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 (5)
웨일스전 두 번째 경기.
송석현은 선발이 아니었다.
2군의 주전 포수이자 고트에선 실력으로 서드로 꼽는 정지환이 주전으로 나섰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환이 경기 운영하는 거 보면서 배울 게 많을 거야.”
“네, 한 경기라도 맡아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지환 선배님한테 배울 게 많습니다.”
“그래그래, 그렇게 생각해. 너 아직 어려. 무슨 말인지 알지?”
송석현의 제외는 감독과 코치의 결정 사항이었다.
공격적이고 개성 강한 경기 운영은 보는 팬들이나 뛰는 선수들에겐 흥미를 돋우는 재미가 있을진 몰라도 현장 지도자에겐 반갑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좋아, 좋아. 공 좋다.”
정지환은 일부러 공을 소리 나게 받아 주면서 투수의 기운을 북돋았다.
송석현은 수첩을 꺼내 정지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빡친다고 일기 쓰는 거 아냐?”
김정률이 송석현 옆으로 와 앉았다.
“에이, 제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뭐 쓰고 있었어?”
“지환 선배님 프레이밍을 보고 있었습니다.”
“프레이밍? 그거 기록할 게 있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는 거예요. 공 받기 전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손은 어느 정도로 움직이는지 그런 거요.”
“별걸 다 쓰네. 하긴, 그런 것도 열심히 쓰니까 네가 아는 게 많겠지.”
“예? 아니에요. 제가 뭘 아는 게 많다고요. 친구 따라 이거 저거 읽다 보니까 잡학만 는 거죠.”
“에헤이, 겸손 떨 필요 없어, 인마. 이제 여기 애들은 다 알아, 어린 놈의 자식이 척척박사라는 거.”
송석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요. 정말 다들 절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겠죠?”
“궁금해? 궁금하면 500원.”
“앗…….”
웨일스와의 경기는 접전으로 흘렀다.
한 점씩 점수를 주고받으며 5회까지 3-3.
경기는 6회에서 결정됐다.
탕!
“아…… 넘어갔네.”
송석현이 입맛을 다셨다.
4번 타자로 나온 심수경이 홈런으로 본인의 존재를 과시했다.
도망가는 3점 홈런.
고트는 추격에 나섰으나 김인환이 홀로 병살 세 개를 때리며 발목을 잡았다.
최종 스코어는 8-4.
김인환은 침울한 표정으로 벤치에 들어왔다.
“야, 이런 날도 있지. 뭘 그렇게 뚱한 표정을 짓냐?”
김정률의 농담에 김인환은 대꾸 대신 한숨을 쉬었다.
“한 경기 가지고 풀 죽기는. 요새 갱년기야? 우울해?”
“…….”
김정률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우리 고기 먹으러 갈까?”
“아뇨. 됐어요.”
김인환이 짐을 싸 들고 벤치를 벗어났다.
김정률은 어깨를 으쓱했다.
“요새 유난히 더 침울해하네.”
“형도 고민이 있겠죠.”
“고민 없는 놈이 어딨냐?”
“형이 좀 민감한 시기잖아요. 군대도 안 보내 주고, 그렇다고 1군에 자리가 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가슴에 고민 하나쯤은 품고 사는 거야. 주전 경쟁이 어려웠던 게 하루 이틀인가?”
“선배님도 형 잘 좀 위로해 주세요. 형 요새 스트레스 많이 받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 너한테까지 티 날 정도면 진짠가 본데.”
김정률이 김인환의 뒤를 따라 달렸다.
“인환쓰! 고기가 싫으면 회 어때? 맛있는 거 먹즈아~.”
그날 저녁.
김인환은 저녁밥을 남기곤 방에 들어와 야간 훈련도 나오지 않았다.
김인환이 밥을 남긴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김정률은 김인환의 방에 쳐들어가려 했으나 송석현이 만류했다.
“오늘은 우리끼리 훈련하시죠. 형 오늘은 좀 쉬려나 본데.”
“루틴을 안 빼먹는 놈이 이러니 영 그러네.”
“가시죠, 선배님.”
송석현은 김정률과 개인 훈련을 마친 후 방에 돌아왔다.
오늘 경기를 복기한 후 1군 경기 리뷰 방송을 틀었다.
-4월에는 힘차게 박차고 나갔던 고트가 5월에는 많이 주춤했습니다.
-예. 그렇죠. 원래 고트가 봄에 강하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임의수 감독 체제 이후 고트는 5월까지 항상 2위는 유지했었는데요, 올해는 페이스가 빨리 무너졌습니다.
-5월에 3연패만 세 번입니다. 연패가 유난히 많은 거 같습니다.
-연패가 많다는 건 단순히 선수들이 못해서가 아니라 선수들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얘깁니다. 이번 스프링캠프에선 유난히 훈련량이 많다고 들었는데, 훈련량이 많으면 4월에는 실전 감각이 빨리 올라와서 성적을 잘 낼 수 있지만 그만큼 피로가 누적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고트의 최근 부진은 이런 경향으로 해석하는 게 맞지 않나 싶네요.
-고트가 다시 치고 올라갈 방법은 없을까요?
-고트의 투수진은 좋습니다. 불펜에 자주 과부하가 오긴 하지만 용병 선발부터 토종 선발까지 선발진은 좋아요. 문제는 타선입니다. 타율은 나쁘지 않은데 득점력이 약해요. 고트가 원래 장타자를 많이 보유한 팀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득점력이 떨어진 건 7년 만에 처음이거든요. 득점력을 올려야 이기는 경기라도 쉽게 가지 않겠습니까? 타이트한 경기가 많아질수록 불펜 과부하가 많아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득점력. 결국 장타겠죠?
-예. 고트의 고질적인 약점인 장타. 쉽게 극복이 안 되는 부분이라 고트의 전반기가 더 어려워질 거 같습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송석현은 팔짱을 꼈다.
“음, 장타력, 장타……. 잠실에서 장타력을 요구하는 건 너무한데.”
송석현이 다음 경기를 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에.”
“들어가도 돼?”
김인환의 목소리였다.
“네, 들어와요, 형.”
김인환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방에 들어왔다.
“뭐 하고 있었어? 야구 프로 보고 있었어?”
“네, 1군은 뭐 했나 좀 보고 있었어요.”
“종일 야구 하는데 안 지겹냐?”
“아직은요. 저 올해 입단한 신인인데 벌써 지겨우면 안 되죠.”
김인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맞는 말이네.”
“앉아요, 형. 마실 거 줘요?”
“아냐. 괜찮아.”
김인환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송석현은 TV를 끈 후 의자를 돌렸다.
“왜요? 뭐 고민 있어요?”
“고민은 뭐, 만날 하는 거지. 왜 이렇게 난 못할까?”
“에이, 왜 그래요, 오늘 같은 경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팀 병살 세 개도 아니고 혼자 병살 세 개는 아무나 못할걸.”
“그건…… 음…….”
송석현은 부정하지 못했다.
“하, 난 왜 이렇게 야구를 못할까?”
“뭘 또 그렇게 자학까지.”
“네가 봐도 한심하지 않아? 너무 못하지, 나?”
“형은 계기가 필요한 거지 못하는 건 절대, 절대 아니에요.”
“일본에 갔을 땐 뭔가 될 거 같았는데 막상 한국 오니까 도루묵이네. 나아진 게 없어.”
“아니죠. 형 이제는 인 앤드 아웃 스윙이 저절로 되잖아요. 팔꿈치를 붙여 나오는 게 이젠 몸에 익숙해졌어요.”
“그럼 뭐 해, 병살만 세 개 치는데. 몸 쪽 공, 바깥쪽 공 전부 다 병살. 하, 스윙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거 같다.”
“오늘은 전부 타이밍이 좀 안 맞았어요. 형이 스탠스를 너무 빨리 바꿔서 그래요. 타격 폼이라는 게 조금씩 수정해야 하는데 형은 올해부터 너무 휙휙 폼을 바꿔 왔잖아요.”
“그렇다고 예전처럼 돌아갈 수가 있나, 예전에도 못 쳤는데.”
“흠.”
송석현은 턱을 괴었다.
김인환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냉정하게. 나 진짜 재능이라는 게 있긴 있냐? 그냥 빨리 접는 게 낫지 않겠어?”
“형, 그 정도로 쫓겨요?”
“급하지, 그럼. 이러다가 어영부영 군대까지 늦게 가면 진짜 끝장이야. 나중에 스물여섯, 스물일곱 때 군대에 가 봐. 상무랑 경찰청도 떨어지고 현역으로 갈 수도 있어. 그럼 돌아오면 서른인데 누가 서른까지 아무것도 못 보여 준 타자를 쓰겠어?”
“형이 왜 상무랑 경찰청에 떨어져요? 지금이라도 당장 갈 수 있는데.”
“지금 이것도 뽀록이지. 오늘만 해도 봐. 병살만 세 개잖아. 이러다 내년부터 죽 쓰면 나 진짜 답도 없어질 거야.”
“그렇다고 타격 폼을 계속 바꾸면 더 어려운데.”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지기도 힘들지 않을까?”
“형, 지금 성적은 잘 나오잖아요.”
“최근에는 타율이고 뭐고 다 떨어졌어. 투수들이 내 몸 쪽을 공략하기 시작했거든.”
“그래도 지금 타율이 3할은……?”
“오늘부로 3할도 끝났어. 2군에서도 3할 못 치는데 1군에서 불러 줄까?”
송석현은 입맛을 다셨다.
김인환은 송석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방법이 없겠어?”
“뭐 제가 의사예요? 어떻게 딱 형한테 맞는 처방전을 줘요?”
“너는 나보다 아는 게 많잖아. 나보다 잘하기도 하고.”
“에이, 형. 아직은 그냥 뽀록이죠.”
“뽀록은 무슨. 나도 보는 눈이 있어. 뽀록이랑 실력이랑 구분도 못할까 봐? 석현아, 뭐든 좋으니까 너 생각나는 거 있음 해 줘 봐. 지금 나 어떻게 해야 되냐? 어?”
“형, 이러면 더 부담스럽죠. 이러면 서로 더 안 좋아요. 형 이렇게 계속 타격 폼을 바꾸면 적응하기도 힘들고, 안되면 원망만 늘어요.”
“내가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보단 네가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난 가망 없어. 실패해도 내 실력이고 성공하면 네 덕이지.”
“아이, 진짜. 이러면 완전 부담이라구요.”
“좀 부탁한다. 여태 네 말을 듣고 이만큼이라도 성적을 올렸잖아. 도와주는 김에 조금만 더 도와줘. 내가 나중에 잘돼서 FA 대박 나면 너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
“공수표는 됐어요. 그런 거 바라지도 않고.”
“석현아, 형 한 번만 더 도와줘라.”
“코치님한테 물어봐야죠. 이걸 후배한테 묻는 게 어딨어요.”
“내가 한두 번 데이냐? 코치님한테 물어보는 순간 내 폼 다 뜯어고칠걸. 네가 나한테 타격 폼을 자주 바꾼다고 뭐라고 하는데 이 팀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가 타격 폼을 바꾼 게 수십, 수백 번은 될 거다. 코치님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다들 내 타격 폼을 너무 뜯어고쳐서 힘들어. 심지어 코치님들마다 티칭도 다 달라.”
“아…… 뭐…… 그 정도예요?”
“어차피 코치님들한테 맡겨도 내 타격 폼을 다 뜯어고쳐야 돼. 그렇게 고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적도 없고. 그럴 거면 너를 믿는 게 백배는 낫지. 네가 해 준 조언대로 해서 잘됐잖아.”
“후우우.”
송석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주식이랑 똑같네요.”
“어?”
“주식을 추천하는 거랑 같다고요. 주식을 추천해서 잘되면 밥 한 번 얻어먹고 마는 건데, 잘 안 되면 평생 원수가 되는 거잖아요. 전 형이랑 멀어지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야, 설마 내가 널 원망하겠니? 나 봐 봐. 나 그런 놈은 아닌 거 알잖아.”
김인환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 같았다.
송석현은 소처럼 끔뻑거리는 김인환의 눈에 고개를 돌렸다.
“형도 참.”
“너 오늘 내 타격 봤잖아. 문제점 보이지? 고칠 점 보이지?”
송석현은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
김인환은 주먹을 꽉 쥔 채 송석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가 무슨 화타도 아니고……. 일단 형 나가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전 코치도 아니고 뭐도 아니지만 포수의 관점에서 형 타격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할 말은 있어요. 일단 나가죠, 형.”
김인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거면 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