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
취이이이이익.
고트 2군 경기장에 울브스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자 선수들이 짐을 챙겨서 내렸다.
“오늘 근데 뭔가 차가 많다.”
“그치? 좀 부산스럽지?”
“오늘 우리 중계 있나?”
“우리가 모르는 중계가 있냐? 게다가 오늘 월요일도 아닌데 중계가 있겠어?”
“아님 무슨 행사 있나?”
울브스 선수들은 주차장을 채운 차를 보며 경기장으로 향했다.
울브스의 2군 감독 김영기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장섰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김영기 감독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남자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 박 대리. 오랜만.”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
“하하, 그동안 격조했죠?”
박기덕은 김영기 감독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 혹시 들으셨나요?”
“뭘? 뜬금없이 뭘 들어?”
“오늘 저희 회장님이 오시거든요, 여기에.”
“회장님? 구단주?”
“네, 갑자기 잡힌 일정이라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저희가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허어, 2군 경기장에 회장이 온다고? 신기하네.”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요새 고트가 잘나간다더니 회장이 2군 경기장까지 챙기는 거야?”
“그거야 뭐 제가 알겠습니까, 말단인데.”
“뭐, 알았어. 회장이 온다고 우리가 뭐 해야 할 건 없잖아. 고트가 바쁜 거지.”
“예, 그럼요. 뭐 따로 하시거나 그런 건 필요 없죠.”
“그럼 됐어. 우린 우리 할 것만 하면 되니까.”
“예, 그, 그리고 오늘 기자들도 오거든요.”
“기자?”
감독이 눈가를 매만졌다.
“무슨 언플을 하려고 기자들까지 불렀대. 그래서?”
“여러모로 서로 좋은 모습이 나가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1군도 아니고 2군 경긴데 뭐 더티 플레이라도 하겠어? 우리를 그렇게 보는 거야?”
“아니요, 아니요. 절대 아니죠. 다만 기자들도 오는 만큼 경기 승패와는 상관없이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찍히는 게 상호 간에 좋지 않겠습니까?”
“참 나, 별걱정을. 알았어. 알아먹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감사합니다, 감독님. 아, 그리고 구 감독님께서 이따 차나 한잔하자고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자네한테 들었으면 됐지, 뭘 구 감독까지 나서?”
“저희가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실례가 아닌가 싶어서…….”
“싱겁긴. 서로 이런 일은 상부상조하는 거지. 걱정하지 마.”
고트와 울브스는 잠실을 함께 쓰는 라이벌이자 동업자였다.
선수는 물론 프런트 직원, 코치들까지 안면은 다 튼 사이들이다.
울브스 김영기 감독은 고트 구창현 2군 감독과 환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자, 자. 주목.”
감독은 선수들이 몸을 풀기 전 더그아웃에 선수들을 모았다.
“어, 오늘 저쪽 팀 구단주가 온다네. 그래서 기자단들도 오고. 여러모로 너희들이 언론에 노출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경기 더 파이팅 있게 하고, 문제 될 소지 없게 잘하자.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알겠습니다!”
“사고 치지 말란 말이야. 열심히 하되 볼썽사나운 일은 없어야 한다.”
2군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향했다.
하나둘 몸을 풀면서 연습하는 사이 울브스 선수 하나가 구장 내로 향했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선수는 두리번거리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끼익!
화장실 문을 열자, 고트 선수 하나가 막 손을 씻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울브스 선수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손을 씻던 선수가 고개를 돌렸다.
“네, 안녕하세……요.”
울브스 선수도 고트 선수도 인사를 하다 말고 서로를 쳐다봤다.
고트 선수는 송석현, 울브스 선수는 장대희였다.
“너…….”
장대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춤거렸다.
송석현은 수도를 잠그고 손을 털었다.
“여기서 만나네.”
“너…… 어떻게?”
“뭐긴. 오랜만에 보는 건데 안 반가운가 보네.”
장대희는 화장실 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화장실에 온 거 아냐? 볼일 봐.”
“……아냐, 그런 거.”
장대희가 다시 화장실을 나가려 했다.
송석현은 장대희의 뒤에다 대고 말했다.
“왜 그랬냐?”
장대희의 어깨가 움찔했다.
“뭐, 그때는 경황도 없었고 나도 어영부영하다 잘려서 물어볼 경황이 없었는데 이제는 물어보고 싶어서 그래. 왜 그랬어, 그때?”
“…….”
“너 소심하고 겁 많잖아. 그런데 무슨 깡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너랑 나랑 원수진 것도 아닌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가더라.”
“뭐가?”
장대희는 송석현에게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뭔 소리야, 네가 실수해 놓고.”
“참 나, 누굴 병신으로 아나. 너 일부러 그랬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더라. 마땅한 이유가 없더라. 너랑 난 좀 친했다가 멀어져서 그렇지, 나쁜 사이는 아니었는데…… 흠.”
“왜, 왜, 왜 내 탓을 하냐?”
“말을 왜 더듬어?”
“아니야. 아니라고.”
송석현은 뒤돌아선 장대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유는 둘째 치고 인정을 안 하네. 인정을 해야 사과를 할 텐데. 너 때문에 내 인생 개꼬인 거 알지? 이제 조금 풀릴락 말락 하고 있지만 나 맘고생 꽤 했거든. 우선 사과를 좀 해 봐. 그런다고 내 기분이 다 풀리진 않겠지만, 네 사과는 들어야겠어.”
송석현은 장대희의 어깨가 떨리는 걸 느꼈다.
“개소리하지 마.”
장대희는 송석현의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을 나갔다.
송석현은 화장실 문을 잡고선 고개를 내밀어 장대희에게 외쳤다.
“사과도 무섭냐? 찌질한 새끼.”
장대희는 걸음을 잠시 멈췄지만 이내 다시 속도를 높였다.
송석현은 장대희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찔리는 거 보면 백 프론데, 저거…….”
송석현의 기억 속 장대희의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소심하고 모범생 같았지만 실력은 뛰어났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사이도 괜찮았다. 친하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장대희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이스 투수로서 승리를 앞둔 상황에서 일부러 경기를 패배로 이끈다? 게다가 정말 교묘할 정도로 자신의 탓으로 만들어 버렸다.
단순 실수가 아니라 작정하고 자신을 묻으려 했다.
수법이 악독해서 더 믿기 어려웠다.
장대희는 한국 야구 레전드이자 성공한 사업가 장혁진의 아들이고 우진고의 에이스였다.
고 3 때 자신과 장대희의 위치는 비교하기도 어려웠다.
고교야구 톱 3 에이스 투수와 포수로 막 포변 한 풋내기.
원한도 산 적이 없었고, 장대희가 자신을 질투할 일도 없었다.
당시엔 ‘설마, 장대희가…….’라는 생각에 장대희를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곱씹을수록 ‘역시 장대희가…….’라는 쪽으로 의심이 짙어졌다.
오늘 화장실에서의 만남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진짜 무슨 이유가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봐도 당최 영문을 모를 일이다.
* * *
구단주의 행차는 요란했다.
회장은 신문기자, 전담 사진기자 등과 함께 2군 구장을 돌며 사진을 찍었다.
회장은 양 팀 감독과도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은 후 관중석으로 향했다.
“1, 2회만 보다 가겠죠?”
“사진만 찍으면 가겠지.”
“그런데 금일봉은 없어요?”
“그러게. 응원 한마디 하고 끝이네.”
고트 코치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경기가 시작됐다.
이례적으로 구단주가 2군 경기를 참관하는 날이었다.
고트 선수들은 관중석의 회장을 연신 힐끗거렸다.
“자, 자. 긴장 풀고. 파이팅!”
“파이팅!”
경기가 시작됐다.
마운드엔 투수 임진필이 섰다.
현재 2군 선수 중에는 가장 잘한다고 할 순 없어도 가장 안정적인 선수였다.
회장이 1, 2회만 보고 갈 거라면 1, 2회 동안 무탈하게 지나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감독은 경기 승패를 떠나 임진필이 1, 2회 동안 사고만 안 내길 빌었다.
-플레이볼!
송석현은 더그아웃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팡!
투수의 1구는 한참 빠지는 초구였다.
구단주가 포수 뒤 관중석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포수가 진정하라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포수의 미트는 정 가운데로 향했다.
어차피 첫 타자다.
장타력 없는 1번 타자에겐 과감하게 승부해야 한다.
탓!
투수가 바깥쪽으로 조금 빠지는 직구를 던졌다.
탁!
타자는 가볍게 밀어 쳐서 1루를 밟았다.
울브스 더그아웃에선 박수가 나왔다.
반대로 고트 더그아웃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자, 자. 쉽게 가자, 쉽게!”
감독이 목소리를 높이며 얼어 있는 분위기를 풀려 했다.
투수는 다음 타자에게 초구로 바깥쪽 직구를 던졌다.
도루를 염두에 둔 투구였다.
파바바바밧!
투수가 바깥쪽 직구를 던졌음에도 주자는 2루로 안착했다.
포수가 공을 던졌지만 한 타이밍 느렸다.
“쟤 발이 빨라서 지환이론 안 되겠네.”
김정률이 중얼거렸다.
송석현은 눈을 감고 시뮬레이션 했다.
자신이라면 과연 잡을 수 있었을까?
승률은 반반.
투수가 주자를 묶어 두진 못했지만 주자의 스타트는 느렸다.
주자의 발이 빠르긴 해도 승부할 수 있는 타이밍이다.
탁!
2번 타자가 안타를 치고 나갔다.
무사 주자 1, 3루.
선수들은 경기장보다 포수 뒤편 관중석에 더 시선을 자주 보냈다.
시작부터 홈팀의 위기다.
3번 타자가 나오자 더그아웃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3번 타자 양승원은 1군과 2군을 오가는 거포였다.
“지금 포수가 한번 올라가야 하는데.”
송석현의 혼잣말에 김정률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수가 넋이 나갔어. 정신없는 상황이야. 원래 저런 놈이 아닌데 완전히 얼었네.”
“그냥 가네요, 안 끊고.”
“아무래도 보는 눈도 있는데 1회부터 그러면 좀 그렇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자가 적시 2루타를 때렸다.
경기는 순식간에 2-0.
무거웠던 더그아웃 분위기가 이제는 숫제 침묵의 바다가 됐다.
구창현 감독은 마음 같아선 바로 투수를 교체하고 싶었다.
한 번 넘어간 분위기는 쉽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1회 초에만 다섯 점을 내준 고트는 1회 말에는 공 여덟 개로 이닝을 마감했다.
선수들의 시선은 계속 회장이 앉아 있는 관중석을 훑었다.
사진도 다 찍었겠다, 이쯤 되면 일어서야 하는데 회장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회장은 아무 말 없이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장 옆에서는 야구단 사장이 어쩔 줄 몰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기자들이 없었다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을 거다.
“2군이 약하긴 약하구만.”
회장의 한마디에 사장은 가시방석이 아니라 쇠못 방석에 앉은 듯싶었다.
1군이 한창 승승장구 잘나갈 때 생전 오지도 않은 2군에는 대체 왜 온 것이며, 북부리그 1위를 밥 먹듯이 하던 팀이 왜 하필 오늘 1회부터 두들겨 맞는단 말인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아직도 안 갔냐?”
“네.”
“아직도 관중석에 있는 거지?”
“네.”
“하아.”
감독은 차마 관중석을 보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투수를 교체해야 하나 근질거렸다.
투수를 교체한다면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구단주를 의식해 이례적으로 투수를 일찍 바꿨다며 기사를 낼 게 뻔했다.
이런 졸전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고 싶진 않았다.
탁!
탕!
탁!
울브스는 2회에도 석 점을 냈다.
고트는 2회에도 점수를 내지 못했다.
8-0.
구창현 감독은 봄인데도 냉기가 등허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상상을 했다.
더 무서운 건 아직도 회장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연 코치.”
구 감독은 투수코치를 불렀다.
“네.”
“정률이 공 1군에도 통할 만큼 좋다고 했지?”
연우식이 바로 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네.”
“준비시켜.”
연우식이 주먹을 쥐었다.
하필 지금.
잘해도 돋보일 수 없고, 못하면 오물만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다.
못하면 언론에서 김정률을 타이틀로 걸고 어떤 기사를 쓸지 벌써 아찔했다.
하지만 어쩌랴.
야구장에선 감독의 말이 법이고 진리인 걸.
연우식이 김정률을 불렀다.
“몸 풀자, 정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