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28화 (28/201)

귀국

다음 날 아침.

송석현은 새벽부터 일어나 창밖을 봤다.

김정률이 코 고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제 곧 귀국이다.

마무리로 훈련을 갈무리한 후 며칠 후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

송석현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배트를 바라봤다.

어제 선물받은 연습용 배트.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트를 움켜쥐었다. 무게감이 어깨까지 타고 올라온다.

송석현은 배트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붕! 붕! 붕!

가볍게 휘두르는데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묵직하다.

스탠스를 제대로 잡고, 팔꿈치를 몸에 붙이고, 공을 던지듯 배트를 툭 밀어낸다.

“느낌이…… 좋네.”

원래 무거운 배트를 쓰긴 했지만 이 배트는 손에 딱 붙는다.

현대 야구에선 더 가볍고 더 얇은 배트를 쓰는 게 트렌드다. 스윙 스피드를 높이고, 빠른 변화구에 적응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가볍고 얇은 배트라고 장점만 있는 게 아니다. 빗맞으면 배트가 쉽게 밀리고, 쉽게 배트가 부러진다.

무거운 배트는 스윙 스피드도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빠른 변화구에 그만큼 취약하다.

최근 트렌드와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타이세이와의 승부 때처럼 결대로 맞히기만 한다면 설령 빠지는 공이어도 쭉 뻗어 나간다.

궤적만 맞힌다면 안타를 양산하기 더 쉽단 얘기다.

붕! 붕! 붕!

송석현은 땀으로 알코올을 다 날린 후에야 다시 숙소로 들어갔다.

* * *

김형석은 점심시간에 맞춰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숙소로 돌아온 세 사람이 김형석을 맞았다.

“여, 왔는가!”

김정률이 한 손을 들어 크게 흔들었다.

송석현, 김인환도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김형석은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 없는 사이에 잘 놀았고?”

“놀기는, 인마. 열심히 훈련도 하고, 경기도 뛰고 다 했어. 너는?”

“나야 뭐 병원에 계속 있었지. 꼼꼼하게 검사하더라고.”

“그래서? 병원에선 뭐래?”

김형석은 말 대신 손가락으로 식당을 가리켰다.

“일단 밥을 먹을까?”

김정률도 눈치가 있었다. 후배들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상태를 밝히고 싶지 않단 얘기일 거다.

“그래, 밥 먹고 얘기하자.”

밥을 다 먹은 후 김정률과 김형석은 따로 티타임을 가졌다.

“자, 받아.”

“땡큐.”

김정률과 김형석은 방에서 커피 한 잔을 나눠 마시며 얘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김정률의 물음에 김형석은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되긴. 뭐, 예상한 대로.”

“예상?”

“그래,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엔딩.”

“…….”

김형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이번이 마지막이 됐네. 그래도 동기랑 마지막으로 훈련도 해 보고 끝나네.”

“병원에선 대체 뭐라고 했는데?”

“생각보단 좋아. 재활 꾸준히 하면 일상생활 하고 남들처럼 운동하고 그런 건 문제가 없대. 짧으면 1년, 길면 2~3년 걸리겠지만 말이야.”

“야구는 안 되고?”

“안 되지, 야구는.”

“왜?”

“왜는. 야구처럼 허리를 많이 쓰는 운동이 어딨어? 게다가 폭발적으로 허리를 틀어 하는데 그러면 백 프로 수술이야.”

“허.”

김정률이 한숨을 쉬었다.

수술.

야구 선수들에게는 의례적인 통과 관문일 뿐이지만, 반가운 소리는 아니다.

김정률도 팔꿈치와 어깨 수술을 했지만 예전 기량을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물며 그보다 더 큰 공사인 허리 수술을 한다면…….

야구 선수 김형석은 없을 터다.

“그래서 깔끔하게 은퇴하기로 했다. 뭐,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었잖아. 이번에 훈련도 네가 우겨서 따라온 것도 컸고, 나도 마지막으로 좀 해 보고 싶기도 했고.”

“후우우.”

김정률이 고개를 숙였다.

김형석은 김정률의 다리를 툭툭 쳤다.

“오바는. 왜 네가 그러냐?”

“하, 외로워서 그런다, 외로워서. 우리 이제 서른하나야. 우리 나이에 이제 막 취직해서 신입으로 들어가는 애들도 있는데 우린 죄다 은퇴를 하고 있네.”

“뭐, 모르고 야구 시작했냐?”

“알아. 알아도 뭐 기분이 그러네. 우리 동기 중에 남은 건 이제 너랑 나 둘인데 너까지 가면 나 혼자네.”

“외롭냐?”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네, 후우. 너까지 나가면 이제 내 차례 같다.”

“넌 더 해 봐. 그래도 천하의 김정률인데 기회가 더 있겠지.”

“글쎄다.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자신은 없다.”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해 봐. 네 말대로 남들은 우리 나이에 신입으로도 들어가는데 네가 쫄 게 뭐야. 어쨌든 넌 공을 던질 수 있잖아. 나는 아예 공을 던지면 안 되는 몸이고.”

김정률이 자기 어깨를 보여 줬다.

“나도 이 팔만 수술 세 번이야.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다고. 공이 완전 노답인데 무슨.”

“내가 너만큼만 던져도 열심히 해 봤을 거다, 짜식. 내 앞에서 앓는 소리 할래?”

김정률이 눈썹을 씰룩했다.

“미안하다.”

“네가 이번에 일본까지 훈련하러 온 거 보면 나름 마음 단단히 잡은 거 같은데, 그 마음 잊지 말고 쭉 해 봐. 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

“동기 없다고 우울해하지 말고. 야구 선수가 서른 넘어가면 노장이야. 이 나이에 은퇴하는 거 이상한 거 아니다. 그러니까 네가 선배 노릇 잘해.”

“이제는 누구한테 힘들다고 얘기도 못 하겠네.”

김정률은 이마를 매만졌다.

고트는 젊은 팀이다.

1군에 김정률보다 나이 많은 노장이 없다.

다른 팀이라면 어린 유망주를 많이 올려서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고트는 달랐다.

애매한 1군은 FA 보상 선수로 나가기 일쑤다.

노장에게 시베리아 벌판과도 같은 곳이 고트였다.

김정률이 여태 버틸 수 있었던 건 그가 잘하기 때문이 아니다. FA 이후 부상, 부상 후 성적 하락으로 다른 팀에서조차 그를 트레이드 대상에 안 올렸기 때문이다.

일본에까지 나와 훈련하고 있지만 과연 자신이 1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다.

다만 자신은 있었다.

여태까지 길도 모르고 헤맸다면, 이제는 방향을 잡았다.

어떤 팀이든 시즌이 지날수록 투수는 모자라기 마련이다. 자신이 2군에서 친구와 후배와 함께 운동하다 보면 다시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형석마저 은퇴한다고 하자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자신의 은퇴도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걸 실감했다.

“그래서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김정률의 물음에 김형석은 턱을 괴었다.

“지금 생각한 게 세 가지 있는데…….”

“세 가지나? 오오, 뭔가 준비해 둔 게 있나 보네.”

“준비까지는 아니고. 모교에서 코치 제안이 왔었거든. 구단에서도 스카우트 팀을 제안했고. 둘 다 밥 벌어먹고 살기는 나쁘지 않은 거 같아.”

“나머지 하나는?”

“하나는 해외 취업인데…….”

“해외?”

김형석이 씨익 웃었다.

“히로토 코치가 나한테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

“히로토 코치가?”

“그래, 자기는 타자 출신이라서 투수 출신이 필요하대. 괜찮으면 일본에서 재활하면서 자기랑 일해 보지 않겠냐고 하던데?”

“너 일본어도 못하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래도 나쁘지 않은 제안 같더라. 코치를 하면 페이가 문제고, 스카우터 하면 전국 각지로 여행을 가야 하고. 둘 다 내 취향은 아니잖아.”

“여기서 일하면 돈은 많이 준대?”

“음, 아니. 지금은 자리 잡는 중이라 월급은 많이 못 줄 거래.”

“그런데 넌 여기서 일하고 싶어?”

“어차피 힘든 거면 아예 제대로 일하고 싶어. 히로토 코치가 아는 게 많잖아. 일본이 재활 쪽으로는 한국보단 나으니까 여기서 재활도 하고 히로토 코치한테 제대로 배우면 한국으로 돌아가도 뭔가 제대로 대우를 받지 않을까 싶다. 내 커리어로 아마야구 코치가 최대일 텐데 일본 유학파라는 딱지가 붙으면 프로 코치도 뚫을 수 있지 않겠어?”

“이미 마음 정한 거냐?”

김형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을 정한 건 아닌데 말하다 보니 이게 제일 낫긴 하네. 여태 어영부영 선수 생활을 했는데 여기서 확실히 재활도 하고 코치 경력도 쌓고, 딱 좋네.”

“……흠.”

“이따가 히로토 코치랑 얘기를 한번 해 봐야겠다.”

“그럼 넌 이번에 한국 안 들어가게?”

“들어가긴 같이 들어가야지. 들어가서 구단이랑 얘기도 해야 하고 짐도 챙겨서 다시 일본 오든가 해야지.”

“일본…… 일본이라고…….”

김형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뭘 네가 청승맞게 구냐? 힘든 건 난데.”

“너까지 한국에 없으면 많이 외롭겠구나 싶어서.”

“반대로 생각해, 그럼. 내가 일본에 있으면 놀러 갈 친구가 있잖아.”

“내가 여기까지 놀러 오리?”

“못 놀러 올 건 뭐야. 한국이랑 여기랑 코앞인데.”

김형석이 김정률 앞에서 손가락을 탁탁 튀겼다.

“너도 정신 차리고 훈련해. 이제 곧 우리도 코치할 나이다. 멋지게 뛰다가 은퇴해라. 천하의 김정률이 마지막 가는 길은 간지가 나야지.”

김형석은 말을 마치고 먼저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김정률이 눈을 감았다.

“세월 빠르네, 빨라…….”

* * *

마무리 훈련을 마친 후 세 사람은 히로토 코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다들 좋은 성과를 얻은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김정률이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였다.

“코치님 덕분에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팔 각도도 많이 올라왔구요.”

“이번 스프링캠프를 잘 보낸다면 오버핸드까지 올릴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입스를 고치는 거지 예전 구위를 다시 찾는 건 어려워요. 그건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단 입스 고친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구속도 차근차근 늘려 봐야죠.”

“팔 각도를 다 올리면 그땐 스트라이드를 조금씩 넓혀 가세요. 스트라이드를 넓히면 골반 회전 각도를 늘리세요. 하나씩 고쳐 가다 보면 구속을 늘리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어려운 점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돕도록 하겠습니다.”

히로토 코치는 김인환을 바라봤다.

“김인환 선수는 제가 많이 못 도와드려서 마음에 걸리네요.”

“아닙니다. 저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김인환 선수의 반사 신경은 훌륭해요. 컨택 능력이 안 따라 줘서 나쁜 공을 치는 게 문젭니다. 노선을 확실히 선택하세요. 컨택 능력은 키울 수 있지만 자신의 존을 작게라도 확실히 고정시켜 놓고 키워 가야 합니다.”

“예, 조언 감사합니다.”

히로토 코치의 눈이 송석현에게 향했다.

자신과 네 사람과의 인연은 송석현으로부터 시작됐다.

“석현.”

“네, 코치님.”

“너는 내가 본 20세 중에 가장 똑똑하고 침착한 선수야. 손목 힘은 내가 본 어떤 선수보다 더 뛰어나. 마인드도 훌륭하고.”

“칭찬 감사합니다.”

“듣자 하니 한국에선 2군에도 못 들었다고 하던데, 참 안타까운 일이야. 혹 그 팀을 나오거든 나한테 연락해. 네가 포수고 한국인이라지만 1~2년만 기초를 닦으면 일본에서도 프로에 도전할 수 있어. 그건 내가 자신해. 그러니까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해. 넌 꼭 성공할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히로토 코치가 웃으면서 네 사람을 봤다.

“형석은 곧 돌아올 거지?”

“네,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래, 한국에서 잘 마무리하고 와.”

“네,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그동안 다들 고생 많았어요. 짧지만 여기서 얻은 경험이 여러분의 프로 인생에서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좋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안녕히 가세요.”

네 사람은 히로토 코치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히로토 코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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