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의 끝
삐뽀, 삐뽀, 삐뽀, 삐뽀.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과대는 구급차에 실려 갔다.
구급대원에게 실려 갈 때 자기 골수가 흐르는 거 아니냐며 울어 구급대원의 핀잔을 들었다.
“이마가 좀 찢어진 정도예요. 골수가 흐를 정도면 이렇게 얘기 못합니다.”
이마가 찢어진 정도라지만 술자리에서 피를 봤다.
술자리는 어수선해졌다.
3학년, 4학년 남학생들은 따로 구석에 모여 송석현을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쑥덕였다.
무리엔 송석현에게 자리에 앉길 권한 여학생도 껴 있었다.
오늘의 사고가 고의가 아니었는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야…….”
김영석은 송석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왜, 인마.”
김영석은 누가 들을까 말은 못 하고 눈치만 살폈다.
송석현이 운동선수라곤 하나 혼자고, 술집엔 남학생들만 수십 명이 있었다.
송석현이 덩치라도 남들보다 크면 모를까, 남들보다 조금 더 건장한 수준이었다.
가게 안에는 송석현보다 키가 더 크고, 덩치도 더 좋은 남학생들이 많았다.
증거는 없지만 의심은 짙은 상황에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야, 이건 아니지. 따질 건 따져야지.”
“가자. 확실하게 할 건 해야지, 우리 과 체면이 있는데.”
술을 마신 데다 송석현은 혼자고, 자기들은 수십 명이다.
덩치가 가장 좋은 남학생이 가슴을 활짝 펴고 송석현에게 걸어왔다.
송석현은 일부러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저기, 잠깐만 얘기 좀 할까?”
“네? 얘기요?”
“그래, 잠깐 나가자.”
김영석이 어찌할 바를 몰라 눈동자를 굴렸다.
“예, 나가시죠.”
송석현이 웃으면서 앞장서려던 찰나, 퉁퉁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발소리였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면서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꼭 내가 직접 와야 되냐?”
고개를 내민 남자는 정미남이었다.
평소에는 그저 덩치 큰 바보 같은 정미남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엔 절로 뒷걸음질을 치게 만드는 남자였다.
키는 190cm에 몸무게 120kg.
운동부 생활을 통해 얻은 근육 위에 지방이 덮인, 소위 근돼.
친구들이야 처먹처먹 하는 돼지라 놀렸지만 남들이 보기엔 성난 멧돼지였다.
하물며 무표정한 정미남의 얼굴이야…….
“어, 왔어? 안 그래도 가려고 했지.”
송석현이 먼저 인사하자 뒤에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숫자가 많다고 해도 압도적인 덩치에는 서로 미루면서 눈치를 보기 마련이다.
송석현은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밖으로 나가자고 말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남자는 송석현과 정미남을 번갈아 보면서 반 발자국씩 뒷걸음질 쳤다.
“여기, 이거요.”
송석현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정미남의 아버지에게 받은 돈 봉투였다.
“사고라지만 저 때문에 다치셨는데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못 찾아갔는데 내일 제가 찾아뵙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저 대신 전해 주십쇼. 제가 직접 전해 드리면 혹시 안 받으실 거 같아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두툼한 돈 봉투에 남자는 우물쭈물했다.
송석현은 남자의 손을 잡고 돈 봉투를 쥐여 줬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병원이랑 병실 꼭 알려 주세요. 꼭이요.”
송석현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돈 봉투를 받아 든 남자는 눈썹을 긁적였다.
“어, 어. 그래. 그…… 알았어. 이거 전해 줄게.”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죄송했습니다. 대신에 제가 술값은 계산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송석현은 카드를 꺼내 주인에게 건네곤 계산을 부탁했다.
“그럼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오늘 죄송했습니다.”
송석현은 인사를 하면서 김영석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송석현과 김영석이 먼저 가게를 나갔지만 정미남은 따라 나가지 않고 몸을 돌려 학생들을 내려다봤다.
영문도 모르고 왔지만 장사를 하면서 쌓아 온 눈치가 있었다.
“우리 영석이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학교생활 무탈~하게 잘하게 해 주십쇼.”
정미남이 목소리를 깔았다.
겨드랑이에 물건이라도 껴 넣은 것처럼 어깨를 쫙 펴고선 삐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미남이 눈을 좌우로 부라리자 학생들은 혹여 눈을 마주칠까 딴청을 피웠다.
딸랑.
정미남이 가게를 나간 후에야 가게를 팽팽하게 감싸 온 긴장감이 풀렸다.
갑작스러운 사고, 피, 구급차, 대치 상황까지.
마지막엔 정미남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술자리는 거기서 끝이었다.
한창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무색하게 학생들은 썰물처럼 가게를 벗어났다.
* * *
“야, 그런데 뭔 일이야? 뭔데 분위기가 저렇게 조졌냐?”
가게를 벗어나자 정미남은 송석현에게 따져 물었다.
“뭐…… 약간의 사고가 있었어.”
“무슨 사곤데 그 돈을 다 줘?”
“대갈빡을 조사 버렸거든.”
“엥? 네가? 때렸어?”
“아니. 사고야, 사고. 어디까지나 사고.”
송석현은 걸음을 멈췄다.
정미남과 김영석도 따라 멈췄다.
“오늘은 영 흥이 깨졌다. 피곤하기도 하고. 우리, 이만 집에 갈까?”
김영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뭐, 다음 주 월요일 날 보자. 그땐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쏠 테니까 다들 시간 비워 두고.”
김영석이 말했다.
“나는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먼저 갈게. 너희들도 가.”
정미남이 말했다.
“같이 가, 그럼.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일 텐데 잠깐 들르지 뭐.”
“아냐. 시간이 좀 걸려.”
“이 시간에 어딜 가는데 시간이 걸려? 걸 프렌드라도 만들었냐?”
송석현은 정미남의 발을 툭툭 쳤다.
“그래, 우리 먼저 갈게. 들렀다가 와.”
송석현의 눈치에 정미남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김영석은 말없이 몸을 돌려 다른 길로 걸어갔다.
코너를 돌아 김영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두 사람은 기다렸다.
“야, 뭔 일 있었어? 영석이 쟤 왜 저래?”
“영석이 학교생활이 우리 생각보다 더 각박하더라. 요새 같은 시기에도 군기를 잡던데?”
“군기? 뭔 군기래?”
“체대도 아니고 공대에서 군기를 잡을 줄은 몰랐는데 좀 그렇더라. 뭐, 그래서 대충 사고 좀 친 거야.”
“미필적고의 같은 거냐?”
“네가 그런 말은 어떻게 알아?”
“내 대가리를 너무 빠가로 아는 거 아냐? 나도 사회인이야. 뉴스 보고 신문도 보고 다 해.”
“빡쳐서 사고는 쳤는데 괜히 애 앞길을 꼰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미 사고 쳐 놓고는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그냥 군기만 잡은 거 아니니까 네가 난리쳤겠지. 네 성격에 무슨.”
송석현은 입맛을 다셨다.
“좀 재수 없고 심하긴 했는데, 그게 통과의례면 내가 영석이 볼 낯이 없잖아.”
“됐다 그래. 영석이도 입이 있는데 불만 있으면 말하겠지.”
“너한테도 미안하다. 밥이나 먹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 지금이라도 밥 먹을까?”
“됐어. 이미 흥이 끊겼는데 뭘. 너도 빨리 집에나 들어가. 다음 주에 거하게 쏠 준비나 하셔.”
“오케이. 알았어. 너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한우 빼고. 10만 원 이하로.”
“이건 뭐 어디 개 짖는 소리도 아니고, 존나 참신하게 짖네. 다 먹으라면서 웬 조건을 달아?”
“나 오늘 오링 난 거 못 봤냐?”
“월급도 받는 놈이 쪼잔하게.”
“야, 형 가장이잖냐. 내 돈이 내 돈이겠냐?”
정미남은 뒷짐을 지더니 한발 뒤로 물러섰다.
“치사하게 치트 키 쓰는 거 보소.”
“나도 나 쓸 거 안 쓰고 모아서 너 사 주는 거야. 내가 설마 돈으로 치사하게 굴겠어? 어?”
“됐다, 됐어. 사람 존나 미안하게 만드네.”
“야, 10만 원이면 충분하잖아.”
“알았다, 알았어. 그만 갑시다. 아, 진짜. 오늘 무슨 일이었는지 상세하게나 말해 봐, 대충 얼버무리지 말고.”
* * *
송석현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정미남은 당장 돌아가 과대라는 놈을 작살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정미남을 진정시키고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11시가 넘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때까지 안 자고 있던 송석현의 어머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송석현을 맞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나간 애가 이제 들어오니?”
“하, 오늘 진짜 힘들었어. 경기 뛴 거보다 더 힘들어.”
“왜? 무슨 일 있었어?”
“그건 아니고……. 아무튼 뭐. 아우, 머리 아파. 쉴 때는 그냥 푹 쉬어야지 밖에 나가니까 더 고생이네.”
송석현이 씻고 나오자 송석현의 어머니가 접시에 수박을 담아 왔다.
“잘 시간인데 이게 뭐야?”
“오늘 나영이 엄마가 너 먹으라고 이거 갖다줬어. 너 수박 좋아하잖아.”
“아, 정말? 벌써 수박이 나올 철인가?”
“앉아서 먹어, 앉아서.”
송석현은 마루에 앉아 수박을 하나 입에 물었다.
“맛있네. 수박이 벌써 다네.”
“안 그래도 철현이도 맛있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니 수박은 항상 나영이 어머니가 먼저 챙겨 주시는 거 같아. 슈퍼는 우리 집이었는데 말이야.”
“나영이 엄마가 참 살뜰하지. 우리 집 물건도 많이 팔아 줬어. 고객들에게 선물한다고 다달이 팔아 준 게 꽤 돼.”
“그랬어?”
“그럼. 나영이 엄마도 보험이다 화장품이다 영업하러 다니면서 참 힘들었을 텐데 오히려 우리 집 많이 도와줬지. 너희 아빠가 그렇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사나 싶을 때 돈 꿔 준 것도 나영이 엄마였고.”
“응? 그런 일이 있었어? 나 전혀 몰랐는데.”
“이제 와서 하는 얘기야. 그때 큰돈 빌려줘서 참 고마웠지. 그 돈 아니었으면 너 운동시킬 생각도 못 했을 거야.”
송석현이 볼을 긁적였다.
“내가 계약금을 받았어야 했는데, 쩝.”
“야구 하는 게 감사하지 무슨 계약금 타령이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니, 그런데 나영이네 집도 여유가 없지 않았나? 어떻게 돈을 빌려주셨대?”
“그러게. 동병상련이라 그랬나? 그 집도 나영이 엄마가 벌다시피 하고 엄마도 혼자 벌어야 하니까 마음이 갔나 보지?”
“고맙긴 참 고맙네…….”
어머니가 송석현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들, 너는 여자 친구 계획은 없어?”
“갑자기 왜 여기서 핸들을 꺾어?”
“이제 너도 본격적으로 프로 생활하잖아. 운동선수는 빨리 결혼해야 좋은 거야. 그래야 안정되고 더 열심히 하지. 그건 너도 알지?”
“나 이제 스무 살이야. 갑자기 무슨 그런 말을 해?”
“지금부터 부지런히 여자 친구를 만들라 이거지. 너 이러다 군대에 가고 어영부영하다 금방 시간 간다?”
“그건 그때 생각 좀 합시다. 수박 먹고 체하겠어.”
“나영이랑은 어때? 나영이 괜찮지 않니?”
송석현이 사레가 들려 쿨럭였다.
“나 진짜 체했어. 어우, 가슴 턱턱 막히네.”
“아들, 한번 말해 봐. 나영이랑은 아무 일 없었어?”
“무슨 일이 있어, 있기는?”
“너희들 맨날 붙어 다녔으면서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해 봐. 안 혼낼게.”
“아이, 진짜. 됐어, 안 먹어. 이거 부담스러워서 수박 먹겠어?”
송석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영이만한 애가 어딨어? 착하지, 예쁘지, 심성 곱지, 똑똑하지, 참 바르게도 컸지.”
“누가 뭐래?”
“나영이한테 잘해 봐. 전에 병원에서 네 얘기 슬쩍 꺼내보니까 나영이 반응은 나쁘지 않더라. 엄마 촉인데 나영이가 너 좋아하는 거 같아.”
“에헤이, 우리 조 여사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 그만 좀 엮어. 나영이가 뭐가 아쉬워서 날 만나? 걔는 강남만 나가도 연예인하라고 명함 받는 애야. 걔 스펙에 걔 얼굴이면 뭘 하든 성공할 텐데 나도 염치가 있지.”
“아니, 우리 아들이 어때서? 어디가 어때서? 프로야구 선수가 됐는데 이 정도면 번듯하고도 남지.”
“내가 야구로 성공해서 FA로 100억을 땡긴다고 해도……. 어휴, 됐어. 엄마도 그런 말 하지 마. 나영이랑 괜히 어색해지고 그러면 애들끼리 보기도 더 민망해진다니까.”
“엄마 생각엔 나영이도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 같은데…….”
“조 여사님, 그만하시구요. 저 쉬어야 합니다. 저 좀 잘게요. 돈 터치 미. 플리~즈.”
송석현은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송석현의 어머니 조애라 여사는 접시를 치우면서 한숨을 쉬었다.
“나영이 바지 끄덩이 잡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으이구, 답답이. 지 아빠를 빼닮아 가지곤.”
방에 들어온 송석현은 침대로 몸을 날렸다.
“시작부터 끝까지 피곤한 하루네, 하.”
마음 같아선 당장 자고 싶었지만 송석현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신언의 조언대로 월요일이라고 쉬는 게 아니라 이번 주 경기를 복기하고 다음 주 경기를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차라리 경기를 하는 게 낫겠어…….”
송석현은 컴퓨터를 켜고 엑셀을 켰다.
박신언이 남긴 자료를 엑셀로 정리하는 게 최근 일과였다.
“신규원, 정정국, 5선발……. 용병이 안 나오겠네?”
송석현이 감독의 마음은 몰라도 4위 웨일스와 2경기 차로 벌어진 건 잘 알고 있었다.
폭스전에서 점수를 따내지 못하면 3경기, 4경기 차까지 벌어진다.
통상 1경기 차를 따라잡기 위해선 일주일이 필요하다.
4경기까지 벌어지면 한 달 내내 위닝시리즈를 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이번 폭스전은 최소한 위닝이고 냉정하게 스윕까지 노려야 했다.
“어디 보자, 신규원……. 최고 구속이 140km/h인데 토종 1선발. 체인지업의 달인. 커터성 슬라이더도 좋고…….”
박신언은 신규원의 대처법으로 카운트에 몰리더라도 파울로 걷어 내면서 원하는 공을 기다리라고 적었다.
공이 느린 만큼 기다리라는 얘기였다.
공을 보고 치기보단 공을 기다렸다 노려서 치는 송석현에겐 그리 어울리지 않는 조언이었다.
“내일 신규원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할까…….”
다사다난한 하루였지만 야구 얘기에 송석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새벽까지 송석현은 허공에 스윙하고 고개를 내젓고 다시 스윙하길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