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전 (2)
“뭐 하냐, 너?”
“네?”
“배트를 끌어안고 뭐 하냐고.”
송석현이 얼뜬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박신언이 송석현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송석현.”
“네.”
“경기를 봐야지, 배트랑 꽁냥꽁냥을 하고 있으면 어쩌냐?”
송석현은 그제야 자기 모습을 제대로 봤다.
“죄송합니다.”
“너 수첩은 어딨어?”
“수첩요?”
송석현이 눈을 껌벅였다.
박신언은 송석현 이마에 딱밤을 놨다.
“어이구. 정신 차려, 인마. 너 포지션이 어디냐?”
송석현이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아, 쓰읍. 포숩니다.”
“지명타자 아니고 포수지?”
“네.”
“너 오늘 전력 분석 보고서는 읽었어?”
“……네, 읽었습니다.”
“그건 잘했다.”
박신언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럼 수첩을 꺼내서 적어야 할 거 아냐. 상대 투수의 컨디션은 어떻고, 포수의 사인은 어떻고, 심판 존은 오늘 어떻고 이런 거. 심판도 사람이야. 심판마다 성향도 다르고 같은 심판이라고 해도 존도 매일 조금씩 바뀌어. 우리가 선공이면 미리 심판 성향하고 존을 볼 수 있잖아. 그래야 다음 이닝에 어떻게 풀어 갈지 감도 잡히고. 안 그래?”
“……맞습니다.”
“여기서 멍 때리지 말고 미리 다음 이닝을 준비해야지. 오늘 네가 포수로 안 뛴다고 이러는 거야?”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늘 포수로 안 뛴다고 방망이 죽부인처럼 끌어안지 말고 수첩 꺼내. 적어. 매 이닝 적어. 끝나면 그날 복기하고 정리해. 매일 정리하고 복기해. 그렇게 해야 한 경기, 한 경기 뛸 때마다 네가 믿는 구석이 생기는 거지 그냥 전력 분석원이 주는 종이만 보고 심판이 바깥쪽을 짜게 주니까 바깥쪽은 안 던져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어, 안 되겠어?”
“……안 됩니다.”
“너 수첩은 가지고 왔어?”
송석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투수 이창훈이 끼어들었다.
“첫날부터 애를 잡고 그래? 오늘 첫 선발이라 정신도 없을 텐데.”
“기본이야, 기본. 포수로서 기본을 알려 주는 거야.”
“누가 뭐래? 대충 해. 조금 있으면 타석에 나갈 애 붙잡고 혼내면 어쩌려고.”
송석현이 박신언에게 꾸중을 듣는 사이 벌써 두 번째 타자가 아웃됐다.
타석에는 3번 타자 김인환이 들어섰다.
4번 타자인 송석현도 대기 타석에 나가야 했다.
“저거 봐. 결국 형 말 듣는다고 공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야, 그래서 내 탓이라는 거야?”
“이따 혼내라는 거지. 공은 쳐야 할 거 아냐.”
송석현은 벤치 밖으로 나가다 몸을 돌려 박신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송석현은 대기 타석에 들어가 배트링을 끼웠다.
이창훈이 박신언 옆으로 와 옆구리를 찔렀다.
“그런데 갑자기 웬 잔소리야, 평소엔 조용하던 사람이?”
“새파랗게 어린 후배 아니냐. 선배로서 가르쳐 주는 거지.”
“프리 패스로 1군에 왔다고 삐쳐서 쟤 괴롭히는 거 아니고?”
“쓰읍, 나를 뭘로 보고.”
이창훈은 키득거리며 웃더니 다리를 꼬았다.
“그래도 보기 좋네. 형이 웬일로 적극적이어서.”
“뭐가?”
“형 솔직히 계속 혼자 다녔잖아.”
“그거야 파벌 같은 거 싫으니까. FA끼리 모이고, 순혈끼리 모이고 이런 거.”
“낙균이랑 문규도 빠졌는데 이젠 형이 좀 나서서 분위기 수습해 줘. 투수조엔 정률이 형이 있다면 야수조엔 형이 제일 노인네잖아.”
“난 그런 거 딱 질색인 체질이라.”
“쟤한테는 잘하면서 뭘 안 한다고.”
박신언이 팔짱을 끼고 송석현을 바라봤다.
“쟤는 포수잖아.”
“근데? 포지션 차별이야?”
박신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송석현의 등만 쳐다볼 뿐이었다.
-볼, 아웃사이드.
그사이.
김인환은 2-3 풀카운트에 몰렸다.
송석현은 배트를 쥐고 투수의 리듬에 주파수를 맞췄다.
“이럼 빼박 볼넷이겠는데…….”
상대 포수 김창현은 투수에게 바깥쪽만 요구하고 있다.
여태 던진 모든 공은 바깥쪽 꽉 찬 공이나 떨어지는 공이었다.
캐스터가 말했다.
“아무래도 볼넷을 줄 거 같죠?”
“예, 4번 타자로 오늘 송석현, 신인 선수가 나왔거든요. 그렇다면 굳이 3번 타자 김인환 선수와 승부할 필요 없죠. 어차피 필요한 건 아웃 카운트 하납니다.”
“함성훈 감독 대행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대대적인 선수 교체가 있었는데 신인 선수의 4번 타자 기용은 정말 파격입니다.”
“파격이라는 게 양날의 검입니다. 성공하면 감독의 덕이 되지만 실패하면 엄청난 비난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 선수를 4번에 쓴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최대규, 강문규, 이낙균. 팀의 핵심인 세 타자가 2군으로 강등됐습니다. 그 외에도 불펜 투수들도 2군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동안 1군에서 과부하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휴식을 주기 위해 내린 건데 문제는 너무 많이, 한 번에 교체했다는 거죠. 고트가 원래 방망이가 강한 팀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FA로 타자만 셋을 데려온 건데, 세 타자 모두 2군에 갔으니 모험을 거는 거밖에 선택지가 없죠.”
“말씀드리는 순간 김인환 선수가 결국 볼넷으로 걸어 나갑니다.”
“베론 선수의 심기가 안 좋아 보이네요. 저 선수, 제가 스프링캠프 때도 봤지만 상당히 다혈질이거든요. 공도 빠르고 성격도 급합니다. 정면 승부를 즐겨 하는 선순데 대놓고 볼넷을 줬으니 상당히 기분이 상할 겁니다.”
“외국인 선수들 중에는 포수 사인을 무시하고 던지는 경우도 왕왕 있죠?”
“한국 야구가 좀 안전 지향적이라면 미국은 맞더라도 자기 공을 던져서 승부하자는 분위기거든요. 공격적인 투수가 한국에 오면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적응을 힘들어하죠.”
타석에 송석현이 들어섰다.
포수는 긴장한 티가 역력한 송석현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후아.”
송석현이 타석에 들어서면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인기 팀 고트와 전년 우승 팀 피닉스답게 대전구장은 외야를 빼곤 내야석은 매진이었다.
하얀색과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고트 팬들이 입을 모아 송석현의 이름을 외쳤다.
“안타! 송석현! 안타! 송석현!”
“송석현! 날려 버려!”
“달려라! 고트! 날려 버려! 송석현!”
수천 명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야구장을 많이 와 봤지만 수천 명의 관중이 자신의 이름을 환호한 적은 처음이었다.
-스트라이크!
송석현이 얼어 있는 사이 투수가 151km/h의 직구를 꽂아 넣었다.
“아.”
송석현은 스트라이크를 하나 내준 이후에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분명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데 잠이 덜 깬 듯 눈앞이 흐릿하다.
팡!
-스트라이크!
제2구도 152km/h의 강속구.
송석현은 배트도 내지 못했다.
“아, 송석현 선수. 이번에도 지켜봅니다. 높은 공이었는데요.”
“아무래도 신인 선수다 보니 첫 경기, 데뷔 경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4번 타자 아닙니까? 중압감이 대단하죠.”
“좋은 기회를 놓치는 송석현 선수. 피닉스 배터리가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어차피 병살 위험도 없습니다. 삼진당하더라도 송석현 선수, 배트는 시원하게 휘두르고 들어와야죠.”
포수가 사인을 냈다.
‘슬라이더, 바깥쪽.’
2스트라이크 이후 빠지는 공 하나.
정석적인 조합이었지만 투수는 고개를 저었다.
김인환에게 피하는 승부를 하면서 구겨진 자존심을 정면 승부로 이겨 내겠다는 심산이었다.
직구, 몸 쪽.
포수는 투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얼어 버린 신인 타자처럼 만만한 상대도 드문 법이다.
투수는 몸을 한껏 비틀어 공을 던졌다.
최고 구속 155km/h에 육박하는 투수의 전력투구.
탁.
송석현은 몸 쪽의 강속구를 파울로 만들었다.
“송석현 선수의 반응이 느리네요.”
“그래도 삼진은 면하게 됐습니다. 고트 입장에선 다행이죠?”
“아무래도 2군에만 있다 보니 저렇게 빠른 공은 보지 못해서 그럴까요? 스윙이 많이 늦었던 거 같습니다.”
“지금은 파울이 나온 게 신기한 거예요. 송석현 선수, 공은 그래도 따라가네요. 맞히는 능력은 있는 거 같아요.”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건네받았다.
메이저리그라면 루키 리그에나 뛰고 있을 어린애다.
자신의 공을 쳐 낸 건 제법이나 행운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직구, 바깥쪽.’
포수가 사인을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타자 몸에 맞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떨치고 바깥쪽에 있는 힘껏 공을 던지라는 신호였다.
투수는 주자를 한번 눈으로 견제한 뒤 팔을 잔뜩 감아 공을 뿌렸다.
공은 바깥쪽 보더 라인으로 완벽하게 빨려 들어갔다.
포수의 미트가 공을 잡으려 할 때, 탁 소리가 났다.
“우중간 안타! 공이 펜스까지 굴러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밟고 3루로! 타자 주자는 2루, 2루, 2루까지 갔습니다!”
“방금은 정말 좋은 타이밍에 안타가 나왔습니다. 노볼 2스트라이크 상황이었는데 이걸 안타로 만들어 내네요.”
“피닉스 배터리 입장에선 상당히 기분이 안 좋겠어요. 삼진으로 끝낼 수 있었는데 2사 2, 3루 득점권 찬스를 내줍니다.”
“저는 배트가 나오는 게 늦지 않았나 싶었거든요? 베론 선수의 공이 빠르고 묵직하니까 당연히 밀릴 거라고 봤는데 이걸 힘으로 이겨 내네요.”
“4번 타자는 역시 다르다는 얘길까요? 상당히 힘이 좋은 타잡니다.”
2루에 도착한 송석현은 숨을 헐떡였다.
얼결에 나간 배트 끝에 공이 걸렸다.
운이 좋아 그라운드에 공이 들어갔지만 어떻게 친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걸 치네. 빠따가 제법인데?”
투수 이창훈의 말에 박신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도 좋고, 빠따도 좋고……. 간만에 물건 하나 들어왔네.”
“이러다 형 자리도 뺏기는 거 아니야?”
이창훈의 농담에 박신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실력으로 뺏기면 할 수 없지.”
“뭐야, 그 반응은? 싱겁게.”
“하드웨어가 좋은 놈이네. 소프트웨어만 잘 패치하면 볼만하겠어.”
타석에는 5번 타자 최재완이 나왔다.
아직 22세의 어린 선수지만 고트에서 차기 3루수로 점찍은 유망주로 공수 모두 건실한 선수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최재완 선수 배트가 공을 못 따라가네요.”
“베론 선수의 공을 1회에 공략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한 타석은 돌아야 눈에 익을 겁니다.”
“송석현 선수의 안타로 득점 기회를 잡았으나 2사 잔루는 2, 3루로 고트의 공격이 끝납니다.”
“점수는 못 냈지만 신인 송석현 선수가 베론 선수에게 안타를 뽑아냈다는 건 고트 팬 여러분들에겐 상당히 즐거운 소식이 되겠네요.”
공수 교대였다.
송석현이 벤치로 들어가자 김인환이 다가와 송석현의 목을 감쌌다.
“왜 이렇게 넋이 나가 있어, 너답지 않게?”
“모르겠어요. 집중이 안 됐어요.”
“다들 처음에 데뷔하면 그렇긴 한데 너도 그럴 줄은 몰랐네.”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 거 같기도 하고……. 하, 오늘 진짜 정신없네요.”
“잘했어. 데뷔 첫날, 첫 타석, 첫 안타잖아.”
그때 배터리코치가 다가와 송석현에게 공을 내밀었다.
송석현은 공을 보며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였다.
“챙겨라, 첫 안타 공인데.”
“아.”
송석현은 공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데뷔 축하한다. 첫 안타도 축하하고.”
송석현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송석현은 공을 눈높이에 들어 올렸다.
상처가 난 야구공.
수없이 많이 보아 온 흔하디흔한 야구공.
송석현은 야구공을 꽉 쥐었다.
“두 번째 안타는 기념구 없죠?”
송석현의 질문에 김인환이 웃었다.
“그런 게 어딨어, 첫 홈런이면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