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80화 (80/201)

잠실의 주인 (2)

“경기 시작합니다.”

“이제 곧 전반기가 마무리되는 만큼 양 팀이 서로 최고의 전력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고트는 선발 포수로 서일혁 선수를 냈습니다.”

“고트의 선발 포수는 박신언 선수였는데요. 서일혁 선수가 종종 나오긴 했어도 주로 체력 안배 차원에서 교체해 주지 않았나요?”

“예, 박신언 선수 컨디션이 나빠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요. 부상도 아니었는데, 서일혁 선수의 컨디션이 유독 좋은 게 아니라면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삽니다. 제임스 선수가 박신언 선수와 호흡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 더욱 그러네요.”

선발투수 제임스가 송진을 손끝에 묻혔다.

갑작스러운 선발 포수 변경은 반갑진 않았지만 감독은 강경했다.

“울브스의 1번 타자 김하균 선수가 나섭니다. 상당히 발이 빠르고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잡니다. 주자로 나가면 꽤 골치 아픈 선수죠.”

서일혁이 사인을 냈다.

‘싱커, 아웃사이드.’

제임스의 1구.

“쳤습니다! 절묘하게 2루수 옆을 스치는 공! 저게 빠지네요. 제임스 선수가 땅볼 유도를 잘했거든요.”

“투수는 좋은 공을 던졌고 타자는 좋은 스윙을 했습니다. 운이 따랐지만 그게 또 야구 아니겠습니까?”

제임스는 웃으면서 2루수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운 좋게 빠진 공이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다만, 발 빠른 주자가 신경 쓰일 뿐이다.

“김하균 선수, 벌써 리드 폭을 늘립니다.”

“상당히 거슬리죠? 투수의 신경을 자극합니다.”

“저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견제를 한다면 투수도 흐름이 끊기지 않습니까?”

“견제도 견제지만 투수는 바깥쪽 빠른 공으로 2루 도루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다른 투수라면 바깥쪽 공이 뻔한 수가 되겠지만 제임스 선수는 커터와 내추럴 싱커, 혹은 투심이 좋은 선숩니다. 알아도 쉽게 치기 힘든 공이예요.”

서일혁이 사인을 냈다.

‘체인지업, 아웃사이드.’

제임스는 잠시 망설였다.

체인지업.

여기서 느린 공을 던지는 건 상대의 노림수를 한번 꼬는 사인이다.

창의적인 볼 배합이지만 느린 공으로 발 빠른 주자의 2루 도루를 막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제임스는 자연스럽게 벤치로 눈을 돌렸다.

스무 살의 루키, 송석현.

저 친구라면 체인지업도 도루 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텐데, 서일혁에겐 그만한 믿음이 없었다.

‘오케이.’

마뜩찮지만 어쩔 수 없다.

1회부터 사인이 길어지면 타자만 유리할 뿐이다.

제임스는 바로 체인지업을 던졌다.

“타자, 헛스윙! 1루 주자 2루로! 2루로! 2루 도루 성공입니다!”

“한 타이밍 늦었어요. 송구가 늦습니다. 지금 느린 타이밍 변화구는 상대의 허를 찔렀지만 울브스는 더 적극적인 주루로 정면 돌파를 하네요.”

“이러면 무사 2룹니다. 바로 득점권 찬스예요.”

독실한 크리스천인 제임스도 이번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역시나.

서일혁의 어깨론 A급 주자를 잡아내기 어렵다.

차라리 싱커를 던졌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후.”

벤치의 함성훈 감독이 한숨을 쉬었다.

서일혁의 볼 배합은 나쁘지 않았다.

야구는 확률의 스포츠다.

성공과 실패가 공존하는 만큼 운도 따르기 마련이다.

서일혁의 한 수가 패착이 되자 1회부터 울브스가 기세를 이어 갔다.

순위 싸움이 빠듯한 상황에서도 서일혁을 낸 이유는 단 하나, 쇼 케이스.

서일혁도 경쟁력을 갖춘 포수라는 걸 보여 줘야 조금이나마 트레이드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다.

분명 서일혁은 백업으로는 최고 수준의 포수고, 주전 포수도 할 수 있는 깜냥이 있다.

중요한 건 포장지다.

얼마나 예쁘게 포장해서 그럴듯하게 보이느냐.

“이러면 곤란한데…….”

2루 주자를 둔 채 제임스가 제2구를 던졌다.

타자 몸 쪽에 붙이는 커터.

타자는 그대로 배트를 휘둘렀다.

“3루수가 공을 잡고 태그, 태그, 아! 태그를 못 했습니다! 김하균 선수의 절묘한 주루 플레이! 왼손을 뻗다가 바로 오른손으로 베이스를 터치했습니다. 3루수 최재완 선수, 주자를 태그도 못 하고 1루에도 공을 못 뿌렸습니다! 이러면 무사 1, 3루에 3번 타자가 들어옵니다. 정인하 선수의 방망이가 요새 뜨거운데요!”

“고트가 초반부터 안 풀리네요. 시작부터 꼬이네요. 울브스의 파인플레이도 좋았지만 오늘 울브스에 운이 따릅니다.”

제임스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고트의 내야진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서일혁이 자리에 일어나 분위기를 쇄신했으나 한번 얼어붙은 분위기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우리의 울브스! 승리의 울브스! 힘차게 강하게! 울브스! 외쳐라, 울브스! 우리의 울브스! 승리! 승리! 승리하리라! 울브스!”

울브스가 앞서가자 1회 초 고트의 응원가에 보답하듯 울브스 팬들이 목소리를 키웠다.

공식 응원가가 끝나자 팬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맨날 지는!”

“고트!”

“잠실의 짐 덩어리!”

“고트!”

“패배의!”

“고트!”

“꺼져라!”

“고트!”

공식 응원가는 아니지만 팬들 사이에선 구전처럼 떠돌던 응원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고트 팬들을 자극하는 응원 소리에 고트 팬들의 산발적인 고함이 터졌다.

“야, 이 울브스 @#[email protected]#%@!”

“저 씨%[email protected]@@$!”

팬들의 고함에 선수들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양 팀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들이 공식 응원가를 유도하면서 욕설을 잠재웠지만 1회 초부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오늘 경기 분위기가 정말 뜨겁네요, 하하.”

“최근 고트가 울브스전 성적이 많이 안 좋지 않습니까? 고트 팬들도 이 부분에 대해선 굉장히 아쉬워해 왔는데, KS포가 생기면서 기대감이 확 늘었단 말이죠. 전반기 4위 결정전에 중요한 경기기도 하고 울브스에 설욕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안 풀리니 팬들 입장에선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도 아직은 0-0입니다. 게다가 1회예요. 승부가 결정되려면 한참 남았어요.”

제임스는 베테랑 투수답게 달아오른 열을 날숨 몇 번으로 가라앉혔다.

되찾은 침착함으로도 무사 1, 3루 상황을 무실점으로 막진 못했다.

“제임스 선수 1회에 2실점을 했지만 공 열다섯 개만 던지면서 경제적인 투구를 했습니다.”

“큰 위기로 이어질 뻔한 상황에서 제임스 선수의 땅볼 유도 능력이 빛을 발했습니다. 하지만 연속 안타는 좋은 조짐이 아닙니다. 단순한 운인지 아니면 제임스 선수의 공이 무뎌진 건지는 유심히 지켜봐야 합니다.”

함성훈 감독은 팔짱을 낀 채 서일혁을 바라봤다.

서일혁의 볼 배합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제임스 맥킨지와는 궁합이 썩 좋지 못하다.

함성훈이 서일혁을 가까이 불렀다.

“제임스는 공격적인 투구를 해야 하는 거 알잖아. 어렵게 가지 말고 빠르게 승부 봐.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1회 초는 실망스러웠다.

2점은 큰 점수는 아니지만, 애초에 먼저 앞서가려 했던 건 고트다.

타선까지 조정하면서 KS포를 2, 3번에 밀어 넣었다.

오늘 경기에서 패하면 잃을 게 많다.

서일혁의 몸값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

타선 조정에 따른 비난은 어떤가?

리더십이 흔들릴 수 있다.

현재 고트는 사상누각이다.

리더쉽이 흔들리면 백약이 무효하다.

파격적인 라인업을 낸 만큼 성공은 아니더라도 강한 인상이라도 보여 줘야 한다.

“2점이 뒤처진 상황에서 고트의 공격이 이어집니다. 고트는 아주 공격적인 타선을 들고 왔죠?”

“예, 그렇습니다. 2번 타자 설진일 선수를 1번으로 올리면서 3번 김인환, 4번 송석현 선수까지 2번, 3번으로 올렸습니다. 파격적인 라인업이죠. 최고의 득점력을 자랑하는 KS포를 전진 배치하면서 한 점이라도 더 빨리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2번 타자 김인환 선수. 하하, 참 보기 힘든 광경 같습니다.”

“선발 포수부터 라인업까지. 함성훈 감독의 행보가 거침없습니다.”

울브스의 선발은 장계성.

국내 최고의 선발 중 하나로 국가 대표에도 오른 선수였다.

좌완인 데다 공까지 빠르다.

여기에 횡으로 휘는 하드 슬라이더는 커터 못지않게 예리했다.

“1번 타자 설진일 선수. 실험적인 라인업입니다. 설진일 선수가 피닉스전에서는 굉장히 잘해 줬지만 상대 투수는 장계성입니다. 피닉스와는 선발의 무게가 다르죠?”

“설진일 선수가 출루를 하느냐, 못 하느냐가 오늘 경기의 분수령이 될 겁니다. KS포 앞에 밥상이 차려져 있지 않다면 홈런을 쳐도 1득점 아니겠습니까? 설진일 선수는 1, 2번 타자가 해야 할 몫을 혼자 해내야 합니다.”

타격코치가 함성훈 감독에게 다가와 물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진일이,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휘두르는 놈입니다.”

“장계성이라는 이름에 쫄지 않고 덤빌 타자가 필요해요. 설진일은 누가 나오든 간에 자기 스윙하는 타자 아닙니까?”

“하지만 초구부터 아웃을 당하면 대실패 아닙니까?”

“1회가 부담스러운 건 타자나 투수나 똑같아요. 그러면 덜 부담스러운 쪽이 유리하죠.”

장계성이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1회 초구.

타자는 초구를 노리고 나오고, 투수는 이를 알고서도 던져야 한다.

타자의 노림수를 피하든지 그대로 맞서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패스트볼, 바깥쪽.’

장계성의 선택은 정면 승부.

국가 대표 선발투수가 2군에서 갓 올라온 늦깎이 타자를 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던져, 던져.”

설진일이 방망이를 힘차게 흔들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리드오프지만 스트라이드를 좁게 가져가지 않는다.

1구부터 풀스윙.

탁!

“쳤습니다! 좌중간을 가르는 안타! 설진일 선수는 1루 밟고 그대로 2루로! 2루로! 2루까지 서서 들어갑니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덤비는 설진일 선수! 오늘 양 팀 리드오프 둘 모두 초구를 공략합니다!”

“보통 1번 타자는 최대한 투수의 공을 많이 보면서 뒤 타자들이 공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는데, 오늘 양 팀 선두 타자들의 생각은 다른가 봅니다. 이렇게 공격적이어도 되나 싶을 정돈데요?”

장계성은 혀로 볼을 밀었다.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타자에게 초구를 제대로 공략당했다.

어떤 투수든 1회는 쉽지 않다지만 2루에서 세리머니까지 펼치는 설진일을 보자 뒷골이 아렸다.

“후우우.”

2번 타자 김인환이 타석에 들어섰다.

울브스의 포수 신민호는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팡!

-볼, 아웃사이드.

“김인환 선수, 공을 잘 골라내네요.”

“피닉스 3연전에서 김인환 선수의 만루 홈런보다 더 놀라운 건 출루율입니다. 볼넷이 많이 늘었어요. 무조건 배트를 내고 보던 김인환 선수가 아닙니다.”

장계성이 굳은 얼굴로 포수의 공을 받았다.

1회부터 말린다.

좋지 못한 징조다.

포수는 다시 바깥쪽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장계성은 고개를 저었다.

정면 대결.

우연은 한 번이다.

포수는 고민했지만 투수의 뜻에 맞춰 주기로 했다.

‘패스트볼, 몸 쪽.’

좌투수 장계성과 좌타자 김인환의 만남.

좌투수의 145km/h 직구가 좌타자의 몸을 파고들었다.

-스트라이크!

“김인환 선수! 헛스윙을 하네요.”

“장계성 선수의 공이 좋습니다. 게다가 좌타자 상대로는 성적이 매우 좋습니다. 좌타자 눈에는 장계성 선수의 공이 눈에 잘 안 들어올 거예요.”

김인환이 타석에서 물러나 배트를 붕붕 휘둘렀다.

대기 타석에선 송석현이 예의 느린 스윙으로 투수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

김인환은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패스트볼, 몸 쪽.’

-스트라이크!

“김인환 선수! 이번에도 헛스윙합니다.”

“타이밍이 느립니다. 장계성 선수의 공이 빠르긴 하지만 150km/h를 넘거나 하는 공은 아니었거든요. 이건 타이밍을 못 잡는다는 얘깁니다.”

불펜에서 지켜보던 김정률이 입맛을 다셨다.

“하도 안 치다 보니까 감 다 잃었네, 저놈.”

장계성의 다음 공은 하드 슬라이더.

좌타자에겐 언터처블이라 불리는 공이었다.

부웅!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입니다! 김인환 선수의 헛스윙! 배트가 공을 완전히 지나쳤어요!”

“김인환 선수. 장계성 선수의 공에는 맥을 못 추네요.”

“피닉스 선발투수와는 확실히 무게감이 다릅니다.”

“국가 대표 선발투수예요. 게다가 좌타자 상대로는 스페셜리스틉니다. 김인환 선수가 감당하기 어렵죠.”

“KS포의 K가 허무하게 물러납니다. 이러면 S만 남는데요. 송석현 선수가 장계성 선수를 상대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서로 첫 상대라면 투수가 유리합니다. 게다가 그 투수가 장계성 선수라면 말할 것도 없겠죠. 송석현 선수는 좀 길게 내다보고 다음 타석을 위해 이번 타석에선 공을 많이 보면서 눈에 익히는 게 필요합니다.”

송석현이 예의 긴 배트를 어깨에 메고 타석에 들어섰다.

포수가 송석현의 유난히 긴 배트에 눈을 돌렸다.

저 배트에 맞았다간 어떤 공이든 박살이 날 거다.

장계성의 구질은 패스트볼, 슬라이더, 체인지업.

우타자에게 던지는 공은 보통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이 있다.

포수 신민호는 신인 선수를 어떻게 다루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포수였다.

‘패스트볼, 몸 쪽.’

장계성도 신민호의 사인을 알아들었다.

몸 쪽 패스트볼.

적당히가 아니라 완전히 몸에 붙이는 공.

그것도…… 높은 쪽으로.

팡!

-볼, 인사이드.

“우우우우!”

고트 응원석에서 바로 야유가 나왔다.

공 한 개만 더 들어갔으면 빈볼이었다.

송석현은 몸을 살짝 돌린 채 숨을 골랐다.

상대 포수는 송석현을 보지도 않고 바로 투수에게 공을 던졌다.

신인 길들이기.

장계성의 빠른 공이 몸 쪽으로 파고들면 타자는 얼어붙는다.

장계성은 우타자 상대로 몸 쪽 슬라이더까지 던지는 투수다.

몸 쪽을 공략해야 바깥쪽을 가져갈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투수였다.

“방금 공은 위험했습니다.”

“공이 빠졌나요? 조금 깊게 들어갔네요.”

“송석현 선수, 이러면 좀 당황스럽죠? 빠른 공이 저런 식으로 들어오면 어떤 타자든 타석에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송석현의 눈이 장계성에게 향했다.

살짝 웃는 장계성의 입가가 보였다.

송석현도 따라서 입가를 씰룩였다.

누가 야구를 신사의 스포츠라고 했던가.

상대의 적의(敵意)가 내 목숨까지 노리는 스포츠가 야구다.

타자는 항시 빈볼의 공포를 안고 선다.

제구가 나쁜 투수라면 송석현도 타석에서 한발 물러섰을 거다.

그러나 상대가 장계성이기에 물러나기는커녕, 숨을 더 깊게 마셨다.

송석현이 배트가 천천히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장계성과 송석현의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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