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투수코치는 송석현이 오자 홍대성에 대해 물었다.
“네가 보기엔 대성이 어때?”
“대성이요?”
“그래, 홍대성. 네가 보기엔 어때? 2군에서부터 함께했잖아.”
“그렇다고 하기엔 같이한 시간이 길진 않아서요.”
“2군, 1군에서 계속 공 받아 준 사람이 너잖아. 너라면 홍대성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해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송석현은 생각에 잠겼다.
홍대성.
고트의 2013년 드래프트 1순위.
150km/h을 던지는 좌완 파이어볼러라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공이 빠르면 제구가 안 좋거나 제구가 좋을라 치면 공이 느린 선수가 태반인데 홍대성은 빠른 공에 비해 제구도 나쁜 편이 아니다.
냉정하게 봐도 평균에 수렴한다.
“내가 보기엔 대성이 이제 갓 스무 살이지만 가능성이 보이거든.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던진다는 데에서 벌써 먹고 들어가는 거지. 그래서 대성이한테 선발 자리 한번 맡기려 하는데 네 의견도 한번 들어 보려는 거야.”
“글쎄요……. 대성이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보신 분은 코치님 아니신가요? 저는 잘…….”
“여러 사람의 의견을 취합하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봐.”
“그렇다면야…….”
송석현이 홍대성에 대해 떠올렸다.
“피지컬은 어느 팀에 가든 먹히는 수준이라고 봅니다. 공도 빠르고 슬라이더도 예리하고 욱여넣는 느낌이 있어도 볼질도 안 하구요.”
“그리고 또?”
“대성이 자체가 좀 야구에 진지하지 않은 타입 같아요. 친하진 않지만 걔는 툭하면 게임 하러 간다고 들었거든요. 딱히 개인 연습 한다는 소리도 못 들었고, 연습할 때도 그냥저냥 시간 채우는 느낌……?”
“마인드에는 문제가 있다?”
“문제라고 볼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마운드에 서면 여유가 있으니까요.”
“음…….”
송석현이 물었다.
“그런데 코치님.”
“어, 왜?”
“대성이까지 선발로 가면 우리 팀 불펜 괜찮나요? 지금도 좀 빡빡하지 않나 싶은데요…….”
“후반기엔 현섭이가 올라올 거야. 내 생각이지만 천운이랑 대성이를 5선발 겸 롱 릴리프로 넣으면 딱 맞을 거 같아서 말이야.”
“아, 천운 선배는 딱 좋죠. 지금 선발에 옆구리 투수도 없고, 천운 선배는 스태미나도 좋은 편이라.”
“그래? 네가 보기에도 괜찮아?”
“네, 그럼요. 일단 피칭도 공격적으로 공 끝도 지저분해서 범타 유도에 좋죠. 오히려 불펜보다 선발이 잘 맞는 체질 같아요.”
“으음, 대충 의견이 비슷하네. 일혁이도 비슷하게 말했거든.”
“아, 그런가요?”
“알았어. 의견 참고할게. 수고했다.”
“네, 들어가십쇼, 코치님.”
코치와 헤어진 후 송석현은 생각에 잠겼다.
풍요 속의 빈곤.
투수를 대거 트레이드로 데려왔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잦은 FA로 유망주와 즉전감 투수들이 계속 유출된 후유증이다.
숙소로 돌아온 송석현은 김정률, 김인환과 함께 커피 한 잔을 하면서 코치와 나눈 얘기를 꺼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긴 한데…….”
김정률이 혀를 찼다.
“내가 보기엔 이번 트레이드로 투수를 많이 데려온 거 자체는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아. 우리 팀에 투수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거든. 그러니까 만성이나 석현이, 환윤이가 던지고 또 던지고 그랬던 거지. 뭐, 외부에선 욕을 많이 하지만 내가 보기엔 꼭 필요한 딜이었어. 어린 투수들도 많이 데려왔고.”
송석현이 말했다.
“제가 보기엔 좀 불안 불안해요. 이렇게 트레이드를 크게 해도 될까 싶어서요.”
“사실 이 정도 규모의 트레이드는 드문 편이긴 하지.”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타자를 좀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송석현이 말을 흐리자 김정률이 크게 웃었다.
“너도 답답하지, 우리 타선?”
“조금 변화가 필요하긴 하죠……. 하위 타선이 너무 약하니까 대놓고 쉬어 가는 타선이 되잖아요. 듣자 하니 유선호 선배님이랑 이지성 선배님 두 분 다 1군에 올라올 컨디션이 아니라던데.”
“당분간 너랑 인환이가 죽어라 해야지. 별수 있냐?”
“저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못할 때도 많잖아요. 그럴 때마다 너무 부담이 돼서…….”
“그나마 진일이까지 없었으면 완전 노답이었을 텐데. 그치?”
“그렇죠. 진일 선배님까지 없었으면 진짜, 하.”
“이거 이거, 큰일이네, 큰일이야. 너랑 인환이 둘이서 다 해 먹고 있어.”
김인환이 말했다.
“저도 뭘 하고 있긴 있나 싶어요. 저는 퐁당퐁당이잖아요. 한 경기 잘했다가, 한 경기 죽 쒔다가.”
“반대로 말하면 한 경기 걸러 한 경기마다 쩔어 준단 얘기 아니냐? 그것만 해도 어딘데.”
“아니 뭐…… 제가 쩐다 싶을 정도로 하는 건 또 아닌 거 같은데.”
“석현이 때문에 네가 가려져서 그렇지, 너 지금 되게 잘하고 있어. 페이스 좋아.”
“그렇죠? 석현이가 문제죠?”
“아니, 갑자기 왜 저 가지고 그래요, 제가 뭘 했다고?”
“너무나 많이 잘한 죄? 흐흐. 큰일이다, 큰일이야. 우리 팀 운명이 너희 둘에게 달렸으니, 너희 둘 중 하나만 부진해도 우리 팀 자체가 삐걱거리네.”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부담스러운데요.”
“부담스러우라고 하는 말이야. 몸 관리 잘해. 뻘짓 하지 말고. 특히 석현이 너는…… 음…… 조심하고.”
송석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선배님 덕분에 제가 아주 피곤해진 거 아시죠? 기자들이 떨어져 나간 거, 며칠 안 됐습니다.”
“미안, 미안. 고거는 내가 쪼까 미안합니다잉.”
“선배님은 잘돼 가고 계신 거죠? 저까지 팔아먹었으니 잘되셔야 할 텐데.”
“낫 배드. 요샌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도 이번에는 느낌이 괜찮아. 안 그래도 주말에 만나기로 했어. 데이뚜, 데이뚜.”
“꼭 잘되십쇼. 저 덜 억울하게 말이죠.”
“오냐. 내가 네 양복은 제일 좋은 걸로 맞춰 줄게.”
* * *
웨일스전에서 대패를 했지만 3차전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고트의 1선발 마이클 피시가 나오는 날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선발로 4점대 방어율까지 기록한 마이클 피시는 자타공인 고트의 최고 투수였다.
메이저리그의 최근 트렌드인 변형 패스트볼 대신 패스트볼, 커브, 체인지업이라는 전통적인 구질을 구사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세 구질만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한몫을 했던 투수다.
웬만한 국내 타자들은 마이클 피시의 높은 타점에서 오는 패스트볼, 커브에 제대로 손도 못 댄다.
웨일스의 투수는 구인선.
직구 145km/h가 넘는 빠른 공을 던지는 좌완이지만 기복이 심해 롤러코스터나 다름없었다.
에이스 대 롤러코스터의 대결.
고트 팬들은 어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인천 구장을 가득 메운 이유였다.
“오늘 고트와 웨일스의 3차전, 세 번째 경기가 펼쳐지는 인천 구장에 나와 있습니다. 양 팀이 서로 1승씩 주고받았지만 고트는 어제 경기 대패의 후유증이 좀 있으리라고 보는데요.”
“아무래도 야구라는 게 흐름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1승씩 주고받았다고 해도 어제 대패를 한 고트가 불리하다고 볼 수 있죠. 크게 졌다는 건 수비가 길어졌다는 얘기고, 수비가 길어졌다는 건 체력 소모가 많았다는 얘기나 다름없으니까요.”
“오늘 경기의 키포인트는 뭐라고 보십니까?”
“결국 뻔한 얘기지만 선발과 타선 아니겠습니까? 선발이 얼마나 버텨 주느냐, 타선이 얼마만큼 벌어 주느냐, 이게 중요할 텐데 선발은 아무래도 고트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습니다. 구인선 선수도 좋은 투수지만 기복이 심하거든요. 그에 비해 타선은 어제 컨디션이 올라온 웨일스가 더 유리하다고 봅니다.”
“그렇군요. 고트의 타선엔 KS포가 있는데도 부족할까요?”
“아무리 김인환, 송석현이 잘한다고 해도 앞뒤로 받쳐 주는 타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부족합니다. 설진일 선수 정도가 제몫을 해내고 있지만 그 외에 눈에 띄는 타자가 없습니다. 결국 고트는 마이클 피시가 제 몫을 해내고 KS포에서 1, 2점이라도 확실히 내는 게 필요합니다.”
“결국 또 KS폰가요?”
“어쩔 수 없죠. 클린업트리오가 모두 트레이드 됐으니 남은 선수들이 힘써 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플레이볼!
경기가 시작됐다.
웨일스의 선발 투수 구인선이 로진을 손에 툭툭 묻혔다.
고트의 1번 타자는 설진일이 아닌 중견수 정병선이었다.
타격에는 소질이 없지만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1할 가까이 높은 타자.
그래도 출루율이 3할 중반을 턱걸이한다는 게 흠이지만 함성훈은 2, 3, 4번을 설진일, 김인환, 송석현으로 채웠다.
설진일이 최근 타율, 출루율, 장타율 모두 상승세에 있지만 공을 적게 보는 게 흠이다.
정병선은 출루에 일가견이 있으니 2, 3, 4번 타자가 공을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게 함성훈의 결론이었다.
팡!
구인선은 초구부터 정병선의 몸 쪽을 찔렀다.
-스트라이크!
“시원시원한 공이 나옵니다.”
“역시 구인선 선수의 공은 좋습니다. 구위 자체는 확실히 좋아요.”
“방금은 정병선 선수가 놀라서 뒤로 물러났어요. 그만큼 좋았다는 거죠.”
정병선이 배트를 짧게 잡았다.
타석에 바짝 붙고 몸은 웅크렸다.
제구가 불안한 투수에게 몸 쪽 공을 던지지 못하게끔 부담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팡!
-스트라이크!
“정병선 선수, 이번에도 꼼짝도 못하네요.”
“바깥쪽에 잘 걸친 공이네요. 저런 공이 들어오면 뭐, 타자는 할 게 없죠.”
정병선이 타석에 물러나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구인선의 투구를 본 고트 선수들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 그날이네. 긁히는 날이야.”
“쟤는 왜 오늘 긁히고 난리야.”
“오늘 힘들겠는데?”
선수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인선의 공이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에 들어왔다.
정병선이 배트를 휘둘렀으나 이미 공이 들어간 후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정병선 선수가 꼼짝없이 삼진을 당합니다.”
“직구 147km/h이 나오네요. 오늘 공 정말 좋네요. 아주 묵직해요.”
정병선은 멋쩍은 표정으로 벤치로 돌아왔다.
송석현은 정병선에게 물었다.
“오늘 공 어때요?”
“힘들겠는데. 공이 너무 좋아.”
“제구는요?”
“쟤는 원래 제구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잖아? 오늘도 비슷한 거 같아. 그런데 공이 더 살벌한데?”
설진일은 구인선의 초구를 노렸지만 배트가 부러지면서 범타로 물러났다.
“……하. 공 좀 보라고, 인마.”
타격코치는 설진일에게 핀잔을 줬지만 설진일은 고개를 한 번 까닥하고 말았다.
뭐라 말하든 마이 웨이를 걷는 선수니만큼 타격코치도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율 3할에 출루율 4할, 장타율 4할을 넘겨주고 있는 타자다.
페이스가 좋은 타자는 굳이 뭘 건드려서 바꿔선 안 된다.
“타석엔 김인환 선수가 들어옵니다.”
“앞 타자 둘이 너무 쉽게 물러났거든요? 김인환 선수가 제 몫을 해 줘야 합니다.”
구인선이 로진백을 손에 툭툭 털었다.
좌타 거포 김인환.
맞았다 하면 공을 부숴 버릴 듯이 휘두르는 강타자.
헛스윙이 많다고 하지만 투수들에겐 부담스러운 타자인 건 분명했다.
구인선에게도 쉬운 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타자도 아니었다.
구인선이 퐁당퐁당 투구, 롤러코스터 투구에도 중용받는 이유.
좌타자 상대로는 방어율이 3점대이기 때문이다.
제구가 들쑥날쑥하는 가운데서도 방어율이 3점대라는 건 컨디션이 좋은 날엔 좌타자들이 맥을 못 춘다는 얘기다.
‘패스트볼, 아웃사이드.’
포수의 사인도 단순했다.
힘으로 눌러 버려라.
구인선은 힘껏 공을 던졌고 김인환도 배트를 휘둘렀다.
탁!
배트에 맞은 공이 그대로 포수 후면석으로 넘어갔다.
-파울.
김인환이 손목을 돌렸다.
확실히 구위가 좋다.
단순히 구위만으로 따지자면 리그에서 손꼽는 수준.
구인선은 제2구도 패스트볼을 던졌다.
탁!
“이번에도 파울이 나옵니다.”
“3루 방향 파울이죠? 김인환 선수가 슬슬 감을 잡아 가는 걸로 보이는데요.”
파울 공이 앞으로 나온다는 건 타자가 타이밍을 맞추고 있단 얘기다.
포수는 구인선에게 포크를 요구했다.
구인선의 포크볼은 제법 날카로웠다.
구인선의 불안한 제구를 오히려 더 살려 주는 공이 포크볼이다.
구인선의 패스트볼을 노리고 들어오는 순간 공은 아래로 뚝 떨어진다.
한가운데 공인 줄 알고 배트를 휘두르다 헛스윙하며 물러난다.
뻔한 레퍼토리지만 알고도 먹히는 레퍼토리다.
빠른 공 두 개로 김인환의 눈에 패스트볼을 각인시켰으니 이제 남은 건 헛스윙을 끌어낼 포크볼 하나다.
“후.”
김인환은 숨을 고르고 배트를 조금 더 누였다.
스윙 폼을 바꾼 이후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임팩트 영역이다.
장타가 가능한 수준 내에선 최대한 히팅 포지션을 낮춰야 임팩트 영역이 넓어진다.
임팩트 영역이 넓어지면 그만큼 공을 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포크볼러에게 투 스트라이크를 뺏겼으니 포크볼을 염두에 둬야 한다.
구인선은 무릎을 한껏 올리더니 그대로 공을 뿌렸다.
김인환의 어깨가 흔들거리더니 힘껏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