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놈 (3)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헛스윙 삼진이 나옵니다!”
“여기서 저 코스에 패스트볼을 꽂아 넣나요? 하하, 대단합니다.”
“이백찬 선수가 이례적으로 주먹을 위로 뻗습니다.”
경기 하이라이트로 이백찬의 삼진이 나오면서 이닝이 교대됐다.
최재국은 배트 헤드를 쥐곤 벤치로 돌아갔다.
송석현은 이백찬을 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거봐요. 되잖아요.”
“미친놈. 안전하게 가면 될걸.”
“안전하게 가도 되죠. 근데 이럴 때 형이 찍어 누르는 경험을 쌓아 봐야 할 거 아니에요. 형은 형 공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니까요.”
“……진심으로?”
“형, 제 사인을 보고 던지고 결과가 안 좋으면 제 욕을 하라니까요?”
7회 말.
폭스는 셋업 전병섭을 올렸다.
폭스의 몇 안 되는 필승조 투수가 전병섭과 송대화였다.
폭스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카드, 셋업 전병섭과 클로저 송대화.
고트는 좌익수 오진영부터 시작했다.
“2-2. 전병섭 선수가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 놓고 계속 빠진 공을 던집니다.”
“하위 타선에서 힘을 빼면 안 되죠. 여기서 출루를 허용하면 상대 중심 타선이 빨리 올라옵니다. 고트는 1번부터 3번까지가 클린업이나 다름없습니다.”
전병섭은 오진영 상대로 볼넷을 허용했다.
폭스 응원석에서 바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또! 또! 또! 고마해라, 쫌!”
“뻑하면 볼넷이가!”
폭스의 장단점을 하나씩 뽑자면 불 타선과 불 마운드였다.
타선의 파괴력은 리그 상위권이었으나 마운드가 말썽이었다.
특히 볼넷 남발은 고질병과 같았다.
폭스는 명경기 메이커란 별명도 있었다.
불펜이 불을 지르면서 경기가 엎치락덮치락 혼전에 빠져 강제 명경기가 탄생하기도 했다.
폭스 팬들은 벌써부터 불안함을 느꼈다.
“타석엔 유격수 정영수 선수가 나옵니다.”
“수비는 리그에서도 수준급인 유격수지만 타석에선 좀체 존재감이 없습니다.”
“유격수는 수비가 또 중요한 포지션 아니겠습니까?”
“예, 물론이죠. 수비가 우선이지만 공격도 잘하면 금상첨화겠죠.”
전병섭은 초구로 슬라이더를 던졌다.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정영수는 힘껏 당겼다.
“유격수! 놓칩니다! 오진영 선수는 2루로! 2루 세이프! 유격수가 공을 잡고 던졌지만 1루도 세이프! 무사 1, 2루! 고트가 좋은 찬스를 잡습니다.”
신규원은 그저 한번 웃었다.
마운드에만 불을 지르는 게 아니다.
폭스의 수비는 피닉스를 포함해 리그 꼴찌를 다투는 수준이다.
벌써 싸한 느낌에 폭스 벤치 선수들이 초조해했다.
“2루수 정동규 선수가 나옵니다. 팀에서 알토란 같은 선수죠?”
“예, 그렇습니다. 공격, 수비, 주루 모두 빠지는 곳 없는 타잡니다. 내야 유틸까지 되는 선수라 쓰임이 많은 선수죠.”
폭스는 전진 수비에 들어갔다.
7회 3점 차이니만큼 주자가 진루하더라도 병살을 노리겠다는 심산이었다.
계획은 좋았지만,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아! 전병섭 선수! 또 볼넷입니다!”
“여기서 볼넷을 주나요? 너무 어렵게 승부를 간 거 같습니다.”
“이러면 주자 만룹니다. 폭스가 7회 위기에 빠집니다.”
“다음 타자 조지호 선수는 일발 장타가 있는 선순데요. 한 방이 무서운 선숩니다.”
폭스 배터리는 강타자 상대로 볼 두 개로 시작했다.
조지호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
폭스가 어떤 팀인지는 이미 훤히 알고 있다.
위기에서 약한 팀, 기다리면 자멸하는 팀.
조지호는 단 하나의 공, 스트라이크를 노리고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노렸다.
“투 볼 상황에서 배터리의 사인이 길어집니다.”
“여기선 승부에 들어가야죠. 쓰리 볼까지 가면 완전히 핀치에 몰리게 됩니다.”
“투수 결정한 듯 보이네요. 투수 던집니다!”
조지호는 존에 오는 공을 보고 배트를 냅다 휘둘렀다.
슬라이더가 아닌 패스트볼이 왔지만 힘으로 밀어 내야로 보냈다.
“2루수! 못 잡았습니다! 안타! 안탑니다! 주자는 한 베이스씩 진루하면서 4-2. 고트가 한 점을 착실하게 따라갑니다.”
“아, 아쉽네요. 2루수가 베이스에 너무 가깝지 않았나 싶네요. 정상적인 수비였다면 잡았을 텐데요.”
“수비 시프트였을까요?”
“글쎄요. 2루수가 자기 포지션을 확실히 못 잡았던 거 같습니다.”
이어지는 만루 상황.
폭스 벤치에서 망설였다.
전병섭이 아니면 여기서 올릴 카드는 클로저 하나뿐이다.
7회 상황에서 마무리를 올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전병섭보다 나은 선수가 있지도 않다.
진퇴양난.
감독의 결정이 길어지는 사이 폭스는 플라이 하나를 내주면서 4-3까지 따라잡혔다.
“타석에는 설진일 선수가 들어옵니다.”
“오늘 설진일 선수 방망이 괜찮습니다. 하지만 피해 갈 수도 없어요. 다음 타자는 김인환 선숩니다.”
설진일은 배트를 붕붕 휘두르며 타석에 들어섰다.
잔뜩 웅크린 몸은 무조건 공을 치겠다는 심산이었다.
포수는 초구로 바깥쪽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투수는 고개를 저었다.
타자가 몸을 웅크린 만큼 바깥쪽 낮은 공을 노리는 게 뻔하다.
포수는 벤치를 바라봤다.
사인을 내 달라는 신호였다.
“후.”
배터리코치가 존에 슬라이더 하나를 넣어 보라고 사인을 냈다.
초구를 노리는 타자는 7할이 패스트볼을 노린다.
초구 스트라이크 하나를 먹고 들어가자는 심산이었다.
“포수가 저렇게 담이 작아서야. 쯧쯧.”
폭스의 감독이 혀를 찼다.
배터리코치는 자기 잘못인 양 입맛을 다셨다.
“조금만 몰려도 벤치를 바라보는 포수는 아니지 않아?”
“……죄송합니다.”
“너무 오냐오냐 애들을 키우면 안 되지. 포수가 투수한테 믿음을 못 주니까 투수도 자기 공에 확신을 못 가지잖아.”
“……예.”
설진일은 초구부터 힘차게 휘둘렀다.
스트라이크.
공 하나를 뺏겼지만 설진일은 여전히 타석에 붙어 눈을 부라렸다.
‘패스트볼, 아웃사이드.’
포수의 선택은 안전한 바깥쪽 낮은 패스트볼.
투수의 공은 존에서 공 하나 이상 벗어났다.
이후로 또 볼, 볼.
3-1.
핀치에 몰린 배터리의 선택은 존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7회부터 많은 공을 던진 투수의 슬라이더는 회전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탁!
“우중간! 우중간! 우중간을! 가릅니다! 설진일! 역전 안타!”
“타자가 제대로 노려서 쳤습니다.”
“주자들은 그대로 홈으로! 홈으로! 홈으로! 주자들이 전부 홈으로 들어옵니다! 5-4! 고트가 7회에만 4점을 뽑아냅니다!”
“전병섭 선수를 올리고도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폭스 입장에서도 속이 쓰리겠어요.”
“고트는 KS포로 이어집니다.”
“폭스는 어쩔 수 없이 투수를 바꾸네요.”
“마무리 송대화 선수가 올라올까요? 이미 역전을 당해서 어떤 선수가 올라올지 모르겠네요.”
폭스가 올린 투수는 정하균.
전병섭, 송대화를 제외하곤 그나마 제일 나은 카드였다.
서른세 살의 노장이지만 경험이 풍부하고 스플리터가 좋아 헛스윙과 땅볼도 많이 만들어 내는 타입이었다.
김인환이니만큼 떨어지는 공에 약하지 않을까 생각해 올린 카드였지만 패착이었다.
김인환이 타격 폼을 바꾼 이후로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에는 약해졌지만 반대로 존 근처로 오는 공엔 과감했다.
존 살짝 아래로 떨어진 스플리터는 김인환의 먹이나 다름없었다.
쾅!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측 담장! 넘어갑니다! 김인환 투런! 김인환이 투런으로 완전 쐐기를 박습니다! 7-4! 고트가 넉넉하게 점수를 얻어 가네요. 폭스는 1회 4점 이후로 계속 침묵합니다.”
김인환이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송석현은 홈으로 들어오는 김인환과 하이 파이브 했다.
짝!
김인환의 홈런 이후 송석현이 들어오자 폭스는 아예 승부를 거르고 다음 타자 최재완을 선택했다.
불타는 타선이 최재완 이후로 짜게 식었지만 고트는 7회 6점을 벌어 간 데에 만족했다.
이백찬은 3이닝을 책임지며 2점을 내줬지만 끝내 역전은 허용하지 않았다.
3이닝 2실점이지만 볼넷 하나 없이 안타 다섯 개, 홈런 한 개.
좋은 성적이라 할 수 없었지만 벤치로 들어오는 이백찬의 표정은 밝았다.
“야, 큰일 날 뻔했어. 결국 홈런 맞았잖아.”
이백찬은 승리를 한 후 송석현에게 투정 아닌 투정했다.
송석현은 크게 웃었다.
“형, 대놓고 스트라이크존에만 던져도 폭스 타자들도 쩔쩔매는 거 못 봤어요? 홈런도 실투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오늘 형 홈런 말곤 전부 단타였어요. 스트라이크만 던져도 이런데 존을 넓히면 어떨 거 같아요?”
“오늘 왜 이렇게 타이트하게 사인을 낸 거야?”
“형은 형 공을 못 믿는다니까요. 오늘처럼 대놓고 던져도 최악의 결과가 이 정도예요. 실투가 나와서 홈런이 나와도 3이닝 2실점. 형은 무조건 이거보다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막 찔러 넣어요. 다음 경기부턴 제가 제대로 타자들을 요리해 줄게요.”
경기 MVP는 설진일로 뽑혔다.
결승 타점에 리드오프 역할까지 해냈다.
설진일은 생애 처음 MVP 인터뷰에도 긴장 하나 없이 줄줄 답변을 이어 갔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계시다면?”
“아, 있죠. 있습니다. 하연아! 보고 있지? 아빠 TV 나왔어. 여보, 당신 남편 이제 TV 나왔다. 이제 어디 가서 내 남편 야구 선수라고 말해도 믿어 줄 거야. 사랑한다, 인혜야! 사랑해, 하연아! 엄마, 아빠! 기다려 줘서 감사합니다! 아들도 이제 TV에 나올 만큼 야구 좀 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 고트 팬들은 응원가를 부르며 승리를 만끽했다.
퇴근길, 설진일은 처음으로 인파에 둘러싸여 사인 공세에 시달렸다.
몸은 피곤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송석현은 기자와 팬을 피해 택시를 타고 빠르게 경기장을 떠났다.
차창 밖으로 설진일이 호탕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어 주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네.”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송석현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추궁 아닌 추궁을 당했다.
윤로미.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다면 모를 수 없는 이름 아닌가.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지?”
“어, 없어. 그냥 선배 때문에 만난 게 다야.”
“정말이지?”
“정말이라니까.”
어머니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네가 연애하는 거 말리진 않겠는데…… 그래도 조심해.”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 거야.”
어머니가 안방에 들어간 후 동생이 송석현에게 스윽 다가왔다.
“형,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아니라고, 인마.”
“형, 그러면 나영이 누나한테 문자했어?”
“무슨 문자?”
“오해를 풀어야지.”
“쓰읍, 오버 좀 하지 마. 너 자꾸 기어오른다?”
송석현이 인상을 쓰자 동생이 물러났다.
“……알았어.”
송석현은 방으로 들어가 오늘 경기를 복기했다.
신규원.
체인지업의 달인.
여태 만난 투수 중에는 가장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눈썰미 좋은 송석현에게 천적이 있다면 쿠세, 패스트볼과 변화구를 던질 때 차이점이 없는 투수였다.
어떤 투수든 약간의 차이는 있기 마련인데 신규원의 찾아내기 힘들었다.
신규원의 체인지업은 일품이었고, 슬라이더도 까다로웠다.
배트의 끝을 잡아 치는 편법이 아니었다면 오늘은 내내 고전했을 터다.
“이런 타자한테는 풀스윙을 하면 안 되나…….”
송석현은 눈을 감았다.
상상 속의 신규원은…… 역시나 까다로운 투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