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44화 (44/201)

줄탁동시 (1)

-아웃!

“야스!”

정진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중견수 플라이 아웃.

심수경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세 타자 연속 범타 처리로 잔루로 끝났다.

“형, 거봐요. 오늘 공 좋다고 했죠?”

송석현은 벤치로 들어오는 정진오에게 엄지를 세워 올렸다.

“하하, 진짜 오늘 이상하네. 이런 날이 없던 거 같은데.”

“봐요. 애들이 타이밍 못 잡고 밀리잖아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 그런 건가?”

“형, 그리고 말이죠…….”

송석현과 정진오는 한쪽 구석으로 가 얘기를 나눴다.

이를 본 배터리코치가 미소를 지었다.

“보기 좋네.”

투수코치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오가 오늘은 오랜만에 공격적으로 가네요.”

“석현이가 어려서 그렇지 그래도 포수가 투수를 끌고 가는 맛이 있네.”

“그러게요. 어리바리할 줄 알았는데 리더십이 있는 거 같아요.”

“조금만 더 2군에서 구르면 1군 콜업 한번 해 볼 만하겠는데?”

“글쎄요. 포수 쪽은 지금 TO가 너무 꽉꽉 차지 않았어요? 신언이는 작년에도 120경기 넘게 뛰었고 일혁이도 포수 약한 팀으로 가면 바로 주전감이잖아요.”

“그거야 나도 아는데, 타격만 봐도 석현이를 올릴 만하잖아.”

“우리야 옆에서 보니까 올릴 만하다고 생각하지, 1군에서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또 우리가 우리 애들을 억지로 올린다고 생각할 거 같은데. 1군에서 우리 말을 쌩깐 지 오래됐잖아요.”

“쩝, 그거야…….”

배터리코치가 한숨을 쉬었다.

“좋은 뜻으로 애들을 추천해도 믿어 주질 않으니 원.”

“어쩔 수 없죠, 다들 밥그릇이 달렸는데. 우리 애들이 1군에 많이 올라갈수록 2군 코치가 잘한다고 소문날 거 아니에요.”

“후, 이게 문제야. 다른 팀 출신 감독을 영입하면 죄다 사단으로 데려와서 때려 박으니 밥그릇 싸움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있나.”

“당장은 힘들어도 늦어도 여름 후에는 석현이를 한번 올리지 않겠어요? 석현이 아직 나이도 어린데 느긋하게 기다려 보세요. 석현이가 2군 기록을 싹 갈아엎으면 여론 때문이라도 한번 올리겠죠.”

배터리코치가 뒷짐을 지었다.

송석현은 대기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결국 2군 애들 방망이로 두드려 패야 한다는 건데…….”

투수코치가 혀를 찼다.

“오늘 투수가 구인선만 아니면 오늘도 성적 괜찮았을 텐데. 그쵸?”

“구인선이야 1군에서도 상위 클래스니까.”

“구인선 포크볼을 치려면 경험치를 많이 먹어야죠. 그래도 앞으로 구인선급 투수가 2군에 내려올 일이 얼마 없으니 석현이가 타율을 쭉쭉 올리겠죠, 쭉쭉. 안 그래, 강 코치?”

타격코치가 입맛을 다셨다.

“석현이야 선구안이 좋은 편이라 기다리면 결국 올라갈 겁니다.”

“아이고, 우리 또 아웃이야? 벌써 투아웃이네.”

“구인선이 잘하긴 잘하네.”

상대 투수 구인선은 두 타자 연속 범타로 처리했다.

아웃을 당하고 온 타자는 벤치로 들어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포크볼이 너무 좋아. 훅 떨어지네.”

“그게 쟤 밥벌인데 공이 좋아야지, 그럼.”

송석현이 타석에 섰다.

포수는 송석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어깨너비보다 조금 넓은 스탠스, 어깨높이의 히팅 포지션, 발을 바깥쪽으로 살짝 뺀 채 리듬을 타는 무릎.

‘바깥쪽 포크.’

포수의 사인에 구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구부터 포크는 그리 많이 나오는 사인은 아니지만 상대는 신인이다.

포크볼러 상대로 카운트를 길게 가져갈 생각은 없을 테니 초구부터 공격적으로 나오리란 판단이었다.

“석현이 힘들겠는데.”

김정률이 혀를 찼다.

김인환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촤악!

유니폼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공이 미트를 향해 뻗어 갔다.

최고 구속 140km/h의 포크볼.

타자 허리띠 높이로 가다 아래로 떨어지는 포크볼은 제구가 좋지 않은 구인선을 1군 붙박이 선발로 만든 1등 공신이었다.

팡.

-볼, 로우.

포수는 미트로 공을 잡은 채 송석현을 올려다봤다.

송석현의 배트가 시동도 걸리지 않았다.

포수도 투수도 갸웃했다.

“재밌네.”

구인선은 자신의 포크볼에 송석현이 미동도 안 하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포크볼을 보고 골랐을 리는 없다.

포수답게 수 싸움을 읽고 초구를 보내기로 한 게 분명했다.

“후, 후.”

구인선이 송진 가루를 손에 묻히곤 입으로 불었다.

포수는 바깥쪽 직구를 요구했다.

구인선은 고개를 저었다.

‘포크?’

구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포크볼에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 한번 꼬셔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합!”

구인선이 힘찬 기합과 함께 공을 던졌다.

바깥쪽에서 공 한두 개 들어오는 코스로 가는 포크볼.

타자 입장에선 한복판도 아니니 실투가 아니라 한복판에서 조금 떨어진 직구 코스로 보일 거다.

배트에 시동이 안 걸릴 수가 있을까.

팡!

-볼, 로우.

“와! 저걸 고르네.”

“석현이 눈치 빠른데?”

고트의 벤치가 술렁였다.

초구, 2구 연속 포크볼도 드물지만 타자가 배트에 시동도 걸지 않았다.

하물며 투수는 1군에서도 3~4선발급인 투수.

마운드 위 구인선이 썩은 미소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석현이가 확실히 수 싸움이 좋아. 그치?”

배터리코치의 물음에 다른 코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구인선은 3구로 직구를 선택했지만 몸 쪽 깊숙하게 들어오면서 쓰리 볼을 내줬다.

‘또 포크?’

‘포크로 가자.’

구인선은 제4구로 포크를 선택했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가 자기 포크볼에 꿈쩍도 안 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흔들렸다.

펄럭!

유니폼이 팽, 하고 바람 소리를 냈다.

한가운데 코스로 가는 포크볼.

-볼, 로우.

송석현은 움직이지 않고 볼넷을 얻었다.

“와, 씨바.”

구인선은 욕지거리를 참지 못했다.

송석현은 그대로 배트를 두고선 1루로 걸어갔다.

고트 벤치에서 박수가 나왔다.

“구인선 공을 고르네.”

“선구안 좋은데?”

“선구안이 아니라 수 싸움이 좋은 거 아니야?”

송석현이 1루로 나가자 구인선은 연속 세 번 주자를 견제했다.

송석현은 서너 발만 루에서 떨어져 있어 어려움 없이 귀루 했다.

“구인선 빡쳤네, 빡쳤어.”

“크크, 이제 곧 1군 갈 건데 기분 더럽게 올라가겠네.”

다음 타자가 땅볼을 치며 이닝이 끝났다.

벤치로 돌아온 구인선이 글러브를 벗으며 머리를 마구 비볐다.

“아, 짜증 나네.”

포수는 구인선 옆에 앉았다.

“어린 놈이 눈치가 빠르네.”

“그치? 눈치가 빠른 거지?”

“그러면?”

“아냐, 아냐. 됐어.”

송석현은 벤치로 돌아오자 정진오를 찾았다.

“형.”

“어, 왜?”

“오늘 하이볼 많이 가시는 거 어때요?”

“하이볼? 내가?”

“네, 인하이볼 쪽으로요.”

정진오가 미간을 좁혔다.

“몸 쪽 직구는 너무 위험한데…….”

“어차피 저기에 장타자라고 할 애들 몇 없잖아요. 이럴 때 공격적으로 가 보는 게 어때요?”

“으음.”

“형, 오늘 공 좋다니까요.”

정진오는 잠시 고민하다 웃어 버렸다.

“그래, 오늘 공 좋다는데 한번 가 보자.”

“제 말 믿어 보세요. 진짜 오늘은 좋을 거예요.”

송석현은 약속한 그대로 초구부터 몸 쪽 높은 공을 요구했다.

탁!

-파울.

갑자기 들어온 초구에 타자는 엉겁결에 쳐 내긴 했으나 파울볼이었다.

‘바깥쪽 커브, 스트라이크존.’

송석현의 요구에 정진오는 그대로 따랐다.

-볼, 아웃사이드.

타자는 배트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바라봤다.

‘직구, 몸 쪽 낮은 코스, 스트라이크존으로.’

정진오는 한복판에 가까운 직구를 던졌다.

실투.

정진오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타자는 배트를 내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1-2.

송석현은 투수에게 공을 던지자마자 사인을 냈다.

‘커브, 한가운데, 바운드.’

정진오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짧은 동작도 생략했다.

공을 받자마자 숨을 한 번 고르더니 바로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아웃.

타자는 배트를 쥔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야쓰!”

정진오가 활짝 웃었다.

정진오는 다음 타자에게 안타를 하나 내줬으나 바로 병살을 뽑아내며 이닝을 마감했다.

“형, 오늘 공 죽이는데요?”

“하하하하, 그런 거 같네. 오늘 잘 먹히는데?”

정진오가 가슴을 활짝 폈다.

경기는 투수전 양상으로 흘렀다.

1군 토종 2선발급 구인선과 2군 투수 중에선 세 손가락 안에 뽑는 투수 간의 대결.

고트의 타자들이 헛스윙을 남발하며 삼진을 내줬지만 정진오는 빠른 승부로 타자와의 승부 시간을 줄였다.

“아, 진짜.”

구인선은 초구, 2구에 자꾸 배트를 가져다 대서 아웃당하는 타자를 보며 짜증 냈다.

조양선은 구인선을 보며 말했다.

“형, 왜 그래요?”

“답답해서 그런다, 답답해서. 공을 오래 좀 보든가. 아니면 안타를 치든가. 내가 숨 돌릴 시간이 없어.”

“형 컨디션 조절하려고 던지는 건데 왜 그래요? 그냥 편하게 던지세요.”

“아이 씨,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구인선의 짜증에 조양선이 머쓱해선 고개를 돌렸다.

“말린 거 같은 이런 기분 개 싫어하는데, 진짜.”

구인선이 짜증에 화답하듯 타자는 또 2구 만에 우익수 플라이를 쳤다.

“하, 연습 투구가 필요 없겠어. 어깨가 아주 식을 틈이 없네.”

5회 말, 고트의 공격.

구인선은 타석으로 들어오는 송석현을 노려봤다.

오늘 기분 망친 주범의 최대 지분은 저놈이 가지고 있을 거다.

‘직구?’

‘직구.’

‘오케이. 직구, 바깥쪽.’

포수의 사인에 구인선이 고개를 저었다.

‘몸 쪽?’

‘몸 쪽.’

‘그럼 낮은 쪽.’

‘아니.’

포수가 몸 쪽 높은 공 사인을 내자 그제야 구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포수는 사인을 내면서 침음을 흘렸다.

구인선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도 제구가 좋다고 볼 수준이 아니다.

냉정하게 봐선 평균보다 아래.

구인선의 영점은 스트라이크존 아웃라인과 한가운데 어디쯤에 맞춰져 있었다.

구인선의 제구로 몸 쪽 직구를 던지는 건 50%는 빈볼을 노리는 거나 다름없다.

전 타석에 송석현이 볼넷을 얻어 낸 게 구인선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스윽.

구인선은 지체하지 않고 포수의 미트를 향해 영점을 맞췄다.

포수는 몸 쪽보단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에 가깝게 미트를 가져다 댔다.

구인선이 공을 던지자 수비를 하던 웨일스 선수들이 긴장했다.

너무 몸 쪽으로 공이 붙었다.

팡!

포수는 공을 잡으면서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공은 송석현의 어깨높이에서 잡혔다.

아마 공 두 개 정도 몸 쪽으로 더 빠졌다면 완벽한 빈볼이었을 코스다.

“…….”

송석현은 요지부동 그대로 구인선을 쳐다봤다.

화를 낸다거나 타석에서 물러선다거나 포수에게 대거리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구인선의 눈을 계속 쳐다봤다.

“씨발 놈이, 왜 쳐다보고 지랄이야.”

친한 사이라면 빈볼이 아니라 빈볼에 가까운 공이라도 미안하다며 제스처 한 번은 할 수 있다.

송석현과 구인선의 연차가 10년이 넘는 만큼 빈볼도 아닌데 구인선이 송석현에게 미안하다 꼭 제스처를 할 필요는 없었다.

“공이 조금 빠졌네.”

포수가 대신 사과를 건넸지만 송석현은 요지부동이었다.

포수는 바깥쪽 직구로 사인을 바꿨다.

투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

포수는 잠시 망설이다 몸 쪽 사인을 냈다.

몸 쪽, 포크.

투수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포수는 송석현을 다시 한번 위아래로 훑었다.

제법 몸이 단단해 보인다.

만약을 위해 빈볼이 나오면 포수가 막아야 한다.

연차 차이가 나는 만큼 타자도 참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까.

“…….”

송석현은 배트만 살살 돌리며 구인선을 보고 또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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