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3)
팡!
-스트라이크! 아웃!
“3회 삼자 범퇴. 마이클 피시 선수, 에이스다운 면모를 보여 줍니다.”
“웨일스에선 벌써 한 타순이 돌았거든요? 이제는 적응해야 합니다. 장타가 어려우면 방망이를 짧게 잡고 단타라도 만들어서 출루해야 해요.”
웨일스 타선은 마이클 피시의 구위에 꽁꽁 얼어붙었다.
피지컬로 찍어 누르는 투수를 이겨 내기 위해선 타선에 에이스가 필요했다.
웨일스에도 이재훈, 김재홍이라는 국가 대표 출신 1, 2번 타자가 있었으나 1, 2점이 필요한 상황에선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출루 자체도 어려울뿐더러, 출루를 해도 타점을 올릴 타자가 부족했다.
5회 초 2-0.
고트의 공격은 1번 정병선의 차례였다.
툭.
“정병선, 기습 번트! 투수 잡…… 아, 공을 못 던졌습니다! 제대로 공을 잡지 못했어요. 타자 주자 1루 세이프! 정병선 선수의 기습 번트가 통했습니다.”
구인선은 털썩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건 투수의 잘못이라고 봐야죠. 번트한 공을 그냥 물건 집듯이 잡으면 안 됩니다. 속도는 느려도 회전이 먹힌 상황이라 공을 움켜쥐듯 한 번에 잡아야 하거든요. 마음이 급해서 공을 제대로 잡을 생각을 못 했나 봅니다.”
“정병선 선수의 기습 번트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웨일스에서도 저런 게 필요해요. 투수가 잘 던진다고 그냥 물러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출루할 생각을 해야죠.”
구인선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다음 타자는 설진일.
초구 덕후에게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던질 필요는 없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패스트볼 하나를 보여 준 뒤 포크볼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설마 이번에도 치겠냐는 마음이었는데…….
탕!
설진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떨어지는 공을 결대로 밀어 쳤다.
“2루수 방향 땅볼! 2루수가 일단 잡고 토스! 유격수가 1루로! 1루…… 놓쳤어요! 악송구를 범하는 조양선 선수!”
“이건 아니죠. 투수의 기를 살려 줘야 하는데 이런 타이밍에 야수들이 투수의 발목을 잡네요. 급하게 할 필요도 없었는데 조양선 선수가 지나치게 서둘렀어요.”
“이러면 병살로 이어질 수 있는 찬스가 원아웃 주자 1루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면 병살이 나오지 않는 이상 또 송석현 선수에게 기회가 간다는 얘기거든요?”
“웨일스 입장에선 최악의 경우죠. 아무리 송석현이 무섭다고 해도 1사 만루를 채워 놓고 승부할 순 없잖습니까?”
구인선이 뒷짐을 진 채 이를 꽉 물었다.
컨디션은 최곤데 주변에서 돕질 않는다.
짜증이 파도처럼 밀려와 목까지 잠식하는 기분이다.
“자, 타석엔 김인환 선숩니다.”
“오늘 타격감이 좋아 보이죠? 쉽게 승부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구인선은 마음을 비웠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좌타자 상대론 누구보다 강한 투수가 자신이다.
오늘 여태 아껴 온 슬라이더도 있고 패스트볼만 던져도 타자들은 감을 잡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선…….
‘슬라이더.’
구인선이 포수에게 먼저 사인을 보냈다.
포수는 잠시 망설였다.
오늘 구인선의 슬라이더가 그리 좋지 못해 패스트볼과 포크볼 위주로 풀어 가기로 한 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
그렇다고 포크볼을 고집하자니 오늘 이상하게 포크볼이 자꾸 맞아 나간다.
자신이 보기엔 포크볼의 각은 좋다.
포크볼만 던지다 보니 구종이 단순해서 타자들의 노림수가 먹히는 게 분명했다.
팡, 팡.
포수가 미트를 손으로 두드렸다.
마음껏 던져 보라는 신호였다.
구인선은 눈으로 1루 주자를 견제했다.
슬라이더를 하나 빼면서 타자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구인선이 공을 던졌다.
스윽.
김인환의 어깨가 움직였다.
스트라이크존 근처로 오는 공에 배트가 반응했다.
김인환의 배트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공도 바깥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김인환의 눈이 공을 좇았다.
구질마다 회전이 다르기 때문에 공의 색도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김인환은 엉덩이를 빼면서 배트를 더 쭉 내밀었다.
툭.
배트 끝에 맞은 공이 하늘 높이 떴다.
“유격수 뒤로! 유격수 뒤로! 좌익수도 달려옵니다! 유격수가 손을 들고…… 놓쳤습니다? 유격수가 공을 안 잡았습니다! 텍사스 안타! 행운의 안타가 터지네요!”
“방금은 좌익수가 잡아야 할 위치였거든요? 유격수가 손을 계속 들다가 마지막에야 내렸는데 저러면 안 되죠. 좌익수가 속도를 내서 잡아야 하는데 유격수가 손을 들고 있으면 주춤주춤하기 마련이거든요.”
“행운의 안타가 터지면서 고트는 1사 1, 2루 상황이 됐습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이 만루 작전으로 가야겠죠?”
“어쩔 수 없죠. 만루 채워야죠.”
웨일스에선 송석현을 거르고 만루를 만들었다.
최재완은 오늘 구인선의 공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웨일스의 판단은 합리적이었지만, 야구는 변수의 스포츠였다.
“우익수 방향! 우익수 잡습니다! 3루수 설진일 선수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3-0. 3-0으로 앞서가는 고틉니다. 주자는 1-3루가 됐습니다.”
“최재완 선수가 이럴 때 한 방 해 주네요. 방금은 큰 거 필요 없었어요. 타점이 중요했거든요. 결국 해내고 맙니다.”
“이러면 최재완 선수도 제 몫을 해내고 있죠?”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내는 거죠.”
함성훈은 박수로 최재완을 맞았다.
최재완은 오랜만에 웃으면서 벤치로 들어왔다.
“재완이도 슬슬 감을 잡아 가네요.”
감독의 말에 타격코치가 대답했다.
“원래 재능은 있는 놈이잖습니까?”
“실력에 비해 너무 주눅 들어 있었는데 역시 기회를 받다 보니까 실력이 나오기 시작하네요.”
“대놓고 석현이 거르고 승부하는데 결과가 좋지 못하니까 재완이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겁니다.”
“인환이도 슬슬 선구안이 좋아지고 있고 재완이도 침착해졌고……. 시간이 해결해 주네요.”
“석현이가 버텨 주니까 앞뒤로 시너지 효과가 있는 거 같습니다. 석현이 때문에 인환이랑 재완이한테 찬스가 많이 갔잖습니까?”
“석현이가 복덩이네요. 석현이 없었으면 4강 싸움은 언감생심인데 말이죠.”
고트는 더는 추가 점수를 내지 못하고 3-0으로 끝났다.
구인선은 벤치로 내려오자 글러브를 내팽개치곤 벤치 뒤로 나갔다.
5회까지 3점,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오늘 풀려도 너무 안 풀린다.
팀도 도와주지 않고 공도 자꾸 맞아 나간다.
분명 오늘 컨디션이 좋은 날인데…….
5회 말.
마이클 피시는 웨일스의 2번 타자 김재홍에게 홈런 하나를 내줬지만 3-1로 이닝을 마쳤다.
구인선의 투구 수는 여든한 개.
마이클 피시의 투구스는 예순네 개.
마이클 피시는 완투도 가능한 투구 수였다.
“6회 초. 구인선 선수가 또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투구 수가 한 스무 개 정도 여유가 있죠? 6회까지는 막고 내려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고트의 타선은 7번 타자 정동규부터였다.
정동규는 구인선의 초구 직구를 쳐 냈지만 배트가 부러지면서 땅볼이 나왔다.
“공 하나로 아웃 카운트 하나를 올리는 구인선 선수. 6회는 시작이 좋습니다.”
“방금은 타자가 힘에 밀린 거 같습니다.”
다음 타자는 유격수 정영수였다.
수비로는 리그 A급 유격수였지만 타율은 2할 5푼 턱걸이도 어려운 타자였다.
정영수는 단 2구 만에 내야 플라이로 물러났다.
“이러면 7회까지 구인선 선수가 올라올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오늘 확실히 구인선 선수의 공은 좋습니다. 3점을 내준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공이 좋아요.”
다음 타자는 9번 타자 조지호.
구인선은 삼구삼진으로 9번 타자를 잡아냈다.
“우와!”
구인선이 포효하면서 마운드를 내려갔다.
6회 말 마이클 피시는 볼넷 하나만 내주고 무실점으로 이닝을 막아 냈다.
고트의 중심 타선 이외는 식물 타선이라는 오명이 있다면 웨일스는 1, 2번 타자 이후에는 ‘도토리 키 재기’라는 별명이 있었다.
7회에 다시 구인선이 마운드에 섰다.
웨일스의 불펜에선 투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위기에 처하면 바로 투수를 투입할 작정이었다.
“구인선 선수, 오늘 공만 보면 완투 페이슨데 공을 너무 많이 던진 게 아쉽겠어요.”
“고트의 중심 타선을 넘기가 참 힘듭니다.”
구인선은 첫 타자 정병선을 상대로 공 다섯 개로 삼진을 뽑아냈다.
“구인선 선수! 아직도 공이 살아 있습니다.”
“좋아요. 이런 거죠. 투수라면 이렇게 찍어 누르는 재미가 있어야죠. 그래야 보는 관중도 즐겁지 않겠습니까?”
“미트에 공이 박히는 소리가 무서울 정도예요.”
구인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은 확실히 컨디션이 좋은 날이 맞다.
공이 이렇게 날아가는 날은 1년에도 몇 번 없다.
설진일은 이번에도 초구를 노렸다.
초구 바깥쪽 패스트볼이 1루수 키를 넘기며 1루로 진루했다.
다음 타자는 김인환이었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몸 쪽으로 과감하게 공을 찔러 넣습니다.”
“공격적으로 나가네요. 이러면 타자도 머리가 복잡해지죠.”
김인환은 타석에서 반 발 정도 떨어졌다.
옆구리 공 하나를 더 맞으면 앓아누울 지경이다.
최악의 경우는 면해야 하지 않는가.
팡!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바깥쪽 패스트볼이었습니다.”
“안쪽으로 공 하나 찌르고 바깥쪽에도 빠른 공. 정석이죠. 저렇게 하기 어려우니까 문제지, 던질 수만 있다면 저렇게 던져야죠.”
뻔한 투구였지만 김인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몸이 반응한다.
몸 쪽으로 붙는 강속구는 타자 입장에선 최악의 공이다.
김인환은 배트를 가볍게 잡았다.
투 스트라이크.
포크볼 카운트다.
과연 여기서 투수가 포크볼을 또-.
-스트라이크! 아웃!
“삼구 삼진! 하이 패스트볼로 삼진을 뽑아냅니다!”
“김인환 선수, 이번에는 꼼짝도 못했어요.”
“구인선 선수,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칩니다.”
구인선은 이제야 미소를 찾았다.
3점을 빼앗긴 건 빼앗긴 거지만, 확실히 오늘 공이 좋다는 건 증명됐다.
최고의 컨디션일 땐 대한민국 어떤 타자도 무섭지 않다.
“타석에 송석현 선수가 들어옵니다.”
“구인선 선수가 이번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또 거를까요?”
“한 타자만 잡으면 아웃인데 그러진 않겠죠?”
구인선이 로진백을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상대할 수 있다.
홈런 하나 맞아도 투런이다.
안타를 내줘도 다음 타자는 최재완이다.
이 정도면 승부할 만하지 않은가.
“송석현 선수, 이번에는 타석에서 조금 떨어져서 자리 잡습니다.”
“너무 타석에 붙는 건 그것대로 위험하죠. 투수를 압박하는 건 좋지만 타자도 자기 몸을 아껴야 합니다.”
구인선은 자신 있게 초구로 바깥쪽 직구 하나를 찔렀다.
탕!
“우익수! 우익수! 파울입니다. 여기서 파울이 나오네요.”
“제대로 밀어 쳤네요. 1~2m만 벗어난 거 같거든요? 위험했습니다.”
구인선은 마른침을 삼켰다.
왜 저놈의 배트는 내 공을 이겨 내는 걸까?
다른 타자들의 배트는 부러지거나 밀리기 마련인데 송석현의 배트는 구인선의 공을 너무나 가볍게 쳐 낸다.
구인선은 제2구로 잘 던지지 않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택했다.
제구력에 자신은 없지만 지금이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팡!
-스트라이크!
“슬라이더가 아주 아름답게 들어갔습니다.”
“저런 백도어 슬라이더를 잘 던지지 않는 구인선 선수지만 이번에는 좋은 선택 같습니다. 송석현 선수가 꼼짝도 못하고 당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단 말이죠.”
“이러면 바로 투 스트라이크입니다.”
구인선이 살짝 웃었다.
됐다.
이제는 승부할 만하다.
백도어 슬라이더를 보여 줬으니 타자의 머리가 복잡할 거다.
포크볼, 백도어 슬라이더, 바깥쪽 패스트볼, 하이 패스트볼까지 결정구만 네 개의 선택지가 있다.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타자의 배트는 늦어진다.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투수의 공은 빨라진다.
홈런을 빼앗긴 건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약한 건 아니다.
그저 송석현이 운이 좋았을 뿐.
구인선은 결정구 하나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자 했다.
구인선이 택한 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