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88화 (88/201)

친구

“된 거야?”

“오케이. 딱 좋아. 이걸로 플래카드 뽑으면 되겠네.”

“무슨 플래카드를 뽑아, 미친놈아. 쪽팔리게.”

“에헤이, 초상권 때문에 그래?”

“아니, 초상권이 문제가 아니라…….”

“어허, 이럴 때 뽕을 뽑아야지.”

중학교에 들른 후 송석현은 정미남의 가게로 향했다.

정미남의 가게에서 사인을 하고 사진을 찍고, 작은 사인회까지 열었다.

정미남의 아버지는 두툼한 봉투를 송석현에게 건넸다.

“아이고, 아니에요. 아버지. 괜찮아요.”

“어허, 받아. 어른이 주는 건 거절하는 거 아니야. 빨리.”

“그래도 이거 너무 많아요. 제가 이걸 어떻게 받아요?”

“받아, 받아.”

정미남의 아버지는 송석현의 손에 기어이 봉투를 쥐여 줬다.

“내가 한 건 없지만 이렇게 바르게 커 줘서 고맙다. 내가 다 뿌듯해. 기특해서 주는 거니까 맛있는 거 먹고 보약도 챙겨 먹고 해. 프로가 얼마나 힘들겠니?”

“정말 괜찮은데…….”

“쓸데없는 데 쓰지 말고 꼭 몸보신하는 데 써야 한다. 벌써 다른 길로 빠지면 안 돼.”

“제가 뭘 어디로 빠지겠어요.”

“그래그래, 얼른 미남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놀아라. 놀 땐 또 놀아야지. 안 그러냐?”

송석현은 정미남의 가게에서 나와 봉투를 정미남에게 건넸다.

정미남은 봉투를 다시 송석현에게 밀었다.

“받아, 인마. 아빠가 너한테 주는 거잖아.”

“너무 크잖아, 액수가. 네가 받아서 돌려드려, 꿀꺽하지 말고.”

“됐거든? 줄 때 받아라. 오늘 홍보비라고 생각해.”

“무슨 홍보비야, 홍보비는.”

“네 얼굴을 박아 놓는 것만으로 이 돈의 몇 배는 더 뽑아먹을 수 있어. 그러니까 순순히 받아.”

“아이, 진짜…….”

“그럼 오늘 맛있는 거나 사 줘라. 나 한우 사 줘. 어때?”

“후, 그래. 그거 말고 또?”

“먹으면서 생각하자. 뭘 일일이 생각하고 먹냐?”

“하기야. 멧돼지가 생각이 많은 것도 웃기지.”

두 사람은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정미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길가에선 너 알아보는 사람이 없네.”

“내가 뭐 대단한 스타라고 날 알아봐?”

“서울의 스타, 잠실의 스타 아니냐. 알아봐야지.”

“오바 좀 작작 싸라.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나 진짜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사망해 버릴 듯.”

“그런데 영석이랑 나영이는 안 만나냐? 걔들은 바쁘대?”

송석현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영석이는 오늘 과에서 행사 있다던가 그랬어. 나영이한테는 따로 안 물었고.”

“나영이랑은 요새 냉전?”

“뭔 냉전이야? 바쁘니까 서로 못 보는 거지.”

“안 그래도 나영이가 바쁘긴 바쁜가 보더라. 요새 우리랑도 잘 안 보니까.”

“고시 준비한다면서. 그러면 바쁘겠지.”

“너희 어머니 아플 땐 자주 찾아가던데.”

“……뭐, 뭐! 뭐, 인마?”

“하, 뭐 나도 무슨 할 말이 있겠냐, 둘 사이 문젠데. 그렇다고 너무 정색 빨지는 마. 친구잖냐. 적당히 거리 벌리라고.”

“알았어. 아, 잔소리는.”

두 사람이 식당에 도착해 막 들어가려는 찰나 정미남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아빠. 왜? 5번에? 아, 또 5번이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전화를 끊은 정미남이 입맛을 다셨다.

“5번 방 기계가 또 말썽이네. 내가 가 봐야 할 거 같다.”

“나도 갈까?”

“됐어. 너는 여기서 고기 시켜 놓고 기다려. 오래 안 걸리니까.”

“나 혼자 고기 먹으라고? 그럴 거면 같이 가지, 뭐.”

“고기 구워 놓고 있어. 나 와서 바로 먹게.”

“그래도 쪽팔리게 혼자서 고기를 구워 먹냐, 그것도 한우집에서?”

정미남이 눈을 깜박였다.

“하긴, 너 혼자 고기 먹는 것도 웃기네. 어디 사진 찍혀서 돌아다니면 더 웃기겠네.”

“그냥 같이 가자니까.”

그때 송석현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김영석이었다.

“어, 왜? 나? 나 지금 미남이랑 있지. 미남이네 가게 근처야. 그건 왜 묻는데? 지금? 지금 와 달라고?”

정미남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영석이 선배들이 나 보자고 부른대. 어칼까?’

‘한번 가 줘, 영석이 기도 살려 줄 겸.’

‘그럴까?’

“그래, 알았어. 좌표 찍어. 내가 찾아갈게.”

송석현은 전화를 끊었다.

“과 행사 한다더니 또 나를 부르는 건 뭐래?”

“친구가 요새 핫한 스탄데 자랑하고 싶었나 보지. 이럴 때 얼굴 좀 팔려 줘라. 영석이 과 생활에 기름칠 좀 해 줘. 너도 걔 성격 알잖아? 학교 다닐 때도 우리 아니면 완전 아싸였는데 대학이면 더하겠지. 영석이한테 받은 게 있는데 이럴 때 도와줘.”

“스읍. 아아, 가서 무슨 얘기를 하냐, 나도 막 치대는 성격이 아닌데.”

“그냥 가서 앉아 있으면 알아서 하겠지. 그래서 안 갈 거야?”

“가긴 가야지……. 그럼 넌?”

“가서 연락해. 거기서 계속 있을 거 아니잖아? 영석이랑 같이 먹든 둘이 먹든 하자고.”

“오케이, 오케이. 알았으.”

* * *

송석현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김영석에게 받은 주소를 따라 가게를 찾았다.

대학가답게 거리엔 행인들로 가득했고, 술집이 1층부터 3층, 7층까지 가득했다.

송석현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간판을 헤맨 후에야 지하의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어? 왔다, 왔어! 송석현이다!”

“오오! 송석현! 송석현! 송석현!”

송석현이 가게에 등장하자마자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송석현을 보곤 그의 이름을 외쳤다.

송석현이 당황해서 눈동자를 굴리자 김영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웃었다.

“와, 왔어?”

“어, 어. 그래.”

김영석의 선배로 보이는 이들이 송석현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아, 반가워요. 나도 고트 팬이에요. 송석현을 이렇게 보네. 사진 가능하죠?”

“예, 뭐…….”

“나는 영석이 선배. 과대예요.”

“아, 그러세요?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하하, 우리가 더 반갑죠. 와서 앉아요. 왔으니 한잔하고 가야죠.”

과대라는 사람은 송석현을 끌고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송석현은 김영석과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채 따로 떨어진 테이블에 덩그러니 앉았다.

송석현이 슥 둘러보니 김영석은 가장 끝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여학생들이 과대 테이블에만 앉아 있는 게 유독 눈에 띄었다.

“자, 한잔 받아요. 내가 우리 석현이 홈런을 보고 속이 빵! 시원해졌잖아. 말 놔도 되지? 영석이 친구라며? 하하, 홈런을 아주 제대로 치던데?”

과대가 술잔을 내밀면서 술병을 들었다.

송석현은 술을 받고선 잔을 내려놨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원샷! 원샷! 원샷!”

과대가 큰 목소리로 선창하자 여학생들과 주변 남학생들도 함께 원샷을 외쳤다.

송석현은 웃으면서 손사래 쳤다.

“죄송합니다만 시즌 중이라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에이, 왜 이래, 술 마신다고 우리가 꼬지를까 봐? 걱정하지 마. 여기 다 우리 과 애들이야. 우리 과 의리가 얼만데. 절대 그럴 일 없어. 걱정하지 말고 마셔. 운동선수 주량을 아는데 뭘 빼? 앉아서 궤짝으로 마신다며?”

“뭐…… 그런 분들도 있겠지만 아무튼 저는 술은……. 예,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과대는 코를 킁킁거렸다.

“에이, 그냥 한 잔만 쭉 하지, 내 체면이 있는데. 우리 영석이가 친구 자랑을 하도 하길래 정말 궁금해서 오라고 한 건데. 나 고트 팬이야. 진성 팬. 우리 아빠부터 팬인데 뭐가 걱정이야. 믿고 마셔. 괜찮아.”

“아뇨, 아뇨. 술 마시는 거 소문날까 봐 그런 게 아니라 제 원칙입니다.”

“원칙은 아는데, 사람이 원칙대로만 살 수 있나. 안 그래? 그치, 애들아?”

“네, 네.”

“그럼 이렇게 하자. 딱 석 잔만 마시자. 한 잔만 마시면 아쉽고, 두 잔은 정 없잖아. 석 잔만 마시고 사인 좀 해 주고 가면 딱 모양새도 좋잖아. 안 그래? 이 정도면 좀 마셔야지. 영석이 체면도 있고 내 체면도 있잖아.”

송석현은 대답 대신 최대한 웃었다.

과대가 잠시 표정을 찡그렸다 폈다.

“영석이랑 불알친구라며. 영석이 얼굴도 있는데 여기 왔으면 좀 친구 체면 봐서 어울리고 해야지. 센스 없게 이럴 거야? 아직 어려서 너무 FM이네. 겁이 많아, 우리 석현이. 운동선수가 대범해야지 그러면 못써. 자 자, 한 잔 쭈우욱 들이키자. 혜미야. 거기 그거 줘 봐. 거기 안주. 안주도 싹 대령했으니까 깔끔하게 원샷 가자. 원샷! 원샷! 원샷!”

과대가 팔을 흔들며 주변을 보자 주변 테이블에서까지 손뼉을 치며 원샷을 외쳤다.

“원샷! 원샷! 원샷!”

송석현은 김영석이 있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김영석은 곁눈질로만 송석현이 있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송석현은 쓴웃음을 짓더니 술병을 그대로 들고 일어섰다.

드르륵.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좌중의 시선이 송석현에게 쏠렸다.

과대가 미간을 좁히며 송석현을 올려봤다.

송석현은 소주 한 병을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대더니 꿀꺽, 꿀꺽 마셔 버렸다.

그제야 과대가 표정을 풀었다.

“오오오! 오오오! 대박! 대박! 역시 야구 선수는 다르네! 술 존나 잘 마시네!”

과대가 손뼉을 치자 다른 학생들도 따라서 손뼉을 쳤다.

송석현은 술을 비운 후 술병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야, 야. 안주. 안주 줘야지.”

혜미라는 여학생이 꼬치를 송석현 입에 내밀었다.

송석현은 고개를 젓곤 파인애플 하나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럼 저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죠?”

“어, 어. 그래그래. 갔다 와. 역시 시원시원하네. 고트 4번 타자답다! 자, 박수!”

송석현은 박수 소리를 배경음으로 들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운동선수라지만 빈속에 소주 한 병은 쉽지 않았다.

송석현은 화장실 거울을 보며 숨을 돌렸다.

속이 울렁거려 연신 침을 삼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리는 띵했지만 속은 조금 가라앉았다.

송석현이 화장실을 나서려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1층으로 가는 계단 쪽이었다.

송석현이 발소리를 죽여 다가가자 1층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야, 야, 야. 아니 네 친구는 야구 좀 하면 저렇게 삐대도 되냐?”

“아닙니다.”

“아이, 씨발, 진짜. 내가 막 애원하면서 술 먹으라고 해야 돼?”

“아닙니다.”

“누가 보면 내가 존나 이상한 놈처럼 보일 거 아냐. 내가 먼저 오라고 했냐? 네가 불렀잖아. 안 그래?”

“……선배님이 전화하시라- 아!”

“이 새끼 보게. 조인트 안 까이니까 정신 못 차리지? 아, 이래서 문제야. 창환아! 이창환!”

“네! 네, 선배님!”

“1학년 관리 이따위로 하지? 우리 과 군기 존나 빠졌다?”

“죄송합니다.”

“토 존나 다네?”

“죄송합니다.”

“내가 풀어 주니까 정신 못 차리지?”

“죄송합니다.”

“하, 내가 진짜 이런 새끼들을 후배라고……. 아, 진짜 아까는 개 쪽팔릴 뻔했네. 아까 송석현이 술 나발로 깐 거 곤조 부린 거 맞지?”

“…….”

“아니, 씨발, 대답이 없어? 아니야?”

“맞습니다!”

“기분 존나 잡치네. 김영석.”

“네.”

“너 앞으로 과 생활 꼬이고 싶냐?”

“아닙니다.”

“내가 보기엔 쟤 네 친구 아냐. 쟤는 너 꼬봉으로 보는 거야. 그게 아니면 이렇게 꼬라지 부릴 수가 없거든. 친구라면 친구 체면도 세워 주고 하는 거지. 친구 선배들이 한 트럭 있는데 거기서 꼬라지를 부린다? 널 개좆밥으로 아는 거지. 친구 관리 좀 해, 인마. 불쌍해서 하는 말이야, 불쌍해서.”

과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송석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과대는 얘기를 하면서 스스로 화가 나는지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송석현은 계단으로 가지 않고 가게로 돌아갔다.

가게로 돌아와선 카운터 쪽에 서서 TV를 봤다.

카운터 옆 테이블에 있던 여학생들이 물었다.

“영석이 나갔는데.”

“아, 그래요?”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아니요. 오늘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아파서 잠깐 일어서 있게요.”

송석현은 TV를 보면서 숨을 깊게,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잠시 후,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송석현이 귀를 기울였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 과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송석현은 가게 문을 잡더니 이내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쾅!

“아!”

“아!”

“아, 씨발! 뭐야!”

문에 먼저 부딪친 사람은 과대였다.

과대는 종이 인형이 쓰러지듯 뒤로 휙 넘어가 쓰러졌다.

쓰러진 과대 뒤로 다른 학생들도 도미노처럼 넘어갔다.

맨 뒤에 따로 걷던 김영석만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박거렸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많이 다치셨어요?”

“아으…….”

과대의 이마에 피가 철철 흘렀다.

유리문 모서리에 이마를 제대로 박은 탓이었다.

“큰일이네. 피 나네. 어휴, 이러다 죽는 거 아냐? 골수가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아아아.”

과대는 밀려드는 고통에 말은 못 하면서도 골수라는 말에 몸을 떨었다.

“119에 전화해야겠다. 큰일이네. 이러다 사람 죽는 거 아닌가 몰라.”

송석현은 핸드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

“거기 119죠? 여기 사람이 크게 다쳐서요. 빨리 와 주셔야 할 거 같아요. 대가리가, 아니 머리가 깨져서요. 이러다 사람 죽을 거 같아요. 빨리 와 주세요. 빨리요.”

송석현의 호들갑에 가게 안의 사람들도 놀라 뛰어나왔다.

가장 놀란 건 피로 눈앞이 가려진 과대였다.

피와 눈물이 볼을 따라 주룩주룩 타고 내렸다.

“사, 사, 살려 주세요…….”

과대의 가냘픈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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