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 (8)
“와, 돌겠네.”
6회까지 김인환의 성적은 3타수 3안타 2홈런.
정용욱의 얼굴엔 푸근한 미소가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홈 플레이트를 향해 뛰어오는 김인환을 볼 뿐이다.
“……약이라도 먹은 건가?”
정용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날 경기는 고트의 9-5 승리.
MVP는 혼자 5타점을 뽑아낸 김인환에게 돌아갔다.
“이제 군말 없이 하는 거다. 어?”
정용욱은 코치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알았어. 누가 뭐래?”
정용욱이 짐을 싸는데 누가 옆에 와 툭 어깨를 쳤다.
“형.”
“어, 정률. 오랜만이네. 너도 여기 있었어?”
“뭐, 나야 이제 여기가 내 고향이지. 형은? 몸 괜찮아? 그 나이에 홈에 충돌하면 뼈 나가.”
“짜식이 오랜만에 보는 형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깐 인사 안 오고 뭐 했어?”
“아까 형 없던데?”
“아, 나 화장실 갔었구나. 요새 어때? 넌 팔 괜찮고?”
김정률이 팔을 빙빙 돌렸다.
“아직까진. 쓸 만해.”
“아깝다, 아까워. 네가 고트가 아니라 우리 팀에 있었으면 우승 반지 몇 개 끼고 관리도 작살나게 받았을 텐데.”
“에헤이. 지나간 얘기는 뭐 하러 해. 지금도 나쁘지 않아. 나 요새 공 잘 던지거든.”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오늘 어때? 식사라도 할까?”
“그럴까?”
그날 저녁.
김정률과 정용욱은 단골 식당에서 근황을 안줏거리 삼아 수다를 떨었다.
“인환이 걔는 왜 이렇게 잘하냐? 요새 잘하는 사이클인가? 걔가 원래 좀 기복이 심하잖아.”
“인환이가 은인을 만났지, 송 코치님이라고. 요새 자주 붙어 다니더니 뭔가 달라진 거 같아.”
“송 코치? 누구야? 누군데? 내가 모르는 사람인가?”
“있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코치가.”
“너희 타코 안 바뀐 거 같던데.”
김정률이 파하하 웃었다.
“우리 막내 포수야. 송석현이라고, 아주 머리에 든 게 어마무시한 놈이야. 똑똑하고 야구도 잘하고 기특한 놈이지. 앞으로 차기 국대 넘버원이 될 인재랄까?”
정용욱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 인마? 형이 앞에 있는데 어디 국대를 꺼내 들어?”
“두고 보슈. 형도 보면 깜짝 놀랄걸. 지금 당장 1군에서 뛰어도 괜찮을 정도야. 엄청 스마트한 놈이라니까.”
“야, 걔 뭔데? 언제 들어온 놈이야? 드래프트 1픽인가?”
“아니, 신고. 신고 고졸 포수.”
“신고 고졸 포수?”
정용욱이 파 웃었다.
“장난하나. 신고 고졸 포수를 형 앞에 들이밀어? 짜쉭이 죽을라고.”
“만만하게 보면 큰일 난다, 형. 걔는 진퉁이야.”
“진퉁이고 유퉁이고. 오죽하면 신고 고졸 포수냐. 포수는 웬만하면 못 가는 데가 없는데.”
“사정이 그렇게 됐어. 실력은 진짜배기야.”
“됐다, 인마. 관심 없어. 무슨 송 코치야, 송 코치는.”
“석현이가 내일 나올지도 모르는데…… 형도 한번 데여 봐야겠네, 흐흐.”
“오버하지 마, 인마. 그런 놈 한 트럭이 와 봐라. 내 발끝에나 미치나.”
* * *
그날 밤 송석현은 수첩을 펴 놓고 A4 용지에 무언가를 적었다.
작은 글씨로 한 줄, 한 줄 적힌 종이는 어느새 활자로 가득 찼다.
송석현은 펜을 놓곤 종이를 내려다봤다.
“하, 내가 앞서는 건 어깨 정도……. 타격은 이쪽도 잘하니까 내가 장타력이 앞선다고 꼭 낫다고 할 수는 없고.”
송석현은 어깨라고 쓰인 단어에 연신 동그라미를 쳤다.
“그 많은 것 중에서 어깨라도 하나 이겨야지. 암.”
송석현은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달렸다.
땀을 쫙 뺀 후 온수로 몸을 씻었다.
오전 훈련엔 김태우 배터리코치가 와 송석현에게 선발임을 귀띔했다.
“어디 한번 해 봐. 안 그래도 다들 비교된다고 나가기 싫어하는데 네 용기가 가상해서 내가 더 적극적으로 밀었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현역 넘버원 포수이자 역대 최고의 포수 중 세 손가락에 드는 정용욱.
지금 당장 뛰어넘네 마네 하기에는 까마득한 산이다.
처음부터 정상을 밟는 사람이 있으랴.
송석현은 정용욱이란 큰 산에 자신이 얼마만큼 올라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고트의 선발투수는 정천운이었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사이드암 투수.
그에 반해 페가수스 선발은 정제성.
작년 드래프트 1라운더 선수였다.
투 피치 좌완 파이어볼러.
선발의 무게감으로 따지면 페가수스 쪽이 한발 앞섰다.
-플레이볼!
경기가 시작됐다.
송석현은 홈 플레이트 뒤에 앉아 타석의 타자를 살폈다.
1번 타자는 외야수 손영석.
페가수스에선 1군과 2군을 오가고 있으나 객관적인 실력으로 보면 어느 팀에 가든 주전이나 1군 백업은 충분히 하고도 남는 실력이었다.
최근 5년간 세 번의 우승을 일군 페가수스가 자기 팀이라는 게 손영석의 불행이었다.
‘몸 쪽 슬라이더.’
송석현이 미트를 한가운데로 내밀었다.
투수는 고민도 없이 공을 던졌다.
송석현의 볼 배합을 익히 봐 왔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아!”
타자는 몸을 빼면서 뒤로 물러섰다.
-스트라이크!
몸 쪽으로 들어오는 스트라이크.
타자는 심판을 봤지만 심판은 요지부동이었다.
“초구부터 빡세네. 살살 가자, 살살.”
손영석은 27세의 8년 차 타자였다.
1년 차 신입 포수에겐 까마득한 선배기도 했다.
“네, 알겠습니다.”
송석현은 다음 공으로 또 몸 쪽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몸 쪽으로 조금 더 붙은 공.
타자는 참지 못하고 공을 쳤다.
“아씨.”
유격수 앞 땅볼.
타자는 1루로 조금 뛰다가 벤치로 들어갔다.
“아나, 진짜.”
벤치로 온 타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정용욱이 물었다.
“저런 공은 왜 치는 거야?”
“아, 열 받잖아요, 몸 쪽 공 계속 던지는 게.”
“저런 공은 누가 쳐도 좋은 공이 안 나와. 알잖아?”
“알죠. 그래도 설마 몸 쪽으로 연속 두 번 던지겠냐고 생각했어요.”
“음.”
정용욱이 팔짱을 낀 채 송석현을 바라봤다.
“저기 볼 배합, 벤치가 아니라 포수가 하는 거 맞지?”
“그런 거 같은데요? 벤치 사인이 따로 안 보여요.”
“그럼 포수가 사이드암 투수한테 우타자 몸 쪽 슬라이더를 두 개 연속 요구한 건데……. 배짱은 대단하긴 하네. 제정신인가?”
고트의 벤치에서도 감독과 배터리코치가 얘기를 주고받았다.
“사인이 과감하네.”
“……아무래도 성향이라 단숨에 고치긴 힘들 거 같습니다.”
“뭐, 이왕 선발을 맡겼으니 우리도 믿어 줘야지. 페가수스 상대로도 석현이가 통하면 스타일이고 뭐고 제 실력이니까 우리도 입 다물어야 하고.”
“용욱이가 있는데 그게 되겠습니까?”
“용욱이는 사람 아니야?”
“그래도 용욱이는 석현이가 날고뛰어도 벅차죠.”
“뭐, 안 통하면 어때? 이미 내가 1군에 강력하게 주장해 놨어, 포수로 안 쓸 거면 대타로라도 쓰라고. 후반기에 올라가더라도 전반기에 1군 공기라도 좀 맡는 거랑 안 맡는 건 차이가 크지 않겠어?”
“그럼 석현이 곧 1군에 가는 겁니까?”
“지금 우리 팀이 연패 중이라 여유가 없긴 하지만 반대로 쇄신하는 차원에서 2군 멤버를 올릴 수도 있잖아. 잘하면 1~2주 안에 올라가고, 늦어도 전반기 전에는 올라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석현이는 경험치를 먹는 만큼 클 놈입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감독과 코치가 얘기를 나누는 사이 고트의 배터리는 2번 타자를 하이 패스트볼로 삼진을 만들었다.
타자는 기회를 놓친 게 분해 배트를 잡고 연신 씩씩거렸다.
“오늘 저기 왜 저래? 볼 배합이 이상한데?”
“직구 140으로 하이볼을 던져?”
정용욱은 안경을 위로 올렸다.
배터리코치가 와서 정용욱에게 말했다.
“어때? 네가 보기에도 저 볼 배합, 벤치에서 나온 건 아니지?”
“응, 김태우 코치 성향을 아는데 절대 저런 사인 안 내. 미친 거지. 2스트라이크 잡아 놓고 하이볼로 삼진.”
“송석현…… 갑자기 저런 놈이 튀어나오나? 뭐지, 이제 스무 살인데.”
정용욱이 혀를 찼다.
“우리 후배님이 과감하시네. 아주 과감하셔.”
고트의 투수 정천운은 바깥쪽 떨어지는 공으로 땅볼 아웃을 만들었다.
공수 교대.
정천운은 벤치로 들어가면서 주먹을 내밀었다.
“너 꼴리는 대로 사인 내. 그냥 나도 바로바로 던질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페가수스 마운드에는 정제성이 올라섰다.
대형 유망주.
좌완 파이어볼러.
정제성은 자신의 이름값을 실력으로 증명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세 타자 연속 삼진.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와 시속 140km/h에 육박하는 하드 슬라이더는 타자가 감을 잡기도 전에 이닝을 끝냈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정용욱의 칭찬에 정제성이 희희낙락 입꼬리를 올렸다.
현재 최고의 포수로 꼽는 정용욱의 칭찬이다.
정제성은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
정용욱은 고개를 돌렸다.
고트 벤치에서 송석현이 포수 장비를 끼고 나오고 있었다.
2회 초.
페가수스의 첫 타자는 하성준이었다.
24세의 호타준족 군필 유망주.
차기 페가수스 1군 진입이 유력한 선수였다.
정용욱은 팔짱을 낀 채 송석현의 사인을 지켜봤다.
초구는 몸 쪽 커브였다.
우타자 몸 쪽에서 바깥쪽으로 흐르는 커브.
하성준은 몸 쪽으로 오는 공에 움찔했지만 가볍게 밀어서 안타를 쳐 냈다.
무사 1루.
다음 타자는 5번 허일태.
작년 드래프트 최대어 중 하나로 차기 4번 타자를 논하는 거포였다.
1루엔 발 빠른 주자, 타석엔 장타자.
정용욱은 숨을 죽이며 팽팽한 긴장감을 즐겼다.
초구는 바깥쪽 커브.
느린 변화구에 기다렸다는 듯 주자가 뛰었다.
팡.
포수는 잡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정용욱은 고개를 저었다.
늦었다. 늦은 타이밍엔 굳이 던질 필요가 없다.
여기서 던지는 건 욕심이다.
아웃!
“……뭐여, 씨발.”
정용욱이 제 눈을 의심했다.
페가수스 벤치도 술렁였다.
“뭐야? 저게 왜 잡혀?”
“지금 저 공 뭐냐?”
“존나 빠르네. 장난 아닌데?”
“미친. 로켓이 날아가는 줄 알았네.”
2루에서 아웃된 하성준도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용욱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어깨를 만졌다.
지금의 어깨론 턱도 없다.
아니, 더 어린 날로 돌아가도 턱도 없다.
어제 헤어질 때 김정률의 얘기가 귀에 맴돌았다.
-내일 꽤 재밌을걸. 하하하.
“재밌긴. 참 나.”
정용욱이 마른침을 삼켰다.
투수 정천운은 바깥쪽 슬라이더, 직구, 커브, 커브로 3-2를 만들었다.
풀카운트.
투수의 선택은 타자 턱 높이의 직구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타자는 턱도 없는 공에 배트를 돌리곤 제 머리를 쳤다.
“아, 머저리.”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몇 개는 빗나간 공.
배트를 휘두르면서도 아차 싶은 공이었다.
“하.”
타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벤치로 들어왔다.
정용욱은 이젠 허리를 바로 세우고 진지한 얼굴로 송석현을 바라봤다.
거포에게도 몸 쪽 높은 공 승부를 하는 포수.
후배가 아니라 프로의 포수로서 인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