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31화 (31/201)

인맥의 맛

“앉아.”

연우식이 의자를 가리켰다.

김정률은 앉기 전에 방 안을 둘러봤다.

“와, 형은 청소 안 해요?”

“청소? 하는데?”

“그런데 이래요?”

고물 의자엔 옷이 잔뜩 쌓여 있고, 방 안에서는 쉰내가 풀풀 풍겼다. 쓰레기통은 언제 비웠는지 화산처럼 부풀어 올라 아슬아슬해 보였다. 바닥의 먼지나 창문의 물때는 언급할 수준도 못 됐다.

“아, 진짜. 마누라도 아니고 웬 잔소리야. 그렇게 잔소리할 거면 가든가.”

“아니에요. 뭐, 프리 라이프, 좋죠. 좋지, 뭐.”

김정률이 의자에 앉자 연우식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에 찾아오네. 여태 한 숙소에 있는데도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드냐?”

“저야 재활군이니까 시간대가 안 맞잖아요. 요새 열심히 훈련도 하고 하니까.”

“훈련?”

연우식이 입맛을 다셨다.

“훈련을 열심히 한다고라?”

“왜 그래요, 열심히 사는 사람한테?”

“너 인마, 스캠에서도 쫓겨났잖아. 그런데 무슨 훈련을 열심히 한다고 그래?”

“그거야 부상 때문이지, 쫓겨났다뇨?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 건데.”

“뭐, 아무튼. 그래, 열심히 하든 말든 그건 나랑 상관없지. 요새 네가 여기 안 와서 은퇴라도 하나 싶었다.”

“에이, 아직 은퇴할 짬은 아니죠.”

“아니긴 무슨, 형석이가 은퇴했는데. 너희 둘이 친하잖아. 형석이가 말 안 했어?”

“알고야 있었죠. 그렇다고 해도 서른하나에 코치는 빠르잖아요.”

“네 나이에 코치가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거지. 너도 올해까지만 꿀 빨고 코치로 넘어와라. 아, 나 심심해. 네가 안 놀아 주니까 놀 사람도 없고.”

“뭘 또 빨리 은퇴하라고 그래요, 서운하게.”

“서운은 무슨. 이제 와서 뭐, 너 복귀하려고? 아서라, 아서. 그 팔로 또 마운드에 섰다간 팔 작살날걸. 너 인마, 성용 선배 몰라? 아직도 어깨 위로 팔이 안 올라가. 일상생활도 어려워지기 전에 미리 그만두는 것도 좋아. 너 이미 은퇴 자금 확 당겼잖아. 80억이면 쓰바, 3대가 먹고살아도 남겠다, 야. 뭐가 미련이 남냐?”

김정률은 의자에 턱을 괴었다.

“미련……은 있죠.”

“스타도 돼 봤고 FA도 땡겼고, 뭐가 미련이 있어?”

김정률이 뜸을 들였다.

“우승?”

“우승? 파하, 웃기는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뭔 우승이야, 우승은.”

“선수로서 우승 커리어 욕심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승 기록은 하나 남기고 은퇴해야죠.”

“그게 되겠냐? 설령 되더라도 네가 지금 1군 올라갈 상황 아니잖아. 입스에다 부상에다 구속도 안 나오잖아.”

김정률이 자기 어깨를 보였다.

“제 어깨가 씹창은 났어도 아직 공은 던질 수 있어요. 날 풀리고 컨디션 올라오면 최대 145km/h까지 가능합니다.”

“네가 선발로 뛰진 못할 거고 불펜으로 나와도 최고 145km/h면 결국 140km/h를 꾸역꾸역 던진다는 건데, 그게 되겠냐? 널 무시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다가 하는 말이야. 그러다 그나마 남은 인대까지 아작 나고 어깨 나가면 너만 손해라니까.”

“형.”

김정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마음은 알겠는데 저도 욕심이 있어요. 저도 나름의 승부수가 있거든요.”

“하, 무슨 승부수.”

“제가 제대로 언더로 던져 보려고요. 잠수함으로 전직할 생각입니다.”

“언더? 네가? 갑자기?”

연우식 코치는 양손을 들어 머리를 마구 긁었다.

“아우, 진짜. 무슨 소리야? 갑자기 웬 언더?”

“언더핸드는 허리랑 무릎에 부하가 많이 걸리지만 팔에는 그나마 부하가 적잖아요. 구속 자체도 빠르지 않고. 제가 던져 보니까 언더로 던지면 아프지도 않아요. 구위도 제구도 괜찮고요.”

“평생을 오버로 던졌는데 이제 와서 언더로 던진다고?”

“네, 자신 있어요. 지금은 구속이 130km/h 초반까지 나와요. 날 풀리면 135km/h 이상 나올 거예요.”

“아후. 정률아, 정률아. 우리 귀여운 정률아. 갑자기 웬 고집이야. 너 재활군 간 이후로 별 의욕도 없었잖아. 2군 경기도 안 뛰던 놈이 뜬금없네.”

“지금은 달라요. 진짜예요. 자신이 생겼거든요.”

“갑자기 자신이라…… 후우우.”

연우식이 허리를 펴고 바로 앉았다.

“그래서 찾아온 거야? 너 써 달라고?”

“네, 저 좀 써 주세요. 부탁할게요.”

김정률이 두 손을 모았다.

“형,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여태 경기 안 뛰어서 형도 곤란했던 거 아는데 그땐 진짜 입스 때문에 어떻게 던지고 싶어도 못 던진 거예요. 지금은 진짜 제대로 던질 수 있거든요.”

“후우우, 뭐, 천하의 김정률인데 2군 뛰는 게 일이겠냐. 그거야 어렵진 않지. 겨우 그거 부탁하려고 굽실거리는 거야? 뭔 시추에이션이야, 이게.”

“그리고요…….”

연우식이 픽 웃었다.

“거봐, 거봐. 본심은 항상 뒤에 나온다니까. 뭐? 보증이라도 서 달라고?”

“아뇨. 그게 아니라요. 혹시 송석현이라고 알아요?”

“송석현? 누군데, 걔가?”

“재활군 포수요.”

“아아, 그래? 걔 이름이 송석현이야? 너랑 같이 다니는 걔 말하는 거 맞지?”

“네, 맞아요.”

“걔가 왜?”

“걔도 2군에 올려서 좀 써 볼 수 없을까요?”

“걔를?”

연우식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 씨. 걔 신고 포수잖아. 고졸이라며? 투수라면 모를까, 2군 훈련에서도 검증 안 된 애를 어떻게 포수로 쓰냐?”

“그러니까 걔도 2군 훈련에 껴 주세요.”

“애초에 걔가 재활군으로 편성됐는데 어떻게 2군 훈련에 넣는데?”

“말이 재활군이지 그냥 처치 곤란한 애들을 넣어 둔 데가 재활군이잖아요. 어차피 지금은 거의 다 나가고 은퇴하고, 그래서 남은 사람은 저랑 석현이랑 영진이 셋인데 셋이서 무슨 재활군을 운영해요? 그냥 2군에 올려서 쓰는 게 맞죠.”

“아이고, 아서라, 아서. 재활군은 못 없애. 장 코치 일자리 없앨 일 있냐? 장 코치가 얼마나 구단 곳곳에다 기름칠을 잘해 놨는데.”

“재활군을 없애라는 게 아니라 몸에 문제없으니까 2군 훈련에도 참여시키면서 실력을 보자는 거죠.”

“으이구, 네가 또 착해서 애들을 두고 못 보는구만? 영진이는 내야수가 발목을 계속 다쳐서 어떻게 써먹을 수 있겠어? 신고 포수도 오죽하면 신고로 들어왔겠냐? 그것도 포수가.”

“영진이야 아직 재활 중이라고 쳐도 석현이는 건강하고 잘합니다. 걔 일본에서 저랑 훈련할 때 소뱅 유망주 투수한테 홈런만 두 개 뽑아냈어요. 걔가 한 공 150km/h은 나왔을걸요.”

연우식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뻥치지 마. 개나 소나 다 150km/h이래.”

“그럼 한 145km/h?”

“125km/h가 아니라?”

“진짜예요. 145km/h는 나왔어요. 수준급 선수였고 소뱅 차기 마무리 후보라고 했어요. 구단에서도 애지중지하는 보물인데 석현이가 걔를 두들겨 팼다니까요.”

“어차피 훈련인데 그냥 몸이나 풀다가 그랬나 보지.”

김정률이 연우식 옆에 앉았다.

“형, 진짜예요. 석현이는 레알이에요. 걔는 무조선 써야 돼요. 2군 훈련이라도 합류하게 해 주세요. 어차피 훈련인데 못 쓸 게 뭐예요. 말만 재활군이지 걔도 2군 선수로 뛰는 데 행정적으로도 아무 문제 없잖아요. 어차피 2군 소속일 텐데.”

“아, 참.”

연우식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귀찮아지잖아. 프런트에서 재활군을 괜히 빼놨겠냐? 거기 애들 쓴다고 하면 프런트 신경을 거스를 수도 있고, 또 감독도 설득해야 하고. 하, 귀찮아. 이거 엄청 귀찮아진다고.”

“그러면 이런 건 어때요? 제 전담 포수가 필요하다고 해 주세요. 제가 지금 입스 고치는 중이잖아요? 입스 때문에 석현이랑 호흡을 맞춰야 한다고 말해 주세요. 뭐 제가 한물, 아니 뭐 한 열물 갔다고 해도 고액 연봉잔데 프런트에서 몇 경기라도 써먹고 싶지 않겠어요?”

“하, 골치 아프네. 왜 나한테 이런 골치 아픈 일을 맡기냐, 구찮게. 나는 조용히 묻어 가고 싶은 거 몰라?”

김정률이 연우식 옆에 싹 달라붙었다.

“형, 제가 술은 못 마시더라도 형 술 시중은 꼬박꼬박 들겠습니다. 앞으로 2군에서 같이 뛰면 서로 얼굴도 자주 보고 좋잖아요. 어차피 형 여기서 친한 사람도 얼마 없으면서.”

“니미, 내가 뭐 왕따라는 거야?”

“형, 부탁 좀 할게요. 저 이런 부탁 잘 안 하잖아요.”

김정률이 자꾸 달라붙자 연우식이 김정률을 밀어냈다.

“떨어져, 인마. 소름 돋아. 남자든 여자든 내 옆에 붙는 거 딱 질색이야.”

“왜요? 형수님 생각나서?”

“이런 씨불 놈이. 염장 지르냐? 돌싱이라고 염장 질러?”

“크크크, 형이 이혼하자고 해 놓고선 왜 성질을 내요?”

“이러면 확 네 말 싹 무시하는 수가 있어.”

“아, 쏘리. 죄송합니다. 부탁할게요. 저랑 석현이 잘 부탁드릴게요. 아, 프런트 쪽은 제가 박 대리한테 미리 기름칠 좀 해 놓을게요. 그래 봐야 있으나 마나 한 재활군인데 2군 훈련 좀 한다고 무슨 일 생기겠어요?”

“으음, 이해가 안 되네. 왜 이렇게까지 애를 써? 너 혼자 2군 복귀하는 거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건데.”

김정률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형이 석현이를 봐야 돼요. 걔는 진짜 크게 될 놈이거든요. 걔가 이렇게 썩는 건 너무 아까워서 두고 볼 수가 없어요.”

“네가 걔 아비라도 되냐?”

“아비는 아니어도 선배잖아요. 선배가 후배를 또 끌어 주고 하는 거죠.”

“오지랖은.”

연우식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감독님한테 슬쩍 귀띔할게, 너 2군 복귀하는 데 전담 포수가 필요하다고. 네 이름 팔면 웬만하면 프리 패스니까 어떻게 잘 욱여넣을 수 있겠지.”

“고마워요, 형. 대신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릴게. 말만 해요.”

“한우?”

“콜. 다른 건?”

“이런 씨불. 이렇게 쉽게 콜할 거면 더 맛있는 거 말할걸.”

“말해요. 사 줄게.”

연우식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솔직히 모르겠다. 한우 말고 뭐가 비싸고 맛있냐?”

김정률이 키득거렸다.

“하여튼.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형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가진 건 돈밖에 없는 놈인데 형 맛있는 거 하나 못 사 주겠어요?”

“스읍, 그래? 그러면 나 진짜 맛있는 거 막 먹는다?”

“막은 안 되고 적당히 알아서 눈치껏?”

“송석현이라는 놈이 뭐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내 일용할 양식을 챙겨 주는구만. 고마운 놈일세.”

“실력을 보면 더 고마울걸요.”

* * *

일사천리.

김정률의 입지는 아직 공고했다.

김정률이 송석현을 전담 포수로 지정해 훈련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하자 하루도 되지 않아 2군 감독과 프런트에서 승인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80억이 아깝긴 한가 보네.”

김정률은 긴장한 티가 역력한 송석현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어떠냐? 이게 바로 인맥의 맛이다. 너 처음으로 팀 훈련에 참가하는 거지?”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이죠.”

“네 실력 찐하게 보여 줘. 형이 판 이쁘게 깔았으니까 그림 기깔나게 그려 봐라.”

송석현이 자신의 배트를 꽉 쥐었다.

이제는 손에 익을 대로 익은 1kg 36인치 배트.

송석현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오함마로 제대로 찍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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