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필요해
회장은 옆에 기자들만 없다면 담배 한 대를 물고 싶었다.
건강 때문에 끊었던 담배가 절실했다.
“2군 구장을 만들어 달라고 성화여서 돈 들여 좋은 집을 만들어 놨더만…… 쯧쯧.”
회장의 한마디에 주변이 얼어붙었다.
기자들까지 눈치 볼 정도로 분위기가 냉랭했다.
“어, 저기 김정률이 올라오네요.”
누군지는 몰라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김정률의 이름을 읊었다.
“김정률?”
김정률이란 얘기에 회장도 관심을 보였다.
“걔가 여기 있나?”
“네, 현재 2군에서 회복 중입니다.”
“정률이 공 잘 던졌지. 예전에는 아주 쌩쌩했는데 말이야. 요즘엔 어때?”
사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실을 말하자니 분위기만 차가워질 거 같고, 거짓을 말했다가 김정률이 불을 지른다면 자기 처지가 더 곤란해질 거 같았다.
“아직은 재활에 전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돈은 돈대로 들고 하는 건 없구만.”
회장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1회부터 대량 실점하더니 이닝이 훅훅 지나갔다.
일어날 타이밍을 놓친 터라 지금쯤 일어서려 했는데 김정률이 올라왔다.
“그래도 김정률이 하는 건 한번 보고 가야지. 안 그런가?”
“예, 맞습니다.”
김정률이 나오자 울브스 벤치에서도 한마디씩 쏟아졌다.
“오오, 김정률.”
“재활 끝난 건가?”
“은퇴 각 아니었어?”
“이야, 언제 적 김정률이야.”
김정률은 마운드에 서서 포수를 바라봤다.
연습 투구 다섯 개.
김정률이 초구를 던지자 그라운드가 술렁였다.
“언더야?”
“언더핸드네?”
“왜 밑으로 던지는 거야?”
상대 팀도 놀랍지만 기자들의 놀라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기자들은 바로 사진기를 들어 김정률을 찍었다.
회장은 미간은 잔뜩 찌푸렸다.
“뭐야, 장난하는 건가?”
회장의 눈빛에 사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야구단 사장이라고 해도 한동안 2군에 박혀 있던 잊힌 에이스의 현황을 꿰차고 있을 리 없다.
“재활 중이라 이것저것 연습하는 중입니다.”
제대로 알지를 못하니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연습이라고?”
“……네.”
“연습이라…….”
사장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손수건이 축축했다.
손으로 쥐어짜면 물이 흐를 정도다.
팡.
팡.
김정률이 2구, 3구를 던지자 울브스의 벤치에서도 탄성이 터졌다.
“제대로네!”
울브스 김영기 2군 감독의 말에 투수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드문 정통파 언더핸든데요.”
“그러게. 공도 좋아 보이네.”
“떨어지는 각이 날카롭습니다.”
“이제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언더로 내려가나.”
“자존심이 있을 텐데 대단하네요.”
“난 쟤가 저렇게 공을 던지는 게 더 대단하다. 쟤 언제 폼을 바꾼 거야?”
“글쎄요. 저도 그건…….”
“하긴, 뭐, 누가 쟤한테 관심을 가졌겠어?”
김정률이 몸을 다 풀자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라운드는 일순 정적이 흘렀다.
김정률의 손이 땅을 스치자 공은 위로 솟구쳤다.
공은 좌우로 보면 한가운데, 높이로 보면 무릎보다 조금 높은 위치로 왔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라는 말은 타자의 철칙이다.
타자는 어깨에 힘을 주고 배트를 돌렸다.
탁.
공은 바운드에 튀어 투수 정면으로 향했다.
김정률은 공을 잡고 바로 아웃을 뺏었다.
“오오오.”
“봤어? 공 떨어지는 거?”
“야, 공 좋은데?”
고트의 벤치보다 울브스의 벤치가 더 시끄러웠다.
아웃당한 타자는 벤치로 들어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각이 존나 좋은데?”
“그 정도야?”
“헛스윙할 뻔했어.”
“구라 치지 마. 뭐, 포크볼이라도 쳤냐?”
“그 정도로 공이 쭉 빠졌다고.”
김정률이 마운드에 오른 후, 울브스의 추가 점수는 없었다.
김정률이 벤치로 돌아오자 고트 선수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야, 뭐 개선장군이라도 납셨냐? 웬 박수야?”
“형, 공 진짜 좋던데요.”
“형. 대박, 대박.”
“대박은 무슨. 아웃 카운트 좀 잡은 거 가지고 오버는.”
김정률은 핀잔을 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2군이지만 타자들이 전혀 감을 못 잡는다.
2군과 1군의 차이가 분명하다지만, 공에 자신감이 생긴다.
“선배님, 공 최고였습니다.”
송석현이 엄지를 세웠다.
김정률은 송석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까지 오버하는 거야?”
“정말 공이 좋았어요.”
“그 정도는 아니잖아?”
“이건 알아도 안타 만들기 힘든 공이던데요?”
“아부는.”
김정률이 빠르게 이닝을 끊은 덕일까.
고트는 만회점을 뽑아내며 한 점씩 쌓아 갔다.
사장은 이 틈을 타 회장에게 말했다.
“저…… 오늘은 이만 일어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정된 시간이 다 되신 거 같습니다.”
회장은 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그렇기는 한데, 김정률이 던지는 거 한 번 더 보자고. 궁금하거든.”
회장이 두 손을 깍지 껴서 턱을 괴었다.
사장은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만회점이 나와서 다행이지만 여기서 또 점수를 내주면 분위기는 아까보다 더 냉골이 될 터다.
탁!
-아웃!
탁!
-아웃!
김정률은 공 세 개로 2아웃을 뽑아냈다.
회장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한두 번 끄덕였다.
“초구 치지 말라고 얘기 안 했냐?”
“공이 너무 가운데로 들어와서요…….”
“그래도 참아. 공을 봐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울브스 벤치에선 아웃당하고 들어온 타자에게 핀잔을 줬다
타격코치의 꾸중에 선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률이 올 시즌에 다시 1군 가겠네.”
감독의 말에 타격코치가 한숨을 쉬었다.
“하필 기자가 왔을 때 왜 저러나 몰라요.”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겠어? 회장도 왔겠다, 기자도 왔겠다, 김정률의 복귀 신호탄으론 딱이지. 안 그래?”
“그럴까요?”
“척이면 척이지.”
“하필 우리랑 할 때 쟤는 왜 저런데요?”
“뭐, 우리가 만만했나 보지. 자주 봐서 더 만만했나?”
“어? 저거…… 초구 치지 말라니까 저게…… 어?”
김정률의 초구를 친 타자가 1루로 달렸다.
공은 2루수 앞에서 불규칙바운드로 튀었다.
2루수가 몸으로 공을 막았지만 타자 주자는 1루에 안착했다.
“흠…….”
감독은 팔짱을 낀 채 관중석을 힐끔 쳐다봤다.
“회장이 안 가니까 기자들도 그대로네.”
“왜요?”
감독은 잠시 뜸을 들이다 손으로 사인을 보냈다.
“정률이한테 미안하지만 우리도 할 건 해야지.”
감독이 보낸 사인은 도루 사인이었다.
1루 주자는 1군 주전인 정영철이었다.
타격 부진으로 잠시 2군에 내려왔지만 작년에 도루 5위 안에 드는 준족이었다.
“…….”
송석현은 눈으로 김정률과 주자를 번갈아 봤다.
울브스 코치의 손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인다.
2사 1루.
정석이라면 타자에게 맡기는 게 맞다.
언더핸드, 빠른 주자.
2사라도 도루를 시도할 수 있는 상황이다.
타앗!
김정률이 공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주자가 달렸다. 타자는 일부러 헛스윙을 하면서 주자의 도루를 도왔다.
포수가 공을 잡아 던졌지만 2루수 머리 위로 넘어갔다.
“달려! 달려!”
주자는 바로 3루에 안착했다.
“…….”
이번 이닝만 보고 일어서려 했던 회장의 눈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회장이 처음으로 2군에 왔는데 체면치레 한번 못해 주는 팀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스으읍.”
고트의 2군 감독 구창현은 관중석을 힐끔거렸다.
“왜 안 가는 거야?”
“이러다 경기 다 보고 가는 거 아니에요?”
“차라리 쪼인트 까이는 게 낫지 환장하겠네, 진짜.”
“어쩌죠?”
“어쩌긴, 별수 있나. 정률이 믿고 가야지.”
김정률은 타자 주자를 아웃시켜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닝은 끝났지만 회장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사장도 이제는 더 일어서자고 권하지 못했다.
-아웃!
-아웃!
-아웃!
김정률은 빠르게 아웃 카운트를 늘렸다.
고트도 한 점, 한 점 따라갔다.
어느덧 6회.
점수는 8-7까지 따라잡았다.
“경기는 재밌구만.”
회장의 한마디에 주변에선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김정률이 이제야 받아먹은 돈의 100분의 1만큼이라도 하려나 보네.”
“아무래도 가닥이 있는 친구 아니겠습니까?”
“저렇게 잘하는데 왜 여태 1군에 안 쓴 거야?”
“그……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재활 중이라서…….”
“재활? 저렇게 잘 던지는데?”
“아, 그러니까 적응 중입니다, 적응.”
“저놈한테 들인 돈을 뽑아내려면 열심히 굴려야지. 여기서 시간 썩히면 되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회장은 어느덧 자리에 일어서는 걸 잊었다.
고트의 수비는 빨리 끝나고 공격에선 연신 점수가 나온다.
고트를 응원하는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광경이다. 국내 야구 구단주 중에 유일하다시피 야구광으로 소문난 회장이다.
“일정 좀 미뤄 둬. 이거 다 보고 갈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회장은 처음으로 의자에 완전히 몸을 기댔다.
6회 초 첫 타자.
김정률은 공을 잡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싱커를 던질 땐 손가락을 벌리지만, 커브를 던질 땐 손가락을 붙여야 한다.
싱커에 대한 검증이 끝났으니 이제 커브를 검증할 때다.
“후우.”
김정률은 표적을 스트라이크존 상단으로 잡고 커브를 던졌다.
여태 싱커만 보아 오던 타자는 공이 쑥 솟아오르자 체크 스윙하듯 공을 건드렸다.
툭.
“마이! 마이!”
우익수가 손을 흔들며 달렸다.
타자 주자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1루로 향했다.
“야! 앞이잖아!”
중견수가 우익수를 보며 외쳤다.
눈이 부신 우익수는 공을 보지 못했다.
공이 우익수 앞에 떨어져 주자가 2루 이상 가는 일은 막았지만, 주자가 또 1루에 섰다.
‘도루.’
울브스에선 또 도루 사인을 냈다.
히트 앤드 런이든 런 앤드 히트든 상관없는 그린 라이트.
2군 경기가 1군에 비해 성적에 자유롭다고 해도 2군에서도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데이터.
상대 선수에 대한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 둬야, 2군이든 1군이든 써먹을 수 있다.
울브스 2군 감독은 김정률의 데이터를 만드는 중이다.
과연 언더핸드로도 도루 저지를 할 수 있느냐.
도루 저지가 안 된다면 제아무리 잘 던진다고 해도 절름발이 투수나 다름없다.
언더핸드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유 중엔 도루 저지도 한몫을 하고 있다.
“어떡하죠?”
고트의 배터리코치가 감독에게 다가가 물었다.
“일단 한 번만 더 지켜보자고.”
김정률이 1루에 견제했다.
주자는 넉넉하게 세이프.
김정률은 다시 한번 견제하려다 참았다.
정 안 되면 도루를 하더라도 1루 채우고 병살을 잡으면 그만이다.
김정률이 공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자가 2루로 뛰었다.
포수는 공을 던지지 않았다.
“오케이. 어지간한 강견 아니면 정률이론 도루 못 잡겠는데?”
울브스의 감독은 뒷짐을 지었다.
구단주 앞에서 오랜만에 복귀하는 김정률에게 흠집을 남기는 일이지만, 울브스의 돈을 받는 이상 제 할 일을 해야 한다.
“저 양반은 왜 안 가서, 참.”
김정률이 상대 팀이지만 야구 후배이자 오랜 기간 재활을 해 온 선수다. 울브스 감독도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김정률 면을 깎고 싶진 않았다.
탁!
김정률은 다음 타자에게 우중간 안타를 내줬다.
짧은 안타로 2루 주자는 3루에 멈췄다.
무사 1, 3루.
김정률이 모자를 벗고 땀을 닦았다.
고트의 2군 감독 구창현이 벤치로 고개를 돌렸다.
“석현아.”
“네?”
“준비해라.”
송석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그래, 빨리 갈아입고 나가.”
감독이 관중석을 쳐다봤다.
안타를 맞고 질 순 있어도 상대에게 도루란 도루를 다 주면서 농락당하고 질 순 없다.
하물며 회장이 보는 앞에서 김정률을 망신 줄 순 없지 않은가.
“얼른!”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