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gun (5)
와인드업을 해도 제구가 안 되던 이백찬이다.
퀵 모션으로 공을 제대로 던질 리가 없다.
이백찬의 투구를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감사합니다.”
송석현은 타자와 심판에게 인사를 하곤 홈 플레이트 뒤에 앉았다.
투수는 이기적이다.
승패를 짊어져야 하니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려면 이기적이어야 부담을 덜 수 있다.
송석현은 도루의 잘못을 자신에게 귀결시켜 이백찬의 짐을 덜어 주려 했다.
‘직구, 하이볼.’
코스는 필요 없다.
높은 공.
제구가 안 될 때는 힘으로 눌러 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백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백찬은 1루 주자를 곁눈질했다.
이백찬의 다리가 올라가자 주자가 스타트 하듯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백찬 선수, 와인드업!”
팡!
-스트라이크!
“주자 뛰었습니다!”
아웃!
박상연은 벤트 레그 슬라이딩을 시도했지만 동 타이밍도 아닌 한 박자 빠른 태그였다.
“방금은 이게 뭐였죠?”
“하하하, 보고 있는 저도 믿기질 않네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투수는 와인드업을 했어요. 주자는 페이크 모션을 취하다 투수가 와인드업을 하니까 조금 늦게 출발했거든요. 그래도 투수가 와인드업을 했단 말이죠. 스타트가 느린 건 아니었을 겁니다.”
“네, 분명 그렇게 느린 출발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봐도 그래요.”
“그런데 말이죠, 주자가 반을 지날 때 이미 공이 2루수한테 당도했습니다. 이게 대체 뭐죠? 이런 일이 있나요?”
“송구가 어마어마했어요. 방금은 높은 공을 던져서 송구하기 좋은 자세였던 것도 있었지만 포수의 어깨를 칭찬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어요. 엄청 빨랐습니다. 대단한 어깨예요.”
“이 와중에 저 높은 공에 헛스윙한 김철웅 선수도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최소한 파울이라도 만들었다면 주자 아웃은 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주 재밌는 상황이었습니다. 투수는 와인드업, 주자는 반 박자 느린 스타트, 타자는 높은 공에 헛스윙, 포수는 투수의 와인드업에도 불구하고 2루 송구 아웃. 대체 이게 뭐죠? 하하하하. 이게 2군의 묘민가요? 1군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상황일 겁니다.”
상무 벤치가 술렁였다.
주루 코치는 당황한 표정으로 벤치와 그라운드를 번갈아 봤다.
박상연은 계면쩍은 얼굴로 벤치에 들어왔다.
“사인도 없는데 왜 뛰었어?”
감독의 말에 박상연은 군기가 바짝 들어 대답했다.
“투수가 갑자기 와인드업을 해서 저도 모르게 뛰었습니다.”
“그러면 살았어야지.”
“죄송합니다!”
“하, 됐다. 들어가.”
박상연은 넋 나간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잠시 멍하니 있던 박상연이 옆에 있던 선수에게 물었다.
“이게 내 잘못인가? 내가 발이 그렇게 느렸어?”
“아니요. 저기 포수 송구가 미쳤어요. 엄청 빠르던데요.”
“그런 거야? 내가 느린 게 아니라 쟤 송구가 좋았던 거야?”
“예, 공이 약간 휘긴 했어도 속도는 엄청났어요.”
“내가 느린 게 아니었다는 거지?”
“형 타이밍이 좀 느리긴 했어도 여유롭게 아웃될 정도는 아니었어요.”
박상연은 홈 플레이트에 앉아 있는 송석현을 바라봤다.
무명의 포수 아니었나?
객관적으로 봐도 자신의 발은 평균 수준은 충분하다.
와인드업한 투수를 상대로 넉넉하게 도루 실패.
결론은 하나.
저 포수의 어깨는 탈인간계다.
여태 본 적이 없는 강견이다.
“뭐야, 저 새끼…….”
23세 이하의 어린 포수 중에서 박상연은 단연코 최고의 유망주였다.
입단부터 동 나이대 최고의 포수 유망주로 불리던 박상연.
송석현을 보는 박상연의 눈엔 혼란이 가득했다.
“후아.”
이백찬은 주자가 아웃되자 살짝 미소 지었다.
“삼진! 이백찬 선수가 삼진을 잡아냅니다.”
“역시 직구가 좋네요. 타자가 못 따라가요.”
“이백찬 선수, 주자를 잡아내니까 역시 다르네요. 확실히 힘이 넘칩니다.”
“주자만 없다면 이백찬 선수는 1군에서도 제 몫을 해낼 수 있는 선숩니다.”
이백찬은 8회 말을 무실점으로 막아 냈다.
이백찬의 직구는 타순이 돌기 전에 쳐 내긴 어려운 공이었다.
직구가 먹히자 슬라이더와 체인지업도 타자를 현혹하기 충분했다.
“공이 묵직한데요.”
송석현은 벤치로 들어오면서 이백찬에게 엄지를 세웠다.
이백찬은 피식 웃었다.
“너는 나보다 공이 더 빠른 거 같다.”
“그래요? 설마요.”
“아까 내 머리 위로 공이 날아가는데 살벌하던데?”
“앞으로 주자 신경 쓰지 말고 던지세요. 2루로 보내도 형 구위면 찍어 누를 수 있어요. 애매한 애들은 제가 다 잡아 드릴게요.”
“그래, 땡큐.”
상무의 5-4 리드.
이기고 있는 건 상문데 분위기는 고트가 더 뜨거웠다.
투수가 와인드업을 했는데도 도루에 실패했다.
상무 선수들에겐 좀체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다.
“자, 자. 갑시다.”
투수인 김영곤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파이팅을 외치며 마운드로 향했다.
1이닝만 막으면 이긴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중요하지 않다.
경기의 주인공은 투수니까.
“타석에는 김인환 선수가 들어옵니다.”
“홈런 하나면 동점입니다. 김인환은 파워가 있는 선수죠. 김영곤 선수가 호투를 해 왔지만 여기서 실투 하나면 경기는 다시 원점입니다.”
“투수 와인드업. 스트라이크를 잡아냅니다.”
“와, 방금은 헛스윙이 나왔지만 풀스윙이었죠? 김인환 선수는 오늘 경기 내내 풀스윙을 합니다.”
박상연은 도루 실패의 충격에서 빠져나와 포수 본연의 임무에 몰입했다.
파괴력 있는 타자.
정면 승부는 없다.
초구부터 슬라이더.
2구도 슬라이더.
3구도 슬라이더.
계속 슬라이더만 던진다.
절대 좋은 공은 하나도 주지 않는다.
“김인환 선수, 볼넷을 얻네요.”
“애초에 승부할 마음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다음 타자는 송석현 선숩니다. 1회에 만루 홈런을 때렸죠? 주자를 보내고 여기서 홈런을 때린 주자와 승부하는 게…… 하하. 이게 좋은 선택일까요?”
“분명 송석현 선수가 1회에 만루 홈런을 때린 건 맞습니다만, 그건 운이라고 볼 수도 있죠. 일단 김영곤 선수가 몰린 공을 던졌고 송석현 선수도 초구부터 힘껏 돌렸거든요. 1회를 제외하면 송석현 선수는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거의 스윙을 안 했어요. 이렇다면 전력으로 스윙하는 김인환 선수보단 송석현 선수를 선택하는 게 더 근거 있는 선택이 아닐까요?”
“그렇군요. 1회에 만루 홈런을 때린 타자가 들어옵니다. 9회에는 어떤 승부가 될지 궁금하네요.”
석수일 기자는 노트북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다.
팔짱을 낀 채 어느새 경기에 몰입했다.
신입 오장흥 기자도 입을 조금 벌린 채 경기장만 바라봤다.
1회의 만루 홈런보다 8회의 송구 하나가 송석현에 대한 흥미를 불태웠다.
“내기할까?”
석수일의 제안에 오장흥이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전 친다에 만 원 겁니다.”
석수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짜식이. 사수 앞에서 선빵을 치네.”
“느낌이 옵니다. 송석현이라는 애, 뭔가 될 놈 같아요.”
“나도 친다에 걸려고 그랬는데.”
“그러면 내기가 안 되잖습니까?”
“그럼 네가 못 친다에 걸든가.”
“그냥 내기를 포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가난한 신입의 주머니를 꼭 터셔야겠습니까?”
석수일이 웃었다.
“너는 왜 친다고 생각하는데?”
“삘이죠.”
“그게 기자가 할 소리냐?”
“그럼 선배님은요?”
석수일이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확신.”
오장흥이 석수일을 살짝 훑었다.
“뭐야, 그 눈빛은?”
“저 친구, 내일 꼭 인터뷰 따야겠죠?”
“야, 그 눈빛 뭐냐고.”
“아무래도 이것만 보고 미리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어쭈, 대답을 안 해?”
마운드 위의 김영곤이 로진을 손에 묻혔다.
투구 수는 아흔두 개.
1회에 공을 많이 던진 거치곤 적은 투구 수다.
김영곤이 2회부터 8회까지 얼마나 쉽게 경기를 풀어 갔는지 투구 개수만으로 훤히 보였다.
포수 박상연은 송석현을 슬쩍 훑더니 사인을 냈다.
‘슬라이더, 바깥쪽.’
오늘 스윙이 유난히 없던 타자다.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팡!
-스트라이크!
타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깥쪽에 꽉 차는 슬라이더.
송석현은 몸에 힘을 쫙 뺀 채 배트만 살짝 흔들었다.
“송석현 선수, 그대로 공을 흘려보냅니다.”
“지금은 오히려 잘한 겁니다. 지금 저 공을 쳤으면 아마 땅볼이 나왔을 확률이 커요.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왔다고 해도 방금처럼 각이 큰 슬라이더는 잘못 치면 땅볼이 나오기 십상이거든요.”
포수는 혹시나 싶어 몸 쪽 깊은 공에 직구 하나를 요구했다.
-볼, 인사이드.
타자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포수는 바깥쪽에 공 하나 빠지는 직구를 요구했다.
-볼, 아웃사이드.
공이 하나 더 빠졌다.
송석현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배터리가 조심스럽게 승부를 이어 갑니다.”
“아무래도 9회고 4번 타자다 보니까 신중한 승부를 하는 거겠죠?”
포수가 슬라이더를 아래로 빼라고 사인을 내보냈다.
투수는 고개를 저었다.
포수가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투수가 또 고개를 저었다.
“…….”
투수는 고개를 뻣뻣하게 든 채 포수를 내려다봤다.
계속 피하는 승부를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정면 승부.
1회의 홈런은 운이라는 걸 증명하겠다는 투수의 고집.
냉정하게 보면 투수의 고집이 맞았다.
1회 홈런 이후 타자는 별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스윙 한두 번이 전부였다.
투수도 슬슬 한계 투구 수에 다다르고 있다.
1회의 실점을 설욕하는 마음도 가득하다.
승부할 이유가 충분했다.
“…….”
포수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투수의 주장이 맞다.
맞는데…… 선뜻 승부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포수가 송석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위화감.
저 편안한 표정과 자세는 대체 뭐지?
‘직구, 몸 쪽.’
포수의 사인에 그제야 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팡!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타자는 미동하지 않았다.
이렇게 무기력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타자는 조용했다.
포수가 주먹을 꽉 쥐고 송석현을 쳐다봤다.
승부 타이밍.
고민하던 포수가 사인을 냈다.
‘슬라이더, 바깥쪽.’
포수의 미트는 존 안에 있었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가 아니라 존에 들어오는 슬라이더.
오늘 김영곤의 슬라이더는 알아도 못 치는 공이다.
카운트가 몰리면 타자는 직구를 가장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니 존에 들어오는 슬라이더는 포수로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음.”
송석현이 어깨를 살짝 흔들더니 어깨를 조금 더 잠갔다.
포수는 잠시 긴장했으나 송석현은 그게 전부였다.
투수가 공을 뿌렸다.
직구처럼 오다가 갑자기 꺾이는 하드 슬라이더.
탕!
우렁찬 소리와 함께 공은 중앙 담장을 넘어 관중석 상단까지 넘어갔다.
장외 홈런.
다이렉트로 장외를 넘기는 공.
송석현의 조금 전 스윙은 망설임 없는 풀스윙이었다.
“홈런! 홈런입니다! 장외 홈런! 송석현 선수가 또 홈런을 쳤습니다! 1회에도 만루 홈런! 9회에는 역전 장외 홈런! 오늘의 주인공, 오늘의 MVP는 송석현 선숩니다!”
“와, 방금 스윙은 정말 대단했어요! 몰린 카운튼데도 저렇게 시원하게 풀스윙을 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오늘 홈런 이후로 내내 소극적으로 나오던 타자가 마지막 스윙은 정말 호쾌했습니다.”
“6-5 역전! 오늘 경기 정말 재밌습니다. 1군에서도 이 정도로 재밌는 경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김영곤 선수, 고개를 숙입니다. 감독이 직접 나오네요.”
“역시 교체 가야죠. 어쩔 수 없습니다. 김영곤 선수 오늘 잘 던졌어요. 6점을 내주긴 했지만 경기 내내 타자들을 제압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선수, 송석현 선수에게만 6타점을 내줬습니다. 송석현 선수가 김영곤 선수의 킬러가 됐습니다.”
“상성이 안 맞는 투수와 타자가 있어요. 이번에는 김영곤 선수가 송석현 선수와 상성이 안 맞았다고 봅니다.”
석수일은 기자라는 신분도 잊고 박수를 보냈다.
2군 경기라지만 중앙 담장 장외 홈런이 말이 되는 소린가?
김인환도 아니고 무명의 포수가 일을 저질렀다.
“뭐 하냐? 내려가! 당장 쟤 인터뷰 잡아, 얼른!”
석수일의 지시에 신입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렸다.
석수일의 영건 시리즈 기사.
어쩌면 영건 시리즈 기사의 꽃은 상무가 아닌 고트에서 먼저 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