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전 (4)
해설자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 파울이네요. 폴대를 약간 비껴 나갔습니다.”
“방금 보셨습니까? 공이 장외로 넘어갔습니다.”
“대전구장이 작긴 해도 저걸 장외로 넘기네요.”
“4번 타자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힘이 정말 장사네요.”
“방금은 정말 마음먹고 돌리지 않았나요?”
“직구를 예상하고 돌린 거 같습니다.”
베론은 ‘왓 더 퍽’을 몇 번이고 외쳤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공이 하늘로 뻗어 나갔다.
가운데 담장으로 보냈어도 넉넉하게 홈런이 될 공이었다.
“저게 스무 살이라고?”
미국이라면 스무 살에 프로 무대 데뷔는 어림도 없다.
루키리그에서 땅콩버터를 잔뜩 바른 빵 쪼가리를 오물거리면서 야구를 계속해도 되는지 회의감에 젖을 나이다.
하마터면 데뷔전에 첫 안타, 첫 홈런을 모두 내줄 뻔했다.
‘슬라이더, 바깥쪽.’
포수의 두 번째 사인에 투수는 도리질 한 번 없이 수긍했다.
팡!
-볼, 아웃사이드.
송석현의 힘을 본 터라 포수는 모험하지 않았다.
바깥쪽 변화구로 공 하나를 뺀 뒤 아래로 떨어지는 공으로 타자를 유혹했다.
-볼, 로우.
“송석현 선수 공을 잘 골라내네요.”
“베론 선수는 사실상 투 피칩니다. 패스트볼이 50% 이상, 슬라이더가 30%를 차지합니다. 여기에 체인지업을 추가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여 주기용입니다. 베론 선수의 패스트볼이 빠르고 위력적이긴 하지만 슬라이더는 그렇게 좋다고 할 순 없습니다. 패스트볼이 받쳐 줄 때 슬라이더가 위력이 있는 거지 연속으로 슬라이더를 던지면 타자를 속이기 힘듭니다.”
포수는 가슴에 뭔가가 얹힌 듯 답답했다.
김인환은 당연히 피해야 하는 타자다.
다음 타자가 오늘 첫 경기 애송이라면 더더욱.
신고 고졸 포수를 무서워할 필요가 있는가?
송석현의 첫 타구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김인환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공포다.
김인환의 파워야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약점도 분명하다.
배드볼 히터.
좋은 공만 주지 않으면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
인내심도 많지 않아 스윙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스스로 스트라이크존을 넓혀 적극적으로 스윙한다.
배터리가 인내심을 가지면 스스로 무너지는 타자가 김인환이다.
송석현은 다른 유형의 타자다.
노림수가 명확하다.
초구의 스윙은 반응이 아니라 대응의 스윙이었다.
노림수가 강한 타자는 역으로 노림수만 피하면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노림수가 강하다는 건 약점도 분명하단 얘기다.
약점이 없는 타자가 노림수를 가져갈 필요가 있는가?
통상적인 추론이지만…… 변화구에 반응이 없다.
베론은 좋은 직구를 가졌지만 지금 스트라이크존에 직구를 넣었다간 사달이 날 듯싶다.
타자의 노림수가 패스트볼이라면 대체 지금 뭘 요구해야 한단 말인가?
“베론 선수, 볼넷을 내줍니다.”
“사실상 고의사구나 다름없었습니다. 초구 이후로 모두 스트라이크존에서 많이 벗어난 공이었습니다.”
“이거 재밌네요. 베론 선수, 상당히 자존심이 강한 타입의 투수 아닌가요?”
“하하, 맞습니다. 자존심도 강하고 성격도 불같죠.”
“그런데 두 타자를 연속으로 거릅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나요?”
“그만큼 김인환, 송석현 선수의 파워를 인정하는 거죠. 아까 송석현 선수의 파울 홈런은 저도 가슴이 철렁했어요. 제가 투수도 아닌데 말이죠.”
“파울 홈런이었지만 장외로 넘어가는 공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무사 1, 2루. 좋은 득점 찬스죠? 고트가 여기서 점수를 얻어 낸다면 경기는 확실히 고트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송석현이 장비를 벗어 코치에게 건넸다.
코치는 송석현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잘했어. 안 덤비고 공 잘 골랐다.”
함성훈 감독은 1, 2루에 나간 김인환과 송석현을 보며 짧게 박수를 보냈다.
타격코치가 옆으로 와 말했다.
“감독님 말씀대로 흘러가네요. 인환이가 3번으로 서고 석현이가 4번으로 서는 전략이 잘 맞아떨어지는 거 같습니다.”
“송석현이 생각보다 더 잘해 주네요. 말씀해 주신 대로 침착하고 노림수가 분명한 타잡니다.”
“인환이도 오늘 많이 참네요. 시너지 효과가 좋은 거 같습니다.”
“김인환이 조급하다는 게 큰 문젠데 송석현이 뒤에 서니까 조급함이 줄어든 게 눈에 보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네요.”
“인환이가 석현이한테 많이 의지하거든요. 석현이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의지한다고요?”
“석현이가 꽤 성실한 타입이라 야구 이론에 관해선 박학다식합니다. 듣자 하니 국내에 나온 야구 책은 다 읽었다네요. 인환이한테도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줬는데 그게 인환이한테 잘 맞아떨어졌나 봅니다.”
“그래요?”
함성훈이 1루에 있는 송석현을 바라봤다.
“저런 포수가 신고로 들어오다니…….”
“그러게 말이죠.”
“흠.”
함성훈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타격코치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어쩌면 잠바 입고 야구 할 수 있겠어요.”
두 타자 연속 볼넷.
무사 1, 2루.
고트는 작전을 내지 않았다.
투수는 흔들리고 있고, 주자 둘은 주루 플레이에 능하지 못한 3, 4번 타자.
투수의 자멸을 노리는 편이 낫다는 게 감독의 결론이었다.
‘슬라이더, 아래로.’
포수의 사인대로 투수는 떨어지는 공을 던졌다.
5번 타자로 나선 최재완은 공의 윗부분을 때렸다.
“타자 쳤습니다! 유격수! 유격수! 잡고! 아, 아, 아! 유격수, 저기서 저글을 합니다. 공을 못 던졌어요!”
“유격수가 글러브에서 공을 제대로 빼지 못했어요. 방금 건 서두르지 않아도 병살 코스였거든요.”
“베론 선수, 수비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피닉스가 올 시즌엔 수비에 역점을 두고 준비했다고 말했는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매 경기마다 실책이 나오거든요. 투수가 야수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베론은 하늘을 보며 욕을 내뱉었다.
흔들리는 투수를 더 흔들어 버리는 수비.
6번 타자 오진영은 제구가 흔들린 투수의 공을 외야로 보냈다.
“1-0. 외야 플라이로 고트가 1점을 앞서갑니다.”
“피닉스 입장에서도 최악은 면했습니다. 1점과 아웃 카운트 하나를 바꾸고 주자들을 묶어 놨습니다. 1사 1, 2루. 병살로 이닝을 끝낼 수도 있거든요.”
베론이 다혈질이긴 해도 프로 경력만 10년이 넘는다.
야수의 실책은 한 번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1사 주자 1, 2루.
집중하면 1점만 내주고 끝낼 수 있는 상황이다.
“정동규 선수! 외야로 공을 보내는데…… 아! 너무 높게 떴네요. 우익수가 손을 뻗어…… 놓쳤어요! 놓칩니다! 주자들도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 방금 건…… 방금 공은 놓칠 공은 아니었거든요. 저런 실수를 하나요?”
“그사이에 송석현은 3루를 밟고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고트의 달아나는 점수. 스코어는 2-0. 1사 2, 3루 상황이 이어집니다. 고트의 계속되는 공격 상황. 고트는 4회에 빅이닝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 볼넷과 실책으로 피닉스가 자멸하네요. 이건 고트가 잘한 게 아니라 피닉스가 못한 겁니다. 피닉스 팬들의 실망이 크겠네요.”
“작년에 우승하긴 했지만 역시 뎁스의 문제는 어쩔 수 없네요.”
송석현이 벤치로 들어오자 선수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타격코치는 송석현의 헬멧을 툭툭 두드렸다.
“첫 홈런볼도 가져갈 수 있었는데. 아깝다, 그치?”
송석현은 벤치로 돌아와 한숨을 돌렸다.
아직도 손이 짜릿하다.
욕심이 앞섰다.
직구를 노리던 차에 몸 쪽 직구를 보자 어깨가 더 빨리 돌아갔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어깨가 덜 돌아갔다면 홈런이 나왔을 거다.
“잘했어. 역시 공 잘 고르네.”
김인환이 송석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흔하디흔한 파울이지만 한 끗 차이로 홈런을 놓치는 파울은 경기 내내 아쉬움이 남는 법이다.
누구보다 송석현의 마음을 잘 아는 김인환이었다.
“마음이 급했어요, 평소대로 했으면 홈런인데.”
“당연한 거야. 원래 첫 경기는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어어!’ 하다가 끝나는 거라니까.”
“오늘만 끝나면 정신이 돌아오려나요?”
“하루 지나면 좀 나아. 뭐, 계속 적응 못하는 애들도 있지만 넌 그런 케이스는 아니잖아?”
송석현은 제 뺨을 툭툭 만졌다.
2군에서 날아다니다 1군만 오면 죽을 쓰는 선수들도 많다.
1군과 2군의 실력 차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고, 큰 경기에 약한 경우도 있다.
프로 야구는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의 환호와 비난 속에서 경기를 치른다.
타고난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중압감에 약한 선수는 쉬이 무너질 수 있다.
혹시 자신도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송석현은 홀로 고민에 빠졌다.
첫 경기라 정신이 없는 건가, 정말 관중 앞에서는 작아지는 타입인가.
고민의 터널 속에 빠져든 사이, 고트는 4회를 빅이닝으로 만들었다.
“고트가 4회에만 7득점을 뽑아냅니다.”
“아, 베론 선수. 4회에 강판됩니다. 오늘 공이 좋았거든요. 분명 3회까진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잘 던졌어요.”
“베론 선수……. 아, 화를 참지 못하네요. 글러브를 던져 버리고 벤치를 나갑니다.”
“용병 선수라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안 되지만 오늘만큼은 베론 선수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갑니다. 4회에만 실책이 세 개가 나왔습니다. 베론 선수의 두 타자 연속 볼넷이 대량 실점의 시발점이 됐지만 분명 이닝을 쉽게 끝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거든요.”
“피닉스의 수비 불안은 좀처럼 고쳐지질 않네요.”
“2012년 피닉스의 우승은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미스터리로 남을 겁니다. 누가 지금의 피닉스를 보고 작년 우승 팀으로 생각하겠습니까?”
“피닉스 투수는 방어율에서 1점은 빼 줘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그저 가볍게 웃고 넘길 얘기가 아닌 거 같네요.”
4회 말.
7득점을 지원받은 한민석은 4회에 볼넷만 세 개를 내줬다.
빅이닝의 단점, 즉 투수의 어깨가 식다 보니 영점 조절과 구위가 약간 떨어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유격수! 유격수, 잡아서 2루로! 다시 1루로! 아웃! 아웃입니다! 4-6-3 병살!”
“고트! 만루 상황에서 한 점도 내주지 않고 막아 내네요.”
“지금 5위로 내려앉았지만 고트도 분명 시즌 초까지만 해도 우승권 경쟁이 가능한 팀이었거든요.”
“확실히 뎁스의 깊이, 저력이 다릅니다. 주전 타자 셋이 이탈했는데 수비만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공격이 약해졌냐고 물으면 오늘 경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김인환 선수의 3번 기용이 오늘은 좋은 선택이 됐습니다. 상대 투수가 김인환 선수를 거르게 되면서 출루율이 올라갔고, 4번 타자 송석현 선수 또한 첫 데뷔 신인답지 않은 침착함으로 연속 출루를 이어 갔습니다.”
“운이 따르긴 했지만 출루 후 연속 안타가 나온 것도 좋은 모습이죠?”
“예, 그렇습니다. 잔루를 쌓아 놓고 무너지는 경우도 많은데 고트는 기회를 살렸습니다. 오늘 베론 선수의 공이 좋았거든요. 만약에 4회를 무사히 넘겼다면 피닉스도 6회까진 잘 이어 갈 수 있었을 텐데 4회의 연속 실책으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고트는 좋은 수비로 위기를 빠져나가고, 피닉스는 나쁜 수비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고트가 이렇게 수비만 탄탄하게 유지한다면 주전 선수들의 복귀 이후 더 치고 올라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 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 김인환, 송석현 선수까지 가세하면 뎁스도 더 두꺼워질 테고요.”
“하하, 두 선수의 조합이 오늘이 처음인 만큼 당분간 더 지켜봐야 윤곽이 나올 거 같습니다.”
7-0까지 점수가 벌어지자 서일혁은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5회, 6회 들어 피닉스는 또 실점을 추가해 10-0까지 점수를 벌렸다.
7회에 접어들자 함성훈 감독이 박신언 포수를 불렀다.
“어때? 좀 쉴까?”
박신언은 벤치를 슬쩍 뒤돌아봤다.
“예, 알겠습니다.”
“오늘 고생했어. 앞으로는 이닝 관리해 줄 테니까 체력 관리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저야 일혁이 덕에 항상 체력은 잘 유지하잖습니까? 괜찮습니다.”
감독이 배터리코치를 불렀다.
배터리코치는 감독의 지시를 듣곤 당황해 다시 물었다.
“석현이를 포수로요?”
“네, 이런 경기에 포수 데뷔를 시켜 봐야 할 거 아닙니까?”
“하지만…….”
배터리코치가 서일혁을 쳐다봤다.
서일혁은 감독과 코치를 계속 힐끔거렸다.
“일혁이가 백업 포순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경기에 신인을 써 봐야죠.”
“……일혁이 올해 FA인 거 잘 아시잖습니까? 경기 일수 채우기 쉽지 않은데 웬만하면 일혁이를 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오늘 석현이는 보여 줄 거 다 보여 주고 있는데요.”
“뭐 때문에 걱정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선수들 파벌 때문이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파벌을 이겨 내는 건 파벌의 배분이 아니라 실력이라는 기준입니다. 어떤 감독이든 오늘 같은 경기에 송석현을 포수로 안 써 보겠습니까?”
배터리코치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코치님도 팀을 위해서 해 주신 말일 텐데요. 서일혁은 잘 타일러 주세요. 오늘 경기 아니라도 올 시즌 깁니다.”
“예.”
김태우 배터리코치가 감독과 말을 끝내고 몸을 돌렸다.
서일혁은 벌써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배터리코치는 서일혁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대로 송석현에게 다가갔다.
“석현아, 준비해라. 다음 이닝에 포수로 나간다.”
송석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요?”
선수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일혁에게 쏠렸다.
서일혁은 배터리코치와 송석현을 번갈아 봤다.
“그래, 준비해.”
“아, 알겠습니다.”
송석현은 포수 장비를 찾아 하나둘 입기 시작했다.
벤치의 선수들은 서일혁을 보며 숨을 골랐다.
배터리코치는 서일혁에게 가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한 경기만 할 거 아니잖아. 그치? 한 경기야, 한 경기.”
“……네, 알겠습니다.”
송석현은 얼빠진 얼굴로 프로텍터를 어루만졌다.
김인환은 송석현을 보며 웃었다.
“오늘 할 거 다 하는데? 축하한다.”
“아…… 하하. 감사합니다.”
송석현이 활짝 웃었다.
서일혁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벤치 뒤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