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임팩트
“자넨가? 트레이드를 주도한 사람?”
운영팀장 김학인은 머리가 어질했다.
야구팀 운영팀장이 그룹의 회장을 만날 일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야구단은 그룹 계열사 내에서도 저 하단 끝 어딘가에 있는 작디작은 회사다.
회장의 야구 사랑이 특별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운영팀장을 따로 부른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네, 네. 하지만 제가 트레이드를 한 게 아니라…….”
“알아. 단장이 시켰다지?”
“……네.”
“명령은 엉망이었는데 그래도 쓸 만한 애들을 데려왔던데.”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합니다.”
“솜씨가 제법 같아서 말이지.”
김학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말인데, 뭐 하나만 물어보지.”
“네, 회장님.”
“우리 팀, 올해는 우승하겠나?”
김학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하게 말해 봐.”
“그, 그게……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어떤 결과?”
“그, 그…….”
“솔직하게 말해 봐. 뭐가 부족해? 부족한 건 채우면 되잖나.”
김학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다.
머릿속이 탈색되는 거 같다.
“나 성격 급한 걸 몰라서 이러나?”
회장이 톤이 올라갔다.
김학인은 여기에 오기 전 함성훈 감독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차피 이런 트레이드를 시작했다면 물꼬를 튼 거나 다름없습니다. S급의 트레이드는 야구판에서 전혀 없던 일입니다. 판이 흔들렸으니 다른 트레이드도 좀 더 쉬워지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는 지금 써먹지도 못하는 카드가 있잖습니까? 우리는 못 써먹어도 남들은 써먹을 수도 있는 카드죠. 이참에 그 카드 중에 한 개 정도 올리는 건 어떻습니까?
-네?
-어차피 욕먹는 김에 트레이드를 과감하게 한 번 더 해서 우리 팀 살 좀 찌우시죠. 우리 팀에 부족한 포지션이 있잖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지금도 이렇게 난린데…….
-어려울까요?
-그럼요. 위에서 재가가 떨어지겠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폭탄 맞은 것처럼 난린데?
-제 욕심이었나 봅니다. 판이 흔들린 지금이 좋은 타이밍이라고 봤는데…….
김학인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저희 팀에는 써먹고 싶어도 써먹지 못하는 카드가 세 개 있습니다.”
회장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 그 사고 친 놈들 셋?”
“네, 최대규는 음주운전으로 올해까진 출전 금지고 이낙균, 강문규는 피해자와 합의를 진행 중이지만 빨라야 하반기 중에 복귑니다. 그때 복귀해 봐야 실전 감각이 떨어져서 올해는 사실상 못 쓴다고 봐야 합니다.”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야 일 얘기가 제대로 되네. 계속 말해 봐.”
“이미 진행된 트레이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박신언을 내보낸 건 타격이 크지만 서일혁과 송석현으로 어느 정도 메울 순 있습니다.”
김학인은 말을 하면서도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야구를 깊게 알지 못한다면 지금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할 터다.
김학인의 우려와 달리 회장은 김학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손해를 볼 각오를 한다면 팀의 빈자리를 채울 퍼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퍼즐을 채우고 싶은데?”
“우리 팀의 카드가 계륵인 만큼 흠 있는 퍼즐이 될 겁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부분만 채우자면 불펜, 거포, 어린 유망줍니다. 지금 우리 팀엔 이 세 개가 절실합니다.”
“그래서 세 개를 다 얻을 자신은 있고?”
“어느 정도 수준이냐가 중요하겠지만 허락만 해 주신다면 추진해 보겠습니다.”
“퍼즐 세 개를 구하면, 우승 가능하겠나?”
김학인이 함성훈을 떠올렸다.
침착하고 대범하며 속이 깊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허언이 없다.
함성훈은 좋은 불펜 하나만 얻어 준다면 4강 싸움도 해볼 만하다고 했다.
A급 포수가 A급 불펜으로 바뀌면서 상황이 꼬였지만 함성훈에게 필요한 카드를 맞춰 준다면 4강 이상도 가능하단 얘기 아닌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면 그때부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정규시즌 1위가 한국시리즈 우승 가능성이 높다곤 하나 스포츠에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이다.
“확신할 순 없지만, 자신은 있습니다. 우리 팀, 약하지 않습니다.”
회장은 무릎을 탁 쳤다.
“좋아. 그렇게 말해야지. 자신 있게 말해야 나도 마음이 동하지. 그럼 해 봐. 골칫덩이 셋 다 다른 놈들이랑 바꿔도 돼. 모자란 애들은 내가 또 내년에 사 줄 테니까 마음껏 해 보라고.”
* * *
폭스와의 3차전.
고트가 위닝시리즈를 확정한 만큼 평소라면 분위기가 들떠 있어야 했지만, 오늘은 조용했다.
주전 포수의 갑작스러운 트레이드는 선수단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심지어 주전 포수를 맡게 될 서일혁까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형, 형한테는 축하할 일 아니에요?”
서일혁과 친분 있는 외야수 오진영이 서일혁에게 물었다.
서일혁은 한숨을 쉬었다.
“팀이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축하할 일이야?”
“왜 그래요, 형? 그래도 형 FA는 무난하게 할 수 있잖아요.”
“FA는 FA고. 우리 팀이 지금 엉망이 되어 가는데 웃을 수 있냐?”
오진영이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내야수 박종일이 오진영의 옷을 잡아끌었다.
“야, 넌 일혁이 알면서 그런 말을 하냐?”
“아니, 축하해 주려고 했죠.”
“쟤는 리얼 고트맨이야. FA 돼도 웬만하면 고트에 남을 놈이라고. 쟤가 그렇게 약삭빠른 놈이었으면 애들이 일혁이를 따르겠어?”
“……쩝, 제가 실수한 건가요?”
“그냥 일혁이 건드리지 마. 일혁이 지금 기분 개 같을걸. 이런 식으로 주전을 꿰차는 거 좋아할 놈 아니야.”
훈련은 침묵 속에 진행됐다.
선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훈련에 임했다.
팀이 어떤 방식으로든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큰 사건이 터졌는데 대체 어떻게, 왜 터졌고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도리가 없다.
구단 상부에서도 숨 쉴 틈도 없이 빠르고 돌아가고 있는 터라 선수들이 파악할 도리가 없었다.
구단 사장과 단장이 회장실에 끌려가 문책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찌할 것인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훈련이 끝났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이 연유를 물으려 했지만 구단 직원들이 가로막았다.
기자들과 직원들 간에 실랑이가 있었지만 직원들은 강경했다.
“오늘은 곤란합니다. 양해해 주십쇼.”
구단의 대응에 기자들도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일이 너무 크면 말단에선 알 수 없는 법이다.
기자들은 선수들도 이번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주전 포수 트레이드를 선수들이 알았다면 진즉에 낌새가 있었을 터다.
혼란한 와중에도 경기 시간은 다가왔다.
* * *
“SBC 스포츠의 캐스터 구정윤.”
“해설 최정윤입니다.”
“오늘 고트와 폭스와의 3연전 마지막 경깁니다. 고트가 2승을 먼저 거두면서 위닝시리즈를 확정했죠?”
“네, 그렇습니다. 4위 웨일스와는 한 1경기 차를 유지하면서 맹렬히 뒤쫓고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웨일스와의 경기를 앞둔 만큼 오늘 경기까지 이기고 간다면 공동 4위에도 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웨일스와의 3연전으로 단독 4위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단 얘기죠.”
“그만큼 오늘 경기가 중요하단 말씀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고트의 분위기는 썩 좋지 못합니다. 위닝시리즈를 확정했는데도 말이죠.”
“예, 야구팬이라면 오늘 깜짝 놀랄 기사를 접했죠? 시즌 중에 주전 포수를 트레이드했습니다. 전례 없던 일이라 다들 어안이 벙벙했을 겁니다. 물론 고트가 불펜이 시급했던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너무 큰 사건이었어요.”
“광주 불스는 이번 트레이드로 마무리와 어린 투수의 유출이 있었지만 오히려 트레이드의 승자라는 분위깁니다.”
“네, 그렇습니다. 고진석 선수는 올해 FA로 풀릴 투수였습니다. 불스가 최근 하위권을 전전하면서 고진석 선수의 쓰임이 애매했죠. 마무리로 나올 상황이 마땅치 않아 개점 휴업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올해 FA로 풀리는 마무리로 내년 FA로 풀릴 리그 A급 포수를 얻는다……. 이게 그리 큰 이득인가 싶겠지만 불스는 박신언 정도의 포수를 돈을 주고도 얻기 힘들었거든요. 박신언이 내년에는 서른둘이 되는 만큼 2차 FA도 불스 입장에서는 용이합니다. 불스도 돈이 부족한 팀은 아니거든요.”
“불스는 리그 최고의 수비형 포수를 얻었고, 고트는 마무리 투수를 얻었습니다. 여기에 젊은 유망주 투수까지 얻었다면 고트도 그리 나쁜 트레이드는 아닌 거 같은데요.”
“단순 트레이드 성과로만 보자면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수준급 포수는 매우, 매우 귀한 자원입니다. 리그에서 가장 귀한 자원을 따지자면, 예를 들어 특급 수준의 성적을 말하는 겁니다. 포수가 제일 귀하고 다음이 선발투수, 다음이 야수, 다음이 불펜 투숩니다. 포지션마다 희소성이 달라요. 수준급 포수는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키우고 싶다고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트 팬들의 팬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서일혁 선수도 좋은 선수고 송석현이라는 대형 신인이 있다지만 박신언의 빈자리를 바로 메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당장 마스크를 쓸 서일혁 선수의 경우 냉정하게 주전 포수로 본다면 리그 하위권 포숩니다. 폭스 정도를 제외하곤 주전을 꿰차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리그 2~3위 포수가 리그 7~8위 포수가 됐으니 고트 팬들 입장에선 너무 아쉽죠. 박신언 선수와 서일혁 선수의 조합도 좋았고 송석현 선수가 성장할 때까지 두 선수가 시간을 벌어 줄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계획이 틀어졌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래서 고트 팬들이 오늘 단단히 화가 난 거군요.”
“시즌이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불펜 투수가 귀한 건 당연한 이치지만 이번 트레이드는 누가 봐도 불스의 낙승입니다. 이번 트레이드를 누가 주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좀 성급하지 않았나 싶네요.”
-플레이볼!
경기가 시작됐다.
고트 팬들은 어느새 현수막까지 펼치면서 구단과 감독을 규탄하다 보안팀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고트의 선발 이창훈이 마운드에 올랐다.
구단을 규탄하는 사람들과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뒤섞인 가운데 이창훈이 초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오늘 이창훈 선수의 공이 좋네요. 초구에 145km/h 나옵니다.”
“선발투수라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죠.”
용병 투수를 제외하면 이창훈은 FA 영입 후 고트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타선 부진과 불펜 난조에도 고트가 4위 싸움을 할 수 있는 배경엔 안정적인 선발투수라는 상수가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창훈 선수가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합니다. 1회 세 타자로 막아 내는 이창훈 선수. 흔들리는 고트에 중심을 잡아 줍니다.”
폭스에선 선발 최영경이 나섰다.
불펜과 선발을 오가는 스윙맨으로 직구와 스플리터, 사실상 투 피치 피처였다.
불펜에서 뛸 땐 방어율 4점대를 오가던 평범한 불펜이었지만 선발로는 방어율이 7점대까지 치솟았다.
단조로운 투구 패턴과 체력 안배라는 두 가지 조건에 발목이 잡힌 터였다.
최영경은 긴 이닝을 끌어가기 위해 1회에는 체력을 아껴 뒀는데 그게 패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공격적인 타자를 만날 땐 더더욱 그러했다.
탁!
“설진일 선수 안타! 안탑니다! 최근에 맹타를 휘두르는 설진일 선수. 방망이가 매섭습니다.”
“새로운 리드오프가 탄생했습니다. 보통 리드오프들은 출루에 비중을 두는 반면 설진일 선수는 매우 공격적입니다. 존에 들어왔다 싶은 공은 모조리 치고 있어요. 단타를 노리는 것도 아니고 공에 제대로 힘을 실습니다. 1번 타자라고 가볍게 들어갔다간 혼쭐이 나겠는데요?”
무사 주자 1루.
타석에는 김인환이 들어섰다.
최영경은 초구 하나를 바깥쪽에 집어넣은 뒤 제2구를 고민했다.
‘스플리터, 존 안쪽.’
포수는 스플리터를 아래로 빼지 않고 존에 넣길 요구했다.
김인환이 떨어지는 공에 취약하다는 건 모든 구단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최영경도 포수의 사인에 바로 수긍했다.
자신이 아는 김인환은 떨어지는 공엔 누구보다 약한 선수다.
자신도 몇 번이고 헛스윙으로 돌려세웠었다.
“투수 던집니다!”
최영경의 공이 스트라이크존 가운데를 향해 가다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 피치임에도 최영경이 5선발을 맡을 수 있었던 건 날카로운 스플리터 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공은 존 하단으로 쓱 떨어졌다.
김인환의 배트도 시동이 걸렸다.
최영경은 뒤늦게 출발하는 김인환의 배트에 등골이 오싹했다.
원래 김인환이 저렇게 어깨를 닫아 놓고 공을 쳤던가?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측 담장! 넘어갑니다! 김인환! 투런 포! 투런 포를 터뜨리는 김인환 선숩니다!”
“이건 완전히 노려서 쳤죠? 공이 제대로 안 떨어진 건가요?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스플리터, 위험했습니다. 김인환 같은 홈런 타자에게는 더 조심을 했어야죠.”
“김인환의 홈런이 고트 팬들을 환호하게 만듭니다!”
“역시 팬들을 기쁘게 하는 최고의 묘약은 홈런이죠. 홈런 하나에 모두가 기뻐하네요.”
최영경이 고개를 숙였다.
공 하나를 더 빼면서 반응을 살폈어야 했나?
내가 안일한 건가?
자책에 빠진 최영경의 눈앞에 송석현이 들어섰다.
3번 타자지만 고트에서 가장 무서운 타자.
최영경은 초구부터 스플리터로 공 하나를 빼기로 결심했다.
공 하나를 빼면서 자신의 공이 통하는지 확인할 참이었다.
송석현이 오픈스탠스로 서면서 숨을 얕게 내뱉었다.
최영경의 초구는 떨어지는 스플리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