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40화 (40/201)

쫄보

8-7의 고착 상황은 8회까지 이어졌다.

균형이 무너진 건 김정률이 내려간 후였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려라.

울브스 타자는 격언을 그대로 실행했다.

“후우, 내려가자마자 이거 원.”

고트 감독은 뒷짐을 지었다.

“투수 준비할까요?”

“됐어. 2이닝도 안 남았는데 그거 못 버티면 어쩔 수 없는 거지.”

“판석이가 제구 안 잡히는 날이면 좀 어렵지 않습니까?”

“됐어, 됐어. 오늘 카드 다 쓰면 내일은 누구 쓰려고? 우린 2군이야. 애들한테 경험치를 먹이는 게 우선이라고. 아까야 회장님이 와서 어쩔 수 없이 정률이 올린 거야.”

고트 감독이 투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공만 좋으면 뭐 하나, 제대로 던져야 말이지.”

팡팡.

송석현은 미트를 손으로 두드렸다.

바깥쪽으로 공을 던지라고 사인을 몇 번 내도 투수는 우물쭈물했다.

바깥쪽 직구.

제구가 안 되는 투수에겐 요구할 게 많지 않다.

커브나 포크볼처럼 낙차 큰 공이 있다면 제구가 안 돼도 할 만하다. 좌우 제구만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면 나쁜 공에도 타자가 따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 투수처럼 직구와 슬라이더가 주력인 투수다.

빠른 공을 지닌 투수들의 주 무기는 주로 슬라이더다.

슬라이더는 가장 던지기 쉬운 변화구 중 하나고, 공이 빠를수록 빛을 보는 구질 중에 하나다.

슬라이더는 좋은 구질이지만 옛날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슬라이더를 고퍼볼(Gopher Ball)이라고 불렀다.

치면 홈런이란 뜻이다.

제구가 안 되는 선수에게 슬라이더는 홈런 제조기밖에 안 된다.

슬라이더를 던질 수 없다면 투수에게 요구할 수 있는 건 직구 하나뿐이다.

‘직구.’

송석현은 연신 직구를 요구하지만 투수는 고개를 젓는다.

송석현은 벤치를 봤다.

배터리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송석현이 심판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운드로 올라갔다.

투수는 글러브로 입을 가렸다.

“뭐 던지시게요?”

“계속 직구만 던지잖아. 슬라이더 가야지.”

“탄착군이 형성이 안 됐습니다. 제구가 어느 정도 잡혀야 슬라이더가 먹힙니다.”

“하! 야, 그걸 누가 모르냐? 상대도 알잖아. 허를 찔러야지. 직구만 온다고 생각하면 개나 소나 내 공 다 칠 거 아냐.”

“선배님 공 개나 소나 칠 정도면 쟤들도 어렵게 승부 안 합니다. 제구가 잡힐 때까진 바깥쪽 공만 던지시죠.”

“하…… 씨발.”

주판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송석현의 말이 맞는 걸 알지만,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꼴이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기는. 얼른 내려가.”

주판석은 어깨를 풀었다.

송석현은 미트를 바깥쪽에 가져다 댔다.

제구가 안 되면 사인은 필요 없다.

포수도 어디로 공이 오는 줄 모르는데 사인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주판석이 가슴까지 다리를 올려 공을 던졌다.

‘……슬라이더.’

송석현은 한가운데로 오는 공을 보자 움찔했다.

구속, 꺾이는 지점, 공의 솔깃은 슬라이더라고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가운데 슬라이더는…… 타자에겐 맛있는 먹이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탕!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공이 좌측 담장을 휙 넘어갔다.

볼 것도 없는 홈런.

투수가 고개를 숙였다.

“…….”

송석현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자신도 투수였었다.

타자와 달리 투수의 지표엔 승-패가 있다. 투수가 경기의 승패를 좌지우지한다는 얘기다.

짊어진 짐이 무거운 만큼 투수는 이기적이고 변덕이 심하다. 투수를 설득하고 길들일 순 없다. 투수의 변덕을 상수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직까진.

“어쩔까요?”

고트의 투수코치가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냅둬. 저것도 경험이지.”

포수가 미트를 바깥쪽으로 아예 대놓고 뺐다는 건 바깥쪽 직구를 요구했단 뜻이다.

한데 투수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묻지 않아도 투수가 포수의 말을 무시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처맞아 봐야 포수 말도 들어야겠다, 생각할 거야.”

투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집을 부린 대가가 홈런이다.

팡팡.

송석현은 말없이 미트를 주먹으로 쳤다.

다음 타자가 들어오자 미트는 다시 바깥쪽으로 향했다.

미트는 못으로 고정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바깥쪽, 직구.’

이번엔 투수도 군말이 없었다.

팡!

팡!

팡!

-스트라이크! 아웃!

미트는 고정인데 공은 안쪽, 바깥쪽, 꽉 찬 공이 들어왔다.

제구가 불안한 투수를 상대로 공을 지켜보려던 타자는 삼진으로 물러섰다.

“예쓰!”

투수는 삼진 하나에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송석현은 다음 타자 등장에도 미트를 가만히 가져다 댔다.

‘바깥쪽, 직구.’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인은 단 하나였지만, 공은 단 한 번도 똑같이 가는 게 없었다.

8회 실점은 홈런이 마지막이었다.

“야.”

투수가 벤치로 들어가는 길.

투수코치가 주판석에게 인상을 썼다.

투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집 부릴 때랑 안 부릴 때 구분 잘해라.”

배터리코치까지 한마디를 보탰다.

투수는 눈치를 보며 벤치에 앉았다.

투수는 송석현을 슬쩍 봤다.

송석현은 주판석을 보지 않았다.

마운드 위의 장대희만 보고 있었다.

팡!

팡!

팡!

-스트라이크! 아웃!

“공 좋네.”

“직구도 빠른데?”

“1라운더는 다르네, 달라.”

“야, 벌써 148km/h이 나오네.”

고트의 선수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장대희는 울브스가 1라운드에 뽑은 이유를 증명했다.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

수준급의 슬라이더, 서드 피치 커브.

커브는 눈요깃감 수준이지만 슬라이더는 고교 시절부터 프로 레벨이라는 평을 받아 왔다.

아버지 장혁진이 아니더라도 장대희는 1라운더감이 분명했다.

“…….”

송석현은 고트 타자를 압도하는 장대희를 보며 의문을 품었다.

실력으로도 압도적인 장대희가 왜 그랬을까?

“뭐 해? 나갈 준비 해야지.”

김정률이 송석현의 상념을 깨웠다.

“아, 예.”

“넋 빠져 있긴. 얼른 준비해.”

“네.”

장대희는 빗맞은 안타 하나를 제외하곤 세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

프로 2군 선수들이지만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와 140km/h에 육박하는 슬라이더는 쉽게 공략할 수준이 아니었다.

“파이팅!”

“울브스 파이팅!”

“화끈하게 이기자!”

울브스 벤치에서 박수까지 보내며 승리를 독려했다.

어느덧 점수는 10-7.

한두 점만 더 내면 쐐기점이다.

2군 경기라지만 승리는 패배보다 달콤하다.

송석현은 이번에도 말없이 바깥쪽에 미트를 내밀었다.

“쩝.”

투수는 원 패턴 피칭에 짜증이 났지만 별수 없었다.

자기 마음대로 했다가 점수를 내주는 것보단 포수 사인대로 했다가 점수를 내주는 게 낫다.

원망할 대상이 있다는 건 마음이 편한 일이다.

탁!

-아웃!

탁!

탁!

탁!

-아웃!

투수의 원 패턴 피칭은 피안타를 세 개나 내줬다.

하지만 추가점을 내주지 않았다.

오락가락 제구는 타자의 노림수도 밸런스도 무너뜨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송석현은 벤치로 들어오기 전 투수를 맞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투수는 별말 없이 벤치로 들어갔다.

포수 리드대로 던져서 성과는 좋았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투수의 로망은 멋진 삼진이다.

방금 전의 피칭은 좋게 봐줘도 꾸역꾸역.

촉망받는 파이어볼러 주판석이었기에 자존심의 금은 더 컸다.

“고생 많았다.”

김정률은 포수 장비를 푸는 송석현을 위로했다.

“특별히 고생한 것도 없는데요.”

“고집 센 놈이랑 같이하는 게 고생이지, 따로 고생할 게 있냐?”

송석현은 씨익 웃었다.

“속도 좋다, 너는.”

“어차피 포수 할 거면 평생 이러고 살 건데, 벌써 스트레스 받으면 제 손해죠.”

“대단도 하셔라. 대인배야, 대인배.”

“아, 다다음이 제 타석인가요?”

“아니. 다다다음이 네 타석이야.”

“아…….”

송석현이 시무룩했다.

“오늘은 못 올라가겠죠?”

마운드의 장대희는 불을 뿜는 중이었다.

“아마도.”

“타석까지 섰으면 딱 좋았는데.”

“그러게 말이다.”

송석현은 장대희를 뚫어질 듯 쳐다봤다.

-볼넷.

장대희는 처음으로 볼넷을 내줬다.

무사 주자 1루.

김정률이 송석현의 등을 떠밀었다.

“나갈 수도 있겠다. 준비해.”

송석현은 몸을 풀면서 장대희를 쳐다봤다.

느낌일까?

장대희도 고트 벤치를 힐끔거린다고 느껴졌다.

퍽!

“아!”

장대희의 손을 벗어난 커브가 타자의 등을 맞혔다.

장대희는 모자를 벗어 꾸벅 인사했다.

타자는 인상을 썼지만 그대로 1루로 향했다.

커브가 빠졌고 투수가 사과했다.

여기서 타자는 더 할 게 없다.

“…….”

송석현의 한쪽 눈썹이 씰룩거렸다.

장대희는 소심하고 평소 규율을 잘 지키는 학생이었다.

송석현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지만 지금 보면 음험한 구석이 있다.

과연 실수일까?

-스트라이크! 아웃!

장대희는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1사 주자 1, 2루.

장대희는 다음 타자 몸 쪽 깊숙이 직구를 찔러 넣었다.

타자가 얼결에 배트를 내자 유격수 쪽으로 공이 흘렀다.

먹힌 공이 유격수 역동작이라 공은 잡았어도 아웃은 없었다.

1사 주자 만루.

타석엔 송석현이 올라왔다.

“후우.”

“하아.”

송석현이 배트를 쥐고 서자 장대희는 마른 숨을 내뱉었다.

송석현은 오픈스탠스 자세로 홈플레이트에서 조금 떨어져 섰다.

장대희와 송석현이 눈빛을 교환했다.

1구.

팡!

바깥쪽으로 많이 빠지는 슬라이더.

장대희가 포수에게 미안하다는 사인을 보냈다.

송석현은 장대희를 보는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팍!

다음 공은 포수 앞에 떨어지는 커브였다.

공이 바운드되자 포수가 블로킹으로 막아섰다.

장대희는 다시 포수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

송석현은 배트를 더 가볍게 쥐고 돌렸다.

제3구.

-스트라이크!

바깥쪽 직구.

장대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포수에게 공을 받았다.

제4구는 바깥쪽 꽉 차는 슬라이더.

2-2 카운트.

송석현은 장대희를 노려봤다.

장대희는 송석현을 보지 않았다.

제5구.

장대희가 공을 던지면서 송석현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질끈.

장대희는 공을 던지면서 눈을 감았다.

“어!”

양 팀 벤치에서 비명과 탄식이 쏟아졌다.

장대희의 직구는 송석현의 머리로 향했다.

팡!

“와.”

“……후우.”

“십년감수했네.”

양 팀 벤치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장대희의 직구는 스트라이크존에서 한참을 빠졌다.

포수 미트는 송석현 얼굴 바로 옆에 멈춰 있었다.

미트 안에는 야구공이 들어 있었다.

송석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장대희를 노려봤다.

장대희는 송석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미안, 미안. 공이 빠졌나 보네. 쟤가 오늘 제구가 왜 이러지?”

장대희 대신 포수가 사과했다.

송석현은 포수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포수는 송석현이 마운드로 안 튀어 나간 걸 다행으로 여겼다.

“……후우우우우우.”

송석현이 숨을 길게 내뱉었다.

3-2 풀카운트.

장대희는 자신을 계속 노려보는 송석현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온몸으로 시선이 파고들었지만 송석현을 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장대희의 제6구.

장대희가 공을 던지면서 송석현과 눈이 마주쳤다.

송석현의 배트에 시동이 걸렸다.

스윽.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