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너지
탁!
탁!
연이은 파울에 조진희도 웃음을 거뒀다.
정용욱은 몸 쪽 공이 먹히지 않자 침음을 흘렸다.
손목을 다친 이후로 몸 쪽 빠른 공은 이지성의 공식적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정용욱이 몸 쪽 공 세 개를 던졌지만 모두 잡아당겼다.
조진희의 구위에 밀려 파울이 났지만 타이밍은 맞고 있다.
라인 밖으로 파울이 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탕!
이지성은 조진희의 커브를 잘 맞췄다.
공은 2루 베이스로 빠져나갔다.
“유격수! 유격수 김형우! 잡고 토스! 2루수가 1루로! 1루~~~~~~ 아웃입니다!”
“대단합니다. 경기 시작부터 엄청난 장면이 나왔어요. 빠진 공을 잡은 것도 대단하지만 그걸 글러브로만 2루수한테 토스해서 발 빠른 이지성을 잡아냈습니다.”
“이지성 선수,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네요.”
“이게 페가수습니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 라인이라는 명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팀입니다.”
고트 벤치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이지성이 돌아오자 함성훈 감독이 나와 손을 내밀었다.
“좋았어. 기대 이상인데?”
이지성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마주쳤다.
“오늘처럼 하면 120점이야. 역시 기대한 보람이 있네.”
“감사합니다.”
2번 타자 설진일은 초구 패스트볼을 노렸지만 구위에 밀려 2루수 땅볼로 아웃.
3번 타자 김인환은 삼구 삼진이었다.
“아…….”
김인환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좌타자에게 조진희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공이 눈에 익기도 전인 1회엔 손대기도 어려웠다.
“조진희 선수, 세 타자를 막아 내면서 이닝을 끝냅니다. 송석현 선수까지 타순이 이어지지 않았네요.”
“고트 입장에선 아쉽죠? 선두 타자로 송석현 선수가 나오게 되면 페가수스 입장에선 마음 편히 상대할 수 있겠네요.”
1회의 위기를 넘긴 정천운은 2회를 세 타자 범타로 끝냈다.
몸 쪽으로 붙이는 싱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과 커브, 슬라이더, 패스트볼은 타자의 배트를 끌어냈다.
“아, 눈에 보이는데 치면 자꾸 땅볼이네.”
“손맛이 없어, 손맛이.”
페가수스 타자들이 입맛을 다셨다.
최고 구속 140km/h 언저리.
빠른 공도 아니고 변화구가 현란하지도 않다.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노리는 공도 아니니 배트가 절로 나간다.
자신 있게 스윙하는데 땅볼이 나온다.
“이거 또 흑마술사가 나왔구만.”
정용욱이 포수 마스크를 썼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포수다.
구속도 제구도 구질도 특별할 게 없는데 자꾸 말리게 만드는 투수.
팬들은 흑마구를 던진다고 해서 흑마술사라고 부른다.
어떤 날은 도저히 칠 수 없는 공을 던지고 어떤 날은 고등학생이 와도 공략할 수 있을 거 같은 공을 던지는 투수.
오늘 하루가 길어질 거 같다.
“2회 말. 위기를 넘긴 고트가 첫 타자로 송석현 선수를 내세웁니다.”
“선두 타자로 송석현 선수가 나오는 게 고트 입장에선 아쉽겠지만 여기서 물꼬를 터야죠. 조진희 선수를 처음부터 공략하는 건 어렵습니다. 안타 하나하나를 만들어 내면서 조금씩 기회를 만들어야죠.”
“최근 주가가 치솟은 송석현 선수라고 해도 조진희 선수는 만만치 않다는 말씀이시죠?”
“그럼요.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라는 찬사는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네, 올 시즌을 한정해서 말이죠.”
“……네, 올 시즌에요.”
타석에 송석현이 들어섰다.
조진희는 로진백을 툭툭 두드렸다.
하얀 연기와 함께 송석현이 자신을 슬쩍 쳐다보는 게 보였다.
조진희는 미소 지었다.
스무 살.
한창 세상모르고 날 뛸 나이다.
세상 무서운지 모를 때다.
자신도 그랬다.
작년까진.
천외천이라고 하던가.
웬 미친놈 하나가 툭 튀어나오더니 자신의 우승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때 얼마나 복창이 터졌던가.
저 어린 신인에게도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
프로의 1군 무대가 만만찮지 않다는 걸.
‘패스트볼.’
정용욱의 사인에 조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슬라이더.’
절레절레.
정용욱이 콧바람을 내뿜었다.
‘커브?’
조진희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초구부터 커브는 웬만해선 잘 던지지 않는다.
조진희의 서드 피치인 커브는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에 비해선 완성도가 떨어진다.
메이저리그를 위해서 커브를 갈고닦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가 패스트볼에 초점을 맞췄을 때나 유용한 공이다.
‘패스트볼.’
정용욱이 다시금 사인을 바꿔 봤지만 조진희는 완강했다.
평소 웃고 다니는 선수지만 마운드에선 누구보다 쇠고집인 게 조진희다.
정용욱은 아래로 떨어뜨리라면서 미트로 홈베이스를 가리켰다.
“조진희 선수, 와인드업!”
조진희가 다리를 들었다.
온몸을 내던지는 조진희 특유의 거친 투구 폼.
귀공자 같은 외모와 달리 야생적인 투구 폼은 조진희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송석현이 숨을 죽였다.
정용욱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송석현이…… 여유롭다.
메이저리그에서 써 먹기 위해 낙차를 키운 커브다.
노림수를 가지지 않는 이상 정타를 만들기 어렵다.
조진희의 커브 구사율은 10% 남짓.
타자가 조진희의 커브를 노림수로 가질 확률도 적은 만큼 조진희의 커브는 효율적이고 유용한 서드 피치였다.
“…….”
송석현은 유선호의 말을 되뇌었다.
투수의 입을 보고 발을 보고 손을 봐라.
조진희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다.
발은…… 아직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손만은 달랐다.
공이 손 위로 잠시 불쑥 솟아올랐다.
전형적인 커브였다.
쾅!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완전히 넘깁니다! 솔로 홈런을 때리는 송석현 선수! 2회에 송석현 선수가 조진희 선수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뽑아냅니다! King is back! 잠실의 왕이 돌아왔습니다!”
“방금은 그냥 받쳐 놓고 쳤습니다. 이건 뭐 맞자마자 홈런이었어요.”
“초구부터 노리고 배트를 휘두른 송석현 선숩니다. 어마어마한 비거립니다. 이번에도 장외 홈런이 나올 뻔했어요. 관중석 상단을 때리는 대형 홈런입니다!”
“커브라는 구종이 정확히 치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정타만 맞추면 정회전이 걸린 공이라 장타로 이어지기 참 좋죠. 저렇게 기다렸다가 치면 장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 정 위원님이 차근차근 조진희 선수를 상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송석현 선수에겐 차근차근이 없었나 봅니다. 단번에 넘겨 버립니다.”
조진희는 굳은 표정으로 포수의 공을 받았다.
정용욱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여튼 저 고집은.”
송석현이 벤치로 돌아오자 선수들이 손을 들어 하이 파이브 했다.
“신고식 제대론데?”
“잘했어, 송석현! 좋았어!”
“홈런왕 기운 좀 줘라. 나도 좀 쳐 보자.”
선수들이 왁자지껄하며 송석현을 반겼다.
송석현은 배트를 내려놓고 땀을 닦았다.
“아니, 어떻게 커브인 줄 알고 친 거야?”
김인환이 그새 옆으로 와 물었다.
“보이잖아요, 커브. 안 그래도 초구는 한번 지켜보려고 손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이 쑥 올라오길래 기다렸다 쳤어요.”
“그러다 직구 왔으면 어쩌려고?”
“그럼 카운트 하나 주는 거죠, 뭐. 유선호 선배님이 투수 손이랑 입, 발을 잘 봐야 한다고 해서 더 눈여겨본 거예요.”
“그래? 나는 뭐 정신이 없던데, 워낙 공이 빨라서.”
“공이 안 보이면 보일 때까지 지켜봐요. 안 보이는데 치는 건 운이잖아요. 삼진을 당하더라도 데이터를 쌓아야지 운에만 맡겨서야 되겠어요?”
송석현은 유선호와 조진희의 대결을 지켜봤다.
쿠세.
어떤 투수든 습관은 있다.
그걸 얼마나 잘 캐치하느냐가 타자의 노하우가 된다.
유선호가 특별한 비법을 얘기하진 않았지만 유선호를 만난 후 더 확신이 생겼다.
약점이 없는 타자도 투수도 없다.
지켜봐야 한다.
약점이 보일 때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상대가 무너질 때까지.
-볼.
유선호는 조진희를 상대로 8구 끝에 볼넷으로 1루로 진출했다.
결정구 슬라이더를 거른 덕이었다.
뒤 타자들이 자동 아웃 수준으로 픽픽 나가떨어지던 걸 보아 오던 송석현에겐 색다른 광경이었다.
타순이 이어지고 있다.
“재밌네.”
송석현이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