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여기요.”
송석현은 커피와 케이크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윤로미가 핸드폰을 꺼내 음식 사진을 먼저 찍었다.
“맛있겠다! 그치?”
“예, 맛있어 보여요.”
“먹어 볼까?”
윤로미는 케이크를 크게 잘라 떠먹었다.
“음, 맛있다. 너도 먹어 볼래?”
윤로미가 케이크를 잘라 송석현에게 내밀었다.
송석현은 순간 당황했지만 윤로미는 송석현 입 바로 앞까지 포크를 내밀었다.
“얼른.”
송석현은 얼결에 입을 벌려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어때? 맛있지?”
“예…… 맛있어요.”
송석현은 오물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라 카페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저기…….”
“누나라고 해. 누나.”
“예. 저기, 누나. 보는 눈 많아요. 저한테 이러시면 누나가 곤란해지잖아요.”
“왜? 나 모자 썼는데 누가 알아본다고.”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텐데 곤란하지 않으시겠어요?”
“너 알아보는 사람은 있어도 나는 없을걸.”
“제가 뭐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절 어떻게 알아보겠어요?”
“그러면 뭐가 걱정이야? 누구한테 들킬까 봐?”
“들킨다기보다는…… 누나가 괜히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봐 걱정돼서요.”
“어떤 소문?”
“그…… 스캔들이나…….”
“너랑? 열애설?”
송석현의 얼굴이 파스스 붉어졌다.
“왜? 누나랑 열애설 나면 불쾌해?”
“아뇨, 아뇨. 불쾌한 건 아니구요.”
“그럼 됐네. 누나, 동생끼리 밥 먹고 커피 마시고 그러는 게 뭐 어때서. 안 그래? 네가 유난히 오버하는 거 아니야?”
송석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정말 자신이 오버하는 걸까?
자기 주변에 친한 여자라곤 나영이가 전부였다.
나영이랑은 남자와 여자 관계라기보단 친구와 친구 사이였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나영이가 자기한테 케이크를 먹여 준다?
상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면서도 혹시 자기가 유난떠는 건 아닐까 주눅 들었다.
“자, 봐 봐. 알아보는 사람 없잖아.”
윤로미가 갑자기 모자를 벗었다.
송석현은 당황해서 말도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카페에 가득한 사람들은 자기 할 일만 할 뿐, 윤로미에게 눈길을 두진 않았다.
“으이구, 네가 너무 유별난 거야. 봐 봐.”
“쩝, 그러게요. 죄송합니다.”
“뭘 또 죄송해? 숙맥이라더니 거짓말은 아니네.”
그때 윤로미의 전화가 울렸다.
윤로미는 전화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송석현은 혼자 남아 윤로미를 기다렸다.
잠시 후, 윤로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어떡하지? 엄마랑 아빠가 지금 집에 왔다네. 지금 집에 가 봐야 할 거 같아.”
“아, 그래요? 그러면 가셔야죠.”
“미안. 이제 앉았는데.”
“괜찮아요.”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때 또 먹자.”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일어설까요?”
송석현은 쟁반을 반납한 뒤 윤로미와 함께 카페를 나섰다.
윤로미는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는 여기 말고 내가 자주 가는 디저트 카페 가자. 선샤인 브런치라고 거기 크로와상을 내가 엄청 좋아하거든. 말차 크로와상 먹어 봤어?”
“아뇨. 저는 그런 건 잘 안 먹어서요.”
“잘됐다. 다음에 같이 먹자. 나 기분 안 좋을 때 거기 크로와상 먹으면서 기분 풀거든. 홍차도 있고 말차도 있고 초코도 있고 다 있어. 맛있는 건 다 있어.”
“예, 알겠습니다. 일단 잠깐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택시 잡을게요.”
송석현은 금세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윤로미는 택시를 타고 떠나기 전 창문을 열고 두 손을 뻗어 흔들었다.
“오늘 고마워. 잘 가. 이따 연락할게.”
“네, 들어가세요.”
송석현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윤로미는 피식 웃었다.
“야! 그렇게 깍듯이 하니까 내가 무슨 못된 선배 같잖아!”
윤로미는 창문을 올리고 바로 앉았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윤로미의 얼굴을 비췄다.
윤로미는 이를 드러내곤 활짝 웃었다.
“하.”
윤로미와 헤어진 후 송석현은 한숨을 먼저 쉬었다.
긴장해서 머리가 어질하다.
혹시 사람들이 윤로미를 알아보면 어쩌나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시간도 별로 없네.”
송석현이 핸드폰을 본 뒤 걸음을 재촉했다.
오랜만의 휴일답게 오늘 스케줄이 빠듯했다.
원래는 오전까지 푹 쉬고 저녁 늦게까지 밀렸던 약속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김정률 덕에 점심시간까지 잡아먹었다.
덕분에 숨 한 번 돌릴 틈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안녕하세요.”
윤로미와 헤어진 후 송석현이 향한 곳은 일신 중학교였다.
송석현과는 연고가 없었지만, 송석현의 고트행을 추천해 준 이기성이 코치로 있는 학교였다.
“이야, 정말 성공해서 돌아왔구나. 하하.”
이기성 코치는 송석현을 보더니 꽉 안았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전화만 드려서.”
“아냐, 아냐. 이렇게 찾아 준 게 고맙지. 안 그래도 매일 네 경기 챙겨 보고 있었어. 잘하더라. 정말 잘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코치님 덕분이에요.”
“내 덕은. 네가 잘한 거지. 오히려 내가 네 덕을 보고 있어. 너랑 아는 사이라고 하니까 애들이 난리다, 난리. 하하. 이따가 사인해 주고 가. 알았지?”
“그럼요. 당연하죠.”
이기성 코치는 일신 중학교 선수들을 불러 송석현을 소개했다.
송석현은 어색해서 눈길을 둘 곳이 없었지만 어린 선수들은 선망의 눈으로 송석현을 올려봤다.
“봐. 너희들은 내 말을 못 믿고 말이야. 내가 송석현이랑 아는 사이라고 했지?”
어린 선수들은 신기하게 쳐다보면서도 다가오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송석현은 잠시 고만하다 먼저 어색함을 떨쳐 내곤 인사를 건넸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안녕하십니까?”
“말 편하게 해, 편하게. 아직은 변변찮은 선수지만 그래도 코치님 덕분에 프로에 들어갈 수 있게 됐어. 코치님이 내 은인이시지.”
“에이, 무슨 은인까지. 하하.”
“그러니까 너희들도 코치님 말씀 잘 들어. 정말 좋으신 분이거든.”
그때 어린 선수 하나가 손을 들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어떡하면 홈런을 그렇게 멀리 칠 수 있으세요?”
질문한 아이는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머리는 밤톨처럼 까까머리에 눈은 초롱초롱해서 보기만 해도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는 아이였다.
“홈런의 비결이라……. 그건 내 비밀인데.”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저도 홈런 치고 싶은데…….”
“하하, 알았어. 알려 줄게. 너희들에게만 알려 줄게.”
송석현이 이기성 코치를 바라봤다.
개인적으로 코칭하는 만큼 코치에게 허락을 구하는 눈이었다.
“그래, 우리 어디 한번 고트 4번 타자의 홈런 비결을 들어 볼까?”
이기성 코치가 허락하자 송석현이 아이들에게 소리 죽여 말했다.
“비밀은 말이야…….”
송석현은 말을 하다가 잠시 고민했다.
어린 아이들에게 타격 이론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정미남, 김영석과 함께 야구 책을 보면서 웬만한 야구 이론에 대해선 달달 외울 정도였다.
고등학교에 와선 부상으로 신음할 때 김영석과 인터넷을 뒤져 가며 새로운 야구 트렌드도 일찍 접했다.
송석현의 타격 폼은 어릴 때부터 쌓아 온 이론과 자신의 경험, 직관을 녹여 만든 폼이니만큼 통상적인 타격 폼과는 달랐다.
프로 선수라면 이론적 토대가 빈약하다고 해도 송석현이 하는 얘기를 금세 이해할 수 있겠지만 중학생들에겐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이해할 토대가 부족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자신의 얘기가 어린 친구들에게 편견을 심어 줄 수 있었다.
아직 힘이 부족한 중학생들이 벌써 스트라이드를 좁히고 힙턴과 당겨 치기로 풀스윙만 한다면 정확도와 파워 모두 망치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저…… 저기…….”
송석현이 한참 뜸을 들이자 어린 선수들이 송석현의 눈치를 봤다.
송석현은 아, 하고 웃었다.
“다는 말해 주지 못하지만 이건 말해 줄 수 있어.”
어린 선수들이 눈을 빛냈다.
“배트. 나는 남들보다 1인치 이상 길고, 10% 이상 무거운 배트를 써. 그러면 배트 컨트롤이 더 어려워지지만 그만큼 더 힘을 실을 수 있거든.”
아마추어 야구에서도 나무 배트를 쓰면서 최근 고교 리그에서 장타가 실종됐다.
알루미늄 배트보다 반발 계수가 턱없이 적은 나무 배트로 장타를 노리기보단 철저히 스몰 볼로 나가는 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송석현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스몰 볼은 장타가 부족한 팀이 택하는 차선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장타가 최우선이고 단타와 작전은 옵션이다.
학생 때는 삼진을 먹더라도 온 힘을 실어 스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릴 땐 힘이 부족해 나무 배트로 풀스윙을 해도 홈런은커녕 담장 근처로 보내기도 힘들겠지만 힘은 프로에 와서 키우면 그만이다.
어릴 때 몸에 밴 스윙은 좀체 고치기 어렵다.
스윙이 큰 타자가 스윙을 줄이는 건 쉽지만, 애초에 스윙이 작은 타자가 스윙을 키우는 건 어렵다.
풀스윙은 배트에 온몸의 힘을 싣는 과정이니만큼 어릴 때부터 풀스윙으로 온몸의 힘을 싣는 감각을 익혀야 한다.
중학교 때까진 알루미늄 배트를 쓰지만 고등학교 때는 나무 배트를 잡아야 한다.
많은 어린 선수들이 줄어든 반발력에 아예 장타를 포기한다.
더 가벼운 배트로 바꾸고 더 배트를 짧게 잡는다.
스윙 폭도 줄인다.
스윙을 제대로 끝마치기 전에 1루로 달릴 준비를 한다.
그러니 어린 학생들의 장래를 위해선 오히려 역으로 배트를 더 길게 잡고, 배트를 더 무겁게 쓰는 게 맞지 않을까……라는 게 송석현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배트가 다루기 어려우면 배트를 내는 데 더 신중해진다.
아무 공이나 쳐서 1루로 빨리 달릴 생각을 할 수 없다면 제대로 치겠다는 선택지만 남는다.
이기성 코치나 어린 학생들은 송석현의 고민까진 이해하진 못했지만 특별한 배트를 쓴다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꽤 그럴듯한 이유 아닌가?
“그러니까 너희들도 너무 가벼운 배트를 쓰거나 짧게 잡지 마. 무거운 배트를 쓰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니까.”
송석현에게 질문한 밤톨머리 소년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럼 저도 홈런을 칠 수 있나요?”
다른 친구들이 파하하 웃었다.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작은 친구였다.
송석현이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이기성 코치가 옆으로 와 소곤거렸다.
“황근성이라고 중 3인데 애가 키가 작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웬만하면 좋은 말 해 줘.”
송석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름이 뭐야?”
“황근성입니다.”
“그래, 근성아. 내가 너한테 하나만 물어도 될까?”
“네.”
“넌 1루타가 좋아, 2루타가 좋아, 3루타가 좋아, 홈런이 좋아?”
황근성은 눈을 깜박였다.
무슨 뜻인지 유추하는 눈치였다.
“홈런?”
“그래, 이왕이면 공을 멀리 보낼수록 좋은 거지?”
“네.”
“1루타보단 2루타가 좋고, 2루타보단 3루타가, 3루타보단 홈런이 좋잖아. 그치?”
“네.”
“그럼 고민할 게 있을까? 홈런을 치든 안 치든, 너는 최대한 공을 멀리 보내면 되잖아. 그치?”
황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홈런에 연연해하지 마. 힘껏, 힘껏 휘둘러.”
“저는 홈런 치고 싶은데 감독님은 그러지 말라는데 어떡해요?”
송석현이 이기성을 바라봤다.
이기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송석현이 말했다.
“음…… 감독님 말씀도 존중해야겠지만 네가 공을 맞힐 수 있다는 전제하에 최대한 공을 멀리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아예 공을 못 맞힌다면 공을 맞히는 게 우선이겠지만, 공을 맞힐 수만 있다면 멀리 보내는 데 집중해 봐.”
황근성은 입술을 앙 모았다.
송석현은 자기보다 네 살밖에 어리지 않은 소년임에도 귀여워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 감사합니다!”
황근성은 고사리손을 불끈 쥐었다.
송석현은 황근성에게 다가가 밤톨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잘해 낼 거야. 열심히 해 봐.”
그러자 황근성이 물었다.
“그럼 저도 프로로 갈 수 있어요?”
프로라는 말에 다른 친구들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송석현은 무릎을 굽혀 황근성과 눈을 맞췄다.
“아니.”
황근성의 눈동자가 떨렸다.
송석현은 씨익 웃었다.
“넌 메이저도 갈 수 있어. 메이저로 직행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해. 홈런을 칠 마음으로 스윙하면 장타가 나오는데, 메이저로 간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면 프로가 문제겠어?”
“제가 메이저리그요……?”
“그래, 메이저리그.”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엔 정미남과의 저녁 약속이 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정미남 가게에 가서 사인도 하고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다.
이기성 코치도 송석현을 불렀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우리 송석현 선수가 너희들한테 사인해 줄 거야. 사인받고 너희들도 열심히 해서 꼭 프로로 가자. 알았지?”
“네!”
송석현은 선수 하나하나에게 사인을 하고 이기성이 가져온 무더기 공에도 사인을 해 줬다.
황근성은 자기 유니폼을 내밀더니 사인을 해 달라 졸랐다.
“여기에? 안 돼. 너희 학교 유니폼이잖아.”
“해 주세요. 네?”
송석현이 이기성을 바라봤다.
이기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애가 고집이 세. 이름만 근성이 아니라니까.”
송석현이 펜을 들어 유니폼을 잡아당겼다.
“메이저리거 황근성이라고 써 주세요.”
송석현은 하하, 웃으면서 등번호 7번이라 쓰인 쪽에 사인했다.
[메이저리거 황근성]
황근성이 그제야 만족한 듯 헤헤 웃었다.
“감사합니다!”
황근성은 다다다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송석현은 통통 튀는 황근성의 달음질에 또 한 번 웃었다.
“애가 참 귀여운데요?”
“착하긴 한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워서 그런가 좀 응석받이야. 고집도 세고.”
“아…… 그래요?”
“못 먹어서 그런가, 키가 안 커서 속상하네. 애가 센스는 있거든.”
이기성 코치가 송석현 등을 두드렸다.
“어쨌든 고마워, 이렇게 찾아와 줘서.”
“아닙니다. 저야말로 늦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하하, 오늘 정말 고마웠어. 애들도 힘 많이 될 거야. 시간 많이 뺏었지? 오늘 휴일이라 약속도 많을 텐데 얼른 가 봐. 나도 총각 땐 월요일이 제일 바빴거든.”
“그럼 다음에 또 시간 날 때 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가고.”
이기성은 다시 선수들을 가르치러 돌아갔다.
송석현은 교문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작아 더 눈에 띄는 소년, 황근성이 몸을 날려 수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격수네. 운동 신경은 좋은가 본데.”
송석현은 교문을 벗어나자 택시를 탔다.
좌석에 머리를 기댄 채 혀를 내둘렀다.
아직도 약속 두 개가 남아 있었다.
“아이고, 휴일이 아니라 혹사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