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36화 (36/201)

가는 날이 장날

“벌써요?”

김정률의 반응에 연우식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정도면 됐지, 얼마나 더 삭히려고? 묵은지 담가 먹으려고? 경기 뛰면서 감을 잡아야지.”

“그래도 아직 본격적으로 아래로 던진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너 몇 달 전부터 던졌다며?”

“그때는 재활 개념으로다가 던진 거라서.”

“그냥 해. 야 야, 너 몰라서 그러냐? 투수는 맞아 가면서 배우는 거야. 왜? 맞으면 쪽팔릴까 봐 그러냐?”

김정률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요. 뭘 그렇게 세게 얘기해요? 할게요.”

“짜식, 진작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말할 것이지.”

“형이 보기엔 어때요? 제 공 나쁘지 않죠?”

“좋아, 인마. 내가 보기엔 너보다 언더로 잘 던지는 놈이 리그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아.”

“에이, 오바는.”

김정률은 눈썹을 씰룩거리면서 웃었다.

“짜샤, 코치로서 하는 말이야. 일단 올라오는 각이 좋잖아. 요새 너처럼 정통파 언더 자체가 드물어. 아니, 없지 않나? 디셉션도 좋고 싱커 각도 좋고……. 아,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는데.”

“뭔데요?”

“너 이제 선발로는 힘든 거 알지?”

김정률은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에 미소는 남아 있지만 눈꼬리는 처져 있었다.

“어깨랑 팔꿈치 둘 다 수술 경력이 있는 데다 너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 언더가 허리랑 무릎에 무리 많이 가는 거 알지? 애초에 언더로 선발은 힘들어.”

“……알고 있어요.”

“그치? 잘 알고 있지?”

김정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계속 선발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욕심이죠. 그만큼 공을 던질 내구성이 안 나온 지 오래라.”

“그래그래, 너도 이제 슬슬 관리받으면서 짧게 던져야지. 이참에 노선 확실히 해라. 언더로 갈 거면 불펜으로 짧게, 짧게. 나는 그렇게 쓸 생각이야.”

“알았어요. 뭐, 형 판단이 맞죠.”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서운할 게 뭐 있어요. 먹튀 소리 듣는 것보단 1이닝이라도 제대로 던지는 게 마음 편해요. 뭐, 저라고 먹튀가 되고 싶어서 됐겠어요?”

“후우, 그래. 그렇게 편하게 생각해. 나도 너 편한 상황에서 올릴 거야. 이닝도 차근차근 늘릴 거고. 난 네가 원 포인트나 셋업을 맡아 줬으면 좋겠다.”

“그것도 제가 잘해야 말이죠.”

“잘할 거야, 인마.”

김정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머릿속에 생각이 스쳤다.

“석현이랑 배터리도 할 수 있겠는데?”

* * *

[봄 염소가 뜬다! 고트, 4월 쾌조의 스타트!]

[832일 만에 1위 등극. 고트, 이번엔 다르다]

[고트는 어떻게 강해졌는가]

전성그룹 본사 회장실.

전성그룹의 회장이자 구단주인 김명진은 스포츠 신문을 탁자에 쌓아 두곤 하나하나 정독했다.

투실투실한 양 볼을 연신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띠이.

-회장님, 이화성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어, 어.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노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김명진은 남자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어. 이 사장! 어서 와 앉아.”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화성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명진은 비서를 통해 차를 준비시켰다.

“요새 고생이 많아.”

회장이 직접 차를 따라 사장에게 건넸다. 사장은 머리를 조아리며 찻잔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마셔 봐. 향이 좋아.”

“네, 향이 그윽합니다.”

“하하하하, 그치?”

회장은 직접 차를 두 모금 마시곤 방긋 웃었다.

“차가 달군, 달아. 고소한 맛도 있고.”

“그렇습니까? 하하, 회장님이 오늘은 유독 더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하하하하, 이게 다 우리 이 사장 덕분이지. 이렇게 성적을 잘 낼 수 있으면서 그동안은 왜 이렇게 저조했어?”

“송구합니다. 제가 다 부덕한 탓입니다.”

“내가 볼 땐 말이야, 올해는 할 만해. 페가수스도 지금 좀 삐걱거리고, 나머지가 스콜피언이랑 울브스 딱 둘 아냐? 근데 걔네보다 우리 투수가 좋잖아. 야구는 투수 놀음인데 말이야. 그치?”

“예, 예. 그렇습니다. 그렇죠.”

“용병도 이번엔 잘 뽑은 거 같고, 이창훈이랑 한민석이도 제 몫만 해 주면…… 이거 뭐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겠구만, 하하하하하. 안 그런가?”

“예에. 하하, 그렇지요.”

사장은 말을 하면서도 시원하게 웃지 못했다.

야구판이 어떤 곳인가. 최소한 여름은 지나야 순위의 옥석이 가려진다. 그런데 아직 4월도 다 안 지났는데 벌써 잔치판을 벌일 참이다.

“아, 그리고 말이야.”

“네, 회장님.”

“내가 기사를 읽다 보니 거슬리는 게 하나 있더라고.”

사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우리 팀의 약점이 뎁스라고 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던데. 2군을 등한시한다나? 결국 선수층이 얇다는 얘기잖아.”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지 않을까요? 우리 팀 주전들의 수준이 워낙 높다 보니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 같습니다.”

“우리가 2군 구장도 늦게 지었다고 어깃장 놓는 놈들도 많더라고. 여태 좋은 곳에 좋은 시설을 올리려고 뜸을 들인 건데 이 새끼들이 뭘 안다고 제멋대로 말하는지 말이야.”

“그러게 말이죠. 기자들도 밥 벌어먹고 사는 회사원 아니겠습니까? 되는대로 지껄이는 게 일인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기자라는 놈들 중에 제대로 된 놈이 열에 하나라도 있겠어?”

“예, 예. 그렇죠. 아무렴요.”

“그래도 말이야.”

회장이 손가락으로 소파를 두 번 툭툭 쳤다.

“언론에서 이렇게 입을 모아 떠들 정도면 한 번은 생각해 봐야 하거든?”

사장의 손이 축축해졌다.

“내가 2군 구장 준공식에도 일 때문에 빠지고, 여태 한 번을 못 가 봤잖아? 이참에 2군 구장 구경도 하고, 애들 수준이 어떤가도 좀 보려고 그래. 가는 김에 격려도 좀 하고 말이야.”

사장의 눈동자가 좌우로 떨렸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을까요? 회장님이 얼마나 공사다망하신데 경기도 외곽까지 직접 가시는 건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아냐. 간 김에 사진도 좀 찍고 사기도 끌어 올리고 해야지. 1군이 아무리 잘하면 뭐 해? 우리 팀은 꼭 여름에 고꾸라진다고. 애들이 퍼져서 그래, 퍼져서. 대체할, 쓸 만한 애들이 없단 얘기지. 내가 한번 가야 또 애들도 파이팅하고, 그래야 쓸 만한 놈들이 많아지지. 안 그런가?”

“어…… 예. 맞습니다.”

“이번 주 내로 최대한 빨리 날짜 잡아 봐.”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왔다 갔다 하시면 여독도 쌓이실 테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을 텐데요.”

“어차피 가서 사진 하나 찍고 오는 건데 뭘 그리 유난을 떨어? 이럴 때 내가 가 줘야 다들 더 긴장감이 생기지 않겠어? 안 그래?”

회장과의 대화를 마친 사장이 회장실을 나왔다.

밖에 나오자마자 사장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저…… 사장님, 음료수라도 내올까요?”

비서의 질문에 사장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나선 후 차를 타기 전까지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에 다 올라타서야 한마디 내뱉었다.

“어휴.”

사장은 구장으로 돌아오자마자 단장을 불렀다.

단장은 사장실로 들어오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사장님, 금일봉 좀 받으셨습니까? 회장님을 뵙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장은 핼쑥한 얼굴로 소파를 가리켰다.

“좀 앉지.”

사장의 표정이 좋지 않자 단장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후.”

사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회장님이 이번 주 내로 2군 경기장에 방문한다고 말씀하셨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야. 회장님 비서랑 조율해서 일정을 잡아야 돼.”

“갑자기 2군 경기장에는 왜요?”

“내 말이. 언론에서 자꾸 뎁스가 얇다느니 2군을 홀대한다는 말이 회장님 심기를 거슬렀나 봐. 아, 이거 잠실도 아니고 2군으로 가신다는 건 생전 처음 있는 일이라 환장할 노릇이네.”

“2군에 무슨 흠 잡으러 가시는 건 아니겠죠?”

“모르지. 회장님 성격 알잖아. 괜히 가는 날 경기에서 지기라도 하면, 어후…….”

단장도 고개를 내저었다.

단장의 머릿속에 회장이 1군 경기장에 왔던 일이 떠올랐다.

자기 임기 내에 회장이 세 번을 왔는데 두 번을 졌다.

이길 때는 통 크게 격려금을 아끼지 않았지만 졌을 땐 그야말로 불호령이었다.

날고뛴다는 임의수 감독도 김명진 회장 앞에선 쩔쩔맸다.

“괜찮을 겁니다. 우리 2군은 북부리그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잖습니까?”

“1군은 그래도 성적이 가늠되는데 2군은 또 모르니까. 아, 이거 참. 칭찬 받고 금일봉이나 챙길 줄 알았더니 일만 더 키우고 왔어.”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래, 별일 없겠지. 그냥 시찰만 하실 건데.”

“경기를 다 보고 가실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도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2군 경기를 다 챙겨 보시겠어요?”

“그렇겠지? 그치?”

“그럼요.”

* * *

송석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찬물로 세수했다.

울브스전 첫 경기.

송석현의 프로 데뷔일.

2군이라지만 프로 팀의 일원으로, 프로 선수로서 정식으로 경기장에 서는 일이다.

송석현은 화장실을 나와 연신 핸드폰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똑똑.

“네?”

“나야. 아침 먹으러 가야지.”

“아, 네 네.”

송석현은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김정률과 김인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

“아, 조금 전에 일어나서 씻었어요.”

“우리 막내, 목욕재계한 거야?”

“아뇨. 그냥 씻은 거예요.”

“농담인데 정색은. 너도 인환이 닮아 가냐?”

김인환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세 사람은 아침을 잔뜩 먹고선 2군 구장 주변을 걸었다.

김정률이 말했다.

“석현이, 오늘 경기 나가지?”

“오늘 짧게라도 경기 뛰게 해 주신다고 했어요.”

“아, 좋겠네. 떨려?”

“조금요.”

“이야, 그럼 내가 더 떨리는 소식 말해 줄까?”

“네?”

“조금 전에 사무실에서 들으니까 오늘 구단주의 시찰이 있으시단다.”

“……네?”

“예?”

김인환과 송석현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구단주느님께서 오늘 시찰을 하신댄다. 뭐, 사진 좀 찍고 가시려나 보지.”

“1군도 아니고 2군에 왜 오는 거예요?”

“내가 아니? 구단주 마음이지.”

송석현이 미간을 좁혔다.

“잠깐 왔다 가는 거겠죠?”

“그럴 거야. 2군 경기 다 보고 가진 않겠지. 아마 초반에 경기 좀 보고 가는 거 아닐까?”

“그럼 다행이다. 저는 어차피 써도 후반에나 쓸 거 아니에요.”

“그래도 긴장해. 오늘 같은 경기에서 잘못 찍히면 곤란하다. 1군에서도 우리 회장님한테 찍혀서 트레이드된 애들이 있어.”

김인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이 좀 업 앤드 다운이 심하시죠.”

“지원도 역대급인데 변덕도 역대급이지. 나도 잘하면 오늘부터 경기에 나서는데, 타이밍 참…….”

송석현이 중얼거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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