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86화 (86/201)

긴 하루

월요일 아침.

송석현은 오랜만에 사복을 입고 서 있었다.

송석현 옆에는 김정률이 명품으로 옷을 쫙 빼입고 연신 핸드폰 카메라로 자기 얼굴을 살폈다.

“하아.”

송석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대체 왜 가야 돼요?”

송석현의 푸념에 김정률이 어깨동무했다.

“형 한 번만 좀 밀어줘라. 형도 장가가야지.”

“그렇다고 제가 굳이 여기에 낄 필요가 있을까요?”

“네가 없으면 명분이 없다 아이가, 명분이. 네 이름을 팔아서 이렇게 자리도 만들고 하는 거지.”

“전 안면도 없는 분인데.”

“그냥 인사만 하고 있어. 그러면 돼.”

어제 송석현이 전화한 사람은 김정률이었다.

뜬금없는 윤로미의 문자에 송석현은 김정률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정률은 송석현의 고민을 해결하는 대신 오히려 제안했다.

송석현은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내일 같이 병문안을 가자.

-내일이면 퇴원하는데 병문안을 가요?

-입원은 입원이잖아. 넌 사람이 측은지심도 없냐?

-아니 그래도 굳이 왜…….

-어허, 형 한번 도와주는 셈 치고 가자. 어? 부탁이다, 석현아. 형이 부탁할게, 좀.

패착이다.

차라리 아무에게도 안 알렸어야 했다.

“어, 오빠 벌써 왔어요?”

“어, 혜미야.”

김정률이 활짝 웃었다.

김정률이 반긴 이는 팽혜리였다.

윤로미와 함께 MBS에서 일하는 선배이자 스포츠 아나운서.

지금 윤로미와 장애진이 가장 핫한 스타라면 팽혜리는 원조 야구 여신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송석현은 팽혜리를 보자 고개를 숙였다.

“어머, 반가워요. 우리 이렇게 처음 만나네요?”

“네, 저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제가 영광이죠, 요새 가장 핫한 스탄데.”

팽혜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김정률이 헛기침했다.

“우리도 오랜만이지?”

“그러게.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 오빠는 잘 지냈어?”

“나야 뭐 맨날 똑같지. 야구 하고 또 야구 하고.”

“오빠도 1군에 와서 다행이야, 걱정했었는데.”

“그래? 내 걱정 했었어?”

김정률이 헤헤거렸다.

“그럼. 오빠가 2군에 있어서 나도 연락하기 좀 그랬어, 오빠 마음도 안 좋을 거 같아서.”

“아냐. 하지 그랬어.”

“그러는 오빠도 안 했으면서.”

“그거야…… 음…….”

김정률이 볼을 긁적였다.

고트의 황태자에서 먹튀, 은퇴를 앞둔 퇴물로 전락해 2군으로 떨어졌었다.

김정률은 주변과의 연락도 끊고 은연자중해 왔다.

“아무튼, 오빠가 다시 기운 차려서 보기 좋다. 다음에 꼭 인터뷰도 해 줘. 우리 회사에서도 관심이 많아. 언더핸드 클로저의 탄생! 고트의 황태자가 고트의 수호신으로! 멋있잖아. 그치?”

“그래? 멋있어?”

“나중에 꼭 인터뷰해 주는 거다. 우리랑 제일 먼저 하는 거야. 알았지?”

팽혜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김정률은 볼을 씰룩거리더니 손가락을 걸었다.

“그래.”

송석현은 두 사람에게 한발 떨어졌다.

코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기침이 나올 거 같았다.

“그런데 오빠가 로미랑도 친했었어? 갑자기 병문안 가지고 해서 놀랐잖아.”

“아아, 아니, 뭐…… 그렇게 친한 건 아닌데 그래도 한솥밥을 먹는 입장에서 다쳤다고 하면 얼굴이라도 내밀어 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잖아.”

“한솥밥?”

김정률이 눈동자를 굴렸다.

“우린 다 같이 야구로 밥 먹고사는 사람들이니까.”

“에이, 오빠가 로미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고?”

“아냐, 절대. 절대, 절대 그런 거는 아니야. 진짜로.”

“뭐야, 왜 그렇게 정색해?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그런 거로 장난치면 안 되지. 그리고 내가 로미한테 관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석현이가, 석현이가 관심이 있다고 해서.”

송석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는데 김정률이 송석현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면서 힘을 꽉 주었다.

“그치, 석현아?”

“그게…….”

김정률이 손에 힘을 더 줬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어머, 우리 송석현 선수도 로미한테 관심 있구나. 정말 요새 로미, 인기가 너무 많아.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에이, 그건 아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잖아. 워낙 네가 어? 예쁘고, 성격도 좋고, 원조 야구 여신이라 유명하고 하니까, 그래서 그런 거지. 무슨 꿔다 놓은 보릿자루야?”

송석현의 등에 닭살이 살짝 돋았다.

“뭐야, 갑자기 그런 말을 해?”

팽혜리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웃음은 감추지 못했다.

“아니, 네가 이상한 말을 하니까. 로미가, 어? 성격이 밝고 그러니까 다들 자기한테 관심 있는 줄 알고 들이대서 인기 있는 거지. 예쁜 거야 네가 제일 예쁘지.”

“오빠는 갑자기 그런 말을 해? 사람 쑥스럽게.”

팽혜리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김정률도 이를 활짝 드러내곤 웃었다.

송석현은 참다못해 어깨 위 김정률의 손을 살포시 뿌리친 후 입을 열었다.

“일단 병원으로 갈까요? 오늘 점심 전에 퇴원한다고 했는데 빨리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 그럴까? 가자, 혜미야.”

“어, 어. 그래.”

김정률과 팽혜리는 서로 환담을 나누면서 앞서갔다.

송석현은 두 사람 뒤에 조금 처져 걸었다.

“이게 데이트야, 병문안이야.”

송석현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름답지 않게 아직은 선선한 날씨였다.

* * *

“언니이이이~.”

“로미야~.”

팽혜리가 들어서자 윤로미는 두 팔을 벌렸다.

팽혜리와 윤로미가 포옹하는 사이 김정률과 송석현이 뒤늦게 병실에 들어왔다.

“흠흠, 안녕. 몸은 괜찮아?”

김정률의 인사에 윤로미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안녕하세요. 여긴 웬일이세요? 설마 제 병문안?”

“어, 같은 동종업계 사람끼리 다쳤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또, 석현이가 걱정을 워낙 많이 해서 말이야.”

“아아, 정말요?”

윤로미가 어색하게 서 있는 송석현을 바라봤다.

“내 걱정, 했다구요?”

윤로미는 송석현을 보고 말했지만 대답은 김정률이 했다.

“얘가 숫기가 없어, 숫기가. 안 그래도 어제 나한테 전화해선 로미 누나가 다쳤는데 어떡하냐고 엄청 발 동동거리더라.”

“예? 제가요?”

“이봐, 이봐. 애가 부끄럼이 많아. 혼자선 쑥스러워서 죽어도 못 간다고 하길래 나도 겸사겸사 같이 왔지.”

“아니, 제…….”

윤로미가 말했다.

“정말요? 그렇게 숫기가 없는 거예요? 난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얘가 머리가 똑똑해서 문제야. 생각이 많으니까 근심 걱정도 많아. 내가 어떻게 로미 누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수 있냐면서 자책하더라고.”

“선배님, 제가 언제요?”

김정률이 송석현의 어깨를 감싸면서 하하 웃었다.

“이래서 내가 나서야 한다니까. 참, 애가 손이 많이 가. 그래도 귀엽지 않아? 완전 순수하잖아. 퓨어, 퓨어. 얘는 아직 제대로 여자도 못 사귀어 봤데. 한마디로 모솔인 거지. 하하, 귀엽지?”

송석현은 혀가 꼬여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이 양반이 자기 잘되자고 이렇게 모함한다고?

“그래서 후배 걱정하는 혜미랑 같이 겸사겸사 왔어. 뭐, 괜찮지?”

“저야 고맙죠, 오늘 퇴원하는데 이렇게 병문안도 와 주시고.”

“발목은 어때?”

“하이힐을 신고 발목 삔 거라 한 달 이상은 깁스해야 한대요. 그래도 이 정도로 다행인 게, 높은 데서 삐끗했으면 큰일 날 뻔했대요.”

“다행이네. 그치, 석현아?”

송석현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네, 다행이죠.”

그때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저 이제 퇴원 수속하셔도 돼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윤로미가 송석현, 김정률을 보며 말했다.

“저 지금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아, 그래? 알았어. 우리 나가 있을게.”

팽혜리가 말했다.

“그럼 나는 로미 도와줄게.”

“언니가 도와주면 좋지.”

송석현과 김정률이 병실 밖으로 나갔다.

윤로미는 두 사람이 나간 걸 확인한 후 옷을 벗었다.

“그런데 뭐야? 둘이 어떤 사이야?”

“뭐가?”

“짝사랑? 쟤는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선 되게 적극적이네. 너 아픈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윤로미는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언니는 정률 오빠랑 다시 시작하는 거야?”

“다시라니, 무슨 말이야?”

“에이, 언니 정률 오빠 얘기 몇 번이나 했잖아. 사석에서 얘기하는 야구 선수는 정률 오빠밖에 없었으면서.”

“아냐. 우리 그런 사이 아닌데.”

“딱 보니까 오빠가 내 핑계 대고 언니 만나러 온 거 같은데. 아니야?”

“오빠는 너랑 친해서 온 거잖아. 아니야?”

“저는 정률 오빠한테 연락한 적 없는데?”

“그럼 너 다친 건 어떻게 안 거야?”

윤로미가 헤헤 웃었다.

팽혜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뼉을 쳤다.

“그럼 네가 송석현한테 연락한 거야?”

“쉬잇. 다른 데 말하지 마. 그냥 귀여워서,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거야.”

“뭐야, 그동안 다른 선수들 연락은 다 쳐 냈으면서 이제 쟤 만나는 거야?”

“아니에요. 남동생 같아서 친하게 지내는 거야.”

“너 남동생이라면 맨날 싸워서 싫다며?”

“어…… 석현이는 착한 남동생?”

팽혜리가 하하, 웃었다.

“알았어. 뭐, 그렇게 알고 있을게. 비밀로 하면 되는 거지?”

“부탁해, 언니.”

“응. 대신 너도 정률 오빠랑 나랑…… 알지? 우리 그런 사이 아닌 거?”

“아직은?”

“얘가 진짜.”

윤로미와 팽혜리 둘 다 웃어 버렸다.

* * *

네 사람은 퇴원 수속을 밟고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김정률이 맛집을 알아 왔다면서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오늘은 내가 퇴원 기념으로 쏠게. 맛있게 먹어.”

“고마워요, 오빠. 잘 먹을게요. 하루 입원인데도 호강하네요.”

송석현은 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식사했다.

친한 사람이라곤 김정률 하난데 김정률은 팽혜리와 얘기를 나눈다고 정신없었다.

윤로미는 의도적인지 아닌지 몰라도 송석현에게 말을 걸지 않고 김정률, 팽혜리와의 대화에만 집중했다.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윤로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떡하죠? 생각해 보니까 병원에 짐을 놓고 온 거 같아요.”

“정말? 뭐 놓고 왔는데?”

“가방을 캐비닛에 넣고 깜박했어요. 아무래도 먼저 일어나야 할 거 같아요.”

“이거 먹고 같이 가자.”

“아니에요, 중요한 게 들어 있어서. 식사마저 하세요. 저는 먼저 일어날게요.”

“아냐. 우리 이거 다 먹었잖아. 그쵸, 오빠?”

“어, 어. 그치. 같이 가자.”

“아니에요. 맛있는 거 얻어먹었는데 제가 방해까지 하고 싶진 않아요.”

윤로미는 송석현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짐도 좀 있는데……. 석현아. 네가 좀 도와줄 수 있어?”

“제가요?”

김정률과 팽혜리가 송석현을 바라봤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 석현아. 네가 좀 도와주고 와.”

“로미야, 언니가 갈까?”

“아냐, 언니. 석현이가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석현이랑 갈게.”

송석현은 얼결에 윤로미를 따라 자리를 먼저 떠났다.

김정률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로미가 석현이를 마음에 많이 들어 하는 거 같은데?”

“오빠가 봐도 그렇지?”

“응, 딱 봐도 보이네. 어제 석현이한테 먼저 문자를 보낸 것도 로미였어.”

“정말? 로미가 먼저? 쟤가 그럴 애가 아닌데.”

“석현이가 밤중에 나한테 전화해서 어떡하냐고 물었다니까.”

“석현이도 되게 순수하구나.”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치?”

“그런데…… 아직은 많이 어리지 않나, 이제 스무 살이면?”

“그래 봐야 네 살 차이야. 딱 좋은 나이 아니야? 네 살 차이. 궁합도 안 본다잖아.”

“그런가?”

“응, 은근히 궁합도 중요해. 네 살 차이. 좋지, 딱 좋지.”

김정률은 커피 한 잔을 홀짝거리면서 팽혜리의 눈치를 봤다.

팽혜리는 고개를 숙인 채 김정률을 보지 못했다.

네 살.

참으로 우연이지만 두 사람의 나이 차도 네 살이었다.

* * *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치?”

윤로미가 창가에 비친 김정률과 팽혜리를 보며 말했다.

송석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어제 답장이 없어서 읽씹 한 줄 알았어.”

“아, 그게…….”

“너 정말 한 번도 여자 친구 만든 적 없어?”

“아뇨. 그 정도는 아닌데, 진지하게 사귄 여자가 없다는…… 겁니다.”

“맞네. 너 모솔이구나?”

“아뇨, 아닌데요.”

“귀여워, 하하. 너 되게 귀엽다.”

윤로미가 송석현을 빤히 쳐다봤다.

송석현은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얼른 병원 가시죠. 택시, 제가 잡을까요?”

“천천히 가자. 병원은 안 가도 돼.”

“네? 왜요?”

“짐 없어. 오빠랑 언니랑 좋은 시간 보내라고 빠져 준 거야.”

“아…… 그런 거였어요?”

“너도 참, 눈치껏 해야지. 오빠랑 언니랑 내 핑계 대고 데이트하는 거 안 보여? 이럴 땐 스윽 빠져 주는 거야.”

“제가 이런 건 좀 몰라서.”

송석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저희도 이제 집에 가면 되겠네요.”

“뭐가 그렇게 바빠? 오늘 내 병문안 온 거 아냐?”

“맞기는 한데…….”

“나 위로해 주러 온 건데 이렇게 가려고?”

송석현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눈알을 굴렸다.

“카페 가서 차 한잔하고 가자. 어때? 그 정도 시간은 되지?”

윤로미는 송석현의 대답을 듣지 않고 먼저 앞장섰다.

송석현은 절뚝이는 윤로미를 두고 갈 수 없어 뒤따랐다.

“천천히 가요. 다쳐요.”

송석현의 말에 윤로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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