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 초입
1군 콜업 나흘 전.
저녁 훈련까지 마친 송석현은 숙소로 들어가지 않았다.
송석현의 손에는 포수 마스크가 들려 있었다.
“내가 괜한 부탁 한 거 아니지?”
“아니에요. 안 그래도 불안해서 연습하려고 했는데요, 뭘.”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송석현과 말을 섞는 이는 정진오였다.
고트 선발 유망주이자 좌완 투수.
2군에서 송석현과 손발을 맞춰 본 적 있는 투수였다.
내일 청백전에는 정진오가 선발투수로, 송석현이 선발 포수로 예정돼 있었다.
정진오는 송석현에게 오늘 자기 공을 한번 받아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실전 감각이 떨어져 있던 송석현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팡팡!
“자, 한번 던져 보세요. 체력 아끼시구요.”
“알았어~ 그럼 한번 봐 줘 봐.”
송석현의 기억 속 정진오는 애매한 투수였다.
좌완이라는 특이점을 빼곤 무색무취의 투수.
구위가 뛰어나다거나 기막힌 변화구가 있는 게 아니었다.
원하는 곳에 공을 넣는 제구력을 갖추지도 않았다.
큰 하자도 없지만 큰 장점도 없는 투수.
송석현은 별 기대 없이 미트를 내밀었다.
“후우우우.”
정진오가 숨을 들이켜더니 다리를 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공이 날아왔다.
팡!
송석현은 공을 받고선 씨익 웃었다.
“공이 되게 좋아졌는데요? 투구 폼도 바뀐 거 같고.”
“그래? 괜찮아 보여?”
“네, 손이 전혀 안 보여요. 이 정도면 우타자도 타이밍 잡기 어려울 거 같은데요?”
“정말?”
“공도…… 구속은 비슷한데 팍 하고 더 파고드는 맛도 있구요.”
정진오는 이어서 연속으로 패스트볼을 던졌다.
팡! 팡! 팡! 팡!
대여섯 개의 공을 받았을까.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데 사이드로는 안 던지세요?”
“욕심 버리기로 했다. 내 실력으로 어설프게 사이드 노려서 던지는 건 안 되더라고. 그래서 위아래만 조절하고 있어.”
“아아.”
“왜, 전에 네가 회전을 살려 보라고 했잖아? 거기서 착안해서 회전수를 최대한 올려 봤어. 그러니까 내 공으로도 하이 코스 헛스윙이 나오더라고. 신기하게 말이지.”
“지금은 구속 얼마나 나오세요?”
“142~143km/h?”
“그런데도 공이 좋은 거 보니 확실히 회전수가 많이 늘었나 봐요. 위로 솟구치는 느낌이 좋아요.”
“내 커브도 한번 볼래?”
정진오의 커브는 너클 커브였다.
패스트볼 궤적으로 오다가 떨어지는 커브.
팡!
송석현은 공을 잡자마자 오오, 탄성을 내뱉었다.
“너클 커븐데 낙차가 장난 아닌데요?”
“그치? 내가 이걸 살린다고 투구 폼까지 다 뜯어고쳤다니까.”
“좌타자는 아예 감도 못 잡겠어요.”
“그래?”
“이런 공을 가졌는데 여태 콜업이 안 됐어요?”
정진오가 뒷목을 긁적였다.
“내가 손가락하고 손톱이 아작 나서 다시 공 던진 지 얼마 안 됐거든.”
“다치신 거예요?”
“너클 커브 각 살린다고 손장난을 좀 많이 쳤더니……. 손톱이 너덜너덜해졌거든.”
“지금은요?”
“지금은 감 잡았어. 손톱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 쪽에 걸어서 던지거든. 처음엔 아팠는데 굳은살 박히니까 괜찮아.”
정진오는 너클 커브를 몇 개 더 던졌다.
“네가 보기엔 실전에서도 쓸 만해?”
“네, 타순 한 번 돌기 전까진 감 잡기 힘들겠어요.”
“후, 다행이네. 1군에서도 쓸 만할까?”
“그럼요. 1군에서도 이 정도 너클 커브는 드물어요.”
“진심으로?”
“진짜죠.”
두 사람은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함께 돌아갔다.
늦은 저녁이라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너 곧 1군 콜업이지?”
“네, 유선호, 이지성 선배님이랑 함께 갈 거 같아요.”
“부럽네, 1군.”
“선배님 이 공이면 금방 올라가실 거예요.”
“우리 팀 투수 자원이 빵빵해졌잖아. 내 자리가 있을까……?”
“투수는 언제나 모자랍니다. 선배님 공이면 없는 자리도 만들어야죠.”
정진오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고민이 하나 있어.”
“무슨 고민이요?”
“너클 커브 각이 커지니까 오히려 스트라이크 하단에 넣는 게 너무 힘들어졌어. 공이 빨리 떨어지잖아.”
“낙차를 생각하면 또 그렇겠네요.”
“그냥 커브라면 모를까, 너클 커브니까 무조건 낙차가 큰 게 좋은 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슬라이더랑 체인지업을 넣어 봤는데 둘 다 시원찮아.”
“체인지업은 회전수를 줄이는 구종이라 선배님 메커니즘이랑 달라서 익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죠. 슬라이더도 커브랑 같이 구사하면 릴리스 포인트를 똑같이 맞추는 게 더 어렵고…….”
“그래도 이왕이면 체인지업보다 종 슬라이더를 배워 두면 좋을 거 같은데 쉽지 않네.”
송석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클 커브 각을 줄이면 되잖아요. 각을 키우는 게 어렵지 줄이는 건 쉽지 않아요?”
“……그게 더 어려운 거 아니야?”
송석현이 야구공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런 식으로 손가락을 딱 붙이면 컨트롤이 어려워도 낙차가 커지잖아요. 선배님은 어떻게 던지세요?”
“나도 이렇게 던지지.”
“그럼 여기서 손가락이랑 야구공의 마찰면을 줄여서 던지면 각이 줄어들잖아요. 마찰면이 줄어드니까 제구가 더 어려울 순 있어도 아예 메커니즘이 다른 구종을 던지는 것보단 쉽지 않을까요?”
정진오가 송석현의 손에 든 야구공을 가져와 집어 들었다.
“이 단순한 걸 왜 생각 못 했지?”
“원래 하나에만 꽂히면 다른 생각 하는 게 어려워요. 직구 150km/h 던지는 사람이 140km/h이 어렵겠어요? 접촉면을 줄이면 각은 줄어들어도 구속은 더 빨라서 잘만 제구하면 종 슬라이더랑 비슷한 느낌 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선배님 말씀처럼 각이 작은 변화구 하나는 더 있어야 돼요. 불펜으로 뛴다면 빠른 변화구는 필수고, 선발로 뛴다고 해도 써드 피치가 있냐 없냐는 차이가 크잖아요.”
정진오가 손가락으로 연신 공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멍청하네. 어떻게 각을 줄일 생각을 못 했을까.”
“아무튼 선배님도 곧 1군에 올라오실 일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제가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석현아, 손 좀 줘 봐.”
“손이요?”
송석현이 손을 내밀자 정진오가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1군 기운 좀 가져가자.”
* * *
다음 날 청백전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유선호, 이지성의 마지막 컨디션 점검이자 송석현이 1군에서도 포수로 뛸 수 있는 컨디션인지 확인하는 경기였다.
유선호, 이지성에게 1군 등판 전 마지막 경기이니만큼 두 사람은 칼을 갈고 나섰지만, 경기의 주인공은 유선호도 이지성도 아니었다.
정진오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좌타자인 이지성, 유선호는 정진오의 커브에 꼼짝하지도 못하고 삼진을 당했다.
여간해선 삼진이 없는 이지성도 세 번의 타석에 서서 한 번의 삼진과 한 번의 범타, 한 번의 내야 안타가 전부였다.
내야 안타도 3루수가 공을 더듬었기에 동 타이밍 세이프였을 뿐이다.
“고트에 저리 좋은 투수가 있었나?”
정진오 상대로 유선호의 성적은 볼넷 하나와 플라이 하나, 삼진 하나.
이지성은 유선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감이 안 와요, 쟤는.”
“제구가 안 좋으니까 더 어렵네. 실툰지 변화군지 알 수가 없어.”
“쟤 하이볼은 더 어렵지 않아요?”
“맞아. 어려워. 공이 살아오는 느낌이 있네.”
“커트도 쉽지 않아요. 감 잡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아요.”
“아이고, 인자 내일이면 올라가는데 오늘 이리 죽 써서 되나 싶다.”
정진오는 공 쉰여덟 개로 5.1이닝 1실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오랜만의 등판이라 투구 수를 조절했지만 승리 조건까지 갖추곤 마운드를 내려왔다.
“공 좋아졌네.”
“진오 형, 공 장난 아닌데요?”
“이야, 진오 혼자서 뚝딱뚝딱하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어.”
정진오가 벤치로 돌아오자 선수들이 칭찬과 덕담을 한마디씩 보탰다.
정진오가 잔뜩 상기돼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스포트라이트가 정진오에게 쏠려 있는 사이 송석현은 조용히 볼넷을 쌓고 있었다.
청백전이니만큼 마음 편히 자기 공을 시험하라고 감독이 말했지만 투수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송석현을 피했다.
파울을 쳐도 담장을 쭉쭉 넘기는 공을 보고 있자니 승부할 마음이 싹 사라진 탓이었다.
짝짝짝.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이랑 내일은 푹 쉬어. 오늘은 외박 허용이다. 대신 내일 저녁 전에는 들어와. 모레부터 원정 경기 있는 거 알지?”
선수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고 치지 말고. 니들이 사고 치면 나 혼자 커버 못 한다. 알았어?”
“네!”
“새끼들, 이럴 때만 목소리가 기차 화통 삶아먹었지. 평소에도 이렇게 기운차면 오죽 좋냐.”
구창현 감독은 송석현과 이지성, 유선호를 따로 불렀다.
“너희 셋은 오늘 짐 빼서 나가. 다치지 말고 거기서 잘해. 여기 올 생각 하지 말고.”
“네.”
“선호 너는 어디 아픈 데 없고?”
“괘안습니다.”
“컨디션은 어때?”
“아직은 다 안 올라왔는데 그래도 함 해 봐야지 안 되겠습니까?”
“너도 이제 야구판에선 장년이야, 장년. 무슨 말인지 알지? 몸 관리 잘하란 말이야. 잘 먹고 잘 자고 다치지 말고.”
“예, 예. 알겠습니다.”
“지성이 너는?”
“저는 지금 컨디션 좋습니다.”
“손목은 어때?”
“타격 폼 바꾼 이후로 한 번도 크게 아픈 적 없었습니다.”
“그러면 됐다.”
구창현 감독이 송석현을 바라봤다.
“정말 괜찮지? 어지럽거나 아프거나 그런 거 없지?”
“네, 병원에 있을 때부터 이미 괜찮았습니다.”
“뇌진탕은 후유증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다음부턴 타석에서 좀 떨어져서 쳐. 앞으로 너한테 몸 쪽 공 붙이는 애들 계속 늘어날 거야. 미련하게 맞지 말고 피해. 그것도 누적되면 컨디션에 영향 주니까.”
“네, 꼭 참고하겠습니다.”
“그럼 다들 1군 가서 잘해. 나도 응원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감독님.”
* * *
송석현은 짐을 싸서 바로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배 터지게 집 밥을 먹은 뒤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오늘도 지고 있네, 오늘도 지고 있어.”
송석현의 동생 송철현이 혀를 찼다.
“초 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짜식이.”
“요새 고트 성적 완전 바닥이야. 지금 1~2경기 빼고 다 졌을걸.”
“올라갈 거야. 잠깐 주춤하는 거지.”
“오늘은 6위까지 떨어졌더라.”
“6위?”
“어, 불스가 지금 5위야. 4위랑 3경기 차까지 벌어졌을걸.”
통상 1경기 차를 줄이려면 일주일이 필요하다.
상대 팀이 일주일간 3승 3패를 하고 우리 팀이 위닝 시리즈 두 번을 해서 4승 2패를 해야 1경기를 줄일 수 있다.
야구에서 1경기 차는 그만큼 큰 벽이었다.
“나도 요새 훈련만 하다 보니까 1군 성적이 거기까지 떨어졌을 줄 몰랐네.”
“함성훈도 욕 많이 먹더라, 이최강 팔아 버려서 팀 말아먹었다고. 불펜 데려와서//불펜을 써 먹을 데도 없는데 왜 데려왔냐고 난리야, 난리.”
“다들 자기가 야구 전문가니까 한마디씩 하는 거지.”
“형이 가서 또 캐리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야구가 얼마나 쉽냐? 나도 1군에서 감 끌어올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인터넷 보니까 형 온다고 엄청 기대하던데.”
“너는 인터넷만 하냐? 공부 안 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
“너 듣자 하니까 경기 매일 챙겨 본다며?”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고등학교 들어가더니 성적도 떨어지고 말이야. 야구를 보더라도 너 할 거 다 하고 봐야지, 인마. 넌 학원 안 다니냐?”
“요새 인강도 잘 나오는데 무슨 학원이야……. 왔다 갔다 하는 시간만 더 걸리지.”
“그런데 왜 내가 있을 때 너 공부하는 꼬라지를 못 보지?”
“아, 진짜. 엄마보다 형이 더 잔소리 심하네.”
“꼬우면 반 1등이라도 하든가. 그러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그게 그렇게 쉬워? 그럼 형도 1등 해 보든가.”
송석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지금보다 더 잘하기도 힘들 거 같은데?”
“…….”
송철현은 말없이 TV로 고개를 돌렸다.
그날도 고트는 5-2로 졌다.
선발투수로 1선발 마이클 피시가 나왔는데도 석패했다.
경기를 마치며 캐스터와 해설자가 말을 나눴다.
-내일은 송석현, 이지성, 유선호 세 선수가 1군에 콜업 됩니다. 내일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줘야 할 텐데요.
-고트가 지금처럼 가면 어렵습니다. 특히 트레이드로 투수를 데려와 놓곤 너무 투수를 아끼고 있어요. 대체 함성훈 감독 대행의 생각이 어떤 건지 당최 알 수 없네요.
-다음 주 화요일부턴 페가수스와의 3연전인데 고트에는 정말 중요한 3연전이 될 거 같네요.
-하필 안 좋을 때 1위 팀을 만나네요. 고트의 반전이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송석현이 TV를 껐다.
싱숭생숭하지만 경기에 대한 기억은 잊었다.
이제 겨우 6위다.
포스트시즌이 머지않았다.
그날 밤.
송석현은 한국시리즈 결승 홈런을 치는 꿈을 꾸며 뒤척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