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 (9)
페가수스의 2군 타선은 현재 모든 2군을 통틀어도 강한 축에 꼈다.
두터운 페가수스의 1군 뎁스 덕에 수준급 타자들이 2군에 자주 들락거렸으며, 발 빠르고 공 잘 치는 장타자 여럿을 드래프트 상위 라운드에서 꾸준히 수급했다.
우승권 경쟁이 잦은 덕에 좋은 투수들이 불펜으로 갈려 나가 2군 투수진은 들쑥날쑥했지만 타선만큼은 하위권 1군 팀과 비교해도 경쟁력이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차기 페가수스 좌익수 후보 김명진이 삼진, 1~2군을 오가는 만능 유틸리티 타자 허일영도 삼진.
고트의 투수 정천운은 좌우,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 공으로 타자들을 연신 돌려세웠다.
“…….”
벤치로 들어오는 타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코치의 눈치를 봤다.
정천운은 고트에서 공들여 키우는 유망주긴 하지만 최고 구속 140km/h에 턱걸이하는 사이드암 투수였다.
구속이 투수의 전부는 아니지만 140km/h 사이드암 투수에게 직구 헛스윙이 계속 나왔다.
페가수스 타자들에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고, 이래서 1군에 가겠냐?”
페가수스 2군 감독의 푸념에 선수들은 입이 바짝 말랐다.
선수들을 옹기종기 모여 푸념을 늘어놨다.
“오늘 뭔 날이야? 공을 왜 저렇게 던지는 거야?”
“아, 미치겠네. 저런 똥볼로 자꾸 정면 승부를 해.”
“저런 똥볼을 못 치는 넌 뭐고?”
“설마 하는데 훅 들어온다니까.”
“설마 하면 준비를 했어야지.”
어느덧 양 팀 타자가 일순했다.
고트의 공격.
선두 타자는 이명성.
20세의 신입으로 차기 주전 1루수로 점찍은 유망주였다.
‘직구, 몸 쪽.’
정용욱은 신인 타자를 요리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몸 쪽 공으로 타자를 한발 물러서게 한 뒤 바깥쪽 직구로 스트라이크 하나.
다시 바깥쪽 직구로 스트라이크 두 개.
마지막은 바깥쪽에서 떨어지는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 세 개 아웃.
정용욱은 공 네 개로 삼진을 잡아냈다.
“후.”
송석현은 정용욱의 볼 배합을 되뇌었다.
결정구가 좋은 투수를 상대로 타자는 초구부터 빨리 승부를 보려 한다.
상대 배터리도 타자의 심리를 알고 있다.
포수는 강속구 하나를 볼로 내주며 카운트를 낭비했지만, 이는 나머지 볼 세 개를 위한 빌드업이었다.
몸 쪽 공 이후 바깥쪽 공은 멀어 보이기 마련이다.
다음 바깥쪽 공이 오더라도 몰린 공만 아니면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는 쉽게 공략되지 않는다.
1-2 상황은 투수의 카운트.
슬라이더로 2-2나 1-3를 노린다.
정석이지만 흠 잡을 데가 없다.
송석현도 투수가 결정구가 좋은 파이어볼러라면 몸 쪽 공 하나씩 섞어서 타자에게 겁을 줬을 거다.
“역시.”
최고의 포수와 자신의 생각이 비슷하다고 결론이 닿자 미소가 나왔다.
자신의 공부가 헛된 게 아니었다.
팡!
타석에는 김인환이 들어섰다.
2사에 주자 없는 상황.
정용욱은 바깥쪽 공을 요구했다.
팡!
-볼, 아웃사이드.
2-0.
정용욱은 무표정으로 투수에게 공을 던졌다.
타자가 바깥쪽 공에 전혀 반응이 없다.
‘슬라이더, 아래.’
정용욱은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공의 코스는 좋았으나 너무 일찍 떨어져 바운드됐다.
3-0.
정용욱이 슬쩍 눈을 돌렸다.
고트의 벤치 한쪽 구석에 송석현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높은 공.’
포수의 요구에 투수는 침을 한번 삼켰다.
강타자에게 볼카운트 3-0을 줬다.
‘여기서 승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른 포수였다면 여기서 고개를 한번 흔들었을 거다.
홈 플레이트에 앉아 있는 포수는 정용욱.
아직 신인 티를 못 벗은 정제성이 고개를 저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스윽.
어쩔 수 없이 던져야 한다면 최고의 구속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없다.
정제성의 직구가 오늘 최고의 구속 151km/h를 찍었다.
탕!
맞자마자 담장을 넘어가는 공.
투수가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파울.
폴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파울이었다.
“와, 진짜. 인환이 형은 낫닌겐이라니까.”
“우리 팀이라 다행이지. 다른 팀이었으면 호러물이다, 호러물.”
“무서워서 어디 던지겠어?”
송석현은 선수들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다만 정용욱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슬라이더, 바깥쪽.’
김인환의 반응 속도로 보아 오늘은 승부를 해선 안 되는 날이다.
정용욱의 선택은 유인구였다.
투수가 바깥쪽을 향해 공을 던졌다.
“……!”
공이 손을 떠나기도 전 투수의 미간이 좁혀졌다.
공이 제대로 안 채졌다.
회전이 풀려서 날아가는 공.
김인환은 존에 들어온 공을 놓치지 않았다.
탕!
김인환이 호쾌하게 돌린 배트가 그라운드로 날아갔다.
배트 플립과 함께 공은 우측 담장을 넘어갔다.
“진짜 똥파워는…… 하.”
고트 선수들의 박수와 함께 김인환이 벤치로 들어왔다.
얼굴이 잔뜩 상기된 김인환이 송석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이제 더 확실해진 거 같다. 이번엔 제대로 감이 왔어.”
“형은 맞히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맞히면 넘어가게 돼 있어요.”
김인환에게 홈런을 맞은 투수가 정용욱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정용욱은 투수를 보지 않았다.
홈 플레이트의 베이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스트라이크! 아웃!
투수는 조금 전의 홈런은 실수였다는 듯, 바로 삼진을 잡았다.
벤치로 들어오는 투수가 정용욱에게 대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응? 뭐가?”
“아까 실투요…….”
“네 실점이 올라가는 건데 나한테 뭘 미안해하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앞으로 더 조심해서 던져.”
“네, 감사합니다.”
정용욱의 표정은 경기 초와 달랐다.
표정 없이 무뚝뚝했다.
페가수스의 공격.
첫 타자가 몸 쪽 커브에 유니폼이 스쳤다.
무사 1루.
다음 타자는 정용욱이었다.
“…….”
정용욱은 배트를 쥔 채 몸을 살짝 흔들었다.
눈은 투수에게 가 있었지만 귀는 포수를 향해 열려 있었다.
타자가 준비 자세를 마치자마자 투수는 지체하지 않고 공을 던졌다.
사삭.
포수의 발소리가 들렸다.
정용욱은 왼발을 바깥쪽으로 조금 더 빼면서 몸을 열어 스윙했다.
-스트라이크!
정용욱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윙이 크네, 용욱이가.”
페가수스의 배터리코치 이만성이 혀를 찼다.
옆에 있던 타격코치가 말했다.
“아까부터 스윙이 커진 거 같아.”
“그러게요. 점점 커지네요.”
“원래 저런 타입 아니잖아? 예전에 홈런왕을 노릴 때보다 스윙이 큰데?”
“으음.”
“이 코치, 용욱이랑 친하잖아. 용욱이 일부러 저러는 거야?”
“글쎄요. 그거까진 저도 잘…….”
“내일이면 1군 콜업 될 텐데 저런 스윙을 가지고 올라가면 안 되는데.”
“내일요? 콜업을 그렇게 빨리 합니까?”
“뭘 빨리 해? 의사도 문제없다고 하고 용욱이도 잘하고 있는데 콜업 해야지.”
“그래도 홈 충돌 있었는데 조금 더 컨디션을 지켜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용욱이가 여기서 할 게 뭐 있다고. 쉬어도 1군에 가서 쉬는 게 낫지.”
정용욱의 카운트는 어느덧 3-2 풀카운트.
타격코치가 손뼉을 두 번 쳤다.
“지금 딱 변화구 타이밍인데. 용욱이가 참겠지?”
배터리코치가 말했다.
“오늘 몸 쪽 높은 코스로 직구를 많이 던지던데 그쪽으로 가지 않을까요?”
투수가 공을 던졌다.
정용욱은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돌렸다.
공은 몸 쪽 높은 쪽 직구였다.
발을 바깥쪽으로 벌린 정용욱이 풀스윙으로 공을 쳤다.
탕!
잘 맞은 공은 그대로 왼쪽 담장을 넘어갔다.
-파울.
정용욱은 왼쪽 폴대를 한참 벗어 나간 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정용욱이 다시 타석으로 돌아오는데…… 송석현은 망부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위화감.
정용욱은 분명 몸 쪽 높은 공이 올 걸 알고 있었고 기다려서 스윙했다.
확신에 찬 스윙이 너무 빠른 게 문제였지 조금만 타이밍이 잘 맞았다면 가운데 담장이라도 넘겼을 거다.
배터리의 노림수가 들킨 상황이다.
하물며 신인 포수다.
당황하거나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투수와 벤치의 눈치를 봐야 정상이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호들갑이 없다.
왜지?
“타자, 빨리 들어와.”
“네, 네. 알겠습니다~.”
정용욱이 미소를 지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아직 어린애라서 얼어붙었을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반응은…… 음…… 대체 왜?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투수는 타자가 준비 자세를 마치자마자 공을 던졌다.
포수와 투수가 사인을 교환할 시간은 있는 건가?
-스트라이크! 아웃!
정용욱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공은 송석현의 미트에 꽂혀 있었다.
송석현은 공을 꺼내 야수에게 돌렸다.
“……하하.”
정용욱은 배트를 들고 벤치로 향했다.
벤치 앞에 나와 있던 배터리코치 이만성이 정용욱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야, 넌 무슨 저런 공에 헛스윙하냐? 오늘 뭐 장작 패는 날이야? 스윙은 또 왜 그렇게 커?”
“그래? 내가 스윙이 컸나?”
“누가 보면 야구 선수가 아니라 나무꾼인 줄 알겠어. 아주 붕붕 막 돌리더라.”
“그랬어?”
정용욱은 배트를 놓고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에 그 공엔 왜 스윙한 거야? 바깥쪽 높은 곳에 빠지는 직구는 완전 실투잖아. 그냥 보면 볼인데.”
“공이 많이 나갔나?”
“모르긴 몰라도 공 한 개 이상은 나갔을걸.”
“그렇겠네, 헛스윙 삼진을 당했으니.”
정용욱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코치가 수건을 가져와 건넸다.
“더워? 안 흘리던 땀은 왜 또 그렇게 흘려?”
“그러게. 땀이 좀 많이 났네.”
정용욱은 땀을 닦다가 피식 웃었다.
“형.”
“왜?”
“조방천 선배님 기억나지?”
“……갑자기? 기억나지. 왜 기억이 안 나?”
“내가 어릴 때 조방천 선배님을 이겨 보겠다고 깐죽거린 것도 잘 알지?”
“잘 알지. 그땐 너도 잘나갔잖아. 스물넷인가, 다섯인가에 30홈런 치고 포수 골글 받았으니까.”
“그래도 조방천 선배님이 은퇴할 때까진 포수 넘버원은 조방천 선배님이었잖아. 그것도 알지?”
“그거야…… 조방천 선배님은 역대 최고 포수 중 하나니까. 그땐 네가 나이도 어렸고.”
“나도 내가 나이 어린 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답답했거든. 차라리 어중간하면 괜찮은데 좀만 더 하면 내가 1등인데, 내가 1등이 될 거 같은데 다른 사람 때문에 못하면 환장하거든. 살리에리 증후군 같은 게 이런 거라며.”
“너는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았지. 독했고. 그래서 성공했겠지만.”
“그땐 세상도 원망했어. 왜 하필 조방천 선배님이 있을 때 내가 활동한 거냐고.”
“선배님이 은퇴하시고는 네가 톱이잖아. 쭉 톱이었지.”
“그래, 그랬지.”
정용욱이 수건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르더니 수건을 벤치에 올려놨다.
“지금은 다행인 거 같아. 조방천 선배님은 나보다 여덟 살은 많았잖아?”
“그런데 갑자기 조방천 선배님 얘기는 왜 하는데?”
정용욱이 그라운드에 시선을 돌렸다.
투수가 병살로 이닝을 마무리하고 포수와 하이 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조방천 선배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갈 거 같아서. 진웅이 마음은 더 이해되고.”
“진웅이?”
정용욱은 저 한쪽 구석에서 각을 잡고 앉아 있는 김진웅을 가리켰다.
“형, 진웅이 잘 키워. 옆에서 잘 다독거려 주고. 나보다 선배가 잘해도 열받는데 나보다 어린 애가 잘하면 더 빡치거든.”
“무슨 말이야? 너 설마……?”
배터리코치가 상대 벤치를 바라봤다.
포수 장비를 풀고 있는 앳된 상대 팀 포수가 보였다.
정용욱은 어느새 포수 장비를 다 차고 마스크를 내렸다.
“하, 저런 놈은 메이저를 갔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와서 지랄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