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전 (3)
고트의 선발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한민석 선수가 올라옵니다.”
“최근 성적은 별로 안 좋죠? 최근 세 경기 방어율이 7점댑니다.”
“고트가 야심차게 FA로 영입했는데 이후 성적은 사실 좀 아쉽습니다.”
“좌완 파워 피처. 지옥에서도 데려온다는 파이어볼럽니다. 부산 폭스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 줬는데 고트에 온 이후로는 방어율이 4점대예요.”
“동갑내기 이창훈 선수도 FA로 영입됐지만 이창훈 선수는 고트의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어서 더 대비가 됩니다.”
“이창훈 선수야말로 모범적인 FA 사례죠. 방어율도 3점대를 지키고 있지만, 무엇보다 이닝 이터 역할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한민석 선수는 부산 폭스 시절의 제구력 난조가 고쳐지질 않으면서 이닝 소화 능력까지 떨어지고 있어요. 선발투수라면 점수를 내주더라도 이닝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거든요.”
피닉스의 1번 타자 강영호가 나왔다.
송석현은 그새 수첩과 펜을 꺼내 경기장을 바라봤다.
공수겸장 최고의 포수가 정용욱이지만 수비에 있어선 박신언도 뒤지지 않는다.
볼은 빠르고 제구력이 좋지 않은 선발투수.
최근 컨디션까지 좋지 않다.
포수로서 어떻게 경기를 풀어 가는지 옆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 한복판 공을 놓칩니다.”
“역시 한민석 선숩니다. 공격적이죠? 빠른 공을 가진 만큼 경기 초반에는 승부를 빨리빨리 가져가는 게 좋습니다.”
탁.
“파울! 투수가 공 두 개로 2스트라이크를 만듭니다.”
“강영호 선수가 수비는 좋은데 아쉽게도 타격이 수비에 많이 미치지 못합니다. 고트 배터리가 이런 점을 적극 활용하고 있네요.”
“제3구! 삼진 아웃입니다!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뺏어 내는 한민석 선수!”
“좋아요. 2스트라이크 이후에 떨어지는 공. 알면서도 배트가 안 나갈 수 없죠.”
“고트가 기분 좋게 출발합니다.”
두 번째 타자는 김진필.
피닉스에선 타격 지표가 두세 번째를 오가는 타자였다.
한민석은 이번엔 초구 슬라이더를 던졌다.
“초구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과감하네요.”
“거의 한복판이었죠? 타자가 타이밍이 안 맞았습니다.”
“오늘 한민석 선수가 적극적인데요?”
두 번째, 세 번째 공은 볼이었다.
네 번째 공은 바깥쪽 직구로 스트라이크.
2-2.
한민석은 떨어지는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았다.
“삼진! 두 타자 연속 삼진입니다!”
“오늘 슬라이더가 잘 떨어지네요. 평소에는 밋밋하게 몰려서 큰 사고가 났었는데 오늘만큼은 다릅니다.”
송석현은 펜을 꺼내 적어 내려갔다.
-타자가 약하면 투수 장점을 살려 공격적으로 간다.
-타자가 강하면 타자의 약점 공략이 우선이다.
정석적인 볼 배합이다.
송석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박신언이라면 어떤 볼 배합을 요구했을까?
김진필에게 요구한 초구 슬라이더를 빼면 박신언의 사인과 대동소이했다.
현역 톱클래스 포수와 자신의 볼 배합이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닫자 송석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송석현 본인이 포수지만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은 역시 볼 배합과 프레이밍이다.
포수로서 경기를 많이 뛰어 경험을 쌓는 게 최선인 분야가 볼 배합과 프레이밍이다.
TV를 볼 땐 이해가 가지 않는 볼 배합도 현장에서 볼 땐 이해할 수 있다.
심판의 존이 평소와 다르거나 투수와 타자의 상태가 TV에서 볼 때와는 다른 점이 있을 때 포수는 거기에 맞춰 볼 배합을 바꾼다.
-스트라이크! 아웃!
“한민석 선수! 세 타자 연속 삼진!”
“오늘 한민석 선수가 어깨가 풀렸네요. 이게 한민석이죠.”
“부산 폭스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한민석 선수가 오늘 대전에서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저게 한민석입니다. 제구가 좋지 않아도 힘으로 윽박지르는 게 한민석 선수의 매력이거든요.”
송석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벤치로 들어오는 선배들을 맞았다.
세 타자 연속 삼진에 고트 선수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자, 자. 집중하고. 한 점씩, 한 점씩 벌어 나가자.”
타격코치가 손뼉을 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1회 초 무득점으로 떨어진 사기를 선발투수의 삼진 쇼로 분위기를 쇄신했다.
분위기가 올라왔을 때 점수를 뽑아내야 경기가 풀리기 마련이다.
-아웃!
-아웃!
-아웃!
“베론 선수, 세 타자 연속 범타 처리를 하네요.”
“고트 선수들이 베론 선수의 강속구를 공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양 팀 선발투수들의 활약이 대단한데요?”
“양 팀 선발투수 모두 파워 피첩니다. 베론 선수는 최고 구속 155km/h까지 던지는 투순데 요새 날이 더워지면서 공이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한민석 선수는 최고 구속이 148km/h로 베론 선수보단 느리지만 좌완 투수인 데다 투구 폼이 좋아서 타자들이 쉽게 공략하질 못하고 있어요.”
“이러면 투수전으로 경기가 풀리나요?”
“일단 타순이 한 바퀴 돌아야 할 거 같습니다. 베론 선수가 아까 송석현 선수에게 안타를 하나 맞았거든요. 송석현 선수의 배트 타이밍이 늦었는데도 안타가 나왔다는 건 베론 선수의 구위가 오늘 생각보다 약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해설 위원의 예측처럼 경기 초반은 투수전으로 흘렀다.
투수의 미덕은 제구라고 얘기한다.
제구가 중요하다고 강속구를 곁다리로 치부하면 안 된다.
강속구는 눈에 익기 전에는 좀체 공략하기 어려운 공이었다.
4회 초.
김인환이 선두 타자로 나왔다.
‘슬라이더, 바깥쪽.’
포수가 미트를 바깥쪽으로 뺐다.
투수는 숨을 훅훅 내뱉더니 고개를 저었다.
포수 김창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직구, 바깥쪽.’
투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포수는 한숨을 쉬었다.
김인환의 힘을 제대로 모르기에 고집을 부르는 거다.
김인환은 잠실에서 밀어 쳐서 홈런을 때리는 선수다.
김인환이 고 3 때 메이저리그 스카우터가 김인환의 파워에 만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소문이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용병으로 온 미국 선수들도 김인환의 파워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보기 힘들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최근 김인환이 1군에 없었기에 투수는 김인환이 어떤 타자인지 체감이 가질 않는 거다.
‘슬라이더, 아래로.’
바깥쪽 승부가 싫다면 공을 아래로 빼야 한다.
투수는 또 고개를 저었다.
“아! 배터리의 사인이 길어지네요.”
“투수가 계속 고개를 젓는다는 건 결국 자존심 때문이거든요.”
“김인환 선수와 승부를 해 보겠다는 얘길까요?”
“오늘 베론 선수의 공이 좋습니다. 한번 승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하지만 김인환 선수의 힘은 자타 공인 역대 최고 아닙니까?”
“선구안이 좋지 못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힘 하나만큼은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최고의 선숩니다. 승부할 필요가 없는 타자예요.”
“결국 심판이 경기를 속행하라고 주의를 주네요.”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갑니다. 답답했나 봐요.”
김창현이 마운드에 올라가자마자 투수가 입도 가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왜 피하는 거야? 내 공이 약해 보여? 스트라이크 하나도 안 던질 정도로 저 새끼가 세냐고!”
통역사가 순화해서 전달하자 김창현이 미간을 좁혔다.
“쉽게 쉽게 가자. 쟤는 피하는 게 좋아. 쟤 1루 보내고 병살로 가자. 오늘 네 공은 최고야. 오늘 같은 날이면 완봉도 해 볼 만하잖아. 쟤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네 기록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너 옵션에 이닝도 걸려 있잖아. 안 그래? 효율적으로 가자고, 효율적으로. 4번 타자는 루키야. 오늘이 첫 데뷔전이고. 오늘 네 공이면 병살은 일도 아니잖아.”
김창현도 포수였다.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까칠한 투수를 어르고 달래는 역할이 포수다.
오랜 경력의 포수답게 투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노하우가 있었다.
“……후.”
베론은 김창현의 속셈을 알면서도 더는 우기지 않았다.
김창현의 말에 일리가 있다.
자기 자존심도 챙겨 줬다.
무엇보다 아까 자신에게 안타를 뽑아낸 타자에게 병살을 만들자는 제안도 솔깃했다.
“오케이. 대신 다음 타자한테도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나도 곤란해.”
“그래그래, 일단 쟤 내보내고 병살 코스로 가자.”
포수가 마운드를 내려왔다.
베론은 마운드를 발로 차면서 김인환을 노려봤다.
베스트 컨디션임에도 상대 타자와 정면 승부를 피해야 하는 사실이 투수의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여기서 더는 우길 수 없었다.
투수가 제아무리 이기적인 포지션이라고 해도 팀의 일원이다.
포수가 투수의 자존심을 치켜세워 줬는데 한 번쯤 못 이긴 척 넘어가 줘야 앞으로 매끄럽게 팀 생활을 할 수 있다.
“볼넷. 볼넷을 주네요.”
“김인환 선수와의 승부를 피합니다.”
“1회 때도 김인환 선수를 피하고 송석현 선수와 승부했거든요. 데자뷔네요.”
“아까는 안타를 맞았었는데요.”
“안타를 맞긴 했지만 정타를 제대로 맞았다, 그렇게 말할 건 아니었습니다. 설령 안타를 하나 맞았다고 해도 김인환 선수보단 오늘이 첫 데뷔 경기인 송석현 선수가 더 할 만한 상대 아니겠습니까?”
“0-0. 투수전으로 이어 가는 팽팽한 순간에 신인 선수 송석현 선수가 나옵니다.”
“신고 선수로 들어온 선수가 첫 데뷔 경기를 4번 타자로 하는 경우는 참 드문 거 같은데, 하필 또 중요한 찬스 때 이렇게 나오게 됩니다.”
“첫 데뷔 경기를 4번 타자로 밀었다는 건 그만큼 팀에서 믿고 있다는 뜻이겠죠?”
“아까는 2루타로 믿음에 보답했는데 이번에는 어떤 승부를 이어 갈지 궁금하네요.”
송석현은 타석에서 한발 물러서 자리 잡았다.
김창현은 자세를 잡는 송석현을 훑었다.
스트라이드는 넓지 않다.
히팅 포지션도 높지 않다.
오픈스탠스지만 반 족자 정도만 열었다.
자세로만 보자면 1, 2번 타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송석현 선수, 이제 보니까 타격 폼이 재밌는데요?”
“뭐가 재밌을까요?”
“저 타격 폼을 보세요. 4번 타자와는 거리가 먼, 리드오프에게나 어울리는 자세거든요. 그런데 배트는 노브만 감싸지 않았지 끝부분까지 내려 잡았어요. 그립은 장타자에게 어울리는 그립이란 말입니다. 타격 폼과 그립이 이율배반이라는 거죠.”
“왜 저런 타격 폼을 고수하는 걸까요? 이유가 있나요?”
“글쎄요. 원래 저런 타격 폼인 건지, 아니면 찬스다 보니까 장타보단 진루타를 염두에 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해가 잘 안 가는 상황입니다.”
송석현이 배트를 장전했다.
포수는 송석현의 자세를 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누가 봐도 컨택에 초점을 맞춘 자세다.
합리적으로 추론해 보자.
상대 벤치에선 진루타를 염두에 두고 바깥쪽으로 밀어 치라는 사인을 냈을 거다.
상대가 바깥쪽을 노리는 가운데 일부러 바깥쪽의 나쁜 공을 줘서 병살을 노릴 것인가, 아니면 정석대로 몸 쪽 공을 줘서 병살을 노릴 것인가?
포수는 송석현의 배트를 보곤 결심을 굳혔다.
‘직구, 몸 쪽.’
딱 봐도 무겁고 긴 배트다.
아까 바깥쪽 승부를 들어갔다가 안타를 내줬다.
타자가 힘이 좋고 배트가 무겁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배트가 무겁기에 몸 쪽 대응이 늦을 수 있다.
‘오케이.’
투수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 승부.
애송이 상대로 자신의 힘을 제대로 보여 줄 시간이다.
“사인 교환이 끝났습니다.”
“초구를 뭐로 선택할지 궁금하네요.”
“투수, 던집니다!”
송석현은 일부러 어깨에서 힘을 더 뺐다.
파워는 힘만 많이 준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몸에서 힘을 빼야 하체의 회전력이 배트까지 전달된다.
하체의 무게 이동으로 힘을 만들고 어깨의 회전으로 스피드를 만든다.
쾅!
“넘어간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하얀 공이 까만 밤하늘을 유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