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건 명분
“유선호?”
고트의 단장 김명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유선호를 데려오겠다고?”
운영팀장 김학인이 답했다.
“네.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숩니다.”
“유선호를 데려올 수 있어?”
“그래서 최대한 조건을 맞춰 줄 생각입니다. 이낙균, 최대규, 강문규 셋도 쓸 생각입니다.”
“……회장님 지신가?”
김학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최강 셋을 다 팔아서라도 필요한 건 다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끙…… 그렇다면야. 그런데 자신 있어? 유선호는 스콜피언 사나이 그 자체잖아.”
“해 봐야죠. 이최강 셋을 내주고 얻을 수 있는 카드 중에 유선호보다 좋은 카드는 없습니다.”
“유선호라…….”
“단장님이 지금 전화만 걸어 주십쇼. 운만 띄워 주신다면 제가 직접 대구로 내려가서 협상해 보겠습니다.”
“알았어.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된 거 꼭 데려와 봐.”
“네. 알겠습니다.”
* * *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
김학인은 운영팀 서승조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될까요, 이게?”
서승조의 질문에 김학인은 한숨을 쉬었다.
“되게 해야지, 일이 이렇게 커졌는데.”
“스콜피언의 심장이라고 떠들고 다니던 유선호 아닙니까? 구단에서 오케이해도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어쩌죠?”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네?”
서승조가 황당하다는 듯 김학인을 바라봤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는 거야. 유선호가 아니면 판 접으면 돼.”
“네…….”
“하지만 스콜피언에서 일단 내려오라고 했잖아. 그렇다는 건 스콜피언에서도 카드는 맞춰 볼 용의가 있다는 거야. 구단에서 오케이하면 70%는 성공인 거지. 나머지는 우리가 선수를 설득 하냐, 마냐에 달려 있고.”
“보통 선수들은 은퇴보단 어떻게든 현역 연장을 원하긴 하는데 유선호는 모르겠습니다. 워낙 강골 아닙니까? 선수협 회장 출신에 해마다 연봉 협상을 가장 늦게 하는 선수고 자기 프라이드도 세고…….”
“흠결 없는 사람이 어딨어? 유선호는 강문규, 이낙균처럼 사고는 안 쳤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유선호가 고집이 세긴 해도 지금 상황은 우리한테도 나쁘지 않아. 일단 이건후 감독이랑 유선호 사이는 절대 개선될 수 없어. 둘 다 강골 중에 강골이야.”
“하기야. 선수협 파동 때도 유선호가 이건후한테 이기적이라고 비난해서 난리 났었죠.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가 꼬인 거죠?”
“유선호 입장에서야 열받지. 선배 대접받던 사람들이 선수협 파동 때는 죄다 발 뺐으니까.”
“근데 왜 하필 유선호가 이건후를 비난한 거죠? 다른 선수들도 입 다물고 있었잖아요.”
“정확한 이유는 몰라. 하지만 이건후는 그때 개망신을 당했다는 건 팩트야. 뉴스에도 나오고 난리 났었지. 구단의 개다, 뭐다 욕도 엄청 먹었었고. 애초에 이건후가 스콜피언에 들어왔을 때부터 파국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어. 이건후도 스타플레이어 출신에 야구 유학파에다 코치, 감독으로도 성공했었어. 구단에서 이건후를 뽑을 때부터 유선호는 버릴 생각이었던 거지. 부상으로 수비도 안 되는 노장 지명타자의 입지라는 게 그렇잖아. 정대한도 성장하고 있고, 조양철도 있으니 장기적으로 정대한이 1루수를 보고 조양철이 지타로 가는 게 맞고.”
“상황만 보면 유선호는 고립무원이네요. 구단이랑도 사이가 안 좋고, 감독이랑도 사이가 안 좋고……. 팬들한테야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지만 지금 상황에선 의미가 없구요.”
“팬들한테 인기가 많다는 게 더 골치지. 처치곤란이잖아. 스콜피언에서도 속앓이 좀 해 왔을 거야. 감독이랑 선수랑 기 싸움하는 거 모든 팀이 알고, 야구팬이 아는데 아닌 척 포장해야 하잖아. 그러니 바로 우리를 불렀겠다만.”
“그럼 이번 트레이드는 유선호의 결정에 달렸겠네요? 구단에서도 빨리 팔고 싶은 마음일 테니까.”
“하나하나 해 보자고. 우선 구단이랑 합을 맞춘 다음에 유선호를 설득해야 할 거 아냐? 스콜피언에서 거절하면 우리가 유선호를 설득한들 무슨 소용이야? 일단 도장을 찍은 다음에 설득해야지. 트레이드라는 건 발표 나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거야. 스콜피언에서도 의외로 뻗대고 나올 수도 있고. 난 이번에 유선호에다 덤까지 요구할 거거든.”
서승조가 한숨을 쉬었다.
“유선호도 어려운데 덤까지요?”
“우리가 쫄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 당당하게 요구해야지. 그래야 유선호 하나만이라도 데려올 수 있는 거야.”
* * *
“유선호, 이지성. 음…….”
스콜피언의 운영팀장 김형석은 김학인의 요구 조건을 듣자 턱을 매만졌다.
김학인은 당당한 표정과 달리 탁자 밑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유선호가 3할 30홈런 100타점을 때려 낸 타자라면 이지성은 국대까지 뽑혔던 중견수다.
공, 수, 주가 완벽했던 톱 타자.
손목 부상 이후엔 황기덕이라는 리그 최고 수준의 중견수가 나타나 백업에 머물러 있다.
지금도 수비와 주루는 리그 A급 타자지만 타율과 장타율이 좀체 회복되지 않고 있다.
“유선호는 뭐, 이미 통화가 됐으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지성까지는 욕심이 과하신 거 아닙니까?”
김학인은 숨을 더 천천히 몰아쉬었다.
이번 트레이드의 핵심인 유선호에 대해 스콜피언은 형식상의 거절도 없이 승낙했다.
이미 99%는 성공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남은 건 덤이다.
덤까지 가져갈 수 있느냐, 없느냐.
“낙균이가 늦어도 시즌 말미, 빠르면 올스타 이후에도 출전할 수 있습니다. 좌익수에 낙균이가 들어가면 고원성이랑 조철웅이 우익수랑 중견수 백업으로 들어가잖습니까. 여기에 장기성도 있구요. 이지성은 부상 이후 하락세가 완연합니다. 이지성은 지금 외야 백업 말곤 자리가 없는데 낙균이까지 들어오면 더 애매해집니다. 낙균이랑 유선호, 이지성 트레이드면 아무리 진성 스콜피언 팬이라고 해도 백이면 백 스콜피언의 이득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낙균이가 사고를 쳐서 팬들 인식이 안 좋다는 건 아시죠?”
“다른 곳이면 몰라도 여긴 대구 아닙니까? 그리고 낙균이는 최대규처럼 사고를 친 게 아니라 그냥 구설숩니다, 구설수. 피해자랑 원만한 협의 중에 있고, 무엇보다 낙균이는 여기 스콜피언이 키워 낸 홈런왕 아닙니까? 돌아온 탕아. 타이틀 좋잖습니까? 감독과 마찰 때문에 사실상 나오지 못하는 유선호 대신 홈런왕 이낙균이 들어온다면 팬들이 환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음…….”
스콜피언 운영팀장 김형석은 직원들과 귓속말을 하면서 의견을 조율했다.
김학인은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낙균이가 돌아오는 건 환영하지만 이지성까지는 줄 필요가 있나 싶은데요. 어디까지나 이건 고트가 먼저 트레이드 제안을 해서 시작된 일입니다. 저희가 굳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박신언까지 팔면서 사정 급한 건 고트잖습니까?”
“맞습니다. 저희가 먼저 트레이드를 요청했죠. 하지만 이번 트레이드는 그저 필요에 의해서만 하는 건 또 아니죠.”
“……무슨 말씀이시죠?”
“팀 내에서 상황이 여의치 않은 이낙균과 유선호, 대승적으로 두 선수의 앞길을 열어 주는 트레이드입니다. 여기에 이지성이 포함되는 것뿐이고요.”
“글쎄요, 허허. 그래도 굳이 우리가…….”
김형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학인은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씨익 웃었다.
“김 팀장님, 제 체면도 좀 생각해 주세요. 낙균이로 유선호만 데려오면 저 돌 맞아 죽습니다. 이지성은 스콜피언에서 현재도 자리가 없고, 앞으로도 딱히 쓸 수 없는 퍼즐 아닙니까? 이지성을 풀어 준다고 해서 반대할 사람도 없을 거 같은데 이번에 인심 좀 써 주시죠. 제가 무리한 요구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트레이드, 이번 한 번만 하실 거예요? 한쪽으로 너무 기우는 트레이드하면 구단에서도 그렇고 팬들도 그렇고 다시는 트레이드 못 합니다. 5 : 5는 아니더라도 6 : 4, 7 : 3 정도는 돼야 다음에도 거래를 하지 않겠어요?”
김학인의 부탁에 김형석은 침음을 흘렸다.
사실상 동정표를 요구하는 저 얼굴.
김형석이 정중하게 말했다.
“잠깐만 저희끼리 회의 좀 해도 될까요?”
김학인과 서승조가 자리를 비켰다.
김형석이 직원들을 쳐다보자 직원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이 정도 딜만 해도 저희가 7 : 3 이상이 이득입니다. 유선호로 이낙균을 받아 오는 건 솔직히 말도 안 되죠.”
“지금 상황이 급해서 고트도 이낙균으로 유선호를 받아 가는 거지 평소라면 절대 언급도 안 될 트레이듭니다. 고트가 그만큼 급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는 건 다른 팀한테도 트레이드를 요청했을 가능성도 크구요. 여기서 밀당하다 파투나서 다른 팀이랑 연결되면 다시는 이런 기회 안 올 겁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유선호를 데려가는데 이지성 하나 원하는 거라면 저희가 무조건 크게 남기는 트레이듭니다. 괜히 실랑이하지 말고 여기서 도장 찍게 하는 게 좋습니다.”
김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성 정도면 우리한테 부메랑으로 돌아올 일도 없고 말이야. 아마 외야 백업 정도로 쓰겠지. 안 그래?”
“예.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진행하시죠.”
김형석은 김학인을 다시 불러들였다.
“좋습니다. 단장님께 지금 보고드리고 오겠습니다.”
“결정하신 겁니까?”
“네. 이낙균과 유선호, 이지성 트레이드. 진행하겠습니다.”
* * *
대구구장에서 멀지 않은 식당.
김학인과 서승조가 숟가락을 들려던 찰나, 단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김학인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고했어, 유선호를 받아 올 줄은 몰랐는데.
“스콜피언도 급했나 봅니다. 유선호를 이렇게 바로 넘겨줄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웨일스에서도 방금 전화가 왔어. 당장 잠실로 오겠다는데?
“……웨일스가요?”
-걔네들도 급한 거지. 힘들겠지만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웨일스랑도 일을 진행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우선 돌아가서 뵙겠습니다.”
김학인이 전화를 끊었다.
서승조가 참았던 궁금증을 못 이기고 물었다.
“웨일스에서 오케이 한 겁니까?”
“그렇지. 웨일스는 무조건 오케이지. 최대규, 강문규를 주는 건데.”
“그래도 투수를 넷이나 받아 오는 딜인데 생각보단 쉽게 트레이드가 됐네요.”
“우리가 많이 손해 보는 딜이잖아. 사실상 핵심 불펜 하나랑 주전 야수 둘이랑 트레이드야. 나머지 셋은 1군 붙박이도 아닌 1.5군 투수고.”
“그래도 투수잖습니까? 게다가 좌 투수 셋에다 우 투수 하나, 정홍민만 빼면 나이도 죄다 20대 초반이구요.”
“웨일스에서도 결단을 내린 거지. 최대규야 내년에 뛴다지만 강문규는 피해자와 합의만 잘되면 한 달 안에 복귀 가능해. 웨일스 같은 구단에서 최대규, 강문규 같은 A급 타자 FA를 언제 품어 보겠어? 걔들도 목이 말랐던 거지. 유망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복권이고 최대규, 강문규는 이미 터진 거액의 복권이잖아. 웨일스의 강점이자 약점이 뎁스가 좋다는 거 아냐? 문제는 그 뎁스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거고.”
“울브스의 마이너 버전 같은 팀 느낌이 있죠.”
“이재홍 같은 국대 테이블 세터가 있어도 중심 타자가 없어서 점수를 못 뽑잖아. 그래서 나도 최대규, 강문규로 투수들을 싹 걷어 올 수 있었던 거고. 우리가 쟤들 가려운 곳을 긁어 줘야 우리 가려운 곳도 긁을 수 있는 법이니까.”
“이러면 구상한 대로 트레이드는 다 진행된 거 아닙니까?”
김학인이 수저를 들었다.
“애초에 눈높이를 낮췄으니 이렇게 일사천리지. A급 매물 셋을 내주는 호구 딜인데 안되는 게 이상하지.”
“그래도 걱정 많이 하셨잖아요.”
“불스, 폭스에 덴 게 많아서 꼬장 피우면 어쩌나 싶었는데 확실히 상위 팀들은 여유가 있어. 악착같이 뭐 하나 뜯어 가려고 궁리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딜이면 과감하게 지르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만회할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덕분에 더 쉬웠고.”
“이제 곧 기사 뜰 건데 난리 나겠네요. 오늘 또 구장 앞에서 시위하는 거 아니겠죠?”
“어차피 욕먹은 건데 조금 더 욕먹는 게 어때서? 누가 봐도 호구 딜이지만 트레이드라는 게 우리가 필요한 거 채우는 거 아냐?”
“그렇긴…… 하죠. 그래도 기사도 그렇고 팬들도 그렇고 반응이 살벌하겠네요, 후. 유선호나 정홍민 둘 다 서른셋 노장이라…….”
“주판알을 튕기면 어떻게 트레이드를 해? 정홍민은 서른셋이지만 실제로 제대로 1군에서 뛴 지 1년밖에 안 됐어. 아직 팔 싱싱해. 유선호는 통산 OPS가 0.9가 넘는 타자고.”
“……유선호, 올해 OPS가 0.7 겨우 넘지 않습니까?”
“그거야 컨디션 난조인 거고. 아무리 나이가 있어도 클래스는 어디 안 가.”
서증조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성사된 트레이드에 왈가왈부해서 무엇을 하랴.
“아, 그런데 웨일스랑 트레이드한다면 팀장님은 잠실로 바로 올라가시나요?”
“그렇지. 내가 올라가 봐야지.”
“그럼 유선호 설득은…….”
김학인이 밥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면서 말 대신 눈짓으로 서승조를 가리켰다.
“제가요……?”
김학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승조는 금세 울상이 됐다.
밥을 목구멍에 넘긴 김학인이 말했다.
“왜 쫄았어?”
“아닙니다. 제가 잘해 보겠습니다.”
“성질 건드리지 말고 살살 잘 달래. 걔가 욱해서 그렇지 사람은 좋잖아. 살살, 살살 잘 달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