선수가 수비를 잘했네요.”
“오늘 공격에선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 수비에선 발군의 실력을 보이는 최재완 선숩니다.”
“공격이 부족하면 수비에서 벌충해야죠.”
정용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제대로 꼬였다.
정천운의 흑마구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면 김정률의 공은 수수께끼다.
“저놈은 저 나이에 회춘을 하나.”
7번 타자 유격수 김형우는 초구를 노려 투수 머리 위로 넘겼다.
다음 타자 좌익수 홍성욱, 풀 카운트에서 커브를 건드려 병살.
페가수스 감독은 쓰게 웃었다.
“오늘 병살 몇 개지? 두 개? 세 개?”
이기고 있는데도 기분이 찝찝하다.
8회 말.
타순은 1번 타자 이지성이었다.
이지성은 타석에 바짝 붙어 조진호의 공을 연신 파울로 쳐 냈다.
포심과 체인지업 투 피치인 조진호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공이 빠르다면 윽박지르기라도 할 텐데, 조진호는 바깥쪽에서 승부하는 투수였다.
“볼넷을 내주네요. 8회 말, 고트가 선두 타자를 내보냅니다.”
“발 빠른 이지성 선수가 나가면 골치 아프죠?”
이지성은 나가자마자 리드 폭을 넓혔다.
좌투수 조진호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이지성을 봤다.
-세이프!
조진호가 견제하자 이지성은 몸을 날려 귀루했다.
이지성은 유니폼의 흙을 털더니 다시 리드 폭을 넓혔다.
-세이프!
또 견제.
이지성은 다시 일어나 유니폼을 털었다.
이지성은 리드 폭을 또 넓혔다.
“와아아아.”
“이지성! 이지성! 이지성!”
“고트의 날쌘돌이 이지성! 달려, 달려, 달려! 소닉붐!”
조진호가 곤란하다는 듯 이지성을 바라봤다.
견제야 몇 번이고 할 수 있다지만 체면이 있는 법이다.
조진호는 초구로 바깥쪽 빠른 공을 던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탕!
“안타! 안탑니다! 설진일 선수의 안타! 1루 주자는 그대로 2루 밟고 3루까지! 타자 주자는 2루까지 못 가고 1루에서 멈춥니다.”
“초구를 좋아하는 설진일 선수에게 너무 정직한 승부를 했습니다. 이지성 선수의 발이 신경 쓰여서 바깥쪽 빠른 공을 던졌겠지만 뻔한 승부였어요.”
“이건 이지성 선수의 공이 절반은 있는 거겠죠?”
“그럼요. 발 빠른 주자는 어쨌든 투수에겐 귀찮은 존잽니다. 이지성 선수처럼 하는 게 체력 소모가 커서 그렇지, 저런 식으로 투수를 도발하면 투수도 견디기 힘들죠.”
“이러면 타석에는 3번 타자 김인환 선수가 들어옵니다.”
“오늘 조진희 선수에게 완전히 꽁꽁 묶여 버렸죠? 같은 좌투수 조진호 선수에겐 과연 설욕을 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김인환이 들어서자 팬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김! 인!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