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05화 (105/201)

위기는 영웅을 부르고

뜨거워진 분위기를 식힌 건 양 팀의 코칭 스태프였다.

감정이 고조된 벤치 클리어링은 일만 키울 뿐이다.

최악의 경우 벤치 클리어링으로 부상자까지 나올 수 있다.

시즌의 중간점에 다다른 지금, 부상자는 팀의 악몽이다.

“포수, 타자를 자극할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심판은 송석현에게 미리 경고를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벤치에서 사인이 나온다면 포수도 어쩔 수 없겠지만, 심판이 할 수 있는 건 포수에게 미리 경고를 해서 벤치 클리어링 시도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낮추는 거다.

“경기 재개합니다.”

“오늘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네요, 허허.”

“선수들이 흥분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프로 스포츠잖습니까. 프로 의식을 보여야 합니다.”

송석현은 초구로 바깥쪽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잔뜩 몸에 힘이 들어간 타자는 범타로 물러섰다.

“…….”

송석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웨일스 벤치를 살폈다.

서로 말 한마디 없이 분위기가 무거웠다.

다음 타자는 심수경을 대신해 들어온 노장 권호준이었다.

갑자기 대타로 들어온 서른다섯의 노장.

송석현은 초구부터 높은 쪽 빠른 공을 요구했다.

김진석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탕!

타자는 초구부터 힘껏 휘둘러 봤으나 준비되지 않은 서른다섯 노장의 배트는 강속구를 이겨 낼 수 없었다.

“내야 플라이가 나옵니다.”

“방금은 너무 서둘렀죠? 조금 지켜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대타로 들어온 만큼 공을 조금 지켜보고 페이스를 올리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송석현은 석상처럼 굳은 자세로 눈을 감았다.

웨일스 타자들이 입은 다물고 있었으나 짜증과 화를 꾹꾹 눌러 참는 게 느껴졌다.

마음이 급해지면 배트도 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다음 타자 정기수도 초구부터 공격적으로 나왔으나 2구만에 슬라이더를 어설프게 쳐서 아웃.

김진석은 벤치로 들어오면서 송석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사인 제법인데?”

“감사합니다.”

7회 초.

고트의 공격은 3번 타자 송석현.

송석현은 배트를 어깨에 멘 채 타석으로 향했다.

웨일스 배터리도 생각이 많아졌다.

하필 절묘한 타이밍에 송석현이 들어선다.

“선두 타자로 송석현 선수가 나옵니다.”

“고트의 희망이고 미래죠. 최근 불미스러운 일로 팬들의 시름이 깊었는데 송석현 선수의 활약이 팬들을 많이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 충격적인 트레이드로 팬들도 선수들도 많이 혼란스러울 겁니다. 올 초까지 클린업을 이룬 최대규, 이낙균, 강문규 세 타자를 트레이드했죠? 그리고 많은 투수를 데려왔지만 타자는 유선호 선수 딱 한 명을 데려왔습니다.”

“이최강 트리오 대신 KSY 클린업을 만들겠다는 복안 같은데…… 이게 쉽지 않을 겁니다.”

“왜 그렇죠?”

“김인환, 송석현 선수는 성적을 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음표가 큽니다. 앞으로도 잘할지 말지 아무도 몰라요. 게다가 유선호 선수야 프로야구의 전설이지만 수술과 재활을 반복했고 나이도 적지 않습니다. 최근에 경기도 제대로 못 뛰었구요. 유선호 선수의 실력에도 물음표가 붙는다는 거죠.”

“클린업이 온통 물음표란 말씀이시죠?”

“네, 김인환 선수가 기복이 좀 심하고, 유선호 선수도 경기 감각을 끌어 올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한 만큼 송석현 선수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송석현 선수가 부진하면 그야말로 클린업 자체가 무너질 수 있어요.”

“스무 살의 어린 선수에게 너무 큰 짐이네요.”

“여기에 베테랑 포수 박신언까지 트레이드되면서 송석현 선수가 포수도 봐야 합니다. 중심 타자 역할만으로도 벅찬데 포수까지 본다……. 음. 참, 어린 선수가 많이 힘들 겁니다.”

“말씀하시는 사이 어느덧 카운트는 2-2가 됐습니다. 송석현 선수 스윙 한 번 하지 않고 공을 냉정하게 고르네요.”

“투수가 바뀌면 송석현 선수는 더 침착하게 공을 보는 성향이 있어요. 원래 공을 많이 보는 타자지만 더 그렇죠.”

웨일스의 투수는 고영규.

사이드암 투수로 직구, 커브, 슬라이더, 싱커 등 다양한 구질을 구사하는 셋업맨.

웨일스의 포수 조진열은 집요하게 바깥쪽 사인을 냈다.

카운트는 2-2.

나쁘지 않은 카운트였지만 배트를 내지 않는 송석현 덕에 골머리가 아팠다.

노림수가 많은 타자가 사이드암 투수 상대로 바깥쪽 공에 미동하지 않는다?

몸 쪽 공이라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패스트볼?

송석현의 스윙이 없을수록 배터리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싱커.’

포수는 사인은 몸 쪽 싱커.

여태 바깥쪽 공 일변도로 던졌으니 싱커로 땅볼 하나를 노려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타자가 걸러도 여태 바깥쪽 공을 지켜봤으니 바깥쪽 공 하나를 더 노려 볼 수 있다.

‘오케이.’

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수는 한껏 와인드업을 크게 했다.

팟!

투수의 공을 떠난 공은 약간 안쪽으로 가다가 마지막에 더 안쪽으로, 아래로 떨어졌다.

각은 크지 않았지만 제구는 괜찮은 싱커였다.

부우웅.

포수는 귓가에 묵직한 바람을 느꼈다.

타자가 몸을 뒤로 젖히면서 3루 외야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봤다.

두 팔을 몸에 딱 붙이고 골프 스윙처럼 힘껏 돌린 배트의 스위트스폿과 공이 만났다.

송석현의 타격 폼을 보자니 투수도 아닌 포수인 자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온몸을 던지는 풀스윙이었다.

쾅!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좌측 담장! 넘어갑니다! 송석현 솔로 홈런! 동점 홈런입니다!”

“지금 공이…… 관중석을 넘어간 거 맞죠?”

“무서운 신예 송석현이 잠실을 넘어 인천 구장에서도 장외 홈런을 때려 버립니다! 어마 무시한 홈런이 터졌습니다!”

“대단합니다. 저 정도 공이면 잘 들어간 공인데 제대로 돌렸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풀스윙으로 인천 구장의 담장을 넘고 관중석을 넘어 장외까지 날려 버리는 송석현 선수! 이러면 장외 홈런만 벌써 두 번째인가요?”

“첫 번째 장외 홈런을 잠실에서 때렸죠?”

“정말 무섭습니다. 저 선수가 스무 살이에요. 한국 프로야구의 미래가 이렇게 밝습니다.”

송석현의 장외 홈런 한 방에 고트 팬들은 함성을 질렀다.

조금 전의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마치 없었던 일 같았다.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

군필 유망주 심수경의 부상과 스무 살 신인 송석현의 장외 홈런.

웨일스 벤치의 분위기는 단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있었다.

적막.

웨일스 선수고 코칭 스태프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별수 없었다.

-아웃!

-아웃!

송석현의 솔로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지만 후속타는 터지지 않았다.

불펜이 강한 웨일스에서도 셋업을 맡는 고영규의 공은 단 한 번의 타석으로 바로 공략하긴 어려웠다.

“흐름이 묘하네요.”

투수코치의 중얼거림에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오늘 같은 경기는 힘드네요. 부상자도 많고 분위기도 날카롭고.”

“경험적으로 오늘 같은 경기가 후유증이 제일 깊었습니다. 감독님 스타일은 아니시겠지만 오늘은 불펜을 짧게 가동시키는 게 어떠십니까?”

“아직 동점인데 필승조를 올리자는 말씀이세요?”

“타순으로 보면 9회에 석현이까지 찬스가 갈 거 같습니다.”

“음…….”

함성훈 감독은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했다.

“진석이 흔들린다 싶으면 바로 정률이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웨일스는 군필 거포 유망주가 다쳤지만, 고트는 풀타임이 가능한 유일한 1군 포수가 다쳤다.

아직 서일혁의 부상 정도는 알 수 없지만 만에 하나 크게 다친 거라면 고트의 포수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다.

타자 송석현이라면 몰라도 포수 송석현은 물음표가 많이 붙는다.

프로라면 어떤 경기든 이기는 게 당연히 더 좋다지만, 오늘 같은 경기에서는 더 승리가 절실한 법이다.

악재 속에 승리마저 없으면 선수들의 사기가 푹 꺾일 테고, 꺾인 사기는 연패로 이어질 테니까.

-아웃!

-아웃!

-아웃!

“아, 고트 선수들도 힘을 내지 못하네요. 추가 점수가 나지 않습니다.”

“고트의 하위 타선은 이게 문제예요. 일단 한번 분위기를 타면 기세를 이어 나가긴 하는데 문제는 한번 분위기 타는 게 어렵다는 겁니다.”

“재밌는 건 오늘 고트가 안타가 적은 건 또 아니라는 거죠.”

“고트의 장타율은 전 구단을 통틀어서 6윕니다. 7, 8위와 크게 격차가 나지 않는 6윕니다. 이것도 최근 송석현, 김인환 선수 덕에 올라간 거지 이마저도 아니었다면 피닉스와 8위 경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고트의 득점력 빈곤은 항상 문제가 됐었죠?”

“그렇습니다. 최근 고트의 무리하다 싶은 트레이드를 살펴보면 유선호라는 대형 타자가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결국 대부분 투수거든요. 함성훈 감독은 타선 대신 투수진을 보강해서 마운드의 힘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려는 생각 같아요.”

“쉽지 않은 문제네요.”

“타선이야 사이클이 있어서 침체가 됐다가도 다시 오른다지만 침체기가 너무 길어지면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승리를 할 수 있을 만큼은 어떻게든 점수를 짜내야 해요.”

8회 말.

김진석은 솔로 홈런 하나를 헌납했다.

점수는 다시 4-3.

함성훈 감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후, 교체 가죠.”

“예, 알겠습니다.”

투수는 더 던질 수 있다고 강변했지만 투수코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체력 아직 짱짱합니다, 코치님.”

“알아. 체력 아껴서 다음에 또 던지자.”

“……하, 네.”

김진석은 끝내 공을 넘겨주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바뀐 투수는 김정률.

마운드에 오른 김정률이 송석현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팡!

팡!

김정률은 바닥을 긁듯이 스윙하며 공을 던졌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친 공은 송석현의 미트에 그대로 꽂혔다.

“오.”

공을 받아 본 송석현은 입을 모았다.

공 끝도 좋지만 송석현이 내민 미트를 따라 공이 따라온다.

제구가 더 날카로워졌다.

언더 핸드에 더 익숙해졌다는 얘기다.

“천재야, 천재.”

송석현이 공을 빼서 김정률에게 던졌다.

언더 핸드로 바꾼 지 이제 반년도 채 안 됐다.

허리를 굽혀 던지는 만큼 오버 핸드보다 제구가 더 어려울 텐데 김정률은 금세 적응했다.

이제는 스타의 자리에서 내려온 터라 사람들의 기대가 낮아졌지만 타고난 재능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자기 공을 던지는 투수 김정률의 공은 웨일스의 빈약한 타선, 그것도 하위 타선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웃!

-아웃!

-아웃!

“김정률 선수! 세 타자 연속 범타 처리! 대단하네요.”

“공 일곱 개로 세 타자를 잡아냈습니다. 이건 정말…… 와, 박수를 안 보낼 수가 없네요.”

“날카로운 싱커가 제대로 먹히고 있습니다.”

“알고도 못 치는 공입니다. 요새는 정통파 언더 핸드 투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거든요. 그만큼 타자들에게 생소해서 더 까다로울 텐데 김정률 선수는 싱커의 각까지 날카롭습니다. 무서운 건 말이죠, 김정률 선수의 공이 더 좋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던지면 던질수록 김정률 선수의 공이 더 날카로워지고 있습니다.”

“이러면 뒷문이 든든해지죠?”

“불스의 마무리 고진석 선수와 웨일스의 좌타자 스페셜리스트 정홍민 선수까지 합류한다면 고트의 불펜진 수준이 꽤 좋아집니다. 벌써 불펜 투수 둘, 박만성과 강석현 선수가 수술에 들어가면서 꽤 암담했는데 김정률 선수까지 제 몫을 해 준다면 고트의 투수진, 꽤 좋습니다. 선발진의 성적까지 생각하면 짜게 봐도 투수진 수준은 상위권입니다.”

김정률은 벤치로 들어가기 전 송석현을 기다렸다.

“어떻디, 오늘 공?”

“명불허전인데요. 죽였어요.”

“쓸 만해?”

“보셨잖아요, 타자들이 제대로 치지도 못하는 거.”

“이 정도면 퇴물 소리는 안 듣겠지?”

“한 10년은 더 하시고 가도 될 거 같은데요?”

“짜쉭이 아부는, 흐흐.”

점수는 4-3이었지만 고트의 분위기는 오히려 살아났다.

고트의 황태자 김정률의 활약과 더불어 9회 초는 9번 타자부터 시작이다.

타순이 나쁘지 않단 얘기다.

탁!

“중견수~ 가볍게 뛰어서 아웃시킵니다.”

“고트 입장에선 아쉽겠어요. 공은 많이 봤지만 득점으로 연결시키진 못합니다.”

다음 타자는 1번 타자 설진일.

웨일스는 투수를 교체했다.

바뀐 투수는 마무리 황시완.

서른다섯의 노장이지만 아직도 145km/h가 넘는 패스트볼과 더불어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백전노장이었다.

“황시완 선수가 나오네요.”

“확실히 여기서 승리를 따내야죠.”

“1점 차, 고트의 중심 타자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황시완 선수는 3번 송석현 선수까지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네요.”

“그렇습니다. 오늘 홈런을 치면서 송석현 선수가 제대로 물이 올랐거든요.”

황시완은 연습 투구로 어깨를 풀었다.

마무리는 생각이 많아선 안 된다.

오로지 하나.

타자만 생각한다.

타석에 들어서는 설진일은 매우 공격적인 타자.

공 하나를 빼면서 타자의 반응을 보는 게 최선이다.

‘슬라이더.’

황시완은 포수에게 직접 사인을 냈다.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노려본다.

헛스윙이 아니더라도 타자의 반응을 보면서 바깥쪽으로 공을 뺄지, 아래로 공을 뺄지 선택지를 좁힐 수 있다.

프로에서 10년 넘게 뛴 베테랑이기에 나올 수 있는 계획.

황시완은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로 설진일의 반응을 살폈다.

탕!

“안타! 안타를 때려 내는 설진일 선숩니다!”

“또 초구를 노렸어요. 완전히 볼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초구를 노렸습니다.”

“황시완 선수,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설진일 선수를 쳐다봅니다.”

“원아웃 상황, 뒤에 강타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저렇게 적극적으로 공을 칠 줄은 몰랐을 겁니다. 저도 당황스럽네요.”

고트의 벤치에서도 황당해하긴 마찬가지였다.

공 하나 정도는 기다리라 사인을 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었다.

“……어떤 의미로든 미친놈은 미친놈이네.”

함성훈 감독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에 보이는 대로 배트를 내는 것도, 사인을 무시하는 것도, 완전히 빠지는 공을 기어이 안타로 만지는 것도 참으로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설진일은 1루에 나가자마자 2루 도루 자세를 취했다.

다음 타자는 김인환, 그다음 타자는 송석현이다.

병살을 면해야 송석현이 나올 수 있다.

병살을 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을 짊어진 김인환, 병살로 송석현 전에 클로징 하려는 황시완.

두 선수가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설진일은 도루 타이밍을 쟀으나 노련한 황시완은 좀체 타이밍을 내주지 않았다.

설진일이 망설이는 가운데 황시완이 초구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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