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17화 (117/201)

그때 그 시절

오랜만에 집에서 자는 잠이라 그랬을까.

송석현은 깊은 단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했다.

단잠을 깨운 건 다름 아닌 정미남이었다.

“야, 일어나. 점심 같이 먹자며?”

정미남이 방까지 들어와 송석현을 흔들어 깨웠다.

송석현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핸드폰을 봤다.

“몇 시야?”

“벌써 12시 다 되어 간다. 전화는 왜 안 받아?”

“진동으로 해 놨나 보네, 아함. 오랜만에 꿀잠 잤네. 그런데 넌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왔어?”

“어머니한테 전화하니까 열어 주시더라고. 우리 맛있는 거 먹으라고 용돈도 주고 가셨어.”

“그래? 엄마 어디 갔어?”

“요새 운동 다니신다고 하더라.”

“운동. 운동 좋지. 아하함. 점심 뭐 먹지. 먹고 싶은 거 있냐?”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건데 나가서 뭐 좀 먹는 게 좋지 않겠냐? 오랜만에 나영이랑 영석이까지 모이는데 맛있는 거 먹자.”

“……쩝. 아, 구찮은데.”

“그럼 짱개 시켜? 요리나 시켜 먹을래? 안 그래도 너희 어머니 저녁 늦게 온다고 하셨는데.”

“철현이도 오늘은 야자 할 거고……. 오랜만에 짱개에 꼬량주 한잔? 나는 못 먹겠지만.”

“오늘 네가 쏜다며? 요리 하나씩 시켜 먹는 거 콜? 일인당 요리 하나씩. 어때?”

“짜장이랑 짬뽕도 기본 하나씩 시켜. 내가 그 정도는 사 준다.”

“오오오, 슈퍼스타는 다른데.”

“짱개 하나로 슈퍼스타는 무슨. 애들은 언제 와?”

“영석이랑 나영이한테 여기 오라고 문자할게. 걔들도 바로 올 거야.”

주문한 음식들은 식탁에 올려 두기에도 양이 많아 거실 바닥에 펼쳐 놨다.

팔보채, 유산슬, 양장피, 탕수육에 짜장, 짬뽕, 볶음밥까지.

송석현은 바닥에 깔린 음식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 미친놈들아. 전부 다 대짜로 시키면 어떡하냐?”

정미남이 능숙하게 랩을 까며 말했다.

“왜? 돈이 아깝냐?”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걸 어떻게 다 먹으려고?”

“나 혼자서도 이거 반은 먹는다. 걱정하지 마쇼잉. 이건 식사고 이건 안주잖아.”

“대단하다, 진짜. 짜장, 짬뽕은 식사가 아니고 뭔데?”

“애피타이저?”

오랜만에 보는 네 사람이지만 어제 만난 것처럼 별다른 얘기를 나누진 않았다.

정미남은 진상 손님을 만난 얘기를 했고, 김나영은 공부가 힘들다고 우는 소리를 했고, 김영석은…… 휴학했다고 말했다.

“휴학?”

“어, 집에서도 의대 한번 가 보라고 해서.”

“그럼 또 수험생이야? 이야. 수험생이 둘이나 생겼네.”

“올해는 그냥 시범 삼아 치는 거고 내년을 목표로 공부해야지.”

“그래, 고생이 많다. 열심히 해. 열심히 해 봐.”

점심 식사에 반주를 함께 하자 저녁까지 자리가 이어졌다.

얼큰하게 취한 김영석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우리 졸업 앨범이네?”

“그거? 어, 안 그래도 어디 있나 했더니 거실에 나와 있었구만.”

김영석은 거실 책장에서 중학교 앨범을 쑥 빼냈다.

김영석이 앨범을 펼치자 김나영, 정미남도 옆으로 와 앨범을 구경했다.

“여기 정미남 있네. 와, 이때도 삭긴 개 삭았네.”

김영석의 농담에 정미남이 정색했다.

“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맹구 얼굴 하고 다니면서.”

“안 변한다는 건 좋은 거야. 사시사철 소나무 몰라?”

“너는 콧물 안 흘리고 다녀서 다행인 줄 알아. 콧물까지 흘렸으면 백 프로 맹구였어.”

“여기 나영이도 있네. 나영이는…… 이때가 더 예쁜 거 같은데? 지금은 좀 퇴화했나?”

김나영이 주먹으로 김영석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죽을래?”

“아씨, 주먹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개 아프네.”

정미남이 앨범을 넘기다 송석현을 발견했다.

“여기서 가장 용 된 건 역시 송석현이야. 그건 인정?”

“인정.”

“나도 인정.”

송석현은 자리를 치우다가 인상을 썼다.

“무슨 용이야, 용은. 그때도 나 괜찮았거든?”

“중 2 때까지 영석이랑 키 비슷하지 않았냐? 중 3 때 갑자기 훅 컸지.”

“맞아. 나랑 키 비슷했는데 중 3 때 180cm이 넘어서 엄청 배신감 들었다니까.”

송석현이 말했다.

“하, 그땐 내가 한 190cm까지 클 줄 알았다.”

“쟤도 참 발전이 없어. 어떻게 중 3 때 키가 평생 가냐.”

“그래도 난 희망의 끈을 안 놓고 있어. 아직 키 더 클 수 있다고 본다. 군대 가서 큰다는 사람도 있잖아.”

“아씨, 나는 왜 안 크는 거야. 나도 딱 5cm만 컸으면 좋겠다.”

김영석이 정미남이 떠들썩거리는 동안 김나영은 졸업 앨범을 가만히 쳐다봤다.

김영석은 그런 김나영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석현이 중 3 때 인기 좋지 않았냐? 나영이 친구들이 석현이 소개시켜 달라고 졸랐다며?”

김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그때 나 떡볶이 많이 얻어먹었어.”

“그래서 소개시켜 줬어?”

“한번 소개시켜 줬는데 쟤가 파토 냈어. 덕분에 나 걔 달랜다고 엄청 힘들었어.”

“와, 송석현. 양아치. 왜 파토를 냈어? 못생김?”

송석현이 물티슈를 꺼내 바닥을 닦았다.

“아니, 괜찮았는데?”

“근데 왜 파토냈어?”

“몰라. 내가 왜 그랬더라……. 기억이 안 나네.”

“와 씨, 개부럽다. 나도 소개팅하고 싶은데. 영석아, 나도 소개팅시켜 줘라. 어?”

“나도 하고 싶어…….”

“넌 대학생이 왜 못 하는데?”

“대학생이라고 다 여자 친구가 갑자기 생기는 줄 아냐?”

“하, 맨날 일만 하니까 여자를 만날 방법이 없네. 나영아, 네 친구-.”

“나도 휴학했는데 무슨.”

“……도움 되는 인간들이 없다, 도움 되는 인간들이.”

송석현이 말했다.

“내가 친한 형들이라도 소개시켜 줄까? 그것도 소개팅이잖아.”

“응, 꺼지고.”

“앨범 대충 봤으면 치우는 것 좀 도와주지?”

“응, 싫어.”

“안주로 청개구리를 삶아 먹었나…….”

김나영은 앨범을 덮어 책장에 다시 꽂았다.

흥이 오른 김영석은 오랜만에 함께 게임방에 가자고 졸랐다.

술에 취한 정미남은 얼씨구나 동의했다.

송석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마저 치워야 가지.”

“그럼 치우고 와. 우리 먼저 가 있을게.”

“어이, 이봐. 치사하게 이럴 거야?”

정미남은 먼저 신발을 갈아 신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가 있으마.”

김영석도 뒤따랐다.

“얼른 치우고 와.”

두 사람이 먼저 나가자 집에는 송석현과 김나영만 남았다.

김나영은 자리에 앉더니 치우던 걸 도왔다.

“얼른 치우고 나가자.”

“……그래.”

김나영은 말없이 뒷정리를 도왔다.

뒷정리를 마친 후 두 사람이 집을 나섰다.

김나영은 먼저 앞장서서 걷다가 물었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뭔가?”

“그때, 너 소개팅 했을 때 말이야.”

“……언제지?”

“나 오락실. 기억 안 나?”

“쓰읍, 그게 언제더라.”

“오락실에서 양아치 애들이랑 시비 붙었을 때.”

“아아, 그때.”

“응, 니들 소개팅시켜 주고 나 오락실 가 있었잖아. 근데 너 어떻게 알고 바로 나 찾아왔어?”

송석현은 침음을 흘렸다.

“아, 맞다. 그때 거기에 우리 야구부 후배들이 있었거든. 우리 학교 애들 중에 네 얼굴 모르는 애들이 어딨어. 그래서 걔들이 나한테 전화한 거지.”

“그래서 그렇게 바로 온 거야?”

“그러고 보니 그래서 내가 소개팅 파토 냈구만. 김나영, 너 때문이었어. 아, 걔 예뻤는데. 집도 잘산다고 하지 않았어? 걔랑 잘됐으면 든든한 처가가 생기고 딱 좋았는데 말이야.”

김나영이 걸음을 멈췄다.

“중학교 때 사귄다고 처가가 왜 생겨?”

“뭐, 잘되면 그럴 수도 있지.”

“…….”

“뭐 해? 안 가?”

송석현은 김나영을 뒤로한 채 앞으로 걸었다.

김나영은 송석현의 등을 지긋이 쳐다봤다.

그날.

김나영은 둘을 주선한 후 헛헛한 마음에 오락실로 향했다.

왜 헛헛한 마음이 드는지 그땐 몰랐다.

둘 다 친한 친구고 좋은 사람이니 잘되면 좋은 일 아닌가,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우울한 마음에 오락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펌프를 즐겼다.

뒤늦게 주변에 사람들이 우르르 모인 걸 보고 자리를 옮기려다 펌프에서 넘어져 발목을 삐었다.

그때 짓궂은 애들이 핸드폰으로 김나영의 팬티를 찍고선 시시덕거렸다.

김나영은 사진을 지워 달라고 말했지만 들어줄 리 만무했다.

입씨름을 하다 보니 험악한 분위기까지 흘렀다.

그때였다.

누군가 자기 손목을 잡고 자기 등 뒤로 끌어당겼다.

놀란 김나영은 익숙한 등을 보고야 깨달았다.

송석현이었다.

당황스럽고, 놀랍고, 창피했다.

그래서 오락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락실 주인이 경찰을 부른 후에야 일이 마무리됐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김나영도 송석현도 별말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에야 자기 발목이 퉁퉁 부었다는 걸 깨달았다.

송석현은 말없이 등을 내밀었고 김나영도 홀린 듯 등에 업혔다.

자기보다 키가 작던 꼬마가 어느덧 넓은 등으로 자길 업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생소함을 넘어서자 따뜻하고 든든했다.

마지막으론 부끄러웠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송석현에게 들킬까 봐.

그날 저녁에야 깨달았다.

자신이 첫사랑에 빠졌다는 걸.

그것도 평생 보아 온 죽마고우에게 반해 버렸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아 온 사이라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모르는 사이라면 모를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기회는 몇 번 있었다.

중학교 졸업 여행 때 캔 맥주 하나에 잔뜩 상기된 김나영이 송석현을 찾아 고백하려 했으나 술기운에 송석현 앞에서 오바이트를 하며 흑역사로 박제됐다.

고등학교에 와선 송석현이 사고와 부진으로 정신을 못 차리느라 고백할 틈이 없었다.

대학에 가면 제대로 고백해야지, 마음먹었는데 송석현에 프로에 가 버려서 근래에는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왜 자꾸 어긋날까.

타이밍이 안 맞을까.

최근에는 우울함과 화가 매일같이 반복됐다.

“야, 같이 가.”

“빨리 오든가.”

김나영은 송석현의 등을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아직 눈앞에 있다.

기회는 아직 손에 있는 셈이다.

화를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마음먹어야 한다.

* * *

“하, 이 브실골 놈들이 진짜.”

송석현, 정미남, 김영석은 김나영의 눈치를 봤다.

네 사람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패배’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미드 터뜨리면 뭐 하냐? 탑, 바텀 중에 하나는 반반이라도 가야 캐리를 할 거 아냐.”

“…….”

“아, 열 받아. 송석현.”

“어?”

“음료수 사 와 봐.”

“어, 어. 알았어.”

점수판 김나영의 아이디 옆에는 다이아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그에 반해 송석현, 정미남, 김영석은 브론즈, 실버였다.

“내가 화를 내기 싫어도 안 낼 수가 없다, 진짜. 아오.”

이후로도 네 사람은 내리 세 번을 졌다.

게임에 질 때마다 송석현, 정미남, 김영석은 점점 말을 잃었다.

결국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채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는 술 먹고 겜방 오자는 얘기 하지 말자. 알았지?”

김나영의 말에 세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송석현이 먼저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향했다.

가는 방향이 같은 김나영과 정미남은 함께 길을 걸었다.

“미남아.”

“왜?”

“기회 되면…… 한번 도와줘.”

“뭘?”

“너도 잘 알잖아.”

정미남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석현에게 부탁받은 게 생각났다.

“인터넷 보니까 친구 사이에 고백 실패하면 영영 못 본다며.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너도 석현이한테 물어봐 줘. 혹시 마음 없는지. 아니, 그보다 다른 사람은 없는 건지.”

“…….”

“부탁 좀 할게.”

“……뭐…… 일단 기회 생기면 한번 물어볼게.”

김나영을 먼저 보낸 후 정미남은 핸드폰을 들었다.

송석현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전화기를 집어넣었다.

“아, 샌드위치, 힘드네.”

* * *

다음 날 아침.

송석현은 아침 일찍부터 짐을 챙겨 잠실 경기장으로 향했다.

페가수스와의 잠실 3연전.

언론에선 벌써 송석현의 복귀로 시끌벅적했다.

[King is back!]

[미스터 장외 홈런의 잠실 복귀]

[국내 넘버 원 투수 조진희 vs 잠실의 왕 송석현]

페가수스의 선발은 국내 최고의 선발투수이자 좌완 파이어볼러 조진희였다.

양 팀 에이스의 맞대결에 잠실 야구장의 티켓은 매진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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