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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오랜만에 만난 함성훈 감독은 그새 볼이 홀쭉해졌다.
유선호와 이지성, 송석현은 감독에게 고개를 숙였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다들 컨디션은 괜찮아?”
유선호는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아직 다는 안 올라왔는데, 거기 더 있는다고 컨디션이 좋아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 1군 경기에서 뛰어야 1군에서 적응하는 거지.”
“그래도 열심히 몸 만들었습니다.”
“유선호가 열심히라는 단어를 꺼냈으면 됐지. 지성이, 너는?”
이지성은 멋쩍게 웃었다.
“저야 몸 컨디션은 좋은데…….”
“좋은데?”
“잘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하.”
함성훈이 이지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2군 성적 좋던데, 왜?”
“장타가 안 나와서 걱정입니다.”
“장타는 걱정하지 마. 출루하는 것만 생각해. 이번 3연전 동안 선발 출장 보장할 테니까 1번으로 나서 봐.”
이지성의 눈이 커졌다.
“저를 1번으로 쓰신다구요?”
“당연하지. 국가 대표 1번 타자 이지성인데 왜 안 써?”
“그거야…… 그때…… 일이어서……. 차라리 원래대로 9번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1번을 맡을 수 있는 그릇은 아닌 거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내가 찾던 1번 타잔데.”
“제가요?”
“그래, 우리 팀 1번 진일이가 맡고 있는 거 알지?”
“예, 그럼요. 요새 진일이 잘하잖습니까. 3할 치고 홈런도 때리고 날아다니던데.”
“하지만 초구를 너무 좋아하지. 야구는 데이터 싸움이야. 상대 투수의 공을 많이 봐야 상대 투수의 컨디션이나 대처법을 세울 수 있어. 그런데 진일이가 초구를 치면 2번, 3번 타자가 얻을 수 있는 데이터가 없잖아.”
“그래도 저랑 진일이랑 지금 성적 차이가 꽤 날 텐데…….”
“모든 타자가 전부 잘 치고 잘 달리고 그러면 좋지만 그게 안 되니까 타선을 짜서 어떻게든 더 효율적으로 가려고 하는 거잖아. 안 그래? 전부 여기 선호나 석현이 같은 타자면 내가 타선 걱정을 왜 해? 너 2군 성적, 내가 잘 봤어. 타율하고 출루율이 아주 인상적이던데.”
“그래도 2군 성적이랑 여기랑 비교가 될까요?”
“선수는 최선을 다하면 돼. 책임은 감독이 져. 나한테 연봉을 주는 이유가 책임지라고 주는 거야. 알았어?”
“……네.”
“네가 성적이 안 나오면 그때 내가 9번으로 내리든 2군으로 내리든 하는 거야. 너는 네가 잘할지 못할지 신경 쓰지 마. 어떤 선수가 못하려고 애쓰겠어? 잘하고 싶은데 성적이 안 나오는 것뿐이지. 그냥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돼.”
이지성이 손으로 바지를 꽉 쥐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너만 편애하는 게 아니라 내 계획대로 하는 거야. 네가 계속 못하면 나라고 너를 감싸 줄 수 있는 거 아니니까 감 잡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곤란해.”
“네, 감독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함성훈이 송석현과 눈을 마주쳤다.
“괜찮다며?”
“네. 의사도 그렇고 코치님들도 그렇고 저 멀쩡하답니다.”
“그럼 됐어. 건강한 송석현이면 말 다 했지. 조진희라고 쫄 거 없어. 오늘도 외야까지 날려 버려라.”
송석현이 웃었다.
“네.”
고트의 라인업이 발표됐다.
1번 타자 중견수 이지성, 2번 타자 우익수 설진일, 3번 타자 1루수 김인환, 4번 타자 포수 송석현, 5번 타자 지명타자 유선호, 6번 타자 3루수 최재완, 7번 타자 좌익수 오진영, 8번 타자 2루수 정동규, 9번 타자 유격수 정영수.
유선호, 이지성의 트레이드, 송석현의 복귀.
기자들은 경기 전부터 그라운드를 누벼 가며 인터뷰를 따 내느라 바빴다.
이들의 눈은 프리 배팅에 가 있었다.
자타 공인 괴력의 사나이 김인환, 장외 홈런의 사나이 송석현, KPBL의 전설 유선호.
세 선수의 홈런 장면만 사진에 찍어도 그림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뭐야. 왜들 저렇게 사려?”
“싱겁네, 싱거워. 이럴 때 빵빵 쳐 주는 맛이 있어야지.”
“송석현 아프다더니 문제 있는 거 아냐? 공이 시원찮은데?”
“유선호도 그렇고 송석현도 그렇고 공이 영.”
기자들이 푸념에도 고트 타자들은 철저하게 밀어 치기로 일관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더니 건질 게 없네.”
“시시해, 시시해. 이따 조진희 오면 인터뷰나 따자고.”
훈련을 마친 고트 선수들은 경기장으로 들어가 간식을 먹으며 체력을 보충했다.
유선호는 빵 하나를 입에 물고 맨손으로 스윙을 했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원래 선배님 경기 전에도 저렇게 열심히 하세요?”
송석현이 이지성에게 물었다.
“보통은. 특히 진희한테는 더 그렇지. 성적이 별로 안 좋거든.”
“아…….”
“하기야 누가 조진희한테 좋겠냐만. 특히 좌타자한테는 완전 천적이라.”
이지성이 송석현을 보며 말했다.
“네가 무조건 풀스윙하는 건 아는데 조진희 상대로는 일단 안타 하나라도 치는 걸 목표로 삼는 게 좋아. 여간 빡센 게 아니라서 말이야.”
고트 선수들이 쉬는 사이 페가수스 선수들도 훈련을 마쳤다.
기자들은 조진희에게 몰려가 인터뷰를 따 내느라 바빴다.
“올해 포스팅은 잘 준비되고 있어요?”
조진희는 모자를 벗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하하.”
“올 시즌 목표가 우승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무난하게 될 거 같아요?”
“지금 우리 팀이 1위를 하고 있기는 한데 그게 제 마음대로 되나요? 작년만 해도 갑자기 김영훈 같은 사람이 툭 하고 나왔잖아요. 어휴, 생각만 해도.”
조진희가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아무튼 제 목표는 올해 팀을 우승시키고 홀가분하게 좋은 값 받고 미국으로 가는 겁니다.”
“포스팅 목표 액수가 있을까요?”
“그동안 선배님들이 제 몸값을 제대로 못 받았다고 보거든요. 저는 상징적으로 1천만 달러 이상이면 좋겠어요.”
“그러면 국내 선수 중 최초이자 최고 액수네요.”
“시작일 테지만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다른 기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늘 경기에 송석현 선수가 복귀합니다. 최근 가장 핫한 타잔데 어떤 대비책을 세웠을까요?”
“대비책이요?”
조진희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저는 특별히 어떤 타자에게 대비책을 세워 두진 않아서요. 그냥 최선을 다해 던지는 거죠, 뭐.”
“최선을 다해서…….”
다른 기자가 말했다.
“조진희가 송석현 대비책을 세워 두는 게 아니라 송석현이 조진희 대비책을 세워 둬야 하는 거 아냐? 하하.”
“하하하하. 그것도 그렇네.”
기자들이 크게 웃었다.
기자들이 그라운드를 떠난 후 정용욱이 조진희 옆으로 왔다.
“또 쓸데없는 얘기 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별 얘기 안 했어요.”
“구설수 안 오르게 입조심해. 지금 이미지 잘 만들어 둬야 너 미국 가서도 편하다. 여기서 적 만들면 골치 아파.”
“네. 항상 감사합니다, 선배님.”
정용욱이 허리를 빙빙 돌리며 몸을 풀었다.
조진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선배님.”
“왜?”
“오늘 송석현은 어떻게 상대하실 생각이세요?”
“송석현? 뭐…… 일단 바깥쪽으로 빠른 공 붙이고 슬라이더로 떨공 던져야지.”
“……피해 가는 승부네요?”
“그게 뭐 피해 가는 승부야? 장타자 상대로는 그게 정석인데. 걔, 어리긴 해도 똑똑해. 노림수가 여간 좋은 게 아니야. 그런 놈 상대로 복잡하게 가면 우리가 더 꼬여. 네 공이면 심플하게 가도 돼. 볼 배합이 무슨 필요가 있어? 오버만 안 하면 되지.”
정용욱이 떠난 이후에도 조진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조진희의 손가락이 야구공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KBC 스포츠의 캐스터 정선우.”
“해설 정철혁입니다.”
“고트와 페가수스의 주말 3연전 경기가 잠실에서 펼쳐지는데요. 오늘 라인업이 흥미롭죠?”
“그렇습니다. 일단 페가수스에는 선발투수로 조진희 선수가 나옵니다, 하하. 내년에는 해외로 진출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선수라 국내에선 얼굴 볼 일이 몇 번 남지 않았죠. 고트는 4번 타자 송석현 선수가 복귀했습니다. 스콜피언에서 트레이드 된 이지성과 유선호도 오늘은 경기에 나섭니다.”
“고트가 최근에는 굉장히 부진하면서 함성훈 감독 대행이 여러모로 수난을 겪었는데, 오늘은 달라질까요?”
“글쎄요. 오늘은 또 하필 선발투수가 조진희라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통산 방어율이 3점을 넘지 않아요. 직구는 160km/h까지 던질 수 있는 투숩니다. 오늘도 고트는 쉽지 않을 겁니다. 어떤 팀이든 페가수스는 어려운 팀이기도 하지만 말이죠.”
경기장에 선수들이 나타났다.
페가수스 팬들은 조진희의 등장에 함성을 보냈다.
국가 대표 1선발투수, 페가수스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 차기 메이저리거.
페가수스 팬들의 조진희 사랑은 절대적이었다.
큰 키에 날렵한 몸매, 곱상하게 생긴 얼굴은 야구에 관심 없는 여성 팬들까지 불러 모았다.
“진희야! 누나 왔어! 누나 좀 봐!”
“진희 코 날렵한 거 좀 봐. 쟤는 아이돌을 해야 했다니까.”
조진희 팬들 중엔 대포 카메라까지 들고 조진희를 찍는 이들도 있었다.
조진희도 대포 카메라를 익히 잘 아는 바 웃으면서 손까지 흔드는 여유를 보였다.
“봤어, 봤어? 진희가 나 보고 손 흔들었어.”
조진희의 인기야 전국구라지만 잠실의 왕은 따로 있었다.
송석현이 등장하자 그야말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나왔다, 나왔다.”
“석현아! 송석현!”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송석현을 보자마자 열성 팬들은 송석현의 응원가까지 불렀다.
최근 고트는 끝없는 부진으로 7위, 8위 경쟁을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송석현의 이탈과 고트의 부진이 겹치는 바, 고트 팬들은 송석현의 복귀를 바라는 걸 넘어 열망했다.
잠시나마 4위 경쟁을 하면서 단꿈에 젖은 것도 잠시였다.
식물 타선으론 제아무리 선발이 좋고 불펜을 보강했다고 한들 소용없었다.
한 번만이라도 마운드에서 삐끗하면 식물 타선으론 복구할 도리가 없었다.
식물 타선의 유일한 희망은 KS포의 부활이었다.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누구 하나가 응원가를 부르자 다른 팬들도 따라 불렀다.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조진희의 응원 소리는 송석현의 응원 소리에 완전히 묻혔다.
“이야, 잠실의 왕이라더니 빈말이 아니네.”
페가수스 3루수 김욱이 히죽거렸다.
조진희는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요. 똥개도 자기 나와바리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더니.”
“오늘 네가 참교육 시켜 줘야지.”
“선배님이 홈런도 좀 쳐 주셔야죠. 저 승리 좀 챙겨 주세요. 100승 채우는 게 제 목표잖습니까.”
“어허, 맨입으로?”
“장어 잘하는 집 있는데 거기로 모실까요?”
“형 잘 먹는 거 알지?”
“그럼요. 홈런만 쳐 주신다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김욱이 자기 가슴을 쳤다.
“오늘 핫바리 올라오던데 걱정하지 마. 형이 홈런 시원하게 하나 날려 줄게.”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너야말로 조심해. 뜬금포 맞지 말고.”
조진희는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저 반드시 승리 챙길 겁니다.”
* * *
-플레이볼!
1회 초 마운드에는 조진희가 올라왔다.
고트의 1번 타자는 이지성.
조진희는 초구를 몸 쪽에 붙였다.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가져가는 조진희 선숩니다.”
“좋은 공이네요. 좌타자 몸 쪽으로 파고드는 빠른 공. 저런 공은 카운트에 몰리기 전에는 배트를 내면 안 됩니다.”
“초구부터 구속이 148km/h 넘습니다.”
“슬슬 피치를 더 올리겠죠?”
제2구는 바깥쪽 패스트볼.
이지성이 배트를 냈지만 배트가 밀리면서 파울이 됐다.
“공 2개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는 조진희 선수.”
“힘에 밀립니다. 이지성 선수가 타이밍은 잘 잡았는데 힘에서 밀렸어요.”
투 스트라이크.
정용욱은 쉽게 가기로 했다.
존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조진희의 공이 존의 하단을 노렸다.
이지성이 배트를 내자 공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탁!
아래로 잘 떨어진 공이었다.
이지성은 가까스로 밀어내 파울을 만들었다.
“파울. 이지성 선수가 겨우 파울을 만들어 냅니다.”
“방금은 공이 아주 좋았어요. 정말 매서웠죠?”
조진희가 코를 긁적였다.
안타도 아닌 파울이다.
정용욱은 다시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조진희는 고개를 저었다.
장타가 없는 타자를 무서워할 필요가 있을까?
‘패스트볼, 몸 쪽.’
빠른 공으로 윽박지른다.
조진희는 몸 쪽 공을 힘껏 던졌다.
탁!
이지성은 1루 방향으로 배트를 잡아당겼다.
공은 그대로 파울.
공 네 개.
항상 웃는 조진희지만 표정에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지성이 타격 폼이 뭔가 좀 달라진 거 같은데……?”
고트의 타격코치 강연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부상 전에도 잘 밀어 치는 타자였고, 부상 후엔 밀어 치기로 일관하던 타자였다.
한데 조진희 상대로 몸 쪽 공을 완전히 잡아당겨 쳤다.
“점마도 저거 무서분 놈이야.”
유선호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김인환이 물었다.
“뭐가요?”
“딱 보고 좋아 보이는 거 있으니까 바로 흡수하니까 하는 말이다.”
“뭘 흡수했는데요?”
“그란 게 있다, 그란 게 있어~ 시너지 효과라는 게 있어~.”
유선호는 허허, 웃었다.
이지성이 당겨 치기 시작했다.
제 몸을 끔찍하게 아끼는 놈이 당겨 치기 시작했다는 건……
“손목이 안 아프게 멀리 때리는 방법을 찾은 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