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 (3)
“후우우우.”
정진오는 벤치에 홀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공만 한 손에 쥐고 살살 돌렸다.
정진오 주변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느덧 8회 말.
투구수는 아흔두 개.
“오늘이 그럼 첫 완툰가?”
감독이 정진오를 힐끔 보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투수코치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올해 4년 찬데 1군도 아니고 2군에서 첫 완투는 너무 늦어.”
“요새 완투 자체가 드물잖습니까?”
“그래도 선발로 살아남고 싶으면 2군에서 완투는 진즉에 몇 번 했어야지.”
“진오 스타일이 좀…….”
“그래, 나도 알아, 계속 피해 가는 스타일인 거.”
“늦었지만 나름 자기만의 방법을 찾은 거 같습니다.”
“진오가 저렇게 공격적으로 나가니까 웃기긴 하네. 2군에서도 5회에 공 백 개 던지는 놈인데.”
“의외로 석현이가 고집이 센가 봅니다. 아까도 보니까 진오가 고개를 저어도 사인을 안 바꾸는 거 같더라고요.”
“아까 그 몸 쪽 커브?”
“예, 그건 누가 봐도 진오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통했으니 다행이긴 한데, 너무 위험하긴 했어.”
“그래도 오늘 진오가 선발투수로선 이제야 한발 좀 내디딘 거 같습니다. 자기 공에 대한 믿음이 워낙 없던 놈이라…….”
감독은 송석현을 바라봤다.
송석현은 프로텍터를 챙기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어린데도 강단이 있어. 카리스마가 있달까.”
“석현이요?”
“그래, 고 1 때까진 전국구 에이스였다며? 확실히 야구는 뭘 해도 잘하는 놈이 잘하는 거 같아.”
“석현이 여기서 오래 안 있겠네요.”
“그건 모르지. 다른 포지션이면 몰라도 포수 포지션은 TO가 사실상 하나잖아. 석현이가 웬만큼 날고뛰지 않는 이상 신언이를 제칠 수 있겠어?”
“그래도 백업 정도는 충분할 텐데요.”
“일혁이가 어떤 상황인지 알잖아. 우리 감독님도 일혁이 경기 일수 챙겨 주는 판국에 석현이를 끼워 주겠어?”
“그래도 저런 애를 안 쓴다는 게 말이 되나요.”
“뭐, 다른 팀이라면 모를까 우리 팀은 지금 쉽지 않지. 일혁이가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내년에는 웬만하면 올라갈 테지.”
“저런 애를 2군에서 1년이나 썩히는 건 너무 아까운데…….”
“여긴 프로야. 유망주는 유망주일 뿐이고, 성적이 최고지. 우리 팀은 더 그렇잖아. 안 그래?”
“예, 그건 그렇긴 하죠.”
9회 초.
정진오가 외투를 벗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첫 완투승.
퍼펙트게임도 아니고 노히트노런도 아니며 완봉도 아니다.
누군가에겐 대단찮은 기록이지만 정진오에겐 생소했다.
프로 입단 후 6회를 넘긴 적이 몇 번인지 셀 수 있을 정도다. 하물며 8회를 넘긴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아.”
투수에겐 대단찮은 기록이지만 정진오에겐 특별한 기록이다.
야수들도 정진오가 경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다만, 더 잔발을 놀리고 허리를 낮추며 투수의 등을 바라볼 뿐이다.
팡!
팡!
팡!
팡!
-볼넷. 주자 진루.
정진오의 공이 바깥쪽으로 계속 빠졌다.
송석현은 바로 마운드로 올라갔다.
“형.”
“어, 왜? 나 괜찮아. 괜찮은데 왜 올라왔어?”
“형.”
송석현이 가슴을 쭉 폈다.
“크게 숨 두 번만 들이켜고 내뱉어요.”
“어? 아냐, 됐어.”
“형.”
“……스으으읍, 푸우우. 스으으읍, 푸우우.”
“좋아요. 초구는 프론트 도어 슬라이더예요.”
“어? 프론트 도어로?”
“견제하지 마세요. 주자는 잊어버리고 타자만 봐요.”
송석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운드에서 내려가 홈플레이트로 걸어갔다.
정진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 볼 배합이 내내 공격적이었다.
익숙해질 만하면 더 공격적으로 간다.
웬만해선 한마디 하고 싶은데 경기가 잘 풀리니 할 말이 없다.
“푸우우우우우우.”
정진오가 숨을 훅 내뱉었다.
송석현은 군말이 없다.
미트를 들어 내밀 뿐이다.
팟!
정진오의 손을 떠난 공은 몸 쪽이 아니라 존 가운데로 향했다.
높이는 낮았으나 타자는 툭 밀어 쳤다.
“3루! 3루! 3루 막아!”
공이 2루수 키를 넘겼으나 우익수 대시가 빨랐다.
주자는 3루까지 가려다 2루로 귀루했다.
“아…….”
정진오가 애꿎은 마운드를 발로 찼다.
초구 몸 쪽 슬라이더는 무모했다. 하물며 자신은 제구가 정교한 투수도 아니다.
제구가 불안한 투수가 몸 쪽 공을 자주 던지는데 좋은 결과가 계속 나올 순 없다.
다 끝난 경기가 어그러진다고 생각하자 짜증이 밀려왔다.
“아씨, 조양선.”
무사 1, 2루.
타자는 발이 빠르고 선구안도 좋은 조양선이다.
병살을 끌어내기 가장 어려운 유형의 타자다.
‘슬라이더, 몸 쪽.’
정진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초구 슬라이더로 안타를 맞았는데 또 낸다고?
송석현은 다음 사인을 내지 않았다.
그저 미트를 내밀었다.
정진오는 설마, 하고 사인을 기다렸다.
“투수, 속행해.”
송석현은 사인을 내지 않았다.
정진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뭐지? 왜 사인을 안 내지? 그냥 아까 사인대로 던지라는 건가? 아니면 내 마음대로 던지라는 건가?
포수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올 순 없으니 송석현에게 물어볼 수 없다.
정진오는 모자를 벗어 땀을 닦았다.
머리가 혼란하다.
포수는 미동도 없다.
정진오는 고민 끝에 공을 던졌다.
팡!
“와, 씨.”
스트라이크존에서 하나 벗어난 공.
조양선은 타석에서 물러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좌투수가 우타자 몸 쪽에 슬라이더를 던지면 공은 점점 더 타자에게 가까이 온다.
“야, 뭐, 맞히려고?”
조양선이 타석에 들어오면서 짜증 냈다.
“공이 좀 깊었습니다.”
“야, 빈볼 던지려면 아까 던졌어야지. 그리고 던져도 나한테 던지지 마라.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야.”
“빈볼은 전혀 던질 생각 없습니다.”
조양선이 배트를 들었다.
송석현의 눈이 조양선의 발을 바라봤다.
처음에 찍힌 발자국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타석에서 멀어졌다.
팡!
-스트라이크!
정진오의 바깥쪽 직구가 조금 몰렸지만 조양선은 지켜봤다.
조양선이 다음 공을 생각하는 찰나 정진오가 바로 공을 던졌다.
“아우 씨.”
-스트라이크!
송석현은 조양선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바깥쪽 직구 이후 몸 쪽 높은 공 직구.
몸 쪽으로 바짝 붙은 공도 아닌데 조양선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나.”
조양선은 타석에서 물러나 배트를 휘둘렀다.
포수의 의도가 보인다.
타자를 윽박질러 긴장시킨 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세운다.
공 받기도 급급할 신인 포수가 경기 운영을 하고 있다.
어이가 없고 괘씸하지만 인정 안 할 수 없다.
생각을 정리한 조양선이 타석에 들어섰다.
무사 주자 1, 2루 상황.
배터리가 원하는 건 병살.
좌투수가 우타자 상대로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변화구를 던질 수 없으니 몸 쪽 빠른 공으로 병살을 유도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다음 공은…….
팟!
정진오가 던진 공이 바깥쪽으로 나온다.
몸 쪽 공을 예상했지만 바깥쪽 직구로도 병살을 유도할 순 있다.
직구가 조금 빠졌지만 밀어 친다면 최소한 진루타는 만들 자신이 있다.
툭.
조양선은 공을 맞히고 1루로 뛰면서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아웃!
-아웃!
4-6-3 병살.
조양선이 친 공은 직구가 아니라 슬라이더였다.
떨어지는 백도어 슬라이더.
“후아.”
긴장이 풀린 정진오가 겨우 미소를 찾았다.
잠깐 송석현을 의심했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도 좋아 보이는 법이다.
공격적인 투구로 안타를 내줬지만, 아웃 카운트도 올렸다.
송석현의 리드가 정진오의 스타일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자기 스타일보다 더 낫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직구, 몸 쪽 하이.’
초구부터 몸 쪽 공을 요구하는 송석현의 모습에 이젠 웃음이 나온다.
아웃 카운트 하나면 끝나는데 송석현은 마지막까지 공격적인 피칭을 요구한다.
정진오는 더는 불만을 갖지 않았다.
“하압!”
정진오가 기합을 크게 넣고 공을 던졌다.
공은 몸 쪽 스트라이크존보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갔다.
치기도 어려운 공인데 타자는 공을 건드렸다.
“플라이! 2루수! 2루수!”
“마이! 마이!”
공은 하늘 높이 떴지만 내야를 조금 벗어난 게 전부였다.
2루수가 공을 잡으며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았다.
“야쓰!”
정진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지막 타자가 알아서 나쁜 공을 건드려 준 덕분에 완투승을 거뒀다.
정진오가 모자를 벗고 환히 웃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송석현은 정진오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진오는 송석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고생했다, 너도.”
벤치의 선수와 코치들이 나와 경기를 막 끝낸 선수들을 환영했다.
웨일스 벤치에서도 선수들이 짐을 챙겨 자리를 막 떠나고 있었다.
“말렸네.”
“그러게요. 오늘 좀 말렸네요.”
심수경과 조양선의 대화였다.
“안타도 치고 출루도 했는데 오늘 경기 자체가 좀 말린 거 같다. 그치?”
“예, 뭔가 좀 이상하게 풀렸네요.”
구인선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선 벤치를 가장 먼저 떠났다.
“벤치 사인이겠지? 오늘 볼 배합 말이야.”
“그렇겠죠.”
“오늘 볼 배합 특이하더라. 고트 스타일이 아닌데.”
“뭐, 진오가 워낙 조심스럽게 던지니까 과감하게 해 본 거 아닐까요?”
“그렇겠지?”
“그렇겠죠.”
심수경도 짐을 싸서 벤치를 떠났다.
마지막까지 남은 조양선은 승리를 만끽하는 고트의 벤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찜찜하단 말이지…….”
* * *
“자.”
송석현이 프로텍터를 벗는 사이, 정진오가 음료수를 건넸다.
“고마워요, 형.”
“에휴.”
정진오는 송석현 옆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오늘 무대포더라, 너.”
“그랬나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참 나. 어이가 없긴 했는데 통하긴 통하더라. 나름 생각하고 볼 배합한 거지?”
“생각 없이 볼 배합하진 않죠.”
“왜 오늘 자꾸 몸 쪽 공을 요구한 거야?”
“그거야 형 공이 좋으니까요.”
“아니, 진짜로. 그냥 하는 말 말고.”
“진짜로요. 형 직구가 좋아요. 좋은 편이에요. 회전수가 높다고 다 좋은 공은 아니지만 직구 구위는 평균 이상이에요.”
“내가 구위로 찍어 누를 정도는 아니잖아. 그런데 몸 쪽 공을 집요하게 요구한 건 좀 과한 거 아니야?”
송석현은 프로텍터를 다 벗고선 땀을 닦았다.
“형은 형 제구가 어떤 거 같아요?”
“나? 나야…… 평균 정도?”
“타자들은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요? 형 제구에 대해서.”
“평균 정도라고 생각하겠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정도. 직구 구위는 좀 좋은 편이고……. 그래서 제가 몸 쪽 공을 요구한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제구가 별론데 왜 몸 쪽 공을 던져? 몰리면 장탄데.”
“타자는 전부 몸 쪽 공에 신경질적이에요. 여차하면 빈볼이니까 신중하죠. 형이 몸 쪽 공을 던지면 존에 몰리는 공도 나오겠지만 반대로 타자 몸 쪽에 붙는 공도 나오잖아요. 형 제구가 아주 좋다면 타자는 몸 쪽 공이 올 때 노림수를 갖고 칠 거고, 제구가 아주 나쁘면 그냥 몸 쪽 공을 버리고 말 텐데 형 공은 50~60% 정도가 스트라이크예요. 버리기도 그렇고 노려서 치자니 몸 쪽 높은 공이라 옆구리 쪽 공보다 빈볼에 더 민감하죠. 형이 몸 쪽 공을 던지면 카운트가 불리하거나 몰린 공이 아닌 이상 타자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나오기 힘들단 얘기예요.”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