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99화 (99/201)

우울할 땐 홈런이 최고

“그러니까 스플리터가 아니라 직구에 쿠세가 있다고?”

“네, 웃기죠?”

경기 시작 전, 송석현은 김인환과 최영경에 대해 얘기했다.

“보통 투수들은 직구를 가장 편하게 던지니까 직구에는 쿠세가 없다고 생각해요. 변화구를 던질 때 쿠세가 생긴다고 생각하거든요. 야구를 시작하는 처음에야 당연한 건데, 프로 수준이 되면 반대가 돼요. 쿠세를 없애려고 변화구 폼을 최대한 이쁘게 다듬으려고 하거든요. 인공적으로 직구처럼 폼을 다듬는 건데, 그래서 반대로 직구가 눈에 튀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직구를 던질 땐 동작이 커진다거나 손이 머리 뒤로 더 간다거나 그런 거죠. 그게 편하니까.”

“그럼 최영경도 그런 타입이야?”

“좀 미세하긴 한데…… 박신언 선배님도 귀띔한 적 있거든요. 직구랑 변화구랑 미묘하게 폼이 다르다고. 그래서 제가 돌려보다 직구 폼이 조금 다른 거 같다고 생각해서 좀 봤어요. 확실하진 않은데 직구를 던질 때 살짝 몸이 뒤로 기우는 거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공에 힘을 실으려고 자연스럽게 하는 동작 같은데, 스플리터를 던질 땐 딱히 그런 거 같지는 않고……. 뭐 백 프로는 아닌데 제 느낌?”

“직구에서 쿠세가 있다는 거지?”

“한번 지켜봐요. 정말 다른지 아닌지, 보다 보면 알겠죠.”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려 줘야겠네, 쿠세가 있을 수 있다고.”

“정확한 것도 아닌데 기다려 봐요. 괜히 저만 뻘쭘해질 수 있잖아요. 한번 검증하고, 그때 얘기해도 안 늦어요.”

김인환은 설진일의 첫 타석부터 최영경의 폼을 유심히 봤다.

대기 타석에서 볼 땐 최영경의 직구와 스플리터의 폼이 구분이 가지 않았다.

타석에 들어서 초구를 지켜보자 패스트볼이 들어왔다.

김인환은 패스트볼의 투구 폼을 머리에 넣은 후 다음 공을 기다렸다.

움찔.

최영경이 공을 던지기 전 몸이 툭 멈춘 느낌을 받았다.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분명했다.

허리를 일부러 더 세워서 던지는 느낌.

김인환은 공을 지켜보기로 했다.

최영경의 공이 스트라이크존 근처로 오자 김인환은 공을 보면서 스윙했다.

탕!

“됐다.”

김인환은 우측 담장으로 넘어가는 공을 보곤 주먹을 쥐었다.

공을 보고 공을 치기만 했지, 노림수를 가지고 쳐서 성공한 적은 드물었다.

이게 되는구나.

베이스를 밟고 홈으로 돌아올 때 송석현이 보였다.

김인환은 손을 내밀어 송석현과 하이 파이브 했다.

“이래서 네가 잘 치는구나?”

“네?”

“네 말이 맞다고.”

송석현은 김인환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쿠세가 확실히 있다.

송석현도 눈으로 어림짐작했지만 역시나였다.

박신언이 노트에 최영경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다.

박신언이 남긴 노트가 자신에겐 얼마나 귀한 자산인지 새삼스러웠다.

“후아.”

송석현은 최영경을 똑바로 보고 섰다.

느낌을 잡아야 한다.

직구와 변화구의 차이.

이질감이 드느냐, 안 드느냐의 차이.

송석현은 최영경의 초구를 보자마자 확신했다.

허리가 유난히 고정된 느낌.

공은 스트라이크존 아래로 향했으나 송석현은 배트를 돌렸다.

쾅!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좌측 담장! 넘어갑니다! 백 투 백 홈런! 송석현의 솔로 홈런이 터집니다!”

“방금은 완전히 떨어진 공이었는데 그걸 퍼 올려서 쳤습니다! 완전히 볼이었거든요?”

“골프를 치듯 공을 퍼 올려서 홈런을 때리는 송석현 선숩니다!”

“최영경 선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담장을 쳐다봅니다. 잠실에서 백 투 백은 투수에게 참 믿기 힘든 일이죠. 그것도 1회 초에 말입니다.”

“떠난 박신언 선수가 아쉽지만 고트에는 송석현 선수가 있습니다. 고트 팬들의 석현 앓이가 더 깊어지겠어요.”

송석현이 들어오자 다음 타자 최재완이 기다렸다.

최재완은 송석현에게 물었다.

“인환이 말대로야?”

그새 김인환이 쿠세에 대해 말한 게 분명했다.

송석현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최재완은 송석현과 하이 파이브 했다.

“오우!”

“예아!”

“잘했어!”

“몬스터!”

송석현이 돌아오자 선수들이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재우는 데 홈런만한 것이 있던가.

백 투 백 홈런, KS포의 가동에 팬들도 한목소리로 응원가를 불렀다.

“고트, 고트 무적 고트, 우리가 가지 못할 곳은 없지. 모두가 어렵다고 해도 우린 밟고 또 밟고 올라가지. 너희는 그저 우리를 우러러볼 뿐. 정상에 서는 건 결국 우리라네!”

“달려라! 고트! 달려라! 고트! 워워워워워!”

“잠실의 분위가 뜨거워집니다! 한 5분 전만 하더라도 양 팀 모두 우울했던 분위기였는데 고트 팬들이 돌아섰네요. 뜨겁습니다. 아주 뜨겁습니다. 손이 데일 정도로 뜨거워요.”

“하하하, 역시 우울할 땐 홈런이 최고죠!”

백 투 백 홈런에 최영경은 자기 손을 쳐다봤다.

분명 공이 나쁘진 않았다.

스플리터가 잘 떨어졌다.

두 타자가 연속해서 스플리터를 쳤다는 건…… 쿠세가 있다는 얘기다.

폭스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다.

이번 이닝을 마칠 때까진 패스트볼 위주로 볼 배합하라는 사인이었다.

포수는 초구로 바깥쪽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최영경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와인드업했다.

최재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최영경의 몸이 뒤로 기우는 게 커졌다.

눈에 확실히 보일 정도다.

최재완이 숨을 깊게 들이켰다.

“초구 던집니다!”

최영경이 던진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향해 날아갔다.

보더 라인을 타는 공은 아니지만 바깥쪽으로 잘 빠진 패스트볼이었다.

최재완은 겨드랑이를 붙인 채 몸을 뒤로 눕혔다.

배트를 몸 쪽으로 당기면서 좌측 담장을 바라봤다.

최재완의 배트가 하늘을 날아 3루 폭스 쪽으로 빙빙 돌면서 떨어졌다.

“좌측 담장! 또 갑니까? 또 가나요? 좌측 담장! 넘어! 갑니다! 백 투 백 투 백! 세 타자 연속으로 홈런! 오늘 고트 무슨 일이죠? 고트 타선이 불타오릅니다! 아주 뜨겁게 불타오릅니다! 잠실에서 백 투 백 투 백 홈런은 제가 중계하면서 처음 봅니다. 잠실 3연타석 홈런이 기록에 있나요? 없을 거 같은데요?”

“KS포에 이어 최재완 선수까지 홈런을 칩니다. 최재완 선수가 한 방이 있는 타자긴 했는데 타율이 낮았거든요. 오늘은 다릅니다. 달라요.”

“최재완 선수까지 홈런을 치면서 고트는 4연타석 안타, 3연타석 홈런이 나옵니다. 시작부터 4점을 벌어 놓는 고트! 오늘 선발 이창훈 선수가 든든하겠네요. 안 그래도 오늘 공이 좋은 이창훈 선수 아닙니까?”

“하하, 이창훈 선수. 어깨가 식을 걸 걱정해야겠네요. 오늘 고트 타선에 불이 붙었습니다. 무서워요. 정말 무섭습니다!”

잠실 3연타석 홈런.

최영경의 머릿속에 ‘잠실에서 3연타석 홈런이 맞은 투수가 있던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투수 친화 구장이라는 잠실에서 홈런 하나 맞기도 쉽지 않은데 백 투 백 투 백 홈런은 볼을 꼬집고 싶을 만큼 믿기 어려웠다.

폭스 벤치에서도 감독이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1회부터 투수를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포수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영경아. 심호흡 해, 심호흡.”

“…….”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저 스플리터 던질 때 쿠세 있어요?”

“……하,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전혀 없는 거 같은데. 깔끔해.”

“아무리 봐도 저 쿠세 읽힌 거 같아요.”

“일단 직구 위주로 가 보자. 스플리터를 하나둘 섞으면서 애들 반응을 보면 알겠지. 집중하자. 응? 아직 경기 많이 남았어.”

최영경은 자기 손가락을 쳐다봤다.

혹시 손가락을 미리 벌려 놓아서 아는 걸까?

손가락을 미리 벌려서 깊게 잡으면 글러브가 조금 벌어진다.

눈치 빠른 타자들은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에 글러브를 보고 직구인지 스플리터인지 알 수 있다지만 최영경은 진즉에 이를 신경 써서 던져 왔다.

혹시 자기도 모르게 다시 습관이 생겼나?

아니면 공을 던질 때 릴리스 포인트가 다른가?

아니면 대체 뭐지?

최영경의 머릿속엔 스플리터를 던질 때 생길 수 있는 쿠세에 대한 상상이 커져 갔다.

자신의 스플리터가 문제가 있으니 타자들이 스플리터와 패스트볼을 구분하는 거다.

뭘까? 뭐지? 찾아내야 한다.

이제 1회다.

아직 끌어갈 이닝이 많다.

“안타! 또 안타를 허용하는 최영경 선수!”

“최영경 선수 집중을 못 합니다. 저런 애매한 패스트볼은 안 돼요. 지금은 오히려 장타가 안 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보통 이렇게 홈런이 나오기 시작하면 타자들의 스윙이 저절로 커지기 마련인데 오진영 선수는 가볍게 받아 칩니다.”

“저게 오진영 선수의 장점입니다. 침착해요. 여기서 스윙을 크게 해서 아웃 카운트를 하나 늘리는 것보다 어떻게든 타순을 이어 가는 게 더 중요합니다. 빅이닝의 기본 조건은 홈런을 많이 내는 게 아니라 아웃 카운트를 늘리지 않고 타순을 이어 가는 겁니다.”

고트의 타선은 전통적으로 강한 편은 아니었다.

잠실을 쓰는 팀이니만큼 홈런보단 단타, 작전, 2루타에 특화돼 있었다.

고트에 입단해서 성장해 온 타자들은 레벨 스윙, 밀어 치기가 몸에 배었다는 얘기다.

고트는 1회에만 타자 일순을 하며 7-0으로 점수를 벌렸다.

폭스는 아예 다른 투수를 내는 걸 포기했다.

1회에만 7-0.

점수 차이가 너무 까마득하다.

최영경이 최대한 이닝을 많이 소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자기 확신이 무너진 투수, 멘탈이 무너져 패스트볼을 던질 때 쿠세가 더 명확해진 투수, 유일한 변화구 스플리터가 봉인된 투수를 어려워하는 프로팀은 없다.

고트는 오랜만에 전 타자 안타를 기록했다.

KS포는 3홈런 4볼넷을 합작했다.

고트 팬들은 경기 중에선 박신언에 대한 생각을 버렸다.

구단을 비난하고 감독을 비난하는 행위를 멈췄다.

홈런, 홈런, 홈런.

상처받은 야구팬의 마음을 치료하는 특효약은 홈런이었다.

“고트 고트 무적 고트, 우리가 가지 못할 곳은 없지. 모두가 어렵다고 해도 우린 밟고 또 밟고 올라가지. 너희는 그저 우리를 우러러볼 뿐. 정상에 서는 건 결국 우리라네!”

* * *

“12-0. 무섭습니다. 고트 무서워요. 폭스가 오늘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스윕을 당한 것 이상의 충격일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심지어 1득점도 하지 못했습니다. 마운드가 무너지자 타선도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폭스는 피닉스와도 2경기 차까지 쫓기게 됩니다. 피닉스가 요새 성적이 좋아지고 있죠? 이렇게 되면 피닉스는 8위 탈출도 가능할 수 있어요.”

“폭스의 암흑기가 길어지네요.”

“이런 경기는 팬들에게도 큰 상첩니다. 질 수는 있어요. 하지만 무기력하게 지면 안 됩니다. 끝까지 싸우고 또 싸우다 져야죠. 오늘 투타 모두 낙제점입니다.”

“고트는 지난 9경기 중에 무려 7경기를 이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윕이 두 번이었어요. 울브스전에서 루징시리즈 한 번 한 거 말고는 두 팀에게 스윕을 따냈어요.”

“확실히 딸 점수는 따고 간다. 이거 중요합니다. 지금 고트가 여러모로 외풍도 많고 내환도 많잖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어쨌든 어떤 팀이랑 하든 승리의 무게는 똑같거든요. 9경기 7승. 대단한 기록입니다.”

“오늘 웨일스가 페가수스에 지게 되면서 고트는 웨일스와 다시 공동 4위에 오릅니다. 다음 경기는 웨일스전이란 말이죠. 웨일스전에서 이기게 되면 단독 4위로 치고 올라갑니다.”

“고트가 달라졌습니다. 팀이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중심을 잡아 주는 선발이 있고 타선이 있습니다. 그동안 타선의 무게감이 아쉬웠는데 이최강 클린업 대신 들어선 KS포가 고트 팬들의 아쉬움을 싹 씻어 버렸습니다.”

“역대 최고의 강타자라는 좌타자 김인환과 잠실 장외 홈런의 우타자 송석현. 어쩌면 말이죠, 우리는 역대는 고트 역사상 최고의 홈런 타자를 동시대에 보는 행운을 누리는 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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