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gun (7)
큰 패배를 당하는 팀은 열에 아홉은 차라리 빨리 게임이 끝났으면 바란다.
역전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점수 차는 까마득하다.
큰 점수 차는 지는 팀은 물론이거니와 이기는 팀도 마음이 풀어지기 마련이건만…….
“……뭐야? 번트?”
고트의 감독 구창현이 얼굴을 구겼다.
4회.
점수 차는 11-1.
2번 타자 방정욱이 느슨한 수비를 틈타 번트를 대고 1루로 달렸다.
“뭐야?”
“미친 거 아냐?”
“뭐 하자는 거야?”
고트 벤치도 술렁였다.
야구에도 불문율이 있다.
불문율은 법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지만 동종 업계의 의리였다.
큰 점수 차에 상대의 신경을 긁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자는 게 야구의 불문율.
방정욱의 번트에 나른했던 공기가 얼어붙었다.
“…….”
1루수 이명성은 방정욱을 뒤에 두고 거친 숨을 내뿜었다.
1루 주루코치가 방정욱에게 다가가 엉덩이를 툭 쳤다.
왜 그랬냐는 신호였다.
방정욱은 주루코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도루…….”
주루코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벤치의 상무 감독은 아까부터 다리를 꼬고 그라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송석현의 송구에 막혀 어제부터 도루하는 족족 잡혔다.
감독은 제대로 설욕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큰 점수 차의 도루는 벤치 클리어링까지 부를 수 있었지만, 여긴 2군이다.
상대 팀은 상무.
어떤 팀도 상무와 경찰청 팀 상대로는 적을 만들 수 없다.
상무와 경찰청은 군 미필 선수들의 보루였다.
여기에 상무 감독은 고트 감독보다 6년 이상의 선배.
고트가 불쾌해할 순 있어도 일을 크게 만들지 못할 거란 게 상무 감독 정상훈의 결론이었다.
큰 점수 차야말로 마음 편히 도루할 수 있는 기회였다.
“…….”
송석현이 상무 감독 정상훈의 마음을 헤아릴 순 없었다.
다만, 불문율을 어겼다는 사실에 숨 고르기가 더 길어졌다.
“흠흠.”
3번 타자 박상연이 헛기침을 하며 타석에 들어왔다.
타석에 서자 연신 송석현을 곁눈질했다.
“빈볼 없습니다. 그만 보세요.”
송석현의 말에 박상연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마운드의 투수는 정장훈.
사이드암 투수였다.
구위도 뛰어나지 않고 제구도 나은 편이 아니지만 사이드암 투수답게 공 끝이 지저분했다.
송석현이 사인을 냈다.
정장훈은 두 눈을 부릅뜨곤 고개를 끄덕였다.
팟!
정장훈이 공을 던지자 방정욱은 냅다 2루로 뛰었다.
타자는 스윙을 해야 하지만 그대로 타석 뒤로 물러섰다.
몸 쪽에 바짝 붙는 높은 공.
송석현은 공을 잡자마자 2루로 던졌다.
팡!
2루수는 그대로 공을 받아 주자의 다리에 자연 태그 했다.
“아웃!”
심판이 큰 목소리로 아웃을 선언했다.
방정욱은 아웃을 확인하더니 뒤로 누워 한숨을 쉬었다.
“야.”
박상연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송석현을 바라봤다.
송석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빈볼은 아니잖아요.”
박상연은 송석현에게 한마디를 하려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그라운드의 분위기가 싸하다.
송석현과 입씨름을 했다간 정말 빈볼이 머리 위로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네 말 믿는다.”
박상연이 타석에 들어섰다.
제2구는 바깥쪽 슬라이더.
박상연은 툭 갖다 맞혔다.
공은 2루수 키를 넘기며 안타.
박상연이 1루에서 장비를 풀었다.
“야, 나 맞히면 재미없다.”
상무의 4번 타자 황영식이 타석에 들어서면서 송석현을 바라봤다.
송석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황영식도 송석현을 더는 자극하지 않았다.
황영식이 슬쩍 벤치를 바라봤다.
런 앤드 히트.
투수가 연달아 주자를 견제했다.
봄볕을 지나 햇볕이 따가워진 계절이건만 경기장은 냉랭했다.
팟!
투수가 초구를 던지자 1루 주자 박상연이 2루로 뛰었다.
타자 황영식이 스윙을 했으나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였다.
송석현은 왼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 공을 받자마자 몸을 틀어 2루로 공을 던졌다.
쏴아아악!
박상연이 먼지를 일으키며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했다.
“……하.”
박상연은 베이스 앞을 가로막은 글러브의 감촉을 느꼈다.
아웃!
주자 연속 도루 실패.
상무 벤치는 숨소리 하나도 조심스러웠다.
“변화구를 던져도 잡아……?”
상무 감독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상무의 연속 도루에 고트 벤치에서도 상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닝이 끝나자 고트의 감독이 송석현을 불렀다.
“홈런 열 개 맞아도 좋으니까 오늘 변화구 던지지 마. 다 직구로 승부해. 아니, 그게 힘들면 빠른 공으로.”
“예, 감독님.”
11-1의 점수 차는 6회, 7회까지 이어졌다.
송석현은 삼진, 볼넷, 삼진을 기록했다.
심판의 후한 몸 쪽 공에 송석현은 스윙 대신 삼진을 택했다.
경기의 클라이맥스는 8회에 찾아왔다.
1사 주자 1루.
주자는 2번 타자 방정욱, 타자는 3번 타자 포수 박상연.
4회와 판박이 상황.
고트에선 투수를 교체했다.
“허, 정진오.”
박상연이 숨을 골랐다.
선발 로테이션을 돌아야 할 선수가 10점 차로 뒤지는 상황에 올라왔다. 고트도 더는 자존심을 구길 수 없다는 신호였다.
정진오는 좌완 투수였기에 도루가 어려워지는 건 덤이었다.
박상연이 벤치를 바라봤다.
런 앤드 히트.
어떻게든 쳐라.
박상연이 앞다리에 체중을 더 실었다.
장타는 버린다.
정진오가 공을 던지자 주자가 뛰었다.
탁.
초구는 파울.
몸 쪽의 직구였다.
“아…….”
박상연이 자책했다.
스트라이크존의 직구였는데 힘에 밀렸다.
벤치의 사인을 다시 확인했다.
사인은 동일했다.
쳐라.
무조건.
정진오의 2구.
탁!
박상연이 또 파울을 쳤다.
몸 쪽 높은 쪽으로 오는 공에 배트가 또 밀렸다.
“상연이 배트가 늦네, 늦어.”
상무 감독의 혼잣말에 타격코치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2스트라이크.
벤치에선 사인을 거뒀다.
이제는 타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
박상연이 숨을 고르고 1루 주자와 눈을 마주쳤다.
방정욱과 박상연은 유격수, 포수로서 서로 사인을 많이 주고받는 사이였다.
눈치만으로도 서로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정진오의 3구.
방정욱이 2루로 뛰었다.
공은 바깥쪽으로 빠지는 직구.
타자는 어정쩡하게 스윙했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바깥쪽에서 오던 공이 마지막에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왔다.
백도어 슬라이더.
좌투수가 우타자 상대로 던질 수 있는 특권.
바깥쪽으로 들어온 빠른 공은 포수에겐 송구하기 좋은 코스였다.
팟!
송석현이 던진 공이 2루로 날아갔다.
방정욱도 스타트는 빠른 상황.
2루수가 공을 받자마자 베이스 앞을 막았다.
때마침 방정욱이 베이스에 손을 뻗었다.
쏴아아악.
흙먼지가 날렸다.
심판은 콜을 머뭇거렸다.
2루수는 글러브를 가리켰고 방정욱이 베이스를 가리켰다.
……아웃.
심판의 판정에 방정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이프를 외쳤다.
아웃.
심판은 번복하지 않았다.
방정욱은 무어라 한마디 말을 하려다 꾹 참았다.
“……후우우.”
2루수는 역전이라도 한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은 높은 송구.
2루수의 태그에 절반의 공이 있었다.
“허허허허.”
상무의 감독은 웃고 또 웃었다.
감독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선수들의 침묵은 길어졌다.
“누가 쟤 송석현이 좀 1군에 갖다 버리고 와라. 어?”
감독의 농담에도 대꾸는 없었다.
고트 벤치에선 긴 침묵이 깨졌다.
추가 점수는 없었지만 감독이 직접 나와 손뼉을 치며 선수들을 맞았다.
“잘했어. 집중력 좋아.”
감독은 2루수 지신준의 엉덩이를 탁탁 두드렸다.
“오늘 좋아. 역시 수비는 신준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송석현에게 말없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9회 초.
첫 타석은 송석현이었다.
박상연은 홈 플레이트에 앉아 타석에 들어오는 송석현을 맞았다.
“어깨는 좋네.”
박상연의 농담에 송석현은 한마디로 대답했다.
“네.”
박상연은 바로 사인을 냈다.
바깥쪽 체인지업.
오늘 내내 몸 쪽 공에 시달렸으니 바깥쪽에 존 근처로만 공이 와도 배트를 휘두를 거다.
박상연의 예상은 합리적이었고, 예측대로 흘렀다.
탕!
바깥쪽으로 조금 빠진 공.
송석현은 풀스윙으로 걷어 올렸다.
배트 끝부분에 맞은 공은 힘없이 크게 떠올랐다.
공은 그대로 우익수 방향으로 날아갔다.
우익수가 천천히 걸으며 글러브를 내밀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툭.
우익수의 글러브를 지나친 공이 우측 담장을 살짝 넘겨 버렸다.
송석현이 배트를 던졌다.
“배팅도 좋습니다.”
송석현은 1루로 뛰었다.
박상연은 플라이로 홈런이 된 상황에 넋이 나가 송석현의 말에 대꾸도 하지 못했다.
“돌겠네…….”
분명 빗겨 맞았는데 홈런이다.
바깥쪽으로 빠진 공을 친 것도 신기하지만 풀스윙으로 걷어 올린 건 더 신기했다.
확신 없이 풀스윙이 가능하던가?
바깥쪽으로 빠진 공이 오리라고 확신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바깥쪽으로 빠진 공을 풀스윙하려고 마음먹었다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송석현은 타자가 아니라 사냥꾼이라 명명하는 게 맞다.
덫을 쳐 놓고 기다리는 사냥꾼.
박상연은 홈 플레이트로 뛰어오는 송석현을 바라봤다.
“…….”
“…….”
두 사람은 말 대신 서로의 눈을 한번 쳐다봤다.
송석현은 그대로 벤치로 들어갔다.
겨우 솔로 홈런 하나.
고트는 추가 점수 없이 그대로 경기를 마감했다.
상무의 대승이지만 분위기는 상반됐다.
상무는 초상집이었고, 고트는 오늘의 패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선수들의 얼굴에 웃음이 생겼다.
“수고하셨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상무 감독 정상훈은 퇴장 대신 고트 벤치로 향했다.
고트 감독 구창현도 퇴장하지 않고 정상훈을 기다렸다.
“구 감독, 오늘 미안하게 됐어.”
정상훈이 먼저 모자를 벗고 구창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구창현은 정상현의 손을 잡았다.
“내가 약이 올라서 말이지. 송석현, 쟤 어깨가 왜 저렇게 좋아?”
“그러게요. 어깨는 역대 포수 중에선 최고 같습니다.”
“내가 여태 본 애 중에 제일 좋은데? 투수 하던 애라고 해도 완전 달라.”
“칭찬 감사합니다.”
“오늘은 내가 실례했어. 다음에 술 한잔하자고.”
“네, 감독님.”
“잠깐만.”
정상훈은 한쪽 구석에서 장비를 챙기는 송석현에게 다가갔다.
“송석현.”
“네?”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상훈이 송석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송석현도 얼결에 손을 잡았다.
“너 군 문제 빨리 해결할 생각 없냐? 내년에 바로 와라. 내가 너는 바로 뽑는다. 어때?”
“어…… 그게…… 그건 구단이랑 상의를 해 봐야 하는 문제라서요.”
“하하하, 군 문제는 빨리 해결할수록 좋아. 어차피 지금 1군에 신언이랑 일혁이 있잖아. 어영부영 네 실력 썩히지 말고 빨리 군대로 와. 군 제대하면 그땐 네가 고트 안방마님이 될 거다. 내 제안 꼭 기억해. 스무 살짜리한테 이런 제안 하는 거, 나도 처음이다. 알았지?”
송석현은 허리를 숙였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앞으로도 종종 보자. 다음에는 내가 꼭 너한테 도루 뺏어 낸다. 너도 각오해. 알았어?”
“네.”
“하하하. 그래그래.”
정상훈이 자리를 떴다.
고트의 감독 구창현이 송석현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네가 우리 개망신은 면제해 줬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오늘 고생 많았다.”
경기가 끝나고 고트 선수들은 2군 숙소로 돌아왔다.
송석현이 씻고 방에서 잠시 쉬는 사이 전화벨이 울렸다.
감독 구창현이었다.
“잠깐 감독실로 와. 지금 바로.”
송석현은 전화를 끊자마자 감독실로 향했다.
감독실에는 구창현과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고트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이나 체형은 평범한 회사원처럼 생겼다.
“어, 왔어? 이리 와 봐.”
구창현이 송석현을 가까이 불렀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송석현과 눈을 마주쳤다.
구창현은 송석현을 가리키며 남자에게 말했다.
“여기 이 친구가 송석현. 우리 고트의 미랩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키도 크지 않았다.
얼굴도 순박하게 생겼고 피부도 하얀 데다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아, 반가워요. 저는 함성훈이라고 해요.”
송석현은 남자의 손을 잡으며 구창현을 바라봤다.
설명을 원하는 눈빛이었다.
함성훈은 구창현 대신 말했다.
“지금까진 고트 수석코치였습니다. 내일부터는 감독 대행이고요.”
송석현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감독, 대행.
한 단어지만 많은 사건이 압축됐다.
함성훈이 송석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축하해요. 오늘 짐 싸세요. 내일 잠실로 출근하면 됩니다.”
송석현이 눈을 깜박거렸다.
하얗고 얇은 함성훈의 손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예?”
“어쩌다 보니 내가 직접 말하게 됐네요. 잘 부탁합니다. 내일부터 우리 잘해 보죠.”
“……네에?”
구창현은 얼빠진 송석현을 보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