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96화 (96/201)

악수 혹은 악수

어제저녁.

고트의 운영팀장 김학인은 함성훈 감독과의 면담을 마치고 차에 탔다.

“후.”

의자를 뒤로 젖힌 후 눈을 감았다.

며칠 간 애를 태우며 부산, 광주까지 직접 방문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불펜 투수 값이 폭등했다.

고트의 자원이 풍부하다면 손해를 감수하고 트레이드를 할 수 있다.

함성훈이 강력하게 우긴다면, 최근 성적과 함성훈의 노고를 고려해 구단에서도 트레이드를 강행할 수 있다.

김학인도 각오한 바였지만 함성훈이 먼저 발을 뺐다.

고트의 뎁스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함성훈이었다.

잦은 외부 FA 영입으로 쓸 만한 자원이 지속적으로 유출됐다.

현재 고트의 빈약한 타선도 FA 유출 영향이 컸다.

안 그래도 빈약한 뎁스에서 트레이드로 유망주가 유출된다면 고트의 장래는 더 어두워진다.

이번 트레이드로 고트가 우승을 바라본다면 시도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터무니없는 상상이다.

구단의 상황까지 헤아리는 함성훈 감독이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지금도 1군에서 어깨가 빠지도록 던진 불펜 투수에게 휴식을 내주고 2군 불펜 투수들을 주축으로 경기를 끌어가고 있다.

올해에만 1군 불펜 투수 둘이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

함성훈 감독은 두 투수에게 수술을 올해 말로 미루지 않고 바로 하도록 권했다.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하는 게 선수 생명과 팀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다는 게 함성훈의 판단이었다.

1군의 필승조 네 명 중에 두 명이 곧 수술에 들어가고 두 명도 현재 컨디션 부진으로 계속 쉬고 있다.

함성훈은 다른 두 명의 투수에게도 전반기엔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시즌 중에 적어도 필승조 불펜 투수 네 명을 3주 이상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핵심 불펜 넷이나 빠졌으니 팀이 흔들리는 건 당연하다.

함성훈은 힘 빠진 불펜의 대안으로 롱릴리프를 가져왔다.

적을 땐 한 타자, 보통 1~2이닝만 던지고 내려가는 불펜에게 적어도 2이닝, 많게는 3이닝 이상 던지게 하고 휴식일을 보장했다.

불펜 투수는 투구가 단조로워 긴 이닝 소화에 적합하지 않다.

불펜 투수들 대부분도 2군에서 뛰던 투수들이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방법이니만큼 불펜의 방어율이 매일같이 올라가고 있다.

불펜이 얻어맞아도 교체하지 않고 밀고 나가니 팬들은 돌성훈이니 멍텅구리니 게시판에 매일같이 욕으로 도배한다.

막상 전임 감독 임의수가 퀵후크와 불펜 혹사를 할 땐 투수를 아끼라고 항의까지 했던 팬들이 이제는 전혀 다른 말을 한다.

임의수의 오물을 뒤집어쓴 함성훈은 인터뷰를 사양했다.

팬들은 신나서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함성훈은 감독이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팬들에게 중요한 건 승리지, 구단이나 팀 운영이 아니다.

팬들은 팀의 패배 원흉을 찾고 싶을 뿐이다.

그게 함성훈 감독인 거고.

“참 사람은 괜찮은데 타이밍…….”

임의수 대신에 올 초라도 감독을 맡았더라면 어땠을까?

지금도 4위를 앞두고 싸우고 있는데 지금보단 낫지 않았을까?

우우우웅.

우우우웅.

김학인이 전화를 들었다.

단장이었다.

이미 퇴근한 사람이 대체 왜?

김학인이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네, 단장님.”

-지금 어디야?

“아직 구장입니다. 이제 퇴근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거기서 기다려. 나 가는 중이니까.

“네? 여길요?”

-그래, 내 사무실에 가 있어.

김학인은 전화를 끊었다.

잔뜩 성이 난 목소리였다.

* * *

“이거 봐, 이거!”

단장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서류를 김학인에게 내밀었다.

김학인은 얼결에 받아 들곤 서류 봉투를 열었다.

단장은 소파에 앉더니 주먹으로 탁자를 퉁퉁 때렸다.

“이거 우리 엿 먹이는 거 아냐?”

김학인은 서류를 읽더니 미간을 좁혔다.

“단장님, 이거…… 의료 기록 아닙니까?”

“맞아. 박신언 의료 기록이야. 그거 봤어? 뇌동맥류라는데, 듣자하니 그거 머릿속에 시한폭탄이라고 하던데.”

“이건 어떻게 얻으신 겁니까?”

“그게 중요해?”

“이건 개인 정보에 관련된 거라 본인이 아니면 열람이 어렵지 않습니까?”

“하, 혜성 병원장이랑 나랑 한 다리 건너서 아는 사이야. 그 양반이 나한테 건네준 거니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랑 그 양반 둘뿐이야.”

“아…… 예…….”

“괘씸하지 않아? 이런 건 바로 구단에 통보해야 하는 거 아냐?”

“물론 그렇습니다만, 당장 수술해야 하는 겁니까?”

“몰라. 당장인지는 몰라도 수술은 해야 한다고 하던데. 수술하고 예후가 안 좋을 수도 있다고 했어.”

“제가 의사가 아니라 확실하게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지금도 계속 뛰는 걸 보면 당장 수술이 필요한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은 부상을 안고 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도 그런 케이스일 수 있습니다.”

“어허, 김 팀장. 중요한 건 우리한테 알리지 않았다는 거잖아. 선수는 구단 소속 아니야? 우리가 월급을 따박따박 주면서 걔들 뒤치다꺼리까지 다 해 주는데 박신언은 이런 중요한 걸 감췄다는 거잖아.”

김학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주 괘씸하단 말이지. 하.”

단장이 다리를 꼬고 숨을 훅훅 내뱉었다.

김학인은 고개를 숙인 채 단장의 눈치를 봤다.

단장은 한참이나 화를 삭였다.

“김 팀장.”

“네, 단장님.”

“지금 우리 트레이드 논의 중이잖아.”

“……네.”

“이걸로 한번 추진해 봐. 박신언이 나오면 충분히 좋은 매물 아냐?”

“박신언을요? 저희 주전 포숩니다.”

“서일혁이도 있고 송석현도 있잖아. 그런데 뭐가 문제야?”

“주전 포수와 백업은 무게감이 다릅니다. 주전 포수를 트레이드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못할 건 뭐야? 어차피 수술해야 한다며. 그러면 또 1년, 2년 훅 날아가는 거 아냐? 공식적으로 우린 박신언이 얘기를 안 해서 얘가 아픈지도 몰랐던 거야. 트레이드에 문제 될 게 있나?”

“그럼 본인에게 물어보고 진행하시죠. 만약에 의사가 당장 수술을 안 해도 된다고 한다면 올 시즌까진 뛰게 해야 합니다. 시즌 중에 주전 포수가 빠질 순 없습니다.”

“에헤이, 이 사람이. 이렇게 아둔해서야.”

단장이 손가락으로 김학인을 가리켰다.

“우리가 물어보면 우리가 걔 아픈 거 알고 있다는 거 알게 되잖아. 그럼 안 되지. 우린 걔랑 접촉해선 안 돼. 지금 당장 진행해. 아직 잘 시간 아니잖아? 지금 전화 걸어. 전화를 걸어서 불펜을 넘겨줄 수 있는 구단을 찾아내서 내일 아침까지 끝내. 길게 끌면 안 돼. 내일 경기 전까지 무조건 끝내, 무조건.”

김학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설득은 어렵다.

이 정도면 강행해야 한다.

시즌 중의 주전 포수 트레이드.

머릿속에 함성훈 감독이 떠올랐다.

백업 포수 서일혁과 고졸 신인 포수 송석현 둘로 팀을 꾸려 간다고?

머리가 하얗다.

이건 악수(惡手)다.

주전 포수를 트레이드하는 것도 문제지만, 트레이드 후에도 뒷말이 무성할 트레이드다.

이런 식으로 트레이드하면 신뢰를 잃고, 신뢰를 잃으면 다음 트레이드가 어려워진다.

“뭐 해? 빨리 전화해, 얼른!”

* * *

송석현은 야구장 포수 후면석 관중석에 앉아 있는 박신언을 찾았다.

박신언은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선배님.”

박신언이 고개를 돌렸다.

“왔냐? 와서 앉아.”

“네, 선배님.”

송석현이 박신언 옆에 한 칸 떨어져 앉았다.

박신언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하게 되네.”

“네?”

“나 트레이드 됐다. 불스로 간다.”

송석현이 두 눈을 깜박였다.

“네? 트레이드요?”

“그래, 그렇게 됐어.”

“아, 아,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주전 포수를 트레이드하는 팀이 어딨어요?”

“여기 있더라.”

“뭐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이건 아니죠. 이건…… 이건 아니죠!”

송석현이 말을 더듬었다.

트레이드는 야구 선수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숙명이라지만 갑작스러운 트레이드는 많지 않다.

트레이드 전에 당사자들은 어느 정도 감을 잡기 마련이다.

트레이드는 물밑에서 수없이 협상과 결렬을 오가다가 그중 한두 건이 되기 마련이다.

트레이드에 자주 오르는 선수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트레이드 대상이라는 걸 알게 되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본인뿐만 아니라 팀에서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박신언은 선택지에 없는 정답이다.

주전 포수를 바꾼다?

서일혁도 좋은 포수라지만 박신언을 대체할 수 없다.

머리가 띵하다.

“왜 이렇게 된 거죠?”

박신언은 인상을 찌푸렸다.

“몰라. 이유는 말 안 했으니까. 아무튼 오늘 바로 내려가야 돼. 그래서 너 부른 거야. 하. 이번 시즌이 끝나면 너 훈련하는 거 좀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럴 일은 없게 됐네.”

“……선배님.”

“어이가 없긴 하다만, 어쩌겠냐. 이것도 프로야구지. 내가 준 수첩은 잘 보관하고 있지?”

“예, 물론이죠.”

“어디 유출한 건 아니고?”

“네, 절대.”

“잘했어. 어차피 준 거 뺏을 수도 없고, 너한테 인연이 있으니까 간 거겠지. 잘 배우고 익혀라. 어차피 그건 과거 자료니까 네가 계속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는 거 알지?”

“……네.”

“그래, 막상 트레이드 됐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이가 없으면서도 누구한테 말할까 생각하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라. 그나마 네 생각이 나서 내려가기 전에 널 불러 본 거야.”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상대 팀으로 만나겠네.”

“…….”

“이거 무서운 타자를 상대하게 생겼네. 벌써 신경이 쓰이는데?”

“……항상 감사했습니다, 선배님. 선배님과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쉽습니다.”

“나야 항상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라 너랑 보낼 시간도 없었어. 지나고 보니 좀 허무하네. 여태 그렇게 살았으니까 내 실력으로도 FA 했겠지만, 친한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네, 하하.”

박신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저 그런, 백업의 백업 수준의 포수였던 선수가 FA로 거액을 받는 정상급 포수로 성장했다.

평범한 피지컬로 성공하기 위해 매일 선수들의 영상을 보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작은 버릇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상대의 습관을 파악하기 위해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부족한 실력을 메우기 위해 당연하다 생각했던 루틴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속내를 털어놓을 친한 사람 하나 없다.

누구보다 야구에 대해 깊이 알고 있지만 같이 야구를 논할 사람이 없다.

그나마 야구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 본 사람이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신인이라니.

박신언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도 이제 미트 잡을 일이 많아질 거야. 내가 포수는 경기 전후로 뭐를 꼭 하라고 했지?”

“마사지를 꼭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맞아. 포수 손은 혹사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포수는 손가락이 꺾이는 경우도 많아. 관절에 피로도 많이 쌓이지. 평소에 찬물에 담그지 마. 항상 따뜻한 물을 써. 그리고 온열팩이나 콩 주머니를 데워서 자주 마사지해 줘. 아귀힘 쓰는 일을 최대한 줄여. 운동도 데드나 턱걸이 이런 건 짧게 해. 선수가 은퇴하는 이유는 큰 부상보단 자잘한 부상 때문인 경우가 많아. 포수는 무릎, 손가락, 어깨를 가장 많이 다쳐. 네 어깨가 좋다고 어깨를 제대로 안 풀고 어깨 힘만으로 던지지 마. 체중 관리 꼭 해. 포수가 살이 찌기 시작하면 무릎에 대미지가 와. 한 경기에 적어도 이백 번은 앉았다 일어서는 게 포수야. 살 꼭 빼. 평소에 앉았다 일어설 땐 무릎에 힘주지 말고 엉덩이 빼고 스쿼트 하듯 일어서. 이게 습관이 돼야 돼. 젊다고 과신하지 마. 네 관절은 소모품이야. 아끼고 또 아껴. 술, 담배는 당연히…… 알지?”

“……네, 선배님.”

박신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신언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참, 나도 말이 많이 고팠나 보네. 주절주절, 참 나. 하하.”

“선배님…….”

“잔소리가 많았다. 내가 다 공책에 참 나은 건데 말이야. 주책이지.”

“아닙니다. 전부 귀담아 듣고 있습니다.”

박신언이 송석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송석현은 잠시 망설이다 박신언의 손을 잡았다.

“이제 다른 팀이 됐지만 우린 포수잖아. 그치?”

“네.”

“좋은 후배를 뒀다고 생각할게.”

“선배님한테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낯간지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러네. 그래도 나쁘진 않다.”

두 사람의 악수는 끝났다.

“앞으로 잘해 봐. 넌 좋은 포수가 될 거니까. 네 스타일이라지만 너무 공격적으로만 하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하고 해 봐.”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앞으로 종종 보자.”

박신언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송석현은 박신언의 등 뒤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여름인데도 바람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송석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이게 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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