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art
“선배님, 인환 선배님 저 폼 맞나요?”
김인환의 타격 폼을 본 송석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예전 그대로의 폼 아닌가.
스트라이드를 넓게 벌리고 배터 박스 뒤에 뒷다리를 박고 선 자세.
홈플레이트에서도 한 발 떨어진 위치.
어깨 위로 올라간 히팅 포지션.
전형적인 거포들의 타격 폼이었다.
“후우, 맞아. 보면서도 모르냐?”
김정률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전지훈련에서 본인의 폼을 다시 조정하신 거 아니에요? 그 폼으로도 홈런을 치셨는데……. 그것보다 저렇게 휙휙 타격 폼을 바꾸면 선수한테도 안 좋을 텐데.”
“별 도리가 없었어. 코치들이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가져왔냐고 한 소리 했거든. 몸 쪽 공을 버리고 철저히 바깥쪽을 노리는 폼 아니냐? 그런 식으로는 홈런이나 치겠냐고 난리였어. 감독까지 한 소리 했고.”
“……하, 그래도 타자 본인이 열심히 연구해서 만든 폼인데.”
“인환이 저놈이 지나칠 정도로 착해. 착하고 우직하고 예의 바르고 그렇지. 타석에선 그렇게 마음이 급한데 웃기지 않냐? 아, 뭐 아무튼. 그래서 저놈은 너무 예의가 발라서 문제야. 코치가 하라고 하면 찍소리도 못 하거든.”
송석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열심히 해 놓고 바로 코치가 하란 대로 타격 폼을 바꾼다고요?”
“나도 말렸지. 그래도 어쩌냐, 저놈 성격이 저런데. 남한테 싫은 소리 절대 못하는 놈이거든.”
“아…… 저렇게 타격 폼을 계속 바꾸면 더 안 될 텐데.”
송석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인환이 연이어 헛스윙했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김인환은 말없이 물러섰다.
김정률은 다리를 꼬고 앉아선 턱을 긁적였다.
“이건 뭐 알고도 당하니 답이 없네.”
“선배님이라도 좀 말려 보시지 그랬어요. 인환 선배님 겨우 바깥쪽 변화구에 감을 잡으신 거 같던데.”
“내가 말하면 뭐 하냐, 코치가 까라면 까는 거지. 아, 너는 임의수 사단이 어떤지 모르지?”
임의수는 현재 고트의 감독이었다.
“저는 잘 모르죠.”
“감독 따라서 코치들도 기가 세. 선수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 그러면 반 조져 놓는 거야. 그래도 개기면 2군 보내서 안 올려 주고. 철저한 상명하복. 군대. 그게 임의수 사단이지.”
“……선배님은 좋은 감정이 없으신가 봐요, 감독님한테.”
TV에선 마침 고트의 감독 임의수가 비치고 있었다.
“좋을 수가 있겠냐, 팀을 계속 갈아 버리고 있는데? 이렇게 한두 시즌만 더 하면 그나마 있던 투수들도 다 갈려 버릴 거야. 투수는 쥐어짜면 어떻게든 써먹는다는 게 저 사람 지론이니까.”
“평가가 박하시네요.”
“너무 올드 스쿨이야. 불펜을 갈아서 한 경기 따먹는 데 열중하고 있어. 후우, 우승 청부사라고 데려온 양반이니 이해는 간다만……. 그래도 해도 해도 너무하지.”
평소엔 누구보다 기운차고 긍정적인 사람이 김정률이었다.
누구와 있더라도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선배가 누구를 그렇게 싫어하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요.”
“……후, 나도 뒷담화는 싫어한다만, 하.”
김정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다. 경기나 보자.”
경기는 초반부터 투수전 양상으로 흘렀다.
김인환은 3타수 3삼진으로 물러섰다.
감독은 김인환을 교체했다.
카메라가 간혹 비추는 김인환은 풀 죽은 얼굴로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작년 우승팀이라지만 피닉스는 대놓고 꼴진데 쟤들한테 발리냐? 어휴.”
김정률은 숨을 훅훅 내뱉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자. 됐다.”
“들어가시게요?”
“어, 이만 가 보련다. 너는?”
“저는 마저 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라.”
김정률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방을 나섰다.
송석현은 김정률을 배웅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고트는 피닉스의 기세에 밀려 좀체 힘을 쓰지 못했다.
“흠.”
송석현은 팔짱을 낀 채 고트의 패배를 지켜봤다.
* * *
“하하, 쩝.”
다음 날.
김정률과 송석현은 밥을 먹다 말고 두 눈을 의심했다.
점심시간, 2군 식당에 김인환이 식판을 들고 서 있었다.
김인환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김정률의 물음에 김인환은 의자를 뒤로 뺐다.
“앉아도 되죠?”
“스톱. 너 설마 2군으로 온 거냐?”
“하하, 뭐, 예. 그렇습니다.”
김인환이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김정률은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아이고, 대가리야. 시범경기 한 경기 만에 2군행이라고?”
“그게 그렇게 됐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비가 없냐?”
“삼진 세 개면 화가 나실 만하죠.”
“시범 경기에서 삼진 좀 먹는 게 어떻다고.”
김인환이 숨을 크게 들이켜곤 내뱉었다.
“뭐…… 저에 대한 기대가 없으시니까.”
김인환이 수저를 들어 밥을 먹었다.
송석현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김정률과 김인환을 번갈아 봤다.
김정률은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수저를 놨다.
“이거 뭐, 일본 가서 뺑이는 뺑이대로 치고 다시 처음이네. 원점이야. 아이고, 내 돈. 내 피 같은 돈.”
김인환이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송석현도 따라 말했다.
“저도 죄송합니다.”
“넌 왜 죄송해?”
“저는 아직 1군도 못 밟아 봤으니까요…….”
“쩝.”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친 후 2군 경기장 주변을 걸었다.
말없이, 한참을.
얼마쯤 걸었을까.
걷고 또 걸어 몸에 열이 올라올 때쯤 김정률이 말했다.
“인환아.”
“네.”
“너 후회하지?”
“뭐를요?”
“줏대 없는 거.”
김인환은 끙, 소리를 냈다.
“네 고집대로 밀고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코치가 말한 그대로 따르지도 못하고. 아니야?”
“……맞습니다.”
“어차피 우리 당분간 1군 못 가. 알지?”
“아마도 그렇겠죠. 한 번 내리면 한 달 이상은 기본이니까요.”
“인환아, 나는 말이다, 결심한 게 있어.”
“뭔데요?”
“이제는 나 확실히 노선을 정하려고. 잠수함을 탈까 한다.”
김인환이 걸음을 멈췄다.
송석현도 따라 멈췄다.
“예?”
“뭘 놀라? 네가 내 공 좋다며, 싱커가 죽인다고.”
“그건 그렇지만……. 정말 진심이에요?”
“진심이지. 지금 내가 농담 따먹기나 할 군번은 아니잖아.”
“아니 그래도…… 그, 평생 해 온 게 있는데 그걸 다 갈아엎는 거잖아요.”
“그치. 맞아.”
김정률이 뒷짐을 진 채 경기장을 바라봤다.
이제 봄이 왔지만 경기장 주변은 겨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너나 나나 지금 모습을 봐라. 결국 2군 아니냐. 앞으로 변화가 없다면 이대로 쭉 묻힐 게 뻔하지.”
“저야 뭐 그렇다지만 선배님은 입스도 고치시는 중이고 저번에 다친 건 큰 부상도 아니라면서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다시 공을 던지실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세요. 너무 급하게 결정하신 거 아니에요?”
“아니. 아니야, 그런 거. 내 인생을 건 결정인데 그렇게 쉽게 할 리가 있냐.”
김정률은 자신의 오른팔을 들었다.
“솔직히 좀 아파. 팔꿈치가 어깨 이상으로 올라오면 조금씩 아파. 적응하는 기간인지 아니면 부상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게 아프기 시작하니까 사람 환장하겠더라. 던져도 되는지 마는지도 모르겠고 신경이 너무 쓰이니까 공도 제대로 던질 수도 없고.”
김정률이 몸을 돌렸다.
“석현아.”
“네.”
“네가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전국구였다면서?”
“솔직히 좀 잘하긴 했습니다.”
“너도 부상 때문에 포변 했고. 맞지?”
“팔꿈치 미세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없었습니다.”
“봐 봐. 여기 우리 셋 봐 봐. 다 잘나갔어. 그런데 지금은 여기에 있고. 석현이야 아직 기회조차 못 받았지만 우리 둘은 기회를 받아도 결국 계속 말아먹었잖아. 석현이가 변했듯이 우리도 변해야지. 계절도 저렇게 바뀌는데 우리만 옛날 추억에 사로잡혀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 되겠어? 내가 오버 하다 언더 하는 게 투수 하다 포수 하는 것보다 어렵겠냐? 네가 타격 폼 좀 바꾸는 게 투수 하다 포수 하는 것보다 어렵겠냐?”
김인환은 말 대신 고개를 저었다.
“이왕 다시 이렇게 여기까지 온 거, 제대로 해 보자. 인환이 너는 네 타격 폼을 제대로 만들어. 코치가 뭐라고 하든 말든 쌩까. 어차피 코치 말 들어도 2군이고 안 들어도 2군이야. 나는 제대로 잠수함을 해 볼 거야. 길어도 두세 달. 짧으면 한 달. 그 안에 콜업은 한 번 올 거야. 그때 성적으로 보여 주면 돼. 시즌 중에 코치가 뭐라고 하겠어. 안 그러냐?”
“그러면 감독님이 그냥 가만두고 보진 않을 거 같은데요…….”
“두고 보지 말라고 해. 자르라면 자르라지. 어차피 이판사판인데. 그리고 인마, 인환아.”
“네.”
“우리가 올라가야 석현이를 끌어 줄 거 아니냐. 석현이가 이래저래 우리 많이 도와줬는데 이대로 우리까지 여기서 허우적거리면 얼마나 쪽팔리냐?”
송석현이 손사래 쳤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긴. 우리가 쪽팔려서 그래. 너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기회도 없는데 우린 있는 기회조차 날려 먹고 옛날 하던 대로 그대로 하고 있잖냐. 우리도 바뀌어야지. 일단 퓨쳐스리그부터 시작하자. 우리 둘이 2군 경기 시작하면 내가 스무스하게 너 추천할게. 어차피 재활군이 유야무야됐는데 너 한 번 안 쓰겠냐? 우리 셋, 여기서 다시 시작해 보자. 제대로 다시 시작해서 1군에서 셋 다 뛰어 보자. 어때?”
김인환은 마른 입술에 연신 침을 묻히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존경하는 선배의 제안과 감독과 코치의 엄명.
김인환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목소리를 키웠다.
“좋아요. 해 보죠. 뭐, 퓨쳐스리그 개막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퓨쳐스 폭격한 다음에 1군 가 버리죠, 뭐. 우리가 2군에서 잘하면 한번 올리지 않겠어요?”
김정률이 씨익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남자면 남자답게 ‘빡!’ 하는 맛이 있어야지. 석현이도 걱정하지 마. 감독이 너 안 쓰면 내가 너 전담 포수로라도 쓰라고 어거지를 부릴 테니까. 내가 잘 던지면 감독도 내 말 들어주지 않겠냐?”
“그렇게까지 하시면 선배님 체면이 좀…….”
“체면은 무슨. 네 실력은 무조건 보여 줘야 돼. 너를 썩히는 게 더 말이 안 돼. 우리 셋이 다 같이 올라가자. 가서 씹어 먹자.”
김정률은 그날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언더핸드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타고난 유연성, 긴 팔, 두터운 하체와 튼튼한 허리는 마치 처음부터 언더핸드 투수를 위해 준비된 선물 같았다.
김정률은 조금씩 스트라이드를 넓히면서 구속도 올리기 시작했다.
퓨쳐스 개막까진 3주 남짓.
고트는 시범 경기에서 영 좋지 못한 성적을 기록하며 팬들의 우려를 낳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리그 개막까지 닷새가 남은 날.
김정률은 연우식이라고 명패가 달린 방문 앞에서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똑똑.
“누구세요?”
“형, 저 정률인데요. 지금 잠깐 시간 돼요?”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머리가 부스스한 남자는 고개를 내밀어 김정률을 올려다봤다.
“네가 웬일이야?”
“형도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싱겁긴. 들어와. 오늘 쉬는 날인데 잘됐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