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의 에이스
어느 팀이나 에이스는 있기 마련이라지만, 암흑기의 에이스는 팬들에게 더 특별하다.
팀이 무너지는 와중에 꿋꿋이 제몫을 해내는 에이스란 팬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대견함, 미안함, 안쓰러움, 자랑스러움, 뿌듯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감정을 단어 몇 개로 표현해 낼 수 없을 터다.
폭스 팬에게 신규원이 그러했다.
나이는 고작 스물넷, 프로 5년 차지만 벌써 정규 이닝을 700이닝이나 소화했다.
통산 방어율은 3.98로 다른 팀의 에이스와 비교해 확실히 낫다고 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규원은 부산 팬들에겐 자랑이고 아픈 손가락이었다.
매번 광주 불스와 6, 7위 경쟁을 하는 와중에도 신규원이 선발로 나서는 날이면 원정에도 폭스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플레이볼!
“경기 시작합니다.”
“고트의 선발투수는 마이클 피시 선순데요. 이 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선발로 평균 방어율 4점대를 기록했을 만큼 좋은 선숩니다. 부상도 겹치고 팀 운도 안 좋아서 용병으로 온 게 고트에겐 행운이라고 할 정도로 좋은 선수죠.”
“예, 그렇습니다. 현재도 방어율 3.11, 리그 3위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피시 선수가 고트의 1선발이라면 폭스는 신규원 선수가 1선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폭스 용병 농사가 이번에도 잘 안됐어요. 브렌트 선수는 대체 용병 얘기가 오가고 있고 벤자민 선수는 방어율 5점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규원 선수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아직 어린 선순데 팀에서 맡은 역할이 큽니다.”
마이클 피시는 첫 타자를 범타로 처리했다.
수월한 출발에 고트 선수들의 긴장이 풀어질 무렵, 폭스의 2번 타자 김형남이 마이클 피시의 커브를 담장에 꽂아 넣으면서 2루까지 진루했다.
“방금은 좀 안일했습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 놓고 커브를 너무 정직하게 스트라이크존에 꽂았습니다. 김형남 선수가 워낙 공격적인 선수라 커브를 떨어뜨렸다면 헛스윙이 나올 타이밍이었거든요.”
마이클 피시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살짝 공이 풀렸을 뿐이다.
“3번 타자 김경심 선수가 나옵니다. 김경심 선수가 요새 방망이가 좋아요. 최근 다섯 경기 타율이 3할 6푼 8립니다.”
“김경심 선수랑 신규원 선수는 동기 아닙니까? 이럴 때 또 동기를 한번 도와줘야죠.”
마이클 피시는 초구로 바깥쪽 패스트볼을 찔렀다.
김경심은 초구를 가볍게 받아쳤고, 공은 좌중간을 뚫으며 2루 주자를 불러들였다.
“1-0. 폭스가 쉽게, 쉽게 야구를 하네요. 1회부터 에이스 마이클 피시 선수에게 선취점을 얻어 갑니다.”
“1점이긴 하지만 고트 입장에선 기분 나쁜 1점이죠.”
포수 박신언이 고개를 숙였다.
마이클 피시의 공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평소보다 공이 더 좋다.
문제는 공이 좋아서 문제다.
자기 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 공을 쉽게 던진다.
폭스가 하위권 팀이지만 장타력만큼은 어느 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박신언이 마이클에게 침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메이저리그에서 레귤러 선발을 했던 선수이니만큼 마이클은 자기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더불어 성격도 다혈질이라 기분이 나쁘면 공이 제멋대로 날아간다.
‘오케이, 오케이.’
마이클은 자긴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냈으나…….
탁!
탕!
탁!
“안타! 또 안타가 나옵니다!”
“마이클 선수, 너무 정면으로만 붙습니다. 빼는 공이 없어요. 이러면 타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죠. 투수는 타자가 망설이게 해야 성공합니다. 타자에게 확신을 줘선 안 돼요.”
“벌써 3점쨉니다. 야금야금 계속 점수를 뺏기고 있습니다.”
폭스는 추가 점수까지 내면서 1회에만 4점을 냈다.
폭스의 초반 기세에 부산 팬들은 흥에 겨워 응원가를 불렀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잠실을 사직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
부산 팬들의 응원가를 등에 업고 폭스의 선발투수 신규원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신규원 선수가 몸을 풉니다.”
“올해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방어율이 4점대까지 올라갔거든요? 피로감이 있어 보입니다.”
“신규원 선수가 참 많은 이닝을 책임졌죠?”
“그렇습니다. 저번 경기에도 부진했거든요. 근 5년 동안 공을 많이 던졌죠.”
“하지만 에이스는 또 에이스 아니겠습니까? 신규원 선수, 오랜만에 든든한 득점 지원을 받으면서 경기를 시작하네요.”
신규원이 로진을 손에 툭툭 털었다.
키 180cm을 조금 넘는 키에 앳되고 포동포동한 얼굴만 보면 운동선수가 아니라 공부만 하는 대학생으로 보였다.
직구 구속도 140km/h 언저리였고 투구 폼도 예뻐 폭스 팬들에겐 공주님이란 별명까지 있는 선수였다.
“타석엔 1번 타자 설진일 선수가 들어옵니다.”
“고트에선 1번 설진일, 2번 김인환, 3번 송석현 선수 라인업을 계속 고수하고 있죠? 선수들의 이탈로 득점력이 떨어진 만큼 상위 타선에 펀치력 있는 선수를 올려 한 점이라도 더 빨리 많이 올리겠다는 심산으로 보입니다.”
“KS포가 저번 울브스전에는 조금 부진했습니다. KS포가 시들하면 고트의 타선에 힘이 많이 빠지죠?”
“그렇습니다. 그만큼 KS포 말고도 다른 선수들이 힘을 내 줘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KS포에만 맡길 수 없어요.”
설진일은 신규원을 처음 상대했다.
전략 미팅에선 신규원을 A급 투수라고 조심해서 상대하라 강조했다.
공격적으로 나서지 말고 공 하나를 노려서 치는 게 좋다고 말했지만…….
“쳤습니다! 2루수가 점프했지만 놓칩니다! 초구를 쳐 내면서 출루하는 설진일 선숩니다.”
“설진일 선수, 참 마음이 급합니다. 초구를 좋아하는 1번 타자는 처음 보네요. 초구부터 굉장히 과감해요.”
“안타를 쳤지만 위원님께선 평가가 그리 후하진 않은 거 같네요.”
“예, 1번 타자면 팀을 위해서 공을 오래 보면서 다른 타자들이 공을 분석할 시간을 벌어 줘야죠. 1번 타자가 초구를 치다 아웃되면 아웃 카운트 하나 이상이 낭비되는 꼴입니다.”
신규원은 안타를 맞고도 가볍게 웃었다.
스트라이크존 바깥으로 던진 초구를 억지로 밀어 쳤다.
안타를 맞았어도 본인의 의도대로 흘러갔으니 나쁠 게 없다.
“후우우.”
설진일이 발을 구르면서 도루 타이밍을 쟀다.
송석현은 대기 타석에서 설진일과 신규원을 바라봤다.
신규원은 1루 견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세트포지션 자세에서 텀을 오래 뒀다.
“제1구!”
신규원은 김인환에게 바깥쪽 패스트볼을 던졌다.
존에서 공 하나 빠지는 코스였지만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외쳤다.
“스트라이크. 좋은 코스로 들어갔습니다.”
“김인환 선수가 잘 지켜봤어요. 지금 코스는 쳐도 좋은 공 안 나와요.”
송석현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제구도 훌륭했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주자 견제다.
1루 견제 대신 투구 딜레이를 길게 둬서 주자의 발을 묶었다.
송석현도 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도루 타이밍을 재 봤다.
송석현이 일곱을 외칠 무렵 신규원은 어느새 공을 던지고 있었다.
최소한 퀵 모션이 1.3초 안에 무난하게 들어온단 얘기다.
-스트라이크!
“김인환 선수가 헛스윙을 하면서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방금 체인지업은 정말 좋았죠? 김인환 선수도 배트를 안 낼 수가 없었습니다. 스트라이크존 너무 가운데도 아니고 바깥쪽도 아닌 코스에서 떨어진 공이라 안 속을 수가 없죠.”
“저 체인지업이야말로 신규원 선수의 트레이드마크죠?”
“신규원 선수를 폭스의 에이스로 만들어 준 공입니다. 직구랑 릴리스 포인트도 똑같고 쿠세, 그러니까 습관이라고 하죠? 공을 던질 때 직구와 체인지업을 구분하기 어려워서 노리고 치지 않으면 칠 수가 없습니다.”
“체인지업의 낙폭도 크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신규원 선수는 스플릿 핑거 체인지업을 던지는데 타자 입장에서는 공이 뚝 떨어지는 걸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만큼 낙차도 크고 스피드도 10km/h 이상 차이가 나서 타자가 속기 딱 좋습니다.”
김인환은 제3구 체인지업에 헛스윙을 하면서 물러났다.
삼구 삼진.
김인환이 고개를 숙인 채 벤치로 향했다.
“김인환 선수의 부진이 길어지네요. 이러면 송석현 선수의 부담이 더 커지거든요?”
“김인환 선수가 부진하면 송석현 선수를 거르면 그만입니다. 최재완 선수도 최근 페이스가 안 좋거든요.”
송석현이 예의 긴 배트를 휘두르며 타석에 들어섰다.
여태 만나 본 투수와는 다른 유형이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피네스 피처.
140km/h를 겨우 채우는 직구로도 에이스 소리를 듣는 투수.
제구가 좋고, 영리하며, 변화구가 좋다.
몰리는 공은 오히려 속이기 위한 공이라 생각하고 외곽으로 오는 공을 노려야 한다.
‘패스트볼, 아웃사이드.’
포수는 송석현을 상대로 피해 가는 전략을 택했다.
스트라이크존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에 미트를 내밀었다.
신규원은 가볍게 공을 던졌다.
팡.
살짝 빠지는 공에 송석현은 배트를 내지 않고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쉽게, 쉽게 가네요.”
“꽉 찬 공이었죠?”
송석현은 어이가 없어 심판을 보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한두 개 차이야 심판 마음이다.
괜히 심판과 싸워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인정하는 게 더 빠르다.
저 코스의 공을 계속 던질 수는 없을 테니 일단 거른…….
-스트라이크!
“연속 스트라이크! 신규원 선수! 오늘 정말 컨디션이 좋은가 보네요!”
“바깥쪽 직구에 송석현 선수가 꼼짝하지 못합니다.”
송석현은 타석에서 한발 물러나 숨을 내뱉었다.
아까보다 공 반 개는 더 빠진 공이다.
통상적인 스트라이크존이라면 공 한 개는 빠진 공이다.
이렇게 바깥쪽에 존을 잡으면 저 코스의 공은 타자가 잘 쳐야 단타가 끝이다.
체인지업.
포수가 미트로 아래를 가리켰다.
제3구이니만큼 한번 떨어뜨려 보자는 신호였다.
신규원은 바깥쪽 코스에 체인지업을 던졌다.
송석현은 아까와 같은 코스로 오는 공에 배트를 휘둘렀다.
신규원의 체인지업은 속도를 죽이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속도가 붙은 송석현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입니다! 신규원 선수가 KS포를 연속 삼진 두 개로 잠재웁니다.”
“송석현 선수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체인지업에 완전히 속았어요.”
“고트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KS포가 1회엔 힘을 못 썼습니다.”
“오늘 승리의 여신이 폭스에게 미소를 보이는 거 같네요.”
송석현은 벤치로 와 고개를 저었다.
김인환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그른 거 같다. 체인지업이 너무 좋아.”
“그러게요. 제가 본 체인지업 중에서는 최곤데요?”
“이럴 땐 어떡하면 좋냐? 스윙이 아직도 너무 커서 그런가?”
“그냥 상대 공이 좋은 거예요.”
“그럼 별다른 방법이 없는 거야?”
“타석의 가장 앞에 서서 체인지업의 낙차가 커지기 전에 공략하는 것도 방법이죠. 아니면 히팅 포인트를 뒤에 두든가.”
“그러면 칠 수 있을라나?”
“저도 모르겠어요. 저런 체인지업이 저처럼 배트 무거운 거 쓰는 사람한테는 제일 잘 먹히는 변화구라…….”
송석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죽 쓰면 내일 무슨 기사가 나갈지 벌써 상상의 나래가 촤르르 펼쳐진다.
어떻게든 부진은 면해야 한다.
자신과 궁합이 가장 안 좋은 투수지만 프로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바깥쪽에 후한 스트라이크존, 최고의 체인지업을 가진 투수에게 송석현이 낼 수 있는 패가 무엇일까?
송석현은 고심 끝에 배트의 노브를 꽉 쥐었다.
“이건 너무 복불복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