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의 주인 (5)
팡!
팡!
김정률의 연습 투구에 고트 팬들은 물론 울브스 팬들도 눈여겨봤다.
언더핸드 김정률.
고트의 황태자로 불리던 김정률이 언더핸드로 나서는 건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림이다.
“울브스는 2번 타자부터 시작합니다. 2루수 정수영 선수가 나옵니다.”
“통산 타율 3할, 비록 장타는 없지만 맞히는 재능 하나는 타고난 선숩니다. FA로 풀리면 시장 최고치를 기록할 선숩니다.”
“잘 치고, 발도 빠르고, 수비도 잘하는 선수가 스물여덟에 FA에 된다는 건 엄청난 일이죠?”
“정수영 선수가 출루하면 김정률 선수도 골치 아파질 겁니다. 특히 언더핸드 투수는 견제가 쉽지 않거든요.”
송석현이 두 손을 모았다.
마무리 김정률.
감독의 과감한 한 수지만, 송석현도 바라 왔던 한 수다.
세 번의 수술, 허리에 부담이 많은 언더핸드, 서른이 넘는 나이.
김정률은 관리가 필요한 선수였다.
불펜에서 가장 관리받는 선수는 역시 마무리다.
고트는 이미 마무리가 있었기에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지금은 마무리가 비어 있다.
“후.”
김정률이 투구판을 밟고 3루를 봤다.
똑같은 3루 풍경이지만 오늘은 3루 응원석이 유난히 더 커 보인다.
울브스 팬들이 얼마나 자신이 잘하는가 노려보는 거 같다.
“김정률 선수, 초구 던집니다.”
김정률의 손이 바닥을 스쳤다.
공은 아래에서 위로 쑥 솟아오르다 마지막 순간에 아래로 툭 꺾였다.
-스트라이크!
“김정률 선수, 초구 스트라이크를 뺏어 냅니다.”
“방금은 위험했습니다. 공은 좋았지만 코스가 한복판이었어요. 정수영 선수가 초구라서 지켜본 게 아니라면 장타가 나올 뻔했습니다.”
“방금 공의 움직임이 좋지 않았나요? 뭔가 훅 꺾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 무브먼트는 좋아 보이네요.”
김정률이 손을 풀었다.
실투.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포수 서일혁은 다음 공도 바깥쪽 싱커를 원했다.
김정률의 제2구는 바깥쪽에 제대로 들어갔다.
완벽한 코스에 타자는 배트를 내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스트라이크! 두 번째 스트라이큽니다.”
“과감하게 가네요. 시원시원해요. 2점 차인데도 개의치 않네요.”
타자 정수영이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을 나섰다.
볼 끝이 지저분하다.
언더핸드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됐을 테니 변화구는 딱히 없을 거다.
노릴 건 역시 싱커.
싱커를 치기 위해선 어퍼 스윙이 제격이지만 정수영은 배트를 짧게 잡았다.
처음 상대하는 공이다.
어퍼 스윙으로 띄우는 방법도 있지만 욕심을 버려야 한다.
레벨 스윙으로 직선타를 노린다.
발 빠른 정수영이라면 정면으로 가는 공만 아니면 살 자신이 있었다.
“배터리가 사인을 교환합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지만 상대는 정수영 선숩니다.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타자가 아닙니다.”
김정률의 제3구.
이번에도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쑥 치고 올라온다.
정수영은 배트를 짧게 잡고 몸을 돌려 스윙했다.
부웅!
허공을 스치는 배트.
이번엔 공이 떨어지지 않고 더 솟구쳐 올라 타자의 허리띠 높이로 올라갔다.
타자는 헛스윙을 하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공이 들어간 미트를 바라봤다.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삼진! 김정률 선수! 방금 공은 뭐였죠?”
“커브 같습니다. 언더 핸더가 커브를 종종 구사하는데 원래 언더핸드의 커브는 떠오르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데 김정률 선수의 커브는 유난히 더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첫 삼진.
김정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른 타자도 아니고 정수영이다.
3할 타자 정수영을 상대로 삼구 삼진을 잡아냈다.
내 공이 통한다는 확신.
다음 타자가 3, 4, 5로 이어지는 클린업이지만 김정률은 오히려 기꺼웠다.
더 해 보고 싶었다.
자기 공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다음 타자는 3번 타자 정인하 선숩니다. 장타력이 있습니다. 울브스의 1루수예요.”
대기 타석에서 본 김정률의 공은 날카로웠다.
처음 상대하는 투수의 공은 자주, 많이 볼수록 좋다.
정인하는 반대로 생각했다.
초구를 노린다.
오늘 김정률의 공은 웬만해선 건드릴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구로는 싱커가 올 테니 제대로 퍼 올려야 한다.
“김정률 1구!”
타자의 예상대로 무릎 높이의 공이 날아왔다.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싱커.
정인하는 공을 퍼 올렸다.
“하늘 높이 날아간 공! 중견수가 그대로 잡아냅니다.”
“제대로 노려서 친 거 같은데 멀리 안 날아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볼 끝이 좋다는 얘기겠죠?”
정인하는 벤치로 돌아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은 글렀는데?”
정인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4번 타자 강제관이 땅볼을 치면서 아웃 됐다.
잠실 30홈런 타자 강제관이지만 낯선 공엔 장사가 없었다.
김정률은 공 다섯 개로 이닝을 끝마치곤 주먹을 위로 뻗었다.
“4-2! 4-2로 고트가 승리를 가져갑니다.”
“점수는 많이 나지 않았지만 오늘 경기는 정말 재밌었습니다. 송석현 선수가 최근에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상대는 피닉스였거든요. 장계성 선수를 상대로도 과연 제 몫을 해낼 수 있는가 궁금했는데 해내고 말았습니다. 울브스의 에이스 장계성 선수를 상대로 두 개의 홈런을 때려 내면서 송석현 선수가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어필했습니다.”
“웨일스도 오늘 승리를 가져가면서 고트는 여전히 공동 4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아쉽긴 하지만 잠실 라이벌인 울브스를 이겼다는 건 짜릿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승리는 언제나 달콤한 법입니다.”
경기 MVP 후보는 세 사람이었다.
1번 타자로 나와 홈런과 출루를 해낸 늦깎이 신인 설진일.
3번 타자로 나와 2홈런으로 타점 세 개를 만든 신고 고졸 포수 송석현.
활약은 적었지만 언더핸드 마무리로 가능성을 보여 준 고트의 황태자 김정률.
세 사람 모두 활약상도 백 스토리도 있는 선수들이었다.
결과는 만장일치.
데일리 MVP는 송석현으로 뽑혔다.
“나도 잘했구만.”
김정률은 설진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질투할 걸 질투해라. 동점, 역전 홈런 친 타자에게 안 주면 누굴 주냐?”
“……저도 TV에 나오고 싶습니다.”
“뭐, 그래도 어쩌겠냐. 다음에 더 잘해서 나오면 되잖아. 저 새파랗게 어린 후배가 MVP가 됐으면 응원하고 칭찬해 줘야지. 쟤도 맨날 받은 거 아니잖아?”
“그건 또 그렇네요…….”
윤로미가 웃으면서 송석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송석현 선수! 오늘 승리 축하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잠실 라이벌 울브스를 상대로 승리를 가져가게 된 소감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어…… 울브스라고 해서 특별히 더 준비한 것도 없고, 특별히 더 기쁜 것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승리에 보탬이 됐다는 데 만족합니다.”
“장계성 선수를 상대로 2홈런이나 쳤습니다. 아~주 드문 기록인데 알고 계셨나요?”
“잘 몰랐습니다.”
“오늘 홈런을 친 비결이 있을까요?”
“장계성 선배님의 공이 워낙 좋아서 공을 딱 노리고 들어갔습니다. 마침 운이 좋아서 제가 노린 공이 들어온 거 같습니다.”
윤로미의 부탁에도 송석현의 답변은 짧고 간결했다.
윤로미가 인터뷰를 이어 가기 위해 계속 질문을 던졌지만 송석현의 대답은 한두 문장으로 끝났다.
송석현의 인터뷰와는 별개로 고트 선수들은 오늘의 승리를 자축하며 서로 물을 뿌리면서 장난을 쳤다.
“네, 이상 데일리 MVP 송석현 선수와의 인터뷰였습니다. 지금까지 시청해 주신 시청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야구는 MBS 스포츠!”
윤로미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설진일은 사람 머리만 한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송석현에게 뿌렸다.
“MVP 축하한다!”
설진일 딴에는 분위기에 휩쓸린 장난이었지만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설진일이 뿌린 물은 송석현뿐만 아니라 윤로미에게도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송석현의 눈에 윤로미 손에 든 마이크가 보였다.
전자 제품이니만큼 물에 젖으면 사달이 나겠다 싶어 그는 그대로 윤로미를 끌어당기면서 등으로 물벼락을 맞았다.
촤아악!
“야! 뭐 해!”
김정률도 뒤늦게 설진일을 보곤 목소리를 높였다.
설진일은 영문을 몰라 김정률을 바라봤다.
“축하……요.”
“야, 방송 장비가 있는데 물을 뿌리면 어떡하냐? 아휴,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진일이가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트의 최고참이자 고트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김정률이 고개를 숙였다.
막 화를 내려던 피디도 한번 참았다.
야구팬들이 보는 앞이고, 여긴 고트의 홈그라운드다.
굳이 여기서 정색해 일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장비는 괜찮은데 앞으로 주의 좀 해 주세요. 큰일 날 뻔했잖습니까.”
“예,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송석현은 등에 달라붙은 옷을 떼어 내면서 허리춤에 꽂아 둔 수건을 꺼냈다.
윤로미는 아직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걸로 닦으세요.”
“네? 어? 아, 아. 어, 어.”
송석현은 설진일 대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윤로미는 수건을 든 채로 대답했다.
“아냐, 아냐. 괜찮아. 별거 아니야.”
“많이 안 젖으셔서 다행이네요.”
노란 원피스가 젖었다면 아직 퇴장하지 않은 관중 앞에서 민망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고마워.”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송석현은 윤로미와 피디, 카메라맨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운로미는 송석현이 건넨 수건으로 팔과 머리에 묻은 물을 닦았다.
* * *
경기가 끝나고 핸드폰을 켜자 정미남과 김영석의 문자와 전화가 가득했다.
오늘 당장 만나자는 얘기였다.
김나영도 단문으로 축하한단 얘기를 적었다.
“후.”
송석현은 볼을 부풀린 뒤 답장했다.
-고마워.
정미남과 김영석에게도 답장했다.
-월요일 날 보자. 경기하는 날에는 빠듯해.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동생이 나와 있었다.
“아우, 안 자고 뭐 해?”
동생 송철현이 웃었다.
“지금 몇 신데 벌써 자? 형 경기 보고 있었지.”
“넌 공부 안 하냐?”
“공부하고 하이라이트로 본 거야.”
“레알이지?”
“어.”
어머니가 송석현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다. 오늘도 잘해서 다행이야.”
“운이 좋았어.”
“운도 실력이다. 그래, 앞으로 이렇게만 하면 돼.”
송석현이 씻고 방에 들어갔다.
오늘 경기를 복기하고 내일 경기는 어찌 풀어 갈지 홀로 줄줄 써 내려갔다.
긴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눕자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피닉스전 이후로 내내 현실감이 없다.
홈런, 홈런, 홈런.
국가 대표 선발투수 상대로 홈런을 쳤다.
피닉스전도 잘했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저 운이 아닐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리그 우승을 노리는 울브스, 울브스의 에이스이자 국가 대표 선발투수 상대로 홈런을 쳤다.
단순히 초심자의 운이라거나 피닉스가 약해서 자신이 잘한 게 아니다.
내 실력이 통한다.
혼자서 죽어라 배트를 휘두르고 상상 속의 투수와 승부했던 경험들이 실전에서도 통한다.
“헤헤.”
송석현은 홀로 히죽거렸다.
띠링.
그때 핸드폰에서 문자 오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