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75화 (75/201)

라이징 스타 (2)

설진일의 번트는 피닉스와 고트 모두를 당황시켰다.

고트의 작전도 없었고 피닉스의 계획에도 없던 번트였다.

“뛰어! 뛰어!”

조금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포수 박신언이었다.

박신언이 3루로 뛰자 1루 주자 정병선도 2루를 훔쳤다.

투수 앤써니 쉐인은 1루와 마운드 사이로 굴러온 공을 잡기 위해 맨손을 뻗었다.

“저렇게 잡으면…….”

송석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은 투수의 손에 잠시 머물다 튕겨 나갔다.

“만루! 만룹니다! 설진일 선수의 깜짝 번트! 모두가 놀란 번트였습니다!”

“방금 번트는…… 절묘했습니다. 피닉스 내야진이 확실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어수선했거든요. 1루수 경수인 선수가 너무 준비가 없었던 거 같습니다.”

“경수인 선수가 수비 시에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건 매번 있는 얘긴데 고쳐지질 않는군요.”

무사 만루.

고트 벤치에선 박수가 나왔다.

작전코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웬 번트야.”

함성훈 감독은 타격코치를 가까이 불렀다.

“설진일, 2군에서도 많이 보셨죠?”

“예, 그렇죠.”

“어떤 친굽니까?”

“독종입니다.”

“어떤 식의 독종 말씀하시는 건가요?”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스타일입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트레이드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공수주 빠지는 거 없는 군필 외야수니까 얼마나 인기가 많았겠습니까? 수비는 확실히 A급이고 타격은 장타력은 좀 부족해도 공을 보면서 치는 스타일이라 투수를 가라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어깨는 진짜배깁니다. 석현이 같은 수준은 아니어도 전 구단을 통틀어 손에 꼽는 강견입니다.”

“그런 친구가 왜 여태 눈에 안 띄었던 거죠? 저는 이름은 들어 봤지만 그 정도 친구인지는 몰랐는데요. 1군에 여태 한 번도 안 올라오지 않았나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부상도 있었고, 낙균이가 오면서 외야가 포화 상태라 2군에서 콜업 될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본인도 흥미를 잃어버려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태업한 겁니까?”

“태업이라기보단, 본인이 동기부여가 없으면 힘들어하는 타입입니다.”

“그러면 멘탈이 약한 거 같은데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똘끼가 있습니다. 몸 안 사리고 날아다니는 친굽니다. 멘탈이 약하다 보긴 어렵습니다.”

“동기부여가 중요하단 말씀이시죠?”

“똘기 있는 거 빼곤 조금만 적응하면 1군에서도 레귤러는 충분히 할 친굽니다.”

설진일이 유니폼의 흙을 탁탁 털었다.

앤써니 쉐인은 이를 꽉 물면서 설진일을 잠시 노려봤다.

무사 만루에 타석은 클린업트리오.

설진일은 무조건 잡아야 했던 선수였다.

팡팡!

김창현은 앤써니를 보면서 손을 아래로, 아래로 흔들었다.

침착하라는 수신호.

앤써니는 베테랑답게 숨을 크게 들이켜곤 천천히 내뱉었다.

“만루에 김인환 선수가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김인환 선수와 승부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다음 타자 송석현 선수가 결코 만만한 타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했잖습니까? 게다가 오늘 2점 홈런까지 때렸습니다.”

“피닉스는 1점을 주더라도 여기서 병살을 이끌어 내고 싶을 텐데, 과연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야 수비수들이 전진했습니다. 어떻게든 땅볼을 끌어내겠다는 심산 같습니다.”

김인환은 타석에 들어서며 고개를 돌렸다.

대기 타석에 송석현이 배트를 들고 몸을 풀고 있었다.

-형, 생각하지 마요. 풀스윙. 존 안에 오면 무조건 풀스윙하고 애매하면 그냥 걸러요. 볼 배합이나 상황은 생각하지 말아요.

조금 전, 김인환이 앤써니를 어떻게 공략하는 게 좋겠냐고 물었을 때 들은 송석현의 대답이었다.

매번 신기 들린 무당처럼 구질을 예측해서 치는 송석현에게 어떤 비법이 있지 않을까 졸라 봤지만 송석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마다 스타일이 달라요. 형은 형 스타일로 가야죠.

“내 스타일…….”

김인환이 중얼거렸다.

내 스타일.

내 스타일…….

최근 송석현이 자기 뒤에 서면서 투수들은 대놓고 김인환을 피했다.

김인환이 존을 좁히며 신중하게 타격을 한 덕에 여태 출루가 이어져 왔지만 이젠 승부할 타이밍이다.

‘커브, 떨어뜨려.’

피닉스 포수 김창현은 만루 상황에서도 블로킹을 각오하고 떨어지는 공을 요구했다.

앤써니는 예의 12-6 폭포수 커브를 던졌다.

-볼, 로우.

“김인환 선수, 공 하나를 걸러 냅니다.”

“방금 커브는 상당히 날카로웠는데 김인환 선수가 반응하지 않았네요.”

“김인환 선수의 선구안이 좋아진 걸까요?”

“안 그래도 최근 경기 출루가 많이 늘었습니다. 안경을 써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김창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김인환은 시동을 걸었다.

시동은 걸었는데 타이밍이 늦었다.

공을 보고 고른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체인지업, 로우.

김창현은 공 하나로 김인환을 다시 시험해 봤다.

팡.

-볼, 로우.

김창현은 확신했다.

이번에도 시동은 걸렸다.

그런데 중간에 멈췄다.

공을 보고 고른 게 아니다.

애초에 비슷한 공은 모두 치려고 나가려는 거다.

그동안 고의 사구에 가깝게 상대해 왔기에 김인환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

김창현의 눈이 김인환과 송석현을 번갈아 봤다.

김인환을 걸러도 송석현이다.

오늘 감이 좋은 타자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승부해야 한다.

떨어지는 변화구 두 개를 바깥쪽에 던졌다.

그렇다면…….

‘패스트볼, 몸 쪽, 아래로.’

병살을 노려야 한다.

앤써니는 숨을 골랐다.

강타자 상대로 몸 쪽 공은 실투로 이어질 경우 대형 사고가 터질 수 있다.

바깥쪽 변화구로 범타 유도가 최선이지만 변화구가 먹히질 않았으니 몸 쪽 직구 하나가 들어가야 한다.

“스으읍.”

앤써니는 공이 부서지도록 손가락으로 꽉 눌렀다.

앤써니의 최대 구속은 145km/h도 안 된다.

제구와 변화구로 먹고사는 투수가 몸 쪽 승부를 들어가자면 패스트볼의 회전을 더 살리는 수밖에 없다.

앤써니는 다리를 최대한 쭉 뻗으면서 공을 확 챘다.

‘코스는 완벽해.’

김창현은 미트를 내밀었다.

몸 쪽으로 잘 붙은 공이다.

심판이 어지간히 존이 작지 않으면 스트라이크가 나올 코스다.

타자가 기술적으로 밀어 치지 않는다면 정타가 나오기 힘들다.

하물며 타자가 김인환이라면…….

스윽.

김인환이 배트에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됐다.

치면 병살이다.

김창현은 김인환이 배트를 힘껏 잡아당기는 게 보였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단 조금 더 늦은 타이밍에.

탕!

“떴다!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측 담장! 넘어갔습니다!”

김인환이 배트를 던졌다.

김창현은 넋이 나간 얼굴로 김인환의 등을 바라봤다.

폴대 밖을 넘어갈 듯 넘어갈 듯, 기어이 넘어가지 않은 공.

조금 늦은 타이밍에 공을 맞혀서 라인 안으로 들어왔다는 건 이해했지만, 늦은 타이밍에 맞았는데 어떻게 담장을 넘어갔는지 믿기 어려웠다.

“김인환! 김인환! 김인환! 김인환!”

“헤! 라! 클! 레! 스! 김! 인! 환!”

“고트의 헤라클레스 김인환! 날려, 날려, 시원하게 날려 버려!”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소식이었다.

김인환의 홈런.

밀리듯 친 공을 담장에 넘겨 버리는 괴물.

김봉사라는 별명까지 붙은, 미운 털이 박힐 대로 박힌 타자였지만 고트 팬들에겐 애증의 선수였다.

애증이 깊으면 희로애락도 깊어지는 법이다.

송석현의 홈런에 환호하던 팬들은 김인환의 만루 홈런에 광기에 젖어 소리를 질렀다.

“앉으세요! 앉아요! 위험합니다!”

“거기 뛰지 마세요!”

“음식 쏟아지잖아요!”

흥을 돋우려 애쓰던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들이 이번엔 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대전구장의 보안 팀까지 와서 팬들을 진정시켰다.

“인환아! 난 네가 한 방 칠 줄 알았다!”

“싸랑한다! 알라븅!”

“사랑해요, 김인환! 김인환! 포에버!”

이제 겨우 3회건만, 벌써 거하게 취한 팬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응원과 술주정을 동시에 해 댔다.

“어디 조울증 환자들을 데리고 왔나. 참 나.”

보안 팀 직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로 돌아갔다.

“예! 예! 예!”

홈 플레이트에선 주자들이 홈런을 친 김인환과 하이 파이브를 나눴다.

평소엔 절제하는 김인환도 이번만큼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야!”

김인환은 송석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백투백 기대한다!”

6-5로 달아나는 점수.

애물단지 김인환의 만루 홈런에 고트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다.

마운드의 앤써니는 기운이 빠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하…….”

넋이 나간 건 포수도 마찬가지였다.

빅이닝.

김인환의 만루 홈런 한 방에 분위기가 단숨에 고트에게 넘어갔다.

김창현은 습관적으로 투수에게 바깥쪽 낮은 곳의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가장 무난하고, 그래서 안전한 공.

탕!

“큽니다! 큽니다! 큽니다! 큽니다! 가운데 담장! 넘어갔습니다!”

송석현은 배트를 옆에 두고 1루로 천천히 뛰었다.

가장 안전한 공은 가장 뻔한 공이다.

김창현의 눈썰미가 날카로워 송석현의 배트가 남들보다 1인치 이상은 더 길다는 것만 알았어도 애매하게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직구를 요구하지는 않았을 터다.

“백투백! 백투백이 나왔습니다!”

“고트는 오늘 정말 무섭네요! 이번 이닝에만 5점, 그것도 홈런으로만 5점을 가져갑니다!”

“단숨에 최대규, 이낙균, 강문규의 빈자리를 메우는 홈런! 김인환 선수의 힘이야 이미 정평이 나 있었지만 송석현, 이 어린 선수가 이렇게 펀치력이 좋을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요?”

“어디서 이런 보물이 굴러들어 온 거죠? 하하하. 고트는 새옹지마가 따로 없네요.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자마자 리그 최고의 유망주 하나가 탄생합니다. 저 선수, 올해 스무 살입니다! 게다가 포수예요! 4번 타자에 서는 포수! 고트 팬들은 안 먹어도 배부르겠습니다!”

팬들이 입을 모아 응원가를 불렀다.

“우리가 가지 못할 곳은 없지. 모두가 어렵다고 해도 우린 밟고 또 밟고 올라가지. 너희는 그저 우리를 우러러볼 뿐. 정상에 서는 건 결국 우리라네.”

“가을의 주인, 잠실의 주인, 고트, 고트라네!”

송석현이 3루를 밟자 고트 팬들이 펜스에 붙어 송석현을 연호했다.

송석현은 관중석을 한 번 본 뒤 손을 흔들었다.

“석현이가! 손을 흔들어쒀!”

“우리도 4번 타자가 있다니까!”

“김인환 이제 터진 거야! 김인환이랑 송석현까지 터지면 우리도 할 만하다고!”

홈런을 쳤다 해도 아직 2점 차.

같은 2점 차라고 해도 한 이닝에 홈런 두 방으로 5점을 따라간 2점 차는 달랐다.

앤써니 쉐인은 볼넷을 연속으로 두 번은 더 준 뒤 강판당했다.

2선발투수가 마운드에서 내려가자 분위기는 단숨에 고트에 기울었다.

고트가 현재 불펜이 약하다고 하지만 피닉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송석현은 이날 경기 5타수 3안타, 2홈런, 2볼넷으로 전 타석 출루라는 기록을 세우며 피닉스의 저승사자가 됐다.

이날 경기의 MVP는 만루 홈런의 김인환이 가져갔지만 송석현은 구단 버스를 타기 어려울 정도로 팬들에게 둘러싸여 한참을 사인하고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 * *

“어…… 그러니까…….”

MVP 선정 후 개인 인터뷰 시간.

김인환은 목이 메어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무려 2년 만에 다시 뵙는 거 같네요. 그쵸?”

아나운서가 웃으면서 김인환을 다독거렸다.

김인환은 겨우 울음을 삼켰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인상적인 만루 홈런을 때렸는데 혹시 타석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준비하셨나요?”

“어…… 그냥 보고 치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보고 치자. 그러니까 따로 구질을 노린 게 아니라는 말씀이신 거죠?”

“예, 저는 그렇게 세심하게 생각하고 치는 타자는 아니라서요.”

“김인환 선수가 이번에 1군에 올라오면서 볼넷도 늘어나고 출루가 많이 늘어났는데, 혹시 달라진 비결을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제가 잘했다기보단 석현이가 뒤에서 잘 쳐 줘서 그런 거 같습니다. 석현이가 잘하니까 제가 해결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사라지고, 부담감이 사라지니까 공을 여유롭게 더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오늘 송석현 선수와 홈런 세 개를 합작했습니다. 고트가 지금 상황이 좀 어수선하잖아요?”

“예, 뭐…….”

“그런 상황에서 두 선수에게 기대를 거는 팬들도 많을 거 같은데, 한 말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인환은 숨을 몇 번이고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동안 팬 여러분들에게 실망만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좋은 성적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가을 점퍼를 입혀 드리겠습니다. 제가 장담은 못하지만, 우리 팀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고트는 강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