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92화 (92/201)

미친놈

KS포의 침묵.

4번 타자 최재완이 타석에 들어섰다.

KS 타선이 당겨져서 얼결에 4번을 맡게 됐지만, 성과는 없었다.

최재완은 스트라이드를 반 폭 줄였다.

-내가 컨택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최재완은 며칠 전 특타 때 송석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집에 막 가려는 송석현을 붙잡고 떼를 쓰듯 물었다.

송석현은 고민 끝에 말했다.

-컨택이라는 건 결국 공을 잘 맞히는 건데, 공을 잘 맞히려면 세 가지가 필요해요. 우선 공을 고르는 선구안, 다음엔 간결한 스윙, 마지막으론 임팩트 에어리어. 이 세 가지 중에 뭐가 필요한지 먼저 고민해야죠.

-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어?

-선구안은 당장에 좋아질 순 없고, 스윙도 시즌 중에 바꾸긴 어려워요. 임팩트 영역도 타격 폼과 관련된 거라 단기간에 고치긴 어렵지만 셋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바꾸기 쉬운 편이죠.

-그래서 어떻게 고치는 건데?

-간단해요. 히팅 포지션을 낮추세요. 레벨 스윙에 가깝게 하면 컨택이 더 잘되겠죠. 물론 그만큼 파워가 약해지겠지만 형도 힘이 좋잖아요. 맞히기만 하면 장타를 충분히 칠 수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형, 2군에선 그렇게 쳤잖아요?

최재완은 배트 높이를 손가락 한마디 정도 낮춰 들었다.

2군에서도 최재완은 홈런 타자가 아니었다.

3루 수비가 견실한 중장거리 타자.

최재완은 길게 내뻗던 스트라이드도 줄이곤 어깨를 꽉 닫았다.

“KS포의 부진을 앞뒤에서 어느 정도 만회를 해야 할 텐데 고트가 이 부분을 풀어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진일 선수는 출루는 잘하고 있지만 너무 공격적이어서 리드오프의 임무 중 하나인 공을 오래 보는 역할을 못 해 주고 있고, 최재완 선수는 삼진이 너무 많습니다. 최재완 선수가 급하게 1군에 올라온 어린 선수이니만큼 감안해서 봐야겠지만 그래도 여긴 프롭니다. 프로는 실력으로 보여 주지 않으면 냉정한 곳이에요.”

폭스 배터리가 사인을 교환했다.

초구는 바깥쪽 패스트볼.

후한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은 이번에도 일관됐다.

-스트라이크!

신규원이 어깨를 살짝 돌렸다.

공이 느린 투수일수록 심판 판정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오늘처럼 바깥쪽을 후하게 잡아 주는 심판이라면 구속이 5km/h는 더 높아진 거나 진배없다.

-스트라이크!

“신규원 선수가 오늘 공격적입니다. 계속 스트라이크를 던지네요.”

“타자들이 꼼짝도 못하고 있죠? 존 바깥을 공략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쉽게 배트를 내지 못합니다. 그만큼 신규원 선수의 체인지업이 좋다는 얘기죠. 신규원 선수는 체인지업으로 삼진도 잡지만 맞춰 잡기도 잘하거든요.”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그렇다면 변화구 타이밍.

신규원은 체인지업을 던졌고 최재완은 아예 치지 않았다.

-볼, 로우.

아래로 오는 공.

최재완은 체인지업을 구별하진 못했지만 공 하나를 일부러 걸렀다.

폭스 배터리는 제4구로 결정구를 선택했다.

바깥쪽 슬라이더.

존에 걸쳐 들어가다 마지막 순간에 빠지는 슬라이더.

신규원의 슬라이더는 각이 크지 않았지만 횡으로 휜다는 장점 하나로 신규원에겐 쏠쏠한 제3구질이었다.

“투수 던집니다.”

신규원이 던진 공은 조금 몰렸지만 마지막엔 바깥쪽으로 꺾이면서 타자의 배트를 유혹했다.

최재완은 배트를 내밀었고, 배트 끝에 공이 걸렸다.

“파울이네요. 최재완 선수, 겨우 걷어 냅니다.”

“방금은 위험했죠? 헛스윙 삼진이 나올 뻔했습니다.”

최재완이 타석에서 물러나 배트를 한번 휘둘렀다.

된다.

공을 보고 공을 칠 수 있다.

중간에 공의 색깔을 보곤 본능적으로 슬라이더를 직감했다.

평소라면 알더라도 헛스윙 했을 테지만 이번엔 배트를 컨트롤해서 걷어 냈다.

1군에서도 내 배트 컨트롤이 통한다.

스트라이드를 좁히고 히팅 포지션을 낮추며 파워를 줄였지만 컨택만큼은 확실히 좋아졌다.

“후하.”

최재완이 어깨를 으쓱하곤 타석에 들어섰다.

포수는 달라진 최재완의 얼굴을 보곤 조금 더 바깥쪽에 앉았다.

팡!

팡!

“최재완 선수, 여기서 승부를 길게 이어 가네요.”

“최재완 선수가 평소와 달리 투수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네요. 좋아요. 이런 모습을 보여야죠. 타석에서 쉽게 물러나선 안 됩니다.”

신규원이 모자를 매만졌다.

최재완은 팔을 가슴에 더 가까이 붙였다.

슬라이더, 아웃사이드.

포수는 결정구로 슬라이더를 정했다.

끈질긴 상대에겐 아예 존 바깥으로 도망가는 공을 던져야 한다.

1회부터 경기가 길어지면 신규원에게 부담이 크다.

에이스가 조금이나마 공을 덜 던지게 하는 게 포수의 임무다.

“후우.”

신규원은 숨을 한번 고른 뒤 공을 던졌다.

동시에 설진일도 뛰었다.

최재완은 공을 끝까지 지켜보더니 배트를 내밀었다.

팡!

공은 미트로 들어갔다.

-볼, 아웃사이드.

“볼넷. 볼넷을 얻어 내네요. 최재완 선수가 배트를 가까스로 멈췄습니다.”

“최재완 선수가 참으로 오랜만에 긴 승부 끝에 이긴 거 같습니다. 그동안에는 너무 서둘렀거든요. 오늘처럼만 침착하게 공을 볼 줄 안다면 팀에도 본인에게도 도움이 크게 될 거 같습니다.”

2사 주자 1, 2루.

투수는 아웃 카운트 하나면 되고 타자는 안타 하나면 된다.

5번 타자는 오진영이 나왔다.

고트의 붙박이 좌익수로, 여덟 개 구단 좌익수 중에선 타격 지표론 뒤에서 순위를 세는 게 더 빠른 선수였다.

좌익수 수비는 리그 최고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공격에 있어선 무색무취.

일발 장타 하나 정도를 기대할 수 있는 타자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이 나옵니다.”

“오진영 선수가 여기서 타순을 이어 주지 못하네요. 신규원 선수의 공이 오늘 유독 좋습니다. 저 바깥쪽에서 떨어지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는 오늘 언터처블이에요.”

함성훈 감독이 한숨을 쉬었다.

최재완이 오랜만에 상대 에이스 상대로도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뒤가 문제다.

좌익수 오진영, 2루수 정동규, 유격수 정영수, 중견수 정병선, 포수 박신언과 서일혁 중 타격으로 일가견 있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비는 리그 평균 이상이라는 거지만 그게 전부였다.

포수 박신언이 개중에는 가장 잘 치는 축에 속하지만 박신언의 타격도 좋게 말해도 준수하다 이상 평가할 순 없었다.

고트가 FA로 야수를 셋이나 데려온 이유가 지금 타선에 있었다.

“폭스가 고트를 상대로 4점을 빼앗으면서 앞서 나갑니다.”

“고트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오늘 경기도 쉽지 않네요. 웨일스와의 경기 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이클 피시는 1회에 4점을 내줬지만 실력이 문제는 아니었다.

2회, 3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 내며 비싼 몸값을 톡톡히 했다.

“고트는 9번 타자 정병선 선수부터 들어옵니다.”

“정병선 선수가 발도 빠르고 수비도 잘하는 리그 수준급 중견수긴 하지만 타격이 많이 부족합니다. 통산 타율이 2할 5푼대라 사실 공격으로만 본다면 팀에 마이너스 요솝니다.”

“정병선 선수가 출루율은 3할 4푼, 꽤 높습니다.”

“타율에 비해 출루율은 높은 편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성적은 아쉽습니다. 장타가 없다시피 한 정병선 선수라면 출루율이 3할 후반대는 돼야 팀에 도움이 됩니다.”

“정병선 선수가 출루를 해야 타순이 송석현 선수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선구안은 좋지만 타격이 안 되는 타자.

최고 구속이 140km/h 언저리인 신규원은 과감하게 스트라이크존에 패스트볼을 꽂았다.

정병선도 초구를 힘껏 쳤으나 2루수 직선타 아웃이었다.

“아, 초구 잘 노렸는데 저기서 아웃이 나옵니다.”

“고트, 오늘 안 풀리네요. 저런 공이 빠져나가야 팀도 탄력을 받을 텐데 말이죠.”

다음 타자는 설진일.

폭스 배터리는 초구를 하나 빼면서 설진일의 반응을 살폈다.

-볼, 아웃사이드.

공 두 개는 빠지는 공에도 어깨가 움찔움찔할 정도로 공격적인 타자.

폭스 배터리는 연속해서 공을 뺐다.

“볼넷이 나옵니다.”

“신규원 선수가 신중한 승부를 하는 건 좋았는데 지나치게 조심스러웠습니다. 전 타석에 안타를 맞은 기억 때문일까요?”

폭스의 포수가 입맛을 다셨다.

유인구로 꼬셔 봤는데 전혀 안 속다 보니 공을 낭비했다.

주자를 내보낸 게 아쉬웠지만 다음 타자를 보자 마음이 풀렸다.

다음 타자는 2번 김인환이었다.

“2번 타자 김인환. 사실 잘 적응이 안 되긴 하는데 함성훈 감독 대행은 꾸준히 밀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타선입니다. 1번 설진일 선수는 리드오프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2번 김인환 선수는 전형적인 거포 선수입니다. 3번 송석현 선수는 클린업 어디에 서든 어울리긴 하지만 과연 이 타선이 맞는가 싶어요.”

“그런데 놀라운 게 있는데요. 김인환 선수가 출루율이 4할이 넘습니다.”

“아, 그런가요?”

“네, 김인환 선수가 삼진도 많이 당한 거 같은데 의외로 볼넷도 많이 얻어 냈습니다.”

“통산 출루율이 3할을 조금 넘는 타자로 알고 있는데 최근 출루율이 이렇게 높았군요.”

“최근엔 출루율과 타율 모두 부진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인내심 강한 타자가 된 거 같습니다.”

“네, 출루율 4할이면 굉장히 좋은 지표죠. 김인환 선수가 작전 수행 능력이 부족하겠지만 출루율이 높다면 2번 타자가 꼭 나쁜 건 아니겠네요.”

김인환은 타석에 바짝 붙었다.

폭스 배터리는 아예 바깥쪽 공만 던지고 있다.

몸 쪽을 버리고 바깥쪽만 노리겠다는 심산이었다.

‘패스트볼, 바깥쪽.’

폭스 배터리는 알면서도 바깥쪽을 노렸다.

심판의 판정이 후하다면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은 안전하고 또 효과적인 선택이다.

-스트라이크!

“김인환 선수가 지켜봅니다.”

“너무 멀었다는 표정인데요. 하지만 심판은 1회부터 계속 저 공을 잡아 주고 있습니다. 적응해야 돼요.”

제2구.

이번에는 체인지업이었다.

김인환은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공을 헛스윙 했다.

설진일은 어느새 2루까지 도루했다.

“설진일 선수가 도루를 하면서 진루타를 친 격이 됐습니다.”

“하지만 노볼 투 스트라이큽니다. 김인환 선수가 너무 쉽게 공략당하고 있어요.”

폭스 배터리가 이번엔 슬라이더를 던졌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에 김인환은 배트를 휘둘렀다.

툭.

“공이 높게 뜨네요. 우익수, 우익수가 나와서…… 잡습니다.”

“설진일 선수, 뛰었습니다!”

“우익수가 공을 던져서…… 세이프? 아웃인가요? 판정이 뭐죠?”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아슬아슬한 세이프이네요.”

“설진일 선수, 여기서 3루를 노릴 줄은 몰랐습니다. 공이 그렇게 멀리 간 건 아니었거든요.”

“설진일 선수의 과감한 주루에 폭스도 당황한 거 같습니다.”

“저건…… 글쎄요. 벤치 사인인가요?”

설진일은 몸을 일으켜 흙먼지를 툭툭 털었다.

주루코치는 설진일의 엉덩이를 주먹으로 툭 쳤다.

“그걸 뛰냐?”

“각이 보이던데요?”

2사 주자 3루.

타자는 송석현.

신규원은 송진을 손에 털어 냈다.

첫 상대는 수월했으나 상대는 최근 주가를 올리는 타자.

폭스 배터리는 초구를 신중하게 골랐다.

타점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상대는 초구를 뭘 노릴까…….

폭스의 포수는 송석현이 타석에 바짝 붙은 걸 보곤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좋아.’

신규원은 포수의 사인대로 공을 던졌다.

바깥쪽 보더 라인을 타고 가다 마지막에 쑥 빠지는 공.

송석현의 배트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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