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84화 (84/201)

잠실의 주인 (6)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가 넘어갔다.

함성훈 감독은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사무실에서 한 남자와 독대하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김학인.

직책은 고트의 운영팀장.

함성훈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쁘신데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것도 제 일인데요.”

“실은 부탁드릴 게 있어서 이렇게 부득불 모셨습니다.”

“예, 말씀하시죠.”

함성훈 감독은 콧잔등을 한번 매만졌다.

“벌써 이런 말 하는 게 낯간지럽긴 하지만, 지금 꼭 필요한 일이라서요. 혹시 트레이드 가능하겠습니까?”

운영팀장은 침음을 흘렸다.

“트레이드요?”

“네, 지금 성적을 보면 아시겠지만, 아직 포스트시즌을 포기할 정도는 아닙니다.”

“예, 요새 저희 팀 성적이 좋죠.”

“지금 저희 팀에 빈 곳이 많습니다. 잘 아시죠, 그건?”

“최소한 앞으로도 한두 달은 대규랑 낙균이, 문규는 없을 테고 불펜도 많이 힘든 거로 알고 있습니다.”

“트레이드로 부족한 걸 다 채울 순 없어도 급한 불이라도 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트레이드는 누굴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일혁을 내주고 불펜을 받아 왔으면 좋겠습니다.”

“음.”

운영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트레이드 매물로 올릴 매물 중에 가장 좋은 패네요.”

“일혁이 정도면 어느 팀을 가든 1군에 들어갈 수준입니다. 포수가 약한 팀에서는 주전도 꿰찰 수 있는 실력이구요. 좋은 불펜을 구하기가 쉽진 않겠지만 지금 우리 팀 불펜 아시잖습니까? 이름만 그럴듯하지 너무 경험이 적거나 혹사에 지쳐 있습니다. 급하게라도 선수 수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음…… 혹시 원하는 투수라도 있을까요?”

“포스트시즌 경쟁 중인 팀은 제외하고 총체적 난국인 피닉스도 제외하면 광주 불스와 부산 폭스 딱 두 팀입니다. 마무리까진 트레이드가 안 될 테지만 최소한 현재 1군 필승조 불펜 중 하나는 얻어 왔으면 좋겠습니다.”

“두 팀 모두 포수가 약하니까 딜은 가능하겠네요. 안 그래도 일혁이 트레이드를 요청했던 팀들이구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 팀 모두 투수가 강한 팀도 아니고, 지금 불펜이 가장 비쌀 때라는 건 잘 아시죠? 트레이드 마감 기한이 다가온 만큼 다른 팀에서도 두 팀에 불펜 트레이드 제안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일혁이만큼 센 매물도 없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운영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일 단장님께 보고드리고 회의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운영팀장이 감독실을 나갔다.

함성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의 컴퓨터 모니터엔 송석현에 관한 서류가 비쳤다.

* * *

[고트-울브스 경기 시청률 2.2%]

[새로운 스타 탄생! 잠실 장외 홈런! 송석현!]

[고졸 신고 선수의 신화 탄생!]

[치면 넘기는 남자!]

다음 날 스포츠 뉴스의 1면은 단연코 송석현이었다.

잠실 장외 홈런, 라이벌 울브스전 승리, 국가 대표 선발투수 장계성에게 2 홈런.

언론이 좋아할 소재였다.

울브스 2차전.

잠실야구장에 기자들이 배로 늘었다.

“한국시리즈야, 뭐야? 오늘 사람 왤케 많아?”

베테랑 김정률도 혀를 내두를 만큼 취재 열기는 뜨거웠다.

김인환과 송석현도 부쩍 늘어난 취재진의 숫자에 신기한 듯 연신 두리번거렸다.

“기자가 왜 이렇게 늘었데요?”

“그러게. 평소보다 훨씬 많은데?”

김정률은 송석현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찼다.

“송 스타, 기분이 어떠십니까?”

“뭐가요?”

“스타가 된 기분 말이야, 인마.”

“제가 무슨 스타예요, 그냥 한 경기 잘한 거 가지고.”

“아아, 피닉스는 팀도 아니다? 피닉스랑 한 경기는 쳐주지도 않겠다?”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아아, 피닉스라는 단어를 꺼내는 건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다?”

“아, 진짜. 선배님.”

김정률이 키득거렸다.

“이 순간을 즐겨. 인기라는 건 항상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오버만 하지 말고. 어?”

“……네.”

“그건 그렇고…… 어제 응큼하더라, 너? 윤로미를 안아 버리데?”

김인환의 눈이 커졌다.

“윤로미를?”

“인환이 넌 못 봤냐?”

“모, 못 봤죠.”

“어제 진일이가 얘한테 물벼락 쏟으려다 윤로미한테 불똥, 물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석현이가 그때 촤악 하고 윤로미를 안고 물을 다 맞아 주더라니까. 누가 보면 백마 탄 왕자인 줄.”

“선배님, 그건 전기가 통하는 전자 장비라…….”

“아아, 변명은 됐고요. 그래서 윤로미를 안은 기분이 어때? 누구는 손도 못 잡아 본 아나운서의 결혼식에 눈물 펑펑 흘렸는데 말이야.”

김인환이 정색했다.

“아, 형!”

“너도 열심히 해라, 열심히. 너보다 석현이가 먼저 식장이 들어가게 생겼어.”

김인환은 쀼루퉁해져선 혼자 앞서갔다.

송석현이 김정률 옆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그만 놀리세요. 어제는 그냥 해프닝이었잖아요.”

“해프닝? 에이, 왜 그러셔. 어제 윤로미가 나한테 네 번호 물어봤어, 인마.”

“네? 선배님이 가르쳐 준 거예요?”

김정률이 픽 웃었다.

“뭐야, 어제 벌써 연락했어?”

“어제 갑자기 문자가 와서 깜짝 놀랐어요. 전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거든요.”

“오올, 연상연하 커플 탄생? 나 양복 하나 맞춰 주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마웠다, 그게 전부였어요.”

“거기서 발전하는 거지, 고마워에서 사랑해~로.”

“자꾸 몰아가지 마세요.”

“왜 그러셔? 윤로미 같은 스타일이 싫은가?”

“그게 아니라……. 제가 뭐 벌써 여자 찾고 그럴 짬은 아니잖아요.”

“그럴 짬이 어딨어? 그냥 만나는 거지. 너 잘나갈 때 여자도 확 낚아채야 돼. 어영부영하다간 네가 만날 수 있는 여자도 영영 못 만나. 지금 나처럼 말이야.”

“선배님이 왜요?”

“나 잘나갈 땐 A급 연예인들도 막 연락 오고 난리였어. 하지만 그땐 야구만 한다고 제대로 만나지도 않았지. 하, 생각해 보면 가장 등신 같은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만나고 싶어도 길 가다 만나기도 힘드네.”

김정률이 뒷짐을 진 채 한숨을 쉬었다.

송석현은 할 말이 없어 입맛만 쩝쩝 다셨다.

화제를 돌리려고 주변을 살피던 중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설진일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설진일 선배도 잘하던데. 그쵸?”

“그러게. 진일이가 그 정도로 잘하는 줄은 몰랐어. 원래 포텐이 있는 놈이긴 했는데, 야구판에서 포텐 없던 놈이 있나.”

“선배님 얘기를 듣고 약간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잘하긴 잘하는 거 같아요.”

“쟤도 소싯적엔 날아다녔어. 투수로도 꽤 잘나갔었고 야수로 전향해서도 잘나갔었고.”

“투수로도 잘나갔어요?”

“쟤도 공 꽤 잘 던졌을걸. 지금도 외야에서 홈까지 노 바운드 송구할 수 있어.”

경기 시작이 가까워져 왔다.

양 팀 팬들이 내야석부터 채우기 시작하더니 외야석까지 빽빽하게 들어섰다.

어제의 잠실 매진에 이어 오늘마저 일찌감치 외야석까지 매진됐다.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송석현은 카메라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잠실 전광판에 송석현의 얼굴이 나오자 팬들이 함성을 질렀다.

“송석현! 송석현! 송석현!”

송석현은 쑥스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고트의 다른 선수들이 송석현을 가리키며 웃었다.

이에 반해 울브스 벤치는 분위기가 무거웠다.

장대희는 홀로 한쪽 구석에 앉아 전광판의 송석현을 쳐다봤다.

-플레이볼!

“경기 시작합니다! 고트와 울브스의 3연전 두 번째 경기. 오늘은 고트의 에이스죠? 이창훈 선수가 선발로 나왔습니다. 반드시 승리를 챙겨야 하는 날입니다.”

“울브스의 선발도 만만치 않아요. 김준기 선수가 나옵니다. 장계성 선수와 더불어 국내 좌완 선발투수 중 손에 꼽는 선숩니다. 구속은 빠르지 않지만 아주 정교한 제구와 변화구로 상대를 잡아내는 투숩니다.”

“오늘 경기도 재밌겠네요. 어제만큼 재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바람과 달리 고트의 에이스 이창훈은 시작부터 볼넷 두 개를 내주더니 연속 안타로 2점을 헌납했다.

승리의 여신이 오늘은 울브스를 향해 웃어 주나 싶었지만 기우였다.

울브스의 선발 김준기는 정교한 제구라는 장점이 무색하게 연신 가운데로 몰리는 공을 던지면서 연속 안타를 내줬다.

5회까지 두 투수가 내준 안타가 열네 개가 넘었다.

점수는 6-4.

울브스의 리드였다.

“오늘은 KS포가 개점휴업입니다. 발동을 안 하네요.”

“어쩔 수 없죠. 김인환 선수의 타격감이 죽으면서 상대 투수들이 송석현 선수를 걸러 버립니다. 지금 고트에 김인환, 송석현 선수를 빼면 확실히 제 몫 이상을 해 주는 선수가 없거든요. 설진일 선수가 오늘 연속 출루를 하고 있지만 득점에는 계속 실패합니다.”

함성훈 감독이 뒷짐을 진 채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왜 안 좋은 예감은 벗어나지 않는가.

피닉스전에서 날아다니던 김인환이 울브스전에선 짜게 식었다.

김인환이 부진하자 송석현을 걸러 버린다.

송석현의 뒤를 받쳐 줄 타자가 부족하니 KS 타선에서 자꾸 덜컹거린다.

타격감이 좋은 설진일을 송석현 뒤로 둘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형국이다.

KS 앞에 주자들이 나가지 못한다면 KS는 누굴 불러들인단 말인가?

“하.”

클린업트리오의 이탈이 뼈아팠다.

불펜만 필요한 게 아니라, 리드오프, 5번 타자까지 절실했다.

선발 이창훈을 믿었으나, 아무리 잘하는 투수라도 한 시즌에 적게는 두세 경기에서 많게는 그 이상 제 실력을 발휘 못하고 무너지는 일이 허다한 게 야구다.

에이스 이창훈이 무너지는 경기가 하필 오늘이었다.

KS포가 식어 버리고 에이스의 공이 무딘 날.

울브스도 선발 김준기가 흔들리긴 했지만 타선의 무게감이 달랐다.

여덟 개 구단 중 팀 내 실력 차가 가장 적게 난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울브스의 뎁스는 두터웠다.

선발이 시원찮은 날이었지만 타선의 힘으로 기어코 승리를 따냈다.

“경기 끝납니다. 9-6으로 울브스가 오늘 경기를 이기면서 울브스는 1위 페가수스를 바짝 뒤쫓습니다. 그에 반해 고트는 오늘 웨일스가 이기면서 공동 4위에서 단독 5위로 떨어집니다.”

“어제의 팽팽한 경기가 벌써 그립네요. 오늘 3점 차로 진 게 다행일 정도로 오늘 고트의 경기 내용이 부실했습니다. 선발이 무너지고, 타선은 출루를 하고도 잔루만 남겼습니다. 불펜은 오늘 경기 내내 볼넷과 실점을 기록했구요.”

“함성훈 감독이 1군 선수들을 대거 2군으로 내리고 2군 선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한 게 독이 됐나요? 피닉스전까지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지만 오늘 경기는 졸전이었습니다.”

“너무 많이 교체를 한 게 탈이 된 게 아닐까 싶네요. 이러면 감독의 리더십이 의심받게 되죠.”

“그럼 앞으로 고트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KS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든가, 아니면 KS포를 재가동시켜야죠. 김인환 선수나 송석현 선수 한 명만 부진해도 KS포의 시너지 효과가 확 줄어듭니다.”

“모두 쉽지 않은 주문이네요.”

어제의 환호와 달리 고트 팬들은 빠르게 잠실을 떠났다.

송석현도 짐을 챙겨 잠실을 떠났다.

오늘 경기 성적은 삼진 하나에 볼넷 세 개.

출루만 세 번을 했지만 득점은 하나도 없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고트의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김인환의 부진은 송석현의 침묵으로 이어졌고, 송석현의 침묵은 고트 타선의 궤멸이나 마찬가지였다.

불과 닷새.

닷새 만에 송석현은 고트의 승리를 좌지우지하는 키맨이 돼 있었다.

그날 저녁.

김인환은 집에 가지 않았다.

특타를 요청했다.

송석현도 김인환과 특타를 함께했다.

김인환과 송석현이 특타에 나서자 설진일도 특타를 요청했다.

중심 타선 셋의 자발적 특타에 고트 타자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모두 특타에 나섰다.

함성훈은 퇴근길을 멈추고 특타에 나선 타자들을 지켜봤다.

“그새 풍경이 바뀌었죠?”

운영팀장 김학인이 어느새 함성훈 옆에 섰다.

“예, 그러네요. 자발적 특타는 처음이네요.”

“그 전에는 말만 자발적이었는데 말이죠.”

“…….”

함성훈은 전임 감독에 대해 말을 아꼈다.

의견은 달랐어도 아버지의 제자고 자신을 뽑아 준 감독이었다.

“솔직히 최근에 성적이 좋긴 해도 구단 수뇌부에선 올 시즌 성적에 큰 기대 없으신 건 아시죠?”

“그렇습니까?”

“워낙 이탈한 선수들이 대어라 망신만 면하면 된다는 분위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전화위복 같아요. 2군 선수들이 대거 올라오니까 선수들이 똘똘 뭉쳐서 자발적으로 뭐라도 하려는 모습이 참 기특해 보입니다.”

“파벌 싸움이 가장 신경 쓰였는데 낙균이랑 문규가 빠지고 나니 분위기가 오히려 쇄신된 건 있습니다.”

“두 녀석 다 실력은 좋은데 분위기를 흐리는 덴 도가 튼 놈들이죠. 아무리 야구가 개인 스포츠라지만 주전 둘이 뺀질대면 팀에 영향이 있죠. 우리 팀에 다른 베테랑들이 중심을 잡아 줘야 하는데 그럴 만한 선수들도 없었으니 더했구요.”

송석현은 김인환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 설진일과 다른 타자들도 함께 모여서 얘기에 동참했다.

“일혁이 하나로 타자까지 덤으로 얻는 건 어렵겠죠?”

감독의 질문에 운영팀장이 쓰게 웃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하셔야죠. 아시잖습니까?”

“죄송합니다. 욕심이었나 봅니다.”

“지금 물밑에서 접촉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내로 결정될 겁니다.”

“상황은 괜찮습니까?”

“비싼 척 튕기기는 하는데 이제 슬슬 패를 까 봐야죠.”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함성훈이 자리를 뜨려 하자 운영팀장이 물었다.

“선수들 안 보고 가시는 겁니까?”

“제가 가게 되면 눈치만 늡니다. 자율 훈련은 자율로 둬야죠.”

함성훈은 그대로 야구장을 나섰다.

운영팀장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선수들을 지켜봤다.

“그런데…… 왜 송석현 말에 다들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거야?”

스무 살 새파란 신인이면 선배들의 말에 ‘네, 네.’만 해도 모자랄 텐데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였다.

나이 많은 선배들이 송석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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