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04화 (104/201)

어서 와. 벤클은 처음이지

퍽!

타자가 인상을 쓰며 타석에서 물러섰다.

한민석의 슬라이더가 타자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맞혔다.

“아, 여기서 사구가 나오나요.”

“방금은 제구가 제대로 안 된 거 같습니다.”

“1점을 빼앗긴 상황에서 추가 진루까지 내주는 고트입니다. 오늘 고트 초반부터 어렵게 가네요.”

“이러면 주자 1, 3루 상황에서 4번 타자가 나오게 되거든요?”

1루로 나간 타자 주자 양선우우가 인상을 쓰며 한민석을 바라봤다.

한민석은 양선우우와 눈이 마주치자 모자챙을 살짝 한번 만졌다.

양선우우의 한쪽 눈썹이 씰룩였다.

“하, 진짜.”

양선우우가 옆구리를 만지면서 한민석을 노려봤다.

선배를 맞혔으면 최소한 모자를 한번 벗고 고개는 한번 숙이는 게 도의 아니던가.

직구가 아닌 변화구라지만 140km/h에 가까운 공이다.

고개 한 번 숙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타자는 공 한번 잘못 맞으면 작게는 2~4주 멍을 달고 살고 심하면 목숨까지 위협받는다.

양선우우는 부글거리는 속을 꾹 눌러 참았다.

다음 타자는 웨일스 4번 타자 이상환.

한때 30홈런도 쳐 본 강타자였지만 통산 OPS가 0.8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좋은 타자지만 한 팀의 4번 타자론 무게감이 떨어지는 성적.

무사 1, 3루라면 얘기가 달랐다.

외야로 가는 플라이 하나면 쳐도 타점을 올릴 수 있다.

이상환은 타석에서 조금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병살은 면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는 한민석 선숩니다.”

“바깥쪽으로 깔끔하게 들어갔죠? 좋았습니다.”

초구 스트라이크에 투수가 어깨를 한번 돌렸다.

타자가 투 스트라이크로 몰리기 전까지 애매한 공은 거를 거다.

바깥쪽 꽉 차는 공을 억지로 밀어 치다 병살을 치는 경우가 많은 만큼 똑같은 코스의 패스트볼은 또 거를 확률이 높았다.

팡!

-스트라이크!

“한민석 선수! 여기서 투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네요.”

“갑자기 제구가 좋아진 거 같습니다.”

“이러면 타자가 많이 불리하죠?”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타자도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는 타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포수가 사인을 냈다.

‘아웃사이드, 슬라이더.’

바깥쪽 패스트볼 두 개 이후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한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뻔해도, 알아도 당하는 패턴이 있기 마련이다.

한민석은 힘껏 공을 던졌다.

공은 안쪽으로 조금 몰렸지만 이내 바깥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타자의 배트는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헛스윙.

부우웅!

-스트라이크!

투수가 삼진을 기뻐하기도 전에 배트가 투수의 발목을 향해 날아왔다.

투수는 깜짝 놀라 피하려 뛰다가 뒤로 넘어졌다.

“아, 타자가 배트를 놓쳤습니다.”

“다행히도 투수는 맞지 않았네요.”

“위험천만한 상황입니다.”

한민석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타자는 한민석을 슬쩍 한번 보더니 그대로 벤치로 향했다.

“아이 씨…….”

한민석을 욕을 하려다 카메라가 자길 찍는다는 걸 깨닫고 입을 꾹 눌러 닫았다.

다음 타자는 5번 타자 심수경.

웨일스에서 공들여 키우는 차기 4번 타자였다.

스물셋의 나이에 군필 거포.

잔부상이 잦지만 실력으론 이미 대형 유망주였다.

구단도, 팬들도 애지중지하는 거포.

퍽!

“악!”

사달은 초구로 던진 몸 쪽 크로스 패스트볼에서 벌어졌다.

타석에 바짝 붙어 스윙하려던 심수경의 손등에 공이 직격했다.

“야, 이 개새끼야!”

심수경이 고통에 쓰러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1루 주자 양선우우가 마운드로 달렸다.

타자에게 신경 쓰느라 1루 주자는 안중에도 없었던 한민석은 양선우우의 몸을 던진 태클에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야!”

“뭐야, 이 새끼야!”

“저거 막아! 막아!”

“말려야지, 뭐 해!”

“우우우우우!”

“한민석 밟아 버려!”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영문을 모르고 깔린 한민석은 고통 속에서도 화를 참지 못해 양선우우와 한데 뒤엉켜 싸웠다.

양선우우의 갑작스러운 태클에 고트 선수들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 끼어들었다.

3번 타자, 5번 타자의 사구에 웨일스 팬들은 그야말로 성난 파도가 돼 욕을 내뱉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그라운드에 집어 던졌다.

웨일스 선수들도 팬들과 다른 마음이 아니었다.

이제 막 제대해서 막내 노릇을 하는 심수경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1회에 실책, 실투, 실점을 연이어 기록한 투수가 한 이닝에 두 타자를 맞혔다.

고의가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면 미필적고의나 다름없었다.

웨일스 선수들은 한민석과 양선우우의 싸움을 말리려 뛰어든 고트 선수들을 보며 양선우우를 해코지한다고 여겼다.

웨일스 선수들은 고트 선수들에게 뛰어들었고, 고트 선수들은 원치 않았던 싸움에 휘말렸다.

“야! 야! 말려! 말리라고!”

“놔! 이거 놓으라고!”

“야, 야. 적당히 해, 적당히. 뭐 하는 거야?”

“애들 말리라고!”

불행 중 다행이라면 웨일스의 베테랑 선수들이 먼저 나서서 양 팀 선수들을 말렸다는 거다.

“야! 너 일부러 맞혔지? 어?”

“먼저 싸움 건 게 누군데!”

한민석과 양선우우는 입씨름을 멈추지 않고 서로 달려들었다.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한민석과 만만찮은 양선우우의 싸움에 양 팀 선수들도 두 사람을 뜯어 말리는 데 초점을 뒀다.

“아, 이런 거 안 좋습니다. 이제는 여자와 어린아이도 함께 보는 KPBL이 됐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싸움과 욕설이 난무한다면 어떻게 패밀리 스포츠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 위원님은 어떻게 보시나요?”

“한민석 선수가 한 이닝에 두 명이나 맞히면서 분란의 빌미를 준 건 맞습니다. 하지만 고의 빈볼이라고 보기엔 확증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양선우우 선수가 먼저 폭력을 행사하면서 웨일스도 지금 할 말이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심수경 선수가 통증이 심해서 바로 병원으로 간다고 합니다.”

“아까 보니까 손등에 맞았거든요? 살이 없는 곳이라…… 통증이 심할 겁니다. 뼈가 부러졌다면 이번 시즌은 사실상 뛰기 어렵죠.”

“웨일스에서 심수경 선수의 입지가 그리 작진 않은데요. 성적만 보자면 웨일스에서 세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들어가는 타잡니다. 안 그래도 강타자가 적은데 심수경 선수가 빠지게 되면 웨일스의 화력이 많이 줄어들 거 같습니다.”

벤치 클리어링이 끝난 후 송석현은 식은땀을 닦았다.

김인환은 송석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벤클은 처음이지?”

“원래 프로에서 벤클은 그냥 위장 시위용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살벌하던데.”

“보통은 그런데 오늘은 좀 심하네. 조심해야겠어. 웨일스 애들도 독이 바짝 올라와 있네.”

“아까 저도 고민했잖아요, 이걸 싸워야 하는지 빠져야 하는지.”

“너는 웬만하면 빠져 있어. 이런 건 선배들이 정리하는 거야. 네가 나섰다가 싸움 더 커진다. 네가 싸움을 말려도 어린놈이 자기를 건드렸다고 입에 게거품 물 수도 있어.”

“그럼 전 구경만 해요?”

“뒤에서 어어어 이것만 해. 어어어.”

경기 흐름이 끊기면 통상 어깨가 식은 투수가 타자보다 불리하다고 하지만, 한민석은 달랐다.

양선우우에게 주먹을 맞은 후 독이 오를 대로 오른 한민석은 보란 듯이 150km/h이 넘는 강속구를 꽂아 넣으면서 이닝을 마쳤다.

거기서 마쳤으면 좋았겠지만, 한민석은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곤 두 팔을 벌려 소리쳤다.

“와아아!”

웨일스 선수들이 들으라는 듯 큰 포효.

웨일스 선수뿐만 아니라 고트 선수들까지 살얼음판을 걷듯 숨을 죽였다.

한민석이 벤치로 돌아오자 투수코치가 한민석을 따로 불렀다.

“민석아, 쟤들 자극하지 마. 심수경이 다쳤잖아. 쟤들 민감하다.”

“저쪽에서 먼저 방망이를 저한테 던졌어요.”

“손에서 미끄러진 거겠지.”

“미끄러진 게 하필 저한테 온다고요? 제가 사구 하고 바로 그런 일이 있었는데요?”

“민석아, 진정해. 상환이가 그 정도 양아치는 아니잖아.”

“모르죠, 여태 양아치 근성을 숨긴 걸 수도.”

“한민석, 지금 공 좋았잖아. 공에만 집중해,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어? 알았어?”

투수코치가 목소리를 높이자 한민석도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벤치 클리어링 이후 경기는 소강사태로 빠졌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서로 득점도 실점도 없는 싱거운 경기.

경기가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한 건 설진일의 도루 이후였다.

“도루 성공! 설진일 선수, 2루 도루에 성공했습니다.”

“설진일 선수, 정말 발도 빠르네요. 과감했습니다.”

설진일은 5회에 도루에 성공한 후 2루 베이스에서 브이 자를 그리며 웃었다.

“감독님.”

그때 웨일스 벤치에서 매니저가 감독에게 다가왔다.

“수경이…… 시즌 아웃이랍니다.”

“뭐?”

“빨라야 1년 후 복귀라고…… 합니다.”

웨일스 감독이 미간을 좁혔다.

“이런 씨…….”

차마 욕은 내뱉지 못했지만 꽉 쥔 주먹이 부들거렸다.

선수들도 심수경의 부상 소식을 듣고선 장탄식했다.

“하, 시바.”

“걔도 존나 안 풀리네.”

“하, 개짜증이네, 진짜.”

양 팀은 6회부터 점수가 나기 시작하면서 선발이 내려가고 불펜이 올라왔다.

스코어는 3-2.

고트가 뒤지는 가운데 6회 말, 웨일스엔 선두 타자로 이상환이 들어섰다.

“…….”

서일혁은 타석 뒤로 바짝 붙은 이상환의 뒷발을 바라봤다.

이상환이 원래 이렇게 뒤에 바짝 붙던가?

타자가 타석 뒤에 붙는 건 변화구를 끝까지 보고 치기 위한 이유가 크다.

고트의 투수는 김진석.

광주 불스에서 트레이드로 데려온 강속구 불펜으로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단 두 가지 구질만 지닌 전형적인 불펜 투수였다.

김진석의 슬라이더가 좋은 편이긴 하지만 타격 폼의 변화를 주면서까지 노릴 만큼 좋은 슬라이더였나……?

여태 보아 오던 투수가 아닌 다른 팀 투수, 그것도 불펜 투수였던 만큼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서일혁은 바깥쪽 슬라이더 하나를 요구하면서 타자의 반응을 살피기로 했다.

“투수, 와인드업!”

김진석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가 공을 뿌렸다.

바깥쪽으로 잘 빠지는 슬라이더.

타자는 온몸에 힘을 주고 풀스윙했다.

허공을 가르는 배트에 서일혁이 희열을 느낄 찰나-.

팍!

“아!”

서일혁이 미트를 쥐고 앞으로 쓰러졌다.

“아! 서일혁 선수! 무슨 일이죠?”

“지금 타자의 배트가 미트를 친 거 같은데요. 다시 한번 볼까요?”

“……아아, 예. 그렇네요. 헛스윙을 한 배트가 타자 몸 뒤쪽으로 돌아 포수의 미트를 쳤습니다.”

“가끔 있는 일이긴 한데…… 좀 깊게 미트를 친 거 같습니다.”

“서일혁 선수, 고통을 호소합니다. 아무리 미트가 두껍고 단단하다고 한들 야구 배트만큼 단단할 순 없거든요.”

“다른 데도 아니고 손가락이면 더 아플 겁니다. 손가락에 살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어요?”

서일혁은 주먹을 부들거렸다.

뼈가 아린다.

고트의 트레이너가 와서 서일혁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주먹 쥘 수 있어?”

“아, 아…….”

“안 되겠네. 교체로 가자.”

트레이너가 교체 사인을 보내자 고트 벤치가 술렁였다.

타자의 배트가 포수의 미트를 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긴 하지만, 여간해선 이런 일로 포수가 통증을 호소하며 교체되는 일은 없었다.

보통 타자가 미트 끝부분을 살짝 스치거나 설령 맞더라도 이미 스윙에 힘을 다 쓴 배트가 톡 건드리는 수준에 그치기 마련이다.

160km/h 강속구도 받는 게 포수의 미트다.

보통의 충격으론 포수의 손에 통증을 주기 어렵다.

평생 야구만 해 오던 선수들이니만큼 서일혁의 교체가 이례적인 사건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뭐 하자는 거야?”

“너무하잖아.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쟤들 눈깔이 돈 거 아니야?”

평소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서일혁의 부상에 선수들은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년에 FA를 앞둔 존경하는 선배의 부상.

큰 부상이든 작은 부상이든 고트 선수들이 도화선에 불을 붙이긴 충분했다.

“송석현, 교체.”

“네.”

송석현은 서일혁이 통증을 호소하자마자 서둘러 장비를 챙겨 입었다.

그라운드의 분위기는 생전 처음 보는 살얼음판이다.

이런 경기를 뛰어 본 적 있었나……?

송석현은 심호흡을 하며 홈 플레이트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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