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11화 (111/201)

각성 (4)

웨일스의 포수가 사인을 냈다.

‘슬라이더, 인사이드.’

좌투수가 우타자 상대로 몸 쪽 슬라이더를 던지는 경우는 드물다.

커터성의 슬라이더를 던지는 경우도 있지만 몸 쪽으로 들어가는 변화구는 타자의 맛 좋은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슬라이더가 태생적으로 횡으로 변하는 공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구인선의 슬라이더는 포크처럼 종으로 많이 떨어지는 공이다.

포크볼이 먹히지 않는 날에 쓰기 위해 구인선이 세 번째 공으로 갈고닦은 공이 슬라이더였다.

물론 포크볼과 달리 횡 변화도 있기에 실투가 나오면 장타를 맞을 수도 있다.

웨일스의 포수 조진열은 이를 알고도 감행했다.

송석현이 이번 타석에서 한 발 떨어져서 섰다.

안정적으로 점수 차를 벌리고 있는 와중에 위험을 감수하고 타석에 바짝 붙을 필요는 없다는 판단일 거다.

이때 더 몸 쪽 위협구를 던져서 타석에서 더 떨어뜨려야 한다.

벨트 높이로 오다 무릎 쪽으로 꺾여 오는 슬라이더를 한번 본다면 송석현도 겁을 먹고 타석에서 붙을 생각을 버릴 거다.

타자가 타석에서 떨어진다면 바깥쪽 공략은 더 쉬운 법이다.

바깥쪽에서 떨어지는 포크볼이라면 더더욱.

‘오케이.’

구인선은 포수의 사인을 받고 지체 없이 공을 던졌다.

새파랗게 어린 신인에게 프로의 매운 맛을 보여 줄 필요가 있지 않은가?

“배터리 사인이 길어졌습니다. 어떤 공을 던질까요?”

“아무래도 빠른 공 하나 보여 주는 게 좋겠죠?”

구인선이 공을 던졌다.

타자 몸 쪽으로 가다 몸 쪽으로 더 붙는 슬라이더.

송석현이 몸을 빼서 공을 피했다.

-볼, 로우.

“슬라이더가 깊었네요.”

“백도어 슬라이더를 던지려다 실투가 들어간 거 같네요.”

송석현이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공을 감추다가 던지는 구인선의 투구 폼 때문에 몸 쪽으로 오는 공이 더 매섭다.

변화구인데도 놀라서 몸을 뺄 정도였다.

‘패스트볼, 아웃사이드.’

포수가 바깥쪽으로 공을 요구했다.

안쪽으로 위협구 하나를 찔렀으니 이제 스트라이크 하나를 먹으러 갈 타이밍이다.

구인선은 빠른 공 하나를 바깥쪽에 찔렀다.

탕!

“또다시 파울. 파울이 나옵니다.”

“이번에는 타이밍이 조금 늦었네요. 아무래도 몸 쪽 공 하나를 본 이후라서 그럴까요?”

구인선이 포수가 던진 공을 받았다.

몸 쪽 위협구를 찌른 후에 던져도 바깥쪽 공을 쳐 낸다.

포수는 다시 사인을 바꿨다.

‘패스트볼, 인사이드, 하이.’

몸 쪽 높은 공.

또 한 번 윽박질러 보자는 계산이었다.

어떤 타자든 모든 존을 다 잘 치진 못한다.

바깥쪽에 강한 타자, 몸 쪽에 강한 타자, 높은 공이나 낮은 공에 강한 타자가 있다.

변화구를 잘 치거나 빠른 공을 잘 치거나 느린공을 잘 치는 타자도 있다.

송석현이 바깥쪽 빠른 공, 떨어지는 공에 강하니만큼 몸 쪽 높은 공이 약점일 수 있다.

인 하이, 아웃 로는 타자 공략의 고전 아닌가.

구인선도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칠 테면 쳐 보라는 심산으로 제대로 한번 붙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하물며 오늘처럼 공이 제대로 긁히는 날엔 더더욱.

“구인선 선수가 송석현 선수를 상대로는 사인 교환이 깁니다.”

“중요한 타이밍입니다. 여기서 깔끔하게 막고 내려가느냐 아니냐, 그것도 큰 차이예요. 감독 입장에선 7회를 넘기고 8회부터 불펜을 올리고 싶을 겁니다.”

구인선은 공을 손에서 휙휙 굴렸다.

오늘 최고 구속은 이 공에서 나올 거다.

구인선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자기가 평소 내딛던 보폭보다 1인치 정도 더 뻗었을까.

구인선의 골반이 돌아가면서 몸이 갸우뚱 흔들렸다.

구인선의 손을 떠난 공도 좌표를 잃고 흔들렸다.

퉁!

공이 헬멧을 맞고 위로 튀어 올랐다.

귀 근처에 맞은 송석현은 순간적인 어지러움에 타석에서 쓰러졌다.

“야, 이 개새끼야!”

“잡아, 저 새끼!”

“막아! 막아, 막아!”

고트 선수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이미 3연전 동안 서로 앙금을 쌓아 왔다.

서로 부상자가 생겼고, 서로 억울함이 있었고, 서로 할 말도 있었다.

쌓이고 쌓인 앙금은 송석현의 빈볼에서 터져 나갔다.

“야아아아아!”

가장 먼저 튀어 나간 건 김인환이었다.

평소 착하다, 예의 바르다 얘기만 듣고 살아온 김인환이었지만 화가 났을 땐 달랐다.

역대 타자 중 최고의 장사라는 타이틀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김인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구인선이지만 이번만큼은 체면을 버리고 도망쳤다.

“막아! 막으라고!”

“잡아! 쟤 잡아! 놓치면 안 돼! 잡아!”

웨일스 선수들도 김인환을 둘러쌌다.

김인환은 두 명, 세 명을 달고서도 웨일스 벤치로 달렸다.

나중에 다섯 명, 여섯 명이 붙고서야 겨우 발걸음을 막아설 수 있었다.

“석현아! 괜찮아? 내 말 들리지?”

쓰러진 송석현에게 먼저 다가온 건 컨디셔닝코치였다.

송석현은 이명 때문에 윙윙거려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누워 있어. 일단 누워 있어. 지금 구급차 들어올 거야.”

“……괜찮은데요. 일어설 수 있어요.”

“아냐. 누워 있어. 일단 병원 가서 검사받아 보자.”

“어지럽긴 한데요……. 그래도 크게 안 다친 거 같아요.”

“그건 의사가 판단할 일이야. 누워 있어, 인마.”

송석현은 허우적거렸다.

벤치 클리어링으로 시끄러운 소리도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릴 뿐이었다.

벤치 클리어링은 구급차가 들어오면서 일단락됐다.

송석현은 들것에 실려 가는 게 싫어 일어나려 했지만 코치가 어깨를 꽉 눌러 잡았다.

“누워 있으라고, 인마.”

양 팀 선수들은 송석현이 구급차에 실려 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구인선은 소란이 진정되자 벤치 뒤편에서 고개를 빼고 상황을 살폈다.

“어떻게 됐어? 많이 다쳤대?”

구인선의 질문에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그라운드는 욕설과 또 욕설, 그리고 욕설로 가득 차 있었다.

* * *

“네, 네. 검사는 다 마쳤습니다. 검사 결과만 봐서는 어디가 다치거나 심각한 부상은 없는 거 같습니다. 네. 네, 네. 그러면 제가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야구단 매니저 김태민은 전화를 끊었다.

병원 휴게실에서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곤 병실로 향했다.

병실엔 송석현이 환자복을 입고 홀로 누워 있었다.

“석현아, 괜찮아?”

“네. 저 진짜 괜찮아요. 이러고 있는 거 너무 오버 같은데.”

“오버는 무슨. 의사 선생님 말 못 들었어? 그래도 머리에 충격이 간 거라서 뇌진탕 염려가 있다잖아.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며칠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그랬어.”

“아까 공 맞을 때 정타로 맞은 게 아니라 약간 빗맞았어요. 처음엔 귀 부분을 맞아서 어지러웠던 거지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중요한 건 전문가의 말이야. 의사가 지켜보자고 하잖아.”

“…….”

송석현이 한숨을 쉬었다.

“경기는 어떻게 됐어요?”

“이겼어. 9-0. 대승했다.”

“정말요? 와, 추가 점수를 냈네요?”

“그렇게 됐어.”

“다행이다…….”

“너희 집에도 연락해 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넌 쉬어. 감독님도 의사가 퇴원해도 좋다고 오케이 할 때까진 무조건 여기에 붙잡아 놓으라고 하셨어.”

“네? 여기서 계속 있으라구요?”

“그래. 뇌진탕 그거 잘못하면 평생 간다. 뇌진탕으로 은퇴한 사람들도 있어. 뇌진탕 이후에 성적이 뚝 떨어진 사람들도 있고. 조심해야 돼. 최대한 보수적으로 봐야 돼, 너.”

“그럼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데요?”

“의사 말로는 적어도 닷새는 지켜봐야 한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있고.”

“네? 닷새요?”

다음 날 아침.

고트 선수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송석현을 병문안했다.

가장 먼저 온 건 홍대성을 비롯한 1년 차 신인들이었다.

“티브이에서 볼 땐 큰일 난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네?”

홍대성이 먼저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정통으로 맞은 건 아니었어.”

“어제 넌 경기 제대로 못 봤지? 아주 그냥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 뉴스까지 나왔어.”

“무슨 뉴스?”

“우리 팬들이 웨일스 애들 차 못 나가게 입막 했다니까. 그걸로 또 싸우고 막고, 크……. 어제는 인천 대첩 수준이었지.”

2군 외야수 표대일이 말했다.

“다들 네 걱정 많이 하더라. 오늘 못 온 애들이 너한테 안부 전해 달래.”

“그래? 고마워. 너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겠네. 2군에서 여기까지 가깝지도 않은데.”

“어쨌든 같은 입단 동긴데, 동기는 동기가 챙겨야지.”

“내가 뭐 챙겨 준 것도 없어서 더 미안하네.”

“아냐. 다들 너 보고 좋아해. 네가 잘하니까 우리도 잘하면 바로 1군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다들 나보다 잘하니까 드래프트 받아서 온 걸 거 아냐. 나도 올라왔는데 니들도 금방 올라올 거야.”

홍대성이 키득거렸다.

“다들 너처럼 했으면 여기가 메이저지 한국이겠냐?”

입단 동기들이 떠난 후 함성훈 감독이 구단 매니저와 함께 찾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누워, 누워. 괜히 일어서지 말고.”

함성훈은 두유 한 박스를 침대 옆에 두고 앉았다.

“우유는 배탈 날 수도 있어서 두유로 사 왔어, 당분 없는 걸로. 여기 있는 동안 푹 쉬면서 잘 먹어.”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래. 지금 상태는 어때?”

“정말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이렇게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의사 말을 들어 보니 퇴원해도 무방하다고는 했어.”

“정말요? 그러면 바로 복귀하면 됩니까?”

“아니.”

함성훈이 고개를 내저었다.

“너 부상자 명단에 올렸어. 지금 다시 돌아와도 못 뛰어.”

“……벌써요?”

“그래, 며칠 더 쉬다가 퇴원해. 1군 복귀하지 말고 2군으로 가.”

2군 얘기에 송석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함성훈은 두유 하나를 까서 송석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경기도 못 뛰는데 서울에 있으면 괜히 헛바람 들어가기 딱 좋아. 차라리 2군에 가서 밥 잘 먹고 잠 푹 자면서 몸 조리해. 잠깐 쉬어 가는 타임이라고 생각해. 앞으로 후반기에 들어가면 너 쉴 틈도 없을 테니까 미리 쉰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잖아.”

“…….”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쉬는 것도 중요해. 쉬어야 더 열심히 할 수 있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간 김에 유선호도 옆에서 구경 해 봐. 유선호 같은 타자라면 네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도움 될 게 있을 테니까.”

유선호란 얘기에 송석현이 눈을 번쩍 떴다.

“선배님 지금 2군에 계시죠?”

“그래, 지금 컨디션 올리고 있어. 올스타 끝나면 올라올 거야. 네가 몸이 괜찮으면 아마 그때 같이 올라올 수 있겠지.”

송석현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바로 2군으로 가면 될까요?”

“며칠 더 병원에 있어야지. 경과를 봐야 할 거 아니냐.”

“……쩝.”

“조급하게 마음먹을 필요 없어. 시즌은 길고 이제 반 왔으니까.”

점심시간에 김인환과 김정률이 찾아왔다.

김정률은 두유 하나를 꺼내 들곤 송석현의 침대에 앉았다.

“서켠스, 괜찮냐?”

“네, 멀쩡해요.”

“어제는 아주 식겁했다. 어제 개판 났던 거 알지?”

“정통으로 맞은 거 아닌데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나 모르겠어요.”

“야, 야. 이럴 때 한번 쉬어 가는 거야. 쉴 때 쉬어. 그게 최고야.”

“……감독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다들 아니까 하는 얘기야. 시즌 길다. 오버할 필요 없어.”

김인환은 송석현의 머리를 살폈다.

“너 진짜 괜찮은 거지?”

“네, 맞을 때만 좀 어지러웠지 지금은 멀쩡해요.”

“그때 쓰러져서 못 일어났잖아?”

“그땐 귀 쪽을 맞아서 그런가 핑 돌았거든요.”

“후, 다행이네, 큰일은 아니라서. 의사는 뭐래?”

“지금은 괜찮은데 더 두고 보자네요. 그래서 여기서 며칠 더 있다가 2군에 가기로 했어요. 올스타 끝나고 감독님이 부르실 건가 봐요.”

김정률이 김인환을 가리켰다.

“어제 인환이 때문에 난리 난 거 아냐? 눈깔이 돌아서 아주 그냥 다 줘 팰 분위더라. 그 덕에 웨일스 애들 완전 쫄아서 어제 우리가 두들겨 팼지.”

송석현이 김인환의 팔뚝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인환 형이 화나면……. 생각하기도 싫네요.”

김인환이 송석현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이렇게 된 거 푹 쉬다 와. 너 없는 동안 내가 열심히 하고 있을 테니까.”

“도움 못 돼 드려서 죄송해요.”

“건강하게만 돌아와라. 어?”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는 구인선이 기자들과 함께 찾아 사과하고 갔다.

사진을 찍힌 건 덤이었다.

오후에는 정미남, 김영석, 김나영이 왔다 갔고 저녁에는 동생와 어머니가 와서 병간호를 자처했다.

쉴 틈 없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이 지난 후 송석현은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하자마자 송석현이 향한 곳은 고트 2군 구장이었다.

그날은 고트 홈에서 페가수스와 고트의 경기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송석현은 경기 시작 전에 맞춰서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재밌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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