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의 주인 (3)
울브스의 포수 신민호는 타석에서 물러나지 않은 송석현을 힐끔 쳐다봤다.
요새 어린 애들은 다 겁대가리가 없나?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패스트볼, 바깥쪽.’
포수가 미트를 바깥쪽에 가져다 댔다.
장계성의 제2구는…….
-볼, 아웃사이드.
“공이 조금 빠졌습니다.”
“공 하나 차이였습니다. 방금 저게 들어갔다면 타자는 손도 못 댔을 만큼 좋은 코스였습니다.”
장계성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안쪽 빠른 공으로 윽박지른 후 바깥쪽 공 하나.
알려질 대로 알려진 단순한 조합이지만, 알아도 당하는 조합이다.
“후우.”
송석현이 숨을 얕게 뱉었다.
포수는 제3구를 고민했다.
몸 쪽 공에 겁먹지 않는 타자다.
바깥쪽 공은 지켜봤다.
뭘 노리는 걸까?
‘체인지업, 아래로.’
포수가 땅을 가리켰다.
바깥쪽 빠른 공 하나 보여 준 다음 안쪽으로 들어오다 떨어지는 공 하나.
무난하고 또 효율적인 공이다.
장계성도 단번에 고개를 끄덕인다.
일리가 있는 볼 배합.
장계성의 체인지업이 미트를 향해 날아갔다.
송석현도 배트에 시동을 걸었다.
팡!
-볼, 로우.
“송석현 선수! 저걸 참아 내네요.”
“거의 배트가 다 나왔는데 마지막에 참아 냅니다.”
“신민호 포수가 아쉬움에 심판을 한번 바라보네요. 하지만 중계석에서 봐도 배트는 돌지 않았습니다.”
“잘 멈췄어요. 잘 참아 냈네요.”
3-0.
순식간에 쓰리 볼로 몰렸다.
장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포수는 투수와 눈을 마주쳤다.
중심 타자와 3-0 카운트.
1루는 비어 있다.
거르고 상대하는 게 정석이다.
장계성은 고개를 저었다.
3번 타자라지만 갓 데뷔한 스무 살.
국가 대표 선발투수가 1회부터 신인 타자를 피해 가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배터리가 사인을 교환했다.
장계성이 눈으로 2루 주자를 견제한 후 공을 뿌렸다.
바깥쪽으로 조금 빠지는 공.
송석현은 그대로 지켜봤다.
공은 마지막 순간에 스트라이크존으로 훅 꺾여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3-0 상황에서 좋은 공을 던졌습니다.”
“방금은 백도어 슬라이더였죠? 좋은 코스로 들어갔습니다. 타자도 카운트가 여유가 있는 만큼 지켜봤어요. 투수는 좋은 공을 던졌고 타자는 잘 골랐습니다.”
1-3 상황.
장계성이 송진을 손에 툭툭 털어 냈다.
살얼음 같은 긴장감이야말로 투수가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다.
멘탈이 약하거나 실력이 부족한 선수들은 긴장감에 무너지지만 장계성은 달랐다.
뒷골이 서늘할 때 공은 더 날카로워진다.
‘패스트볼, 바깥쪽.’
포수의 미트가 스트라이크존 안에 있다.
힘으로 이겨 내라는 신호.
장계성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힘 대 힘으로 붙는 투구야말로 야구의 꽃 아닌가?
장계성이 앞발을 힘껏 내밀었다.
체중을 실은 공은 ‘팽!’ 하고 쏘아졌다.
동시에 송석현의 골반도 앞으로 이동했다.
탁!
“큽니다! 큽니다! 큽니다! 파울! 하지만 폴대를 넘어가네요.”
“폴대를 넘어가긴 했어도 송석현 선수의 힘은 정말 대단하네요. 타이밍으론 조금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힘으로 밀어서 담장을 넘깁니다. 폴대에서도 많이 벗어난 공은 아니었어요.”
“이야, 정말 송석현 선수의 힘 하나만은 인정해야겠습니다. 장계성 선수의 공도 묵직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장계성 선수의 공을 힘으로 밀어내네요.”
“이번 승부 재밌습니다. 1회부터 양 팀 모두 제대로 붙습니다.”
장계성은 고개를 돌려 담장을 넘어간 공을 찾았다.
전력투구한 공이 파울이 됐다.
뒤로 넘어간 게 아니라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파울.
잘해 봐야 파울이라곤 생각했지만, 밀어 친 공이 저렇게 멀리 날아갈 거라곤 생각도 못 한 터였다.
“아…….”
송석현은 배트를 놓고 장갑을 다시 꼈다.
망설였다.
조금 전 백도어 슬라이더의 잔상 때문에 바깥쪽 공 대처가 늦었다.
아주 조금,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홈런이 나왔을 수도 있다.
다른 투수의 공이라면 홈런이 됐을 거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는 국가 대표 선발투수의 공은 달랐다.
최고 구속은 145km/h 내외지만 디셉션이 좋아 체감상으론 150km/h 이상이다.
공의 테일링도 좋아서 공이 살아 움직인다.
흔히들 뱀 직구, 채찍 같은 공이라고 하는데 장계성의 공은 가시 돋친 채찍 같다.
1kg에 육박하는 배트인데도 손이 저릿하다.
“3-2 풀카운트. 승부가 길어집니다.”
“송석현 선수가 단순히 피닉스를 상대해서 얻은 성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네요. 국가 대표 선발투수를 상대로 전혀 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울브스 배터리도 송석현 선수에겐 매우 조심스럽게 상대하고 있어요. 이건 상대를 4번 타자로 인정한다는 얘깁니다.”
“오늘은 3번 타잡니다.”
“아, 예. 하하, 3번 타자. 아무튼 상대의 에이스로 인정한다는 얘기죠.”
송석현이 타석에 바짝 붙었다.
포수가 코로 숨을 훅 내뱉었다.
몸 쪽 공을 던져 보라는 도발에 어찌 반응할 건가.
포수는 바깥쪽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도리도리.
장계성은 고개를 저었다.
바깥쪽 패스트볼에도 고개를 저었다.
후배의 도발에 선배가 기꺼이 넘어가 주겠다는 포부다.
몸 쪽 공 패스트볼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풀카운트. 오늘 경기의 하이라이트가 1회부터 나옵니다. 장계성 선수와 송석현 선수의 정면 승부!”
장계성이 이를 악물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선수가 새파란 신인 상대로도 이겨 내지 못한다면 메이저를 꿈꿀 수나 있겠는가.
장계성은 온 힘을 담아 오늘 경기 최고 구속을 찍었다.
147km/h의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존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탁!
“넘어간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직선으로 날아간 공이 잠실 좌측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고트 팬들도 울브스 팬들도 공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아! 이번에도 폴대를 벗어났어요! 이번엔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였습니다. 1m 차이도 안 났어요!”
“울브스 벤치에선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다이렉트로 잠실의 좌측 담장을 넘겼습니다. 이게 정말……. 하하, 김인환 선수의 데뷔 때보다 더 무서운 거 같습니다. 그동안 고트에 거포라고 할 수 있는 타자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김인환, 송석현이라는 무시무시한 타자 둘이 나타났습니다. 송석현 선수. 잠실 담장을 옆집 담처럼 넘겨 버립니다.”
포수 신민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몸 쪽으로 완벽하게 들어온 패스트볼.
이 정도의 공은 장계성이 한 경기에 한두 번 던지는 공이다.
보통 타자라면 루킹 삼진을 당할 공이다.
A급 타자라도 헛스윙 삼진이 나올 공이다.
특급 타자라야 파울 정도로 끝난다.
송석현은 파울을 쳤지만 담장을 크게 넘겼다.
마지막에 공이 휘지 않았다면 홈런이었다.
다른 구장이었어도 홈런이다.
등골이 서늘했다.
최고의 공이 나왔는데도 삼진을 잡지 못한다고?
투수가 장계성인데?
“후우우.”
가장 당황한 건 투수였다.
입가의 미소가 가라졌다.
회심의 일구가 파울이 됐다.
지금까진 자존심 싸움이었다.
국가 대표 선발투수로서 신인에게 프로의 벽을 느끼게 해 주겠다는 자존심.
그러나 파울 두 개를 보고 나자 가슴이 차가워졌다.
어쩌면…….
“오늘 경기의 백미가 1회부터 나올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송석현 선수가 요새 주가가 많이 올라갔다고 해도 상대는 장계성 선수거든요. 리그에서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투숩니다. 용병을 포함해도 말이죠. 메이저 직행을 준비하는 장계성 선수가 스무 살 신인과 어려운 싸움을 이어 갑니다.”
“경기 시작부터 양 팀의 응원전이 대단했는데 지금은 조용해졌습니다. 이건 관중도 경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야구팬이라면 지금 이 장면이 얼마나 짜릿한 장면인지 잘 아실 겁니다. 치면 담장을 넘기는 타자와 국가 대표 좌완 강속구 투수의 대결입니다. 피해 가지 않아요. 서로 힘 대 힘으로 맞붙고 있습니다!”
울브스 감독의 손이 움직였다.
동시에 작전코치의 손도 움직였다.
포수의 눈이 좌우를 흘깃거렸다.
포수의 사인이 늦어지자 장계성은 숨을 한번 들이켰다.
벤치의 사인이다.
장계성의 공만 믿고 기다릴 수 없다는 벤치의 판단이다.
“하.”
장계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1회, 그것도 스무 살 신인에게 막혀 벤치가 개입했다.
송석현의 덩치가 유독 크거나 온몸이 근육질로 덮인 타자도 아닌데 스트라이크존이 좁아 보인다.
꿀꺽.
사인이 길어지자 송석현도 침을 삼켰다.
무슨 공일까?
패스트볼? 체인지업? 슬라이더?
장계성은 우타자에게 몸 쪽 슬라이더도 종종 던진다.
날카로운 횡 슬라이더는 땅볼을 만들어 내기 좋다.
송석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이 길어지면 망설여진다.
정해야 한다.
내가 노릴 하나의 공.
송석현은 어깨에 힘을 빼고 단 하나의 공을 머릿속에 그렸다.
끄덕.
장계성이 사인 교환을 마쳤다.
관중석에도 침묵이 감돌았다.
연속 파울이 나온 만큼 결정구가 나올 타이밍이다.
장계성은 2루 주자를 한번 보고선 앞으로 다리를 쭉 뻗었다.
닫힌 골반이 회전하면서 뒤에 숨긴 손이 쑥 하고 튀어나왔다.
“투수! 던집니다!”
바깥쪽으로 뻗어 가는 공.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난 공에 송석현이 배트를 휘둘렀다.
기다렸다는 듯 휘두른 배트에 공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송석현이 생각한 공, 울브스 벤치에서 결정한 공은…….
백도어 슬라이더였다.
팡!
붉어진 하늘로 하얀 공이 로켓처럼 날았다.
“좌측 담장! 좌측 담장! 좌측 담장! 넘어서 더 갑니다! 더! 더! 더! 더! 장외까지! 넘어! 갑니다!”
“잠실 장외 홈런을 때려 버리네요! 송석현 선수! 정말 무시무시한 힘입니다!”
“좌측 담장을 넘어! 장외로! 잠실의 장외를 넘겨 버렸습니다! 송석현! 잠실 장외를 넘겨 버리는 2점 홈런!”
“이건 뭐 장외도 한참 넘어간 거 같습니다! 엄청난 비거리네요!”
“울브스의 에이스, 국가 대표 선발투수 장계성을 상대로 1회 투런을 때리는 송석현! 고트 팬들 보이십니까? 저기, 저기 여성 팬을 울고 있습니다!”
“하하하, 한국시리즈도 아니고, 포스트시즌도 아닌데 홈런에 울어 버리네요.”
“팽팽한 긴장감을 완전히 일소시켜 버리는 송석현 선수의 홈런! 지금 잠실은! 고트의! 홈구장이 됐습니다!”
“오오, 고트의 송석현. 팔방미인 송석현. 장외 홈런 송석현. 날! 려! 버! 려!”
1회 똑같은 2점을 나눠 가졌지만 분위기는 상반됐다.
실투도 아니고, 얻어걸린 공도 아니었다.
울브스 벤치까지 직접 나섰고 장계성은 전력투구했다.
울브스의 회심의 결정구.
송석현은 완벽하게 공략했다.
“우와와와와!”
“송석현! 송석현!”
벤치의 선수들이 나와 송석현을 맞았다.
가장 기뻐한 건 선발투수 제임스였다.
“I love you! You are my super star!”
장계성은 포수가 던진 공을 받았다.
겨우 2점이다.
선발투수에게 2점은 상수다.
스스로 2점 따위라고 되뇌었지만 상기된 얼굴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방금 백도어 슬라이더는 정말 좋았는데 말이죠.”
“송석현 선수가 정확히 노리고 쳤습니다. 타이밍상 보고 친 게 아니에요. 제대로 노려서 쳤습니다.”
“송석현 선수는 어떻게 백도어 슬라이더를 노렸을까요?”
“장계성 선수의 공중에 송석현 선수가 손도 못 댄 건 백도어 슬라이더 하나 아닙니까? 여기에 빠른 공 두 개를 던져 놨으니 타이밍상 백도어 슬라이더 하나가 더 들어가는 건 분명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송석현 선수는 애초에 지명타자가 아니라 포숩니다. 볼 배합에 가장 정통한 게 역시 포수 아니겠습니까? 타자가 유일하게 반응하지 못한 공을 결정구로 쓴다, 이건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하죠.”
“합리적인 선택이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군요.”
“하하, 야구는 스포츠니까요. 그래서 포수들이 볼 배합을 어렵게 꼬기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1회 2점을 내줬지만 장계성은 장계성이었다.
분노의 강속구로 4번, 5번 타자를 잡아내곤 벤치로 들어갔다.
장계성은 글러브를 벗어 벤치에 집어 던지듯 내팽개치곤 벤치 뒤로 나가 버렸다.
카메라는 씩씩거리며 나가는 장계성의 얼굴을 그대로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