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gun (4)
석수일 기자의 노트북에는 워드가 켜 있었다.
‘영건을 찾아라’라는 제목 뒤로 커서가 깜박였다.
“홍대성도 대단하네요. 저 친구, 내년 아시안 게임에 갈 수도 있겠는데요?”
석수일 옆에는 굿 스포츠의 기자이자 이제 막 입사한 신인 기자, 오장흥이 앉아 있었다.
“오늘 재밌는 거 많이 건지네. 김영곤을 보러 왔는데 여기서 송석현을 보게 되네.”
“저 포수요? 아는 친구예요?”
“이제 생각났어. 내가 입사할 때 저 친구 이름을 좀 들어 봤거든. 예전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검색하니까 맞네. 송석현. 메이저리그 가니 마니 했던 친구.”
“저 친구가요? 그 정도였어요?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당연히 넌 모르겠지. 포수가 아니라 투수로 메이저리그에 가려 했던 애야. 최고 구속 155km/h까지 나왔다는 기사도 있네. 그것도 고 1이.”
“와, 고 1이 155km/h면 대박이네요.”
“어쩌다 포수를 보게 됐지? 투수에서 야수로 전향한 경우는 있어도 포수로 전향한 경우는 처음 보네.”
“저 친구도 인터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뭔가 인생 스토리에서 재밌는 게 나올 거 같은데.”
석수일이 턱을 매만졌다.
“어차피 영건 시리즈는 모레까지 취재하기로 했으니까 내일이나 모레에 한번 인터뷰하러 스윽 가 보자. 오늘은 김영곤 인터뷰가 우선이니까.”
“넵.”
경기는 상무의 우세로 흘렀다.
홍대성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김영곤이란 벽은 두꺼웠다.
하드 슬라이더가 먹히기 시작하자 타자들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컨디션이 살아난 김인환마저 김영곤의 슬라이더엔 헛스윙을 참을 수 없었다.
4번 타자로 나온 송석현은 루킹 삼진으로 물러났다.
“흠.”
송석현을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상무 선수들이 벤치로 들어왔다.
포수 박상연은 찜찜한 표정으로 고트의 벤치를 바라봤다.
“형, 왜? 표정이 왜 그래?”
김영곤이 박상연 옆에 앉았다.
“저 포수 말이야, 송석현.”
“어.”
“아까 홈런 날린 거 말고 오늘 스윙이 한 번인가 두 번밖에 없었다. 그거 알고 있었어?”
“그래?”
김영곤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중한 성격인가 보지.”
“뭔가 께름칙해.”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아까 홈런 맞은 거 때문에? 그건 내 실투고.”
“아니, 꼭 그런 게 아니라…….”
그때 감독이 김영곤을 불렀다.
“잠깐만.”
김영곤이 자리를 떴다.
박상연은 홀로 중얼거렸다.
“헛스윙이 하나도 없는 게 찜찜하다고…….”
김영곤은 감독에게 가 바로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오늘 페이스 좋은데?”
“네, 감사합니다.”
“조금 더 끌고 가 볼래? 투구 수도 지금 괜찮잖아.”
“네, 가 보겠습니다.”
“그래, 완봉은 물 건너갔지만 완투는 가 보자. 1회에 홈런 맞은 거 만회는 해야 할 거 아니냐.”
“예, 죄송합니다.”
“이것도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우리 불펜이 지금 컨디션 안 좋은 거 알고 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기자들이 있을 때 네 손으로 승리를 확정 짓는 게 낫잖아. 안 그래?”
“네.”
“그래, 아까처럼 실투만 하지 말고. 그러면 돼.”
자리로 돌아온 김영곤은 야구공을 손에 쥐었다.
두 손가락을 붙여 야구공 실밥 위에 올렸다.
슬라이더 그립.
김영곤을 차기 토종 에이스로 불리게 만든 구질.
1회 실투 이후론 타자들이 김영곤의 공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다.
김영곤은 손에 쥔 야구공을 빙빙 돌렸다.
* * *
“아, 미치겠네.”
고트의 1번 타자 김승환은 대기 타석에 나가기 전부터 인상을 찌푸렸다.
1회 이후로 김영곤에게 무안타.
출루도 없다.
삼진, 삼진.
김영곤의 하드 슬라이더에 속수무책이었다.
2번 타자 설진일도 배트를 쥔 채 한숨을 쉬는 건 마찬가지였다.
탁!
8번 타자가 김영곤의 공을 건드렸지만 땅볼.
김영곤은 8회까지 145km/h에 육박하는 직구를 던졌다.
아웃!
김승환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타석으로 향했다.
송석현은 팔짱을 낀 채 김영곤을 보고 있었다.
“석현아, 네가 보기엔 쟤 어때?”
김정률이 김영곤을 가리켰다.
“네 눈에도 좋아 보이냐?”
“좋죠. 누가 봐도 좋잖아요.”
“대성이랑 비교하면 어때?”
“아무리 짜게 잡아도 최소 한 단계 위죠.”
“그러냐…….”
김정률이 입맛을 다셨다.
“왜요?”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형도 저렇게 날아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왜 그러세요, 선배님도 지금 충분히 좋은 공 던지시는데? 요새는 거의 언터처블 아니세요?”
“그거야 2군이니까 그렇지. 1군에도 통할지 모르겠다, 강속구 없는 투수가 돼 본 적이 없으니.”
“선배님이 저기 김영곤보다는 더 까다롭죠. 더 어려운 투수예요. 아니, 더 좋은 투수죠.”
“내가?”
김정률이 피식 웃었다.
“아부는. 돈 좀 먹었다고 아부 자판기가 된 거냐?”
“아부가 아니라요. 진짜로요.”
“진짜라고?”
김정률은 으음, 소리를 내더니 송석현을 바라봤다.
“이유가 뭔데?”
“선배님은 터널링이 좋아요. 싱커랑 커브, 슬라이더가 비슷한 코스로 나와요.”
“그거는 쟤도 마찬가지지.”
“그건 비슷하죠. 하지만 선배님은 디셉션도 좋고 무엇보다 쿠세가 없잖아요.”
김정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쟤 쿠세 발견한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요.”
“뭔데?”
“아직은 아니에요. 확인해 봐야 말씀드릴 수 있어요.”
“오오, 쿠세가 있다고?”
김정률이 마운드 위의 김영곤을 바라봤다.
직구와 슬라이더는 투수에겐 가장 흔한 레퍼토리지만 최고의 궁합이기도 하다.
직구와 커브도 찰떡궁합으로 유명하지만, 커브는 직구와 아예 터널링이 다르다.
커브는 직구와 던지는 메커니즘 자체가 달라 눈썰미 좋은 타자라면 공이 오기도 전에 커브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슬라이더는 직구와 메커니즘이 비슷하고 터널링도 구분이 어렵다.
메커니즘이 비슷하다는 건 던지기 용이하다는 얘기고, 던지기 용이하다는 얘기는 쿠세-다른 습관이 나오기 어렵단 얘기다.
“뭐지? 뭐가 다른 거야?”
김정률이 눈을 크게 뜨고 김영곤을 바라봤다.
보고 또 봐도 김정률의 눈에는 직구와 슬라이더를 던질 때의 투구 폼이 똑같아 보였다.
“힌트라도 줘 봐. 뭔데?”
송석현은 어느새 포수 장비를 입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선 몰라요. 타석에 서야 알거든요.”
“뭔데 그러냐, 궁금하게. 말해 줘 봐.”
“확인하고 말씀드릴게요.”
8회 말.
고트의 마운드 위는 홍대성이 아니라 이백찬으로 바뀌었다.
홍대성이 호투를 펼쳤으나 추가 점수를 내주며 5-4로 역전됐다.
이백찬은 작년 고트의 1라운더 투수로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다.
작년에 이백찬을 뽑을 때만 해도 최선의 선택이라 구단에선 자평했지만 지금 이백찬의 평가는 갈렸다.
강속구를 던지지만 3이닝 이상 끌고 가면 구위가 떨어진다.
연투를 하면 공이 금세 무뎌진다.
날카로운 칼이지만 여차하면 부러질 수 있는 얇은 칼.
고트는 이백찬을 마무리로 써 보기 위해 2군에서 육성 중이었다.
팡팡.
송석현이 미트를 손으로 두드렸다.
마운드 위의 이백찬이 연습 투구를 던졌다.
팡!
미트에 박히는 소리가 시원했다.
구속 148km/h.
송석현은 바깥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궤적을 확인했다.
“좋습니다! 공 좋아요!”
8회 첫 타석은 8번 타자 포수인 박상연.
박상연은 이백찬의 연습 투구를 보곤 배트를 짧게 잡았다.
“이백찬 선수가 상당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고트에 입단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현재는 2군에서도 썩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진 못하고 있어요.”
“이백찬 선수는 분명 공도 좋고 변화구도 좋은 편입니다. 제구도 괜찮아요. 하지만 문제는 역시 멘탈입니다. 소심해요. 새가슴이라고 하죠? 주자만 없다면 위력적인 투수지만 주자가 나가면 허둥지둥합니다. 특히 퀵 모션, 슬라이드 스텝이라고 하죠? 이게 1.4초댑니다. 1.3초 안에 들어와야 주자를 견제할 수 있는데 이러니 주자 견제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주자 견제가 안 되는 투수. 약점이네요.”
“그럼요. 아주 뚜렷한 약점이죠. 이런 명백한 약점이 있으면 1군 무대에서 활약하기 어렵습니다.”
이백찬이 키킹을 하며 초구를 힘껏 던졌다.
미트는 바깥쪽에 있었으나 공은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들어왔다.
팡!
-스트라이크!
한복판 직구지만 타자는 배트를 내지 못했다.
150km/h에 육박하는 공.
미트에 울리는 소리가 묵직했다.
“오늘 고트의 투수들이 죄다 강속구를 던집니다. 공이 상당히 빠르네요.”
“한국 야구에서 공이 빠른 투수들이 귀하거든요. 제구와 상관없이 공이 빠르면 우선 뽑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홍대성 선수도, 이백찬 선수도 공 하나만큼은 확실히 빠릅니다. 특히 이백찬 선수의 직구는 묵직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결국 이백찬 선수가 1군에 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단점은 있지만 장점도 분명하거든요.”
송석현은 눈으로 타자의 무릎을 살폈다.
앞무릎에 체중이 조금 더 실린 자세.
스윙 전에는 뒷다리에, 스윙할 땐 앞다리에 무게를 싣는 게 타격의 기본이다.
스윙 전에 앞다리에 무게를 싣는 건 컨택을 노리는 선수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다.
‘직구, 몸 쪽.’
송석현이 미트를 몸 쪽으로 내밀었다.
이백찬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키킹을 가슴 높이로 했다.
“아!”
박상연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이백찬의 공은 미트가 아니라 박상연의 엉덩이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아, 사구가 나오네요.”
“방금은 전혀 몸에 맞는 공을 던질 타이밍이 아니었거든요. 아무래도 실투인 거 같습니다.”
“타자도 투수에게 항의하지 않네요. 아마 타자도 투수의 실투라는 걸 알고 있나 봅니다.”
“엉덩이에 맞아서 다행이네요.”
“이백찬 선수의 공이 허리 위로 갔다면 아찔한 상황이 나왔을 겁니다.”
이백찬은 1루로 간 박상연을 향해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였다.
박상연도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무사에 주자 1루. 이백찬 선수가 주자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요.”
“1루 주자가 발이 빠른 주자는 아니지만 이백찬 선수는 이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될 겁니다.”
투수가 숨을 골랐다.
다음 타자는 9번 타자 김철웅.
9번 타자지만 한 방이 있는 타자였다.
송석현은 초구로 바깥쪽으로 하나 빠지는 공을 요구했다.
팡!
-볼, 아웃사이드.
바깥쪽으로 공 두세 개 정도는 더 빠져서 들어왔다.
“아, 바로 공이 빠집니다. 제구가 안 되네요.”
“직구를 저런 식으로 제구하면 벤치도 답답하죠. 저런 공에 누가 속아 주겠습니까? 변화구라면 타자가 스윙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런 공은 그냥 버리는 거예요.”
1루 주자가 리드 폭을 조금씩 넓혔다.
이백찬은 곁눈질로 1루를 슬쩍슬쩍 바라봤다.
제2구.
바깥쪽으로 또 빠지는 직구.
2-0.
“제구가 너무 안 되는데요?”
“퀵 모션이 느린데 억지로 끌어 올리려고 하니까 지금 팔과 다리의 밸런스가 안 맞습니다. 디딤발이 먼저 제대로 받쳐 주면서 그 힘으로 팔이 넘어가야 하는데 지금은 디딤발이 힘을 제대로 받기도 전에 팔이 넘어갑니다.”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임. 잠시만요.”
송석현이 마운드로 향했다.
이백찬은 숨을 한번 골랐다.
이백찬의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형.”
이백찬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알아. 제구가 너무 안 좋지? 공이 빠져서 말이야.”
“그게 아니라요.”
“괜찮아, 괜찮아. 내가 로진을 많이 안 발라서 그래. 이젠 제대로 던질 거야.”
“형, 잠깐만요. 저 좀 보세요.”
이백찬은 그제야 송석현을 바로 봤다.
송석현은 이백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주자 리드 폭만 줄이고 퀵 모션은 하지 마세요. 그냥 와인드업해요. 도루하면 제가 잡을게요. 저 믿고 던져요. 도루 주면 그건 제 탓이에요. 아셨죠? 그냥 와인드업하세요.”
“어?”
송석현은 그대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백찬은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눈만 깜박였다.
송석현의 어깨가 홈 플레이트를 꽉 채워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