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 (4)
송석현이 말했다.
“형 공은 회전수가 높아서 높은 쪽 직구를 던질 때 더 위력적이에요. 회전수가 높으면 브레이킹볼이 더 잘 먹히는데, 몸 쪽 높은 직구를 던진 후에 바깥쪽 커브를 던지면 타자한테는 더 멀어 보이고, 느려 보여서 조합도 좋고요.”
“그러니까 도박을 해 본 거네, 몸 쪽 공으로? 웨일스라 통했지 장타자가 있었으면 오늘 홈런 몇 개는 나왔을 거다.”
“장타자가 많이 나오면 또 그때에 맞춰 대처하는 거죠. 오늘은 웨일스잖아요.”
정진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또 그러네. 웨일스전이지. 그래도 아까 2연속 초구 슬라이더를 요구한 건 과했어. 게다가 조양선한테는 더더욱.”
“조양선 선배한테는 더더욱 몸 쪽 승부를 해야 돼요.”
“선구안이랑 컨택이 좋아서 내 공 골라낸단 말이야. 몸 쪽 공 보고 골라서 칠걸.”
“어차피 쳐도 좋은 공 안 나와요.”
“왜? 파워가 없어서? 그래도 몸 쪽 공은 결대로 치면 장타 쭉쭉 나온다, 너.”
“조양선 선배는 톱 핸드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타입이에요. 특이하게 밀어 치기도 잘하지만 애초에 당겨 치는 걸 더 좋아해요. 파워가 부족한 선수가 당겨 치면 먹힌 공이 잘 나와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톱 핸드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
“보텀 핸드 겨드랑이를 보면 알죠. 공 치기 전에 보텀 핸드의 겨드랑이가 더 벌어지면 톱 핸드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뜻이니까요.”
“겨드랑이를 본다고?”
“네.”
정진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게 보여?”
“보이죠. 타자 발을 보고 다음엔 무릎을 보고, 다음엔 어깨랑 겨드랑이를 보고, 마지막엔 고개를 보고. 그러면 타자 스타일이 다 나와요.”
“……그러냐?”
정진오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송석현은 짐을 챙겨 정진오에게 눈짓했다.
“안 가요?”
“석현아.”
“네.”
“너는 내 공이 어떤 거 같아? 직구는 정말 좋아?”
송석현은 코로 숨을 훅 뱉었다.
“몸 쪽 직구는 A급이에요.”
“왜 몸 쪽이라고 콕 집는데? 바깥쪽은 별로야?”
“바깥쪽 공은 평범한데 몸 쪽 직구는 더 좋아요.”
“같은 직군데 그게 어떻게 다르냐?”
“보통 투수는 몸 쪽 직구랑 바깥쪽 직구가 적어도 2~3km/h, 많게는 5km/h 이상 차이가 나요. 빈볼을 의식해서 몸 쪽 공은 더 힘을 빼서 던지거든요. 그런데 형은 몸 쪽 공이랑 바깥쪽 공이 별 차이가 없어요. 그 말은 형의 몸 쪽 직구는 타자한테 145km/h 이상의 속구를 던지는 투수의 공과 같다는 얘기죠. 게다가 형은 공에 스핀이 더 많이 먹으니까 더 떠오르는 느낌이 있을걸요. 조금 과장을 보태면 몸 쪽 하이볼이 타자에게는 150km/h 수준으로 느껴질 거예요.”
“150km/h……. 그 정도 던지면 소원이 없겠는데.”
“형, 이제 좀 가죠.”
정진오는 송석현을 따라가면서 물었다.
“직구는 그렇다 치고. 커브랑 슬라이더는 어때? 체인지업은?”
“냉정하게요?”
“적당히. 적당히 냉정하게.”
“체인지업은 딱히, 그냥 그래요. 대신에 커브는 중상급이고 슬라이더도 평균보다는 조금 나아요.”
“그러면 커브를 살려야겠네. 그치?”
“그런데 형 커브 던질 때 쿠세가 너무 심해요. 원래 커브는 쉽게 알아채기는 하는데 형은 더 심해요. 손목으로 많이 감으니까 커브 각이 좋은데, 그래서 더 쉽게 보여요.”
“……부정은 못하겠네. 커브를 던질 때 좀 많이 감긴 하거든.”
“차라리 너클 커브를 던지는 게 어때요? 형 구속이 아주 빠른 것도 아니고 릴리스 포인트가 높은 것도 아니면 정통파 커브보단 너클 커브가 나을걸요.”
“왜? 내 커브 좋다며?”
“너클 커브는 공이 위로 떠서 가는 게 아니라 인식 지점을 지날 때까진 직구랑 커브를 구분하기 어려운 게 첫 번째고, 너클 커브가 원래 각이 별로 안 큰데 형이 던지면 스핀을 많이 먹일 수 있는 게 두 번째죠. 형이라면 각도 잘 살지 않을까요?”
“그런가……? 딱히 너클 커브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형은 지금 정통파도 아니고 기교파도 아니고 좀 애매한 상황이에요. 구속만 따지면 기교파여야 하는데 레퍼토리는 정통파에 가깝죠. 12-6 커브도 그렇고요. 형 폼은 예쁜데 제구가 그리 뛰어나지 않은 건 팔 각도도 높아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차라리 팔 각도를 조금 내려서 제구를 날카롭게 가다듬고 너클 커브랑 슬라이더 섞어 쓰면 타자가 골라내기 더 힘들걸요.”
“팔 각도를 내리면 공이 옆으로 휘잖아. 떨어지는 공이 없어지는데? 체인지업도 별로라며?”
“너클 커브가 있잖아요. 형이 던지면 충분히 각도를 살려서 떨어뜨릴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송석현은 걷다 말고 우뚝 섰다.
“아, 그렇다고 제 말 곧이곧대로 다 듣진 마세요. 이건 제가 생각하는 방향이고 형은 형 나름대로 생각하는 방향이 있을 거 아니에요. 지금 당장 팔 각도를 내리고 너클 커브를 배우고 그러면 시즌을 통으로 날려야 하는데, 어휴……. 형이 물어서 대답은 했는데 뭐든 코치님이랑 상의하세요.”
송석현은 먼저 자리를 떴다.
정진오는 자리에 서서 턱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애매하다……. 음…….”
* * *
2군 생활은 경기를 마쳤다고 일과가 끝나는 게 아니다.
경기가 끝난 후 스트레칭과 보완 운동도 해야 하고 샤워와 뒷정리를 해야 한다. 저녁 시간 후에는 개인 훈련 시간도 따로 있다.
이 중엔 코치와의 면담도 포함돼 있었다.
“앉아.”
송석현은 배터리코치 김태우의 부름에 사무실로 향했다.
“네,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오냐. 맛있게 했지. 오늘 이겨서 더 꿀맛이더라.”
코치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고생 많았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늘 볼 배합을 다 맡겨 봤는데 괜찮았어. 공격적으로 잘 리드하더라.”
“코치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입니다.”
“내가? 글쎄다. 내가 그렇게 가르쳐 줬던가.”
송석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김태우는 커피를 홀짝거렸다.
“애초에 오늘 좀 공격적으로 가려고 했었지만 오늘 좀 과하더라. 여기가 2군이니까 그렇게 모험적인 볼 배합을 할 수는 있어도 1군에 가면 달라. 뻔하다 싶어도 좀 안정적으로 가야 투수도 야수들도 코치들도 믿고 맡길 수 있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까 심수경한테 던진 커브도 그래. 너무 위험한 공이었어.”
“그건…… 아, 아닙니다.”
“뭐? 이유가 있었어?”
송석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심수경 선배가 아무래도 몸 쪽 공에 좀 약한 거 같아서 그렇게 승부해 봤습니다.”
“수경이가? 걔는 공을 가리는 타입이 아닌데.”
“제가 심수경 선배님 자료를 보다 느낀 게 있습니다. 핫콜드존을 보면 몸 쪽 공 타율이 아슬아슬하게 3할인 데다 타격 시도 횟수 자체가 적습니다. 그렇다는 건 몸 쪽 공 스윙에 인색하단 얘기죠. 단순히 신중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유가 있는 건지 알아보려고 몸 쪽 공 승부를 해 봤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상대가 노림수를 가지고 반응을 안 했다고는 생각 안 해 봤어? 그랬다면 몸 쪽 커브는 아예 갖다 바치는 공이 됐을 텐데.”
“애초에 몸 쪽 공 자체를 배제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특정한 공이나 존을 배제하고 타격하는 경우는 왕왕 있으니까요. 그래도 계속 직구만 던지면 상대도 노림수를 가지고 덤벼들 수 있으니까 결정구는 몸 쪽 커브로 바꿨습니다. 상대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고, 예상하지 못한 몸 쪽 커브를 잘 받아 친다면 ‘애초에 몸 쪽 공 자체를 잘 치는데도 안 치는구나.’ 하고 결론이 나지 않겠습니까?”
“홈런을 맞을 생각으로 볼 배합을 했다는 거야?”
“홈런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했습니다.”
“허.”
코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너도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했다는 거구나?”
“네.”
“왜 안전한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까지 한 거야?”
“음…… 아직 미숙하지만 저도 제 나름의 틀이 있습니다.”
“무슨 틀인데?”
“전 야구가 3할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는 3할을 치면 잘 치는 거고, 투수도 타자에게 3할은 맞을 각오로 던져야 한다 생각합니다.”
“맞을 각오로 던진다…….”
“네, 투수는 홈런을 맞든 안타를 맞든 다양한 상황에, 다양한 위치에, 다양한 공을 던져 봐야 데이터가 쌓인다고 생각합니다. 타자든 투수든 약점이 생기면 그걸 보완하려 할 테니 또 정보가 바뀌지 않습니까? 그럼 또 상대 약점을 찾고 보완하고, 찾고 보완하고……. 이걸 못하는 선수는 도태되고 잘하는 선수는 살아남는 게 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투수는 맞을 각오로 던져야 자기 위닝샷이 생기고 타자도 삼진당할 각오로 스윙을 참아야 자기 존이 생기는 게 아닐까요?”
코치는 어느새 커피를 다 마시곤 빈 종이컵을 탁자에 탁탁 두드렸다.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통통 울렸다.
기다림 끝에 코치가 침묵을 깼다.
“네 야구관이 맞든 틀리든 중요하지 않아. 네 나이에 너만의 그런 걸 생각했다는 게 대단한 거지. 내가 널 불러서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부질없겠다. 알 만큼 아는 놈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랴.”
“예? 아닙니다. 그저 제 개똥철학입니다. 코치님이 잘 이끌어 주셔야죠.”
“개똥철학이 어딨어? 네 볼 배합이 좀 공격적이긴 해도 근거가 있으니 난 더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충고는 할 수 있겠지?”
“예, 귀담아 듣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쇼.”
코치가 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너 우리 팀 1군 감독이 누군지는 잘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우리 팀 감독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똑똑한 사람이야. 쥐어짜 내는 건 아마 전 구단을 통틀어서 가장 잘할 거다. 작전도 잘 내고, 경기 운영도 타이트하게 밀고 나가는 편이야. 그런데 말이다.”
“네.”
“임 감독은 무조건, 무조건 안전제일 주의야. 퀵 후크도 전 구단을 통틀어 1위고 번트 작전도 제일 많지. 너처럼 개성 강하고 공격적인 볼 배합을 보는 순간 바로 2군에 박아 놓고 올리지 않을 거야. 이건 그냥 너 겁먹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야. 아마 임 감독을 아는 사람이면 다 그렇게 생각할 거야.”
“아…… 음…….”
송석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좋든 싫든 너도 안정적으로 경기를 이끌어 가는 걸 익히는 게 좋아. 몸 쪽 공은 위닝샷으로 아껴 두고 바깥쪽 위주로 볼 배합을 풀어 나가 봐. 넌 어깨도 좋으니까 바깥쪽 위주로 볼 배합하면 도루 저지에도 도움이 될 거야. 블로킹 연습도 더 열심히 하고. 1군에 올라가면 네가 아니라 감독, 코치가 자주 볼 배합을 낼 거야. 승부구는 떨어지는 공 위주로 갈 건데 블로킹이 약하면 바로 눈 밖에 날 여지가 높아.”
“……예, 알겠습니다.”
“힘들어도 정석대로 배워 둬. 2군이라고 네 스타일대로 하기보단 우선 정석을 배우고 나중에 네가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았을 때 그때 네 볼 배합을 끌고 나가.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말이야. 알았지?”
“네.”
“그래, 넌 똑똑한 놈이니까 잘 알아듣겠지.”
코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넌 난놈이야. 나 같은 3류짜리? 포수 출신이랑은 그릇이 달라. 나랑 구 감독님이 너 1군 콜업을 적극적으로 밀어 볼 거야. 당장은 어려워도 전반기 내론 콜업이 있을 수 있어. 그러니 그때까지 잘 준비해 둬.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송석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가기 전, 송석현이 몸을 돌려 코치에게 인사했다.
“저한테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돈 받았으면 내 일 해야지. 나가 봐. 가서 쉬어라.”
“네, 코치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송석현이 사무실을 나갔다.
코치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한숨을 쉬었다.
“후, 요새 애들은 정말 다르네, 달라. 나는 저때 뭐 했는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