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
볼넷, 볼넷, 볼넷, 볼넷.
볼넷을 남발하던 정광우는 밀어내기로만 3점을 내는 진기록을 세웠다.
피닉스 벤치에선 한숨만 푹푹 쉬었다.
“안타! 안타가 터집니다!”
“주자 홈으로! 홈으로! 홈으로~! 2루 주자까지 홈으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아! 공이 빠졌어요! 2루수가 던진 공이 악송구가 됐습니다! 타자 주자 2루까지, 2루까지~ 갑니다!”
안타 이후의 실책.
1회부터 볼넷을 남발하자 야수들의 집중력이 떨어졌고, 떨어진 집중력은 실책으로 나왔다.
피닉스 선수들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피닉스가 힘들게 막아 내긴 했지만 1회에만 5-0, 5-0의 스코어가 나왔습니다.”
“아…… 이건 아닙니다. 이건 아니에요. 5점. 1회에만 5점을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볼넷을 남발하다 자멸하는 건 팀에도 리그에도 팬들에게도 결코 좋지 못합니다.”
“정광우 선수, 1회에만 48구를 던지고 내려갔습니다. 벤치에 앉은 정광우 선수. 많이 자책하네요.”
“작년 피닉스의 우승은 누가 봐도 기적이라고 부를 대업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올해는 평소보다 더 심한 거 같습니다.”
“고트는 벌써 주전을 하나둘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런 경기에선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아껴야죠. 뭐, 당연한 결괍니다.”
무너진 피닉스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송석현은 이날 안타를 단 하나도 치지 못했다.
대신 6타석 전부 볼넷 출루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KPBL 기록에는 못 미치지만 시즌 한 경기 최다 출루, 한 경기 최다 볼넷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피닉스전 스윕.
클린업이 이탈하고 나쁜 뉴스만 넘쳐 나는 타이밍에 얻은 꿀맛 같은 승리였다.
선수들은 한껏 들떠서 버스에서 내내 수다를 떨었다.
함성훈 감독만 굳은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 * *
고트와 피닉스 경기가 끝나자 곧이어 KBC스포츠의 베이스볼 퍼스트가 시작됐다.
따다단, 따다단, 따다단.
카메라가 스포츠 아나운서의 얼굴을 찍었다.
아나운서는 한껏 밝게 웃으면서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베이스볼 토크의 장애선입니다. 오늘 경기도 잘 보셨나요? 오늘은 심인호 해설 위원과 함께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심인호 위원님.”
“안녕하세요.”
“우선 오늘 경기, 고트와 피닉스의 경기를 리뷰 해 주시겠어요?”
“예, 그럼 오늘 경기 리뷰에 들어가겠습니다.”
화면에는 1회 만루 상황에 정광우와 송석현의 맞대결이 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키포인트는 바로 이 장면입니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4번 타자 송석현 선수와 정광우 선수이 맞대결하는 장면인데요. 송석현 선수가 정광우 선수의 초구를 큰 파울 홈런으로 만들어 냅니다. 보시죠? 분명 공이 크게 떴거든요. 정타가 아니라 공의 하단을 긁었다는 건데, 보통 이런 공은 플라이가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공이 어마어마한 높이로 날아가더니 그대로 관중석까지 가 버렸습니다. 이번에도 파울 장외 홈런이 나올 뻔했습니다.”
“송석현 선수의 이번 피닉스전 활약은 정말 대단하죠? 저번 파울 장외 홈런은 임팩트가 정말 대단했는데요.”
“예, 맞습니다. 파울로 카운트 하나를 늘린 건 좋았으나 이 파울이 정광우 선수의 뇌리에 너무 깊게 남았나 봅니다. 정광우 선수는 만루 상황에서 또 피해 갔습니다. 정광우 선수의 포크볼이 좋다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피해 간다면 타자도 배트를 휘두를 필요가 없죠. 아마 여기서 스트라이크 하나라도 더 들어갔다면 포크볼이 먹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송석현 선수가 포크볼을 참아 냈고, 밀어내기 볼넷이 나왔습니다. 바로 이 밀어내기 볼넷으로부터 고트의 득점이 시작됐습니다.”
“결국 밀어내기 볼넷보다 그 전의 파울 홈런이 더 중요했다는 말씀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아마 평범한 타자였다면 정광우 선수도 조금 더 과감하게 승부했을 겁니다. 하지만 송석현 선수가 피닉스전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죠. 이번 세 경기로 송석현 선수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현재 유망주 선수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어요.”
“송석현 선수의 활약, 무시무시한 장타가 정광우 선수가 움츠리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이번 시리즈의 키포인트는 만루 홈런의 김인환 선수가 아니라 송석현 선수라고 생각해도 될지도 모릅니다.”
“고졸 신고 선수, 그것도 스무 살의 선수가 이렇게 빨리 스타가 된 건 처음인 거 같은데, 고트는 천군만마를 얻었네요.”
해설자가 하하, 웃었다.
“송석현 선수가 이번 피닉스전에서 대활약을 했지만 겨우 3경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피닉스였습니다.”
“아직은 좀 더 검증이 필요하단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고트는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제 몫을 해 주던 클린업트리오가 사라지고 거포 유망주 둘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두 사람이 아무리 난다 긴다 한들 타석의 뎁스가 얇아진 건 부정하지 못합니다. 오늘 경기도 고트의 함성훈 감독 대행 입장에선 숙제가 될 겁니다.”
“왜 그렇죠? 스윕을 했는데도 부족한가요?”
“스윕을 했지만 오늘 경기는 5-2로 이겼습니다. 1회에 5점을 낸 게 전부였다는 거죠. 물론 주전을 교체하면서 고트도 쉬어 가는 경기를 했지만 그래도 기세를 잡아 놓고 추가 점수 하나를 못 냈다는 건 고트의 타선이 너무 약하다는 얘기죠. KS포가 시즌 내내 가동된다면야 다행이지만 두 선수는 아직 검증이 안 된 선수들입니다. 언제 또 방망이가 식을지 모를 일이에요.”
“고트는 KS포를 얻었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결국 이번 울브스전이 분수령이 될 겁니다. 오늘 경기로 고트는 웨일스와 함께 공동 4위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웨일스는 하위권인 광주 불스와 만나고 고트는 현재 2위인 울브스를 만납니다. 울브스는 최근 고트 상대로 우위를 쭉 점해 왔습니다. 울브스라는 산을 넘지 못한다면 다시 5위로 처질 수 있어요.”
“그렇다면 다음 경기 고트는 울브스 상대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고트는 이번에 대승을 하면서 불펜에 휴식을 줬습니다. 그나마 이건 다행이지만, 여전히 고트는 불펜이 약합니다. 현재 불펜의 키맨들이 2군에서 휴식 중인 만큼 고트는 선발과 타선에서 앞서가야 합니다. 타선이라고 하면 역시 KS포가 건재해야죠.”
“김인환, 송석현 선수에게 무거운 짐이 맡겨졌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스타는 위기에 나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두 선수가 이번 위기를 이겨 낸다면 명실상부한 리그의 스타가 될 겁니다. 고트 팬들 아시잖습니까? 서울 원년 팬들의 팬심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다음 경기 울브스전도 김인환, 송석현 선수의 활약이 간절하겠네요. 네, 그러면 나머지 하이라이트도 계속 볼까요?”
* * *
송석현은 집에 오자마자 책상에 앉았다.
박신언의 충고대로 엑셀을 켜고 오늘 경기를 복기하고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오늘 경기 총평을 적은 송석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닉스. 선발투수 약함. 불펜 약함. 타선 약함. 수비 약함. 용병 둘은 괜찮은 편.
“이런 팀을 데리고 어떻게 우승한 거지?”
송석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국가 대표 4번 타자가 있어도 압도적 꼴찌.
자신이 피닉스에 갔다면 수월하게 주전 경쟁 중일 터다.
물론 영원히 고통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김영훈이 돌아온다면 또 리그 우승권 팀이 되는 게 피닉스 아닌가.
“아냐, 아냐. 그래도 여기선 못 뛰어. 사람이 뛸 곳이 아냐.”
송석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송석현이 잘 준비를 하는데 문자가 하나 왔다.
내일 오후에 인터뷰가 있으니 점심 식사 후 프런트에 먼저 방문해 달라는 문자였다.
“인터뷰…… 후우.”
송석현은 인터뷰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새벽 늦게야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오후.
송석현은 신문사 두 곳, 방송사 한 곳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고졸 신고 포수라는 타이틀은 언론에서도 흥미가 돋울 주제였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포수를 했냐면…….”
같은 질문, 같은 대답.
첫 인터뷰만 떨렸을 뿐, 이후 두 인터뷰는 수월하게 넘어갔다.
인터뷰가 끝난 후 홍보팀장이 송석현을 불렀다.
“오늘부터 벤치에 프레스를 허용할 거예요. 언질은 해 놨지만 혹시 최대규 선수나 이낙균, 강문규 선수에 대해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하세요.”
“예, 어차피 전 정말 아는 게 없습니다.”
“아마 오늘 김인환 선수나 송석현 선수나 해설자랑 기자, 아나운서가 귀찮게 굴 거예요. 절대 화를 낸다거나 비속어를 쓴다거나 그러면 안 돼요. 지금 우리 구단에 사건, 사고 많은 거 알죠?”
“예, 주의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송석현은 숨을 골랐다.
연속 인터뷰에 진이 빠진다.
TV에 나온다는 기쁨도 잠시, 경기가 시작도 하기 전에 피로가 몰려왔다.
시간은 보니 어느덧 2시가 넘었다.
“아, 벌써 훈련 시간…….”
어제 경기 끝나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와 경기를 복기했다.
경기 복기 후엔 인터뷰 준비를 한 후 취침.
일어나자마자 복기한 자료를 살핀 후 식사.
식사 후엔 출근 후 인터뷰.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훈련.
하루가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2군 생활이 1군보다 열악하다곤 하지만 그때는 경기장과 숙소가 붙어 있어 개인적으로 남는 시간이 많았다.
1군에 올라오니 개인적으로 훈련할 시간도 빠듯했다.
여기에 매일 경기를 복기하고 기록하고 경기 전략을 세운다고 생각하니 벌써 하루가 다 간 듯한 기분이었다.
왜 박신언이 동료들과 개별적인 친분이 없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FM대로 생활하면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
하루 8시간 이상 꼭 자란 말이 뼈저렸다.
몸보다 머리가 지친 상태로 훈련에 참가했다.
홈경기 훈련은 원정 경기보다 배는 길다.
팀 전체 훈련, 조별 훈련, 보충 훈련으로 이뤄졌다.
훈련이 끝나면 중계방송사 인터뷰나 언론사 인터뷰도 있다.
당연하게도 김인환과 송석현은 언론사들의 첫 번째 인터뷰 대상이었다.
“오오오오.”
“윤로미다, 윤로미야.”
“와, 씨바. 개 예쁘네.”
“몸매 봐라, 몸매. 나는 윤로미가 원톱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딱 저만한 키가 최고야. 저 키에 저 정도 글래머면 진짜 끝장 아니냐?”
“너는 장애선이냐, 윤로미냐?”
“저는 금보배요.”
“금보배? 걔는 글래머가 아니라 좀 찐 거 아닌가? 얼굴도 좀……. 윤로미처럼 글래머러스하든가, 장애선처럼 슬렌더인 애를 뽑으라는 거잖아. 윤로미랑 장애선은 얼굴도 된다, 참고로.”
고트 벤치가 술렁였다.
선수들은 인터뷰에 나선 MBS 아나운서 윤로미의 등장에 눈을 떼지 못했다.
매일 야구 하이라이트를 중계하는 스포츠 아나운서는 야구팬은 물론 야구 선수들에게도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FA로 거액을 받은 야구 선수들의 와이프 중엔 스포츠 아나운서들이 적지 않았다.
근래에 스포츠 아나운서는 명문대 출신부터 걸 그룹, 모델, 공중파 아나운서 지망생들까지 다양했다.
이 중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는 두 사람이 윤로미와 장애선이었다.
윤로미는 해외 명문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빼어난 미모와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일찌감치 인기를 끈 그녀는 타고난 밝은 성격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에 반해 장애선은 국내 미인 대회 출신이자 모델 출신이었다.
단아한 외모, 슬림한 몸매, 낯가리는 성격은 많은 야구 선수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여태 많은 선수들이 대시했지만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기에 역으로 더 많은 인기를 구사하는 아나운서였다.
윤로미가 원래 인기가 많았다지만 오늘은 유독 선수들이 윤로미에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 입고 온 노란 원피스가 작게 나온 탓인지 안 그래도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오늘은 더더욱 두드러졌다.
선수들의 애타는 눈이 윤로미에게 쏠렸으나, 윤로미의 눈은 단 한 사람에게 쏠렸다.
등번호 8번.
포수 송석현.
윤로미는 예의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송석현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