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03화 (103/201)

시작부터 장난질이냐?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SP 스포츠의 캐스터 윤중현.”

“해설 김보준입니다.”

“오늘 상승세의 고트와 웨일스가 인천에서 맞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고트는 폭스전 스윕을 하면서 기세가 달아올랐는데요. 웨일스도 만만찮습니다. 최근 10경기 동안 6경기를 승리로 이어 갔습니다.”

“두 팀 모두 4위 경쟁에 치열합니다. 김 위원님께서는 오늘 어느 팀의 우위를 점치시는지요?”

“아무래도 기세를 따지자면 고트가 좀 낫죠. 무엇보다 웨일스에는 없는 특급 거포 둘이 있잖습니까. 김인환, 송석현 말이죠.”

“요새 두 선수가 뜨거워요. 정말 무서운 타자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좌타자 김인환과 우타자 송석현. 정말 최적의 조합이죠. 두 선수의 성향도 다릅니다. 김인환 선수가 존을 좁히고 들어오는 공을 박살 낸다, 이런 느낌으로 스윙한다면 송석현 선수는 사냥꾼 같은 타입이죠. 자기가 노리는 공은 놓치지 않는다? 뭐 이런 느낌입니다. 포수답게 수 싸움을 아주 잘해요. 자기가 원하는 공이 온다? 그럼 헛스윙은 신경 쓰지 않고 풀스윙으로 돌립니다. 이렇다 보니 투수들은 송석현 선수가 적극적으로 배트를 내지 않아도 지레짐작 겁을 먹고 공을 빼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멸하는 거죠.”

“쉽게 말해서 칼집에 칼을 뽑지 않으면서 상대를 숨 막히게 하는, 그런 느낌일까요?”

“예. 그것도 맞겠네요. 송석현 선수가 은근히 삼진이 좀 있는 편이거든요? 그런데도 삼진에 연연하지 않고 타석에서 침착합니다. 이런 선수가 스무 살이라니, 믿기 힘들죠. 허허.”

“예, 그러면 오늘 양 팀의 전력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티비 화면에 선발, 불펜, 타선, 수비, 주루, 작전이 여섯 꼭짓점으로 이뤄진 육각형 그래프가 나왔다.

“선발은 고트가, 불펜은 웨일스가 앞서지만 이번 트레이드로 고트는 불펜을 보강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결국 타선. 타선의 힘에서 승부가 결정 날 겁니다.”

“고트는 KS포가 오늘도 건재하길 바라야겠군요.”

“그렇다고 웨일스의 타선이 약한 건 아닙니다. 국가 대표 1번, 2번 타자가 있지 않습니까. 두 선수가 출루만 한다면 고트도 골치가 아플 겁니다.”

“국가 대표 1, 2번을 보유한 웨일스냐, 아니면 신흥 거포 KS포를 장착한 고트냐. 4위를 앞둔 오늘 경기, 정말 재밌겠네요.”

-플레이볼!

경기가 시작됐다.

1회 초 선발은 웨일스의 로버트 유진.

공은 140km/h 언저리를 오가지만 빼어난 제구력으로 안정감을 과시하는 투수였다.

패스트볼, 슬라이더, 체인지업 세 가지 구질을 섞어 가며 타자의 범타를 유도했는데 투수의 컨디션이 좋을 때는 삼자범퇴가 수시로 나왔다.

-탕!

-아웃!

“설진일 선수, 오늘도 초구를 노려 봤지만 우익수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잡습니다.”

“방금은 스트라이크존에 좀 몰리긴 했어도 1번 타자가 너무 적극적인 거 같습니다. 침착하게 공을 봐야죠. 이러면 다음 타자는 적응할 시간이 없어요. 안타라도 쳤다면 좋았겠지만 1번 타자가 초구 플라이로 아웃. 안 좋죠.”

“고트 입장에서는 참 속이 쓰릴 겁니다. 설진일 선수가 공격적인 선수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현재 3할을 치고 출루율 4할을 기록하는 설진일 선수보다 더 나은 1번 타자는 없거든요.”

“설진일 선수가 1번 타자라는 게 아쉽습니다. 2번이나 3번으로 간다면 더 좋을 선수거든요.”

“이번에 트레이드 된 유선호 선수도 클린업에 설 선수 아닙니까? 그렇다는 건 설진일 선수의 1번 타자를 계속 봐야 할 수도 있겠네요.”

“이번에 함께 트레이드 된 이지성 선수가 예전의 폼을 회복한다면 국가 대표 1번 타자를 볼 수 있을 텐데……. 단순 컨디션 난조가 아니라 쉽지 않겠어요.”

2번 타자로 김인환이 나왔다.

송석현은 배트를 어깨에 메고 투수의 타이밍에 주파수를 맞췄다.

1번 타자 설진일보다 2번 타자 김인환이 공을 보는 숫자가 더 많다.

상대 투수도 김인환 상대론 볼넷을 각오하고 바깥쪽으로 공을 많이 뺀다.

최근 김인환의 타석당 볼 개수는 4개 이상.

송석현이 영점을 조절하기엔 적당한 숫자였다.

“볼. 볼넷을 채웁니다.”

“로버트 유진 선수가 굳이 상대하지 않죠? 방금은 걸려 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의 볼 배합이었습니다.”

“뜨거운 타선을 상대하기보단 돌아가는 전략일까요?”

“고트는 1~3번을 빼면 뒤 타선이 많이 아쉽거든요. 최재완이나 오진영 선수는 시즌 초에 강문규, 이낙균 선수의 백업으로 낙점받은 만큼 큰 기대가 어렵습니다.”

송석현이 타석에 들어서자 로버트 유진이 로진백을 집어 들었다.

타석에 선 송석현은 날씬했다.

키는 180cm을 조금 넘었고 몸무게도 80kg 남짓.

메이저리그가 아니라 한국 리그 기준으로도 큰 덩치는 아니었다.

저런 체형으로 멀리 쳐 봐야 얼마나 치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감독이 피해 가라고 했으니 우선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팡!

투수의 초구는 바깥쪽 패스트볼 하나.

심판은 잠시 머뭇하다 볼을 불렀다.

“볼입니다.”

“방금 코스는 절묘했죠? 잘 들어갔지만 정말 아쉽게 공 반개가 빠진 거 같네요.”

로버트 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좋은 코스인 만큼 타자가 움찔해야 하는데 미동도 없다.

확실히 볼이 될 줄 알았다는 듯 배트를 들고 그대로 있었다.

포수의 제2구도 아웃사이드 패스트볼.

로버트 유진은 조금 더 안쪽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스트라이크!

“좋은 코스에 공을 집어넣는 로버트 유진 선수입니다.”

“저런 공이 들어오면 타자도 어쩔 수 없죠. 역시 제구가 좋은 로버트 유진 선숩니다.”

송석현은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어깨를 풀었다.

투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려 있다.

스트라이크를 노렸다는 얘기다.

“음.”

송석현은 숨을 한번 들이켜곤 타석에 들어섰다.

투수들이 대놓고 자신을 피해 가는 경우가 많아 송석현은 배트를 내는 걸 자제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승부하는 투수라면, 마음가짐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슬라이더, 아웃사이드.’

포수의 사인에 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스트볼을 놓친 타자는 조급할 거다.

조급한 타자에게 비슷한 코스로 가다 바깥쪽으로 휘는 슬라이더는 먹음직스럽다.

제구 하나만큼은 트리플 에이에서도 정평이 난 투수가 로버트 유진이다.

투수의 공은 예측한 대로, 포수가 요구한 코스대로 날아갔다.

탕!

“송석현! 안타! 안타를 칩니다! 우중간을 빠져나가는 안타!”

“깔끔하게 받아쳤죠?”

“배트 끝에 걸렸다고 봤는데 상당히 멀리 날아갑니다.”

“송석현 선수의 배트가 남들보다 길다는 게 그리 체감이 가지 않는데, 이럴 땐 눈에 확 들어오네요. 다른 선수였다면 잘 쳐 봐야 파울일 텐데 지금은 스윗 스팟의 살짝 윗부분을 맞았습니다.”

“로버트 유진 선수. 여기서 1사 1, 3루를 내줍니다.”

로버트 유진은 포수에게 공을 받으며 미간을 좁혔다.

잘 빠진 슬라이더였다.

너무 바깥쪽으로 빠지지 않았다.

스트라이크존으로 날아가다 존 밖으로 나가는 유인구.

이 정도의 공이라면 메이저리그의 타자들이라도 속을 수밖에 없었을 터다.

“후, 어메이징한 리그야.”

싱글 A에서나 볼 법한 타자가 있지 않나, 메이저리그에서도 보기 드문 타자가 있질 않나.

KPBL 리그는 당최 예상하기 어려운 혼돈 그 자체였다.

-아웃!

-아웃!

“로버트 유진 선수, 두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면서 1회의 위기를 잘 넘깁니다.”

“최재완, 오진영 선수가 너무 힘없이 물러납니다. 공을 오래 보는 건 좋았지만 안타로 연결시키진 못했네요.”

“그럼 1회 말로 넘어가겠습니다.”

1회 말.

포수 마스크는 서일혁의 차지였다.

송석현은 경기 후반을 기약하며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마운드에는 한민석 선수가 올라옵니다.”

“폭스의 에이스였죠? 고트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지만 폭스에서만큼은 아닌 거 같습니다.”

“공이 빠르고 볼넷도 많고 성격에 따라 업 앤드 다운이 심한 투숩니다.”

“네, 그렇습니다. 잘할 때는 한없이 잘하고, 안될 때는 참 잘 안 풀리는 선수예요. 좋은 실력을 갖췄지만 아쉬운 점도 뚜렷한 선숩니다.”

“소위 긁힌다고 하죠? 긁히는 날에는 정말 좋은 선순데 말이죠.”

팡!

팡!

팡!

-볼넷. 타자 주자 1루.

한민석은 마운드에 올라오자마자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줬다.

모두 공 한두 개 차이로 벗어나는 공이었다.

한민석은 로진백을 툭툭 털면서 숨을 골랐다.

“웨일스의 2번 타자 김재홍 선수가 들어옵니다. 2번 타자지만 강한 2번입니다. 20홈런은 거뜬하게 쳐 주는 2번이죠?”

“그렇습니다. 40도루가 가능한 1번 타자 이재훈 선수와 20홈런이 가능한 2번 타자 김재홍 선수. 웨일스의 가장 예리한 칼날입니다. 웨일스의 주 득점 루트기도 하구요.”

“1루에는 이재훈 선수가 호시탐탐 2루를 노리고 있습니다.”

“투수 입장에선 괴롭죠. 이재훈 선수를 신경 쓰자니 김재홍 선수의 한 방이 신경 쓰이고, 김재홍 선수에게 집중하자니 이재훈 선수의 발이 신경 쓰이고. 어쨌든 하나는 확실하게 하고 가야 합니다. 국가 대표 1, 2번 타자 상대로 욕심을 부려선 안 돼요.”

투수가 1루에 견제했다.

주자는 여유 있게 세이프.

좌투수 한민석 상대로도 주자는 긴장된 표정 하나 없었다.

한민석은 다리를 살짝 들더니 다시 한번 견제했다.

“공이 빠졌어요! 빠졌습니다!”

“주자는 2루로! 2루 밟고 3루……는 안 가네요. 욕심을 버리고 2루에서 멈춥니다.”

“한민석 선수, 아쉽습니다. 견제에 너무 신경을 썼나요?”

“이런 실책, 안타 하나 맞은 거랑 같습니다. 주자를 한 베이스 진루시키기 위해서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낭비하면서까지 번트를 대고 작전을 짜는 건데 이건 아웃 카운트 하나 얻지도 못하고 상대 팀 좋은 일만 시켜 줬습니다.”

송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투수가 조급했다.

주자는 발이 빠르고 포수 서일혁은 발 빠른 주자를 잡을 만큼 어깨가 좋은 게 아니다.

투수 본인도 슬라이드 스텝에 자신 없으니 주자를 1루 베이스에라도 잡아 두고자 공을 던진 건데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

투수는 본인을 믿지 못했고, 포수는 투수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송석현이 주먹을 쥐었다.

아쉽다.

경험이 부족하다고 벤치에 앉아 있는 지금 상황이 답답하다.

탕!

“안타! 김재홍 선수의 안타가 나옵니다! 2루 주자는 그대로 홈으로! 세이프입니다! 김재홍 선수의 적시 2루타!”

“한민석 선수, 저런 공은 아니죠. 체인지업을 던지려면 확실하게 속도를 늦추든지 아니면 떨어뜨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지금 체인지업은 패스트볼보다 겨우 8km/h 느렸습니다. 낙차도 작았고요.”

“웨일스는 쉽게, 쉽게 득점합니다.”

“고트는 5번 타자까지 나가도 1득점도 못 했는데 웨일스는 2번 타자가 1타점. 이러면 시작부터 분위기가 기울죠?”

한민석이 한숨을 쉬었다.

실책 이후 실투.

숨 한 번 더 고르고 던졌어도 충분했다.

꼭 실투를 던지고 나서야 조급함을 깨닫기 마련이다.

“3번 타자 양선우우 선수가 들어옵니다.”

“일발 장타가 있는 타잡니다. 조심해야 돼요. 서둘러서 승부하면 안 됩니다.”

배터리는 초구를 어떻게 던질지 사인을 주고받았다.

투수는 패스트볼을 생각했으나 포수는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투수의 마음이 급해졌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상대 팀 타자들이다.

좌완 파이어볼러.

한민석은 자신의 패스트볼이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타자들이 못 칠 거라고 생각했다.

몰리는 상황일수록 더 자신의 패스트볼에 집착했다.

투수는 자신이 잘 던지는 공을 던져야 한다는 게 한민석의 믿음이었다.

상대 타자들도 이를 알고 있기에 한민석과 상대할 땐 패스트볼에 초점을 맞춰 휘둘렀다.

한민석이 위기에 처할 땐 더더욱.

‘오케이.’

한민석은 포수의 사인이 미덥잖았지만, 슬라이더 판단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격적으로 달려들 타자에게 헛스윙이나 범타를 유도할 수 있는 공.

한민석은 손가락으로 공을 꾹 눌러 쥐곤 슬라이더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생각보다 더 많이 떨어진 공은 바닥에 바운드가 됐다.

서일혁은 공을 막아 냈지만 그사이 김재홍이 3루를 훔쳤다.

“3루 도루! 3루 도루에 성공하는 김재홍 선수!”

“이야, 여기서 3루를 훔치나요?”

“방금은 투수가 다리를 들기도 전에 뛰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아무래도 사인이 들통났을 수도 있겠네요. 2루에선 포수의 사인이 보이거든요. 투수가 변화구를 던질 걸 알고 뛰었던 거 같습니다.”

“무사 3루 상황. 타자는 플라이 하나만 쳐도 타점을 올리게 됩니다.”

한민석이 허리에 두 손을 올렸다.

실책, 실투, 3루 도루 허용까지.

폭스의 에이스로 군림하던 한민석의 자존심에 굵고 짙은 금이 갔다.

숨을 씩씩대는 한민석을 본 송석현이 고개를 저었다.

“한번 올라가야 하는데…….”

송석현의 마음과 달리 서일혁은 미동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1회다.

1회 1실점.

한 경기에 단 두 번 올라갈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르다고 판단이었다.

원래 한민석은 기복이 심한 투수이니만큼 서일혁은 이 정도의 실점, 실투 정도는 개의치 않았다.

얼굴이 붉어진 한민석은 주자를 신경 쓰지 않고 타자만 바라봤다.

타자는 배트를 짧게 잡고 몸을 웅크린 채 타석에 붙어 섰다.

공을 치기만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한민석은 슬라이드 스텝을 크게 하며 공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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