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Precious!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이 3루 방향으로 뻗어 갔다.
3루수가 글러브만 가져다 대면 잡을 수 있는 직선타.
3루수는 글러브를 가져다 대다 몸을 뺐다.
공은 그대로 3루 베이스를 벗어나 파울 라인으로 나갔다.
파울.
3루수는 그대로 파울 지역으로 몸을 뺐다.
3루수가 있던 자리엔 부서진 배트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으음.”
타이세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몸 쪽으로 완벽하게 먹힌 공이었다.
프로 선수라면 아웃 처리를 했을 거다.
배트가 부러졌다지만 호들갑 떨면서 몸을 피할 만큼 파편이 크고 빠르지도 않았다.
아쉬웠지만 어쪄랴.
작은 차이가 프로와 아마를 가르는 법이다.
3루수를 원망하기보단 의도대로 먹힌 공을 양산했다는 데 의의를 뒀다.
“잠시만. 조또마떼. 조또마떼 구다사이.”
송석현은 심판에게 양해를 구한 뒤 부서진 배트를 쥐고 벤치로 향했다.
여분의 배트를 찾아 벤치로 들어가려는데 오키나와 베어의 코치가 배트를 슥 내밀었다.
“아…….”
송석현은 자기 배트를 쓰려고 했지만 코치가 배트를 내밀자 무의식적으로 배트를 쥐었다.
“간바떼.”
“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송석현은 배트를 쥐고 붕붕 휘둘렀다.
두 번만 휘둘렀을 뿐인데 저절로 배트에 눈이 갔다.
연습용 배트.
보통 배트보다 조금 더 무겁고 긴 배트.
송석현은 평소 900g 내외의 배트를 썼다. 보통 연습용 배트는 980g~1,000g, 더 무거운 배트도 쓰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 배트의 무게는 확실하지 않지만 1kg 내외의 무게라는 건 손으로 느껴졌다.
배트의 끝을 보니 배트의 길이도 34인치보단 1인치 이상 더 길어 보였다.
“후우우.”
다시 배트를 바꿔 달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모두가 자신과 타이세이의 승부를 지켜보고 있다. 배트를 바꿔서 범타가 나오면 더 민망해진다.
“오케이?”
송석현이 타석으로 다가가자 심판이 물었다.
“오케이.”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거리곤 타석에 들어섰다.
“파이팅! 석현이 파이팅!”
김정률의 우렁찬 응원 소리에 오키나와 베어 선수들도 합창했다.
“파이또!”
“파이또!”
송석현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타이세이의 초구는 직구가 아니었다.
스플리터.
스플리터는 손가락 장난치기 좋은 공이다. 약간의 손장난으로 투심처럼 공을 좌우로 휘게 만들 수 있다.
타이세이는 싱커보단 횡 무브먼트가 적지만 몸 쪽으로 떨어지는 스플리터로 범타를 유도했다.
“후우우우.”
어려운 상대다.
마무리로 저런 투수가 나온다면 머리가 아프다.
바깥쪽엔 포크가 있고 안쪽엔 스플리터가 있다.
변화구를 노리면 빠른 직구로 윽박지른다. 배트까지 무거워서 섬세한 배트 컨트롤도 어렵다.
송석현은 배트를 살짝 움켜쥐었다.
-플레이볼!
타이세이는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깔끔한 와인드업 후 피칭.
팡!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몸 쪽에 붙는 스플리터였다.
“후후.”
타이세이는 포수의 공을 받으면서 웃었다.
역시 아마추어.
제대로 된 1구에 얼어붙어 스윙이 없다.
타이세이가 모자를 고쳐 썼다.
이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건 프로가 아니다. 피칭은 예술이어야 한다. 힘이 아니라 머리로 상대 타자를 눌러 버려야 한다.
타이세이의 머릿속에 삼구 삼진이 떠올랐다.
2스트라이크 상황.
꼬맹이의 배트 컨트롤로 몸 쪽 스플리터를 쳐 낼 수 없다.
타자가 노리는 건 바깥쪽 직구 하나.
헛스윙을 하더라도 타자는 바깥쪽 직구 말곤 노릴 게 없다.
그렇다면…….
끄덕끄덕.
타이세이가 다리를 들어 올렸다.
타자가 원하는 게 보이면 투수는 던질 곳이 보인다.
팟!
타이세이의 손을 떠난 공이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을 노린다.
송석현의 배트가 시동이 건다.
타이세이의 마음 한구석에서 들리는 외침.
됐다.
타자의 인식 지점을 지난 공이 각도를 꺾어 떨어진다.
이게 바로 알고도 당하는 포크볼.
2스트라이크는 포크볼러의 카운터다.
타자는 2스트라이크 전에 포크볼러와 승부해야 한다.
팡.
“…….”
타이세이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오키나와 베어 벤치에선 오오, 감탄이 터졌다.
“저걸 참네.”
“석현이 칠 거 같더니만 참네요.”
“수 싸움엔 안 밀리는데?”
타이세이는 표정을 관리했다.
아예 안 친 것도 아니고 배트에 시동이 걸렸는데 배트를 내지 않았다.
페이크였나?
아니면 포크볼 쿠세가 보인 건가?
그것도 아니면 포크볼을 구분한 건가?
확신을 가진 공이 통하지 않았다.
타이세이의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싹텄다.
“와아.”
송석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은 정말 위험했다.
배트에 시동을 걸었는데 배트가 무거워 원하는 만큼 나오질 않았다. 왠지 포크볼일 거 같단 마음까지 들자 배트가 나오다 말았다.
결과는 역시 포크볼.
배트를 냈다면 꼼짝없이 헛스윙이었다.
‘하나 더.’
포수가 포크볼 사인을 낸다.
타이세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설마 저런 애송이가 자기 포크볼을 골라낼 리 없다.
2군에서도 자신의 포크볼은 수준급으로 평가받는다.
당장 1군에 올라도 먹힌다는 평이 다수였다.
타이세이가 1군에 못 올라가는 건 아직도 아쉬운 제구와 폼을 바꾸면서 생긴 쿠세 때문이지 공 자체는 1군 레벨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팟!
타이세이가 이번엔 조금 더 안쪽으로 포크볼을 던진다.
직구였다면 살짝 몰린 공.
팡.
타이세이의 미간이 좁아진다.
“…….”
2-2.
타자가 이번엔 배트를 낼 생각조차 없었다.
이건 포크볼을 본 게 아니라 애초에 배터리의 생각을 읽었다는 얘기다.
“재밌는데.”
유격수로 있던 히로시가 히죽 웃었다.
타이세이는 소프트뱅크에서도 애지중지 키우는 마무리 후보.
그는 외모와 달리 승부욕이 끓다 못해 펄펄 솟구치는 타입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했던 연습 경기에서 자존심에 먹칠을 당할 줄 누가 알았으랴.
타이세이가 전력으로 던지는 만큼 저 어린애가 안타를 치긴 어려울 거다.
하지만 장외 홈런 한 방으로도 이미 자존심이 구겨졌는데 어려운 승부 끝에 겨우 아웃 카운트를 따낸다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거다.
이미 자신과 료스케는 놀릴 준비가 돼 있었다.
‘여기서 안타까지 맞게 되면 놀릴 수도 없을 텐데.’
이번 승부가 범타로 끝나면 홈런은 그저 사고로 치부될 거다. 히로시와 료스케에겐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반대로 여기서 안타가 나온다면 당분간 오늘 일은 거론할 수도 없다. 투수의 자존심을 건드는 일을 함부로 언급할 순 없다.
히로시는 다른 의미로 타이세이가 송석현은 범타로 처리하길 빌었다.
절레절레.
타이세이와 포수가 주고받는 사인이 길어졌다.
2-2.
여기서 볼 하나가 더 들어가면 풀카운트다.
애송이를 상대로 풀카운트 승부를 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홈런을 맞았다고 어려운 승부를 한다 생각할 거 아닌가?
포수는 하이볼 사인을 냈다.
계속 낮은 공으로 눈을 낮춰 놨으니 높은 공으로 헛스윙을 유도하자는 의도였다.
타이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장외 홈런이 사고였다곤 해도 송석현은 자신의 최고 구속의 직구를 쳐 냈다.
배트 스피드가 빠르단 얘기다.
“……하.”
포수는 한숨을 쉰 뒤 사인을 바꿨다.
몸 쪽 스플리터.
타자가 애초에 손도 못 댔던 공이다.
타이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플리터라면 좋은 선택이다.
“핫!”
타이세이가 기합을 넣으며 공을 던졌다.
투수가 기합을 넣는 경우는 많지 않다. 타이세이는 그중에서도 기합을 잘 안 넣는 축이었다.
송석현을 상대하면서 자신이 기합을 넣는다는 걸 인식하지 못할 만큼 타이세이는 이번 승부에 깊게 빠져 있었다.
팡!
포수가 미트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송석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양 팀 선수들이 심판을 바라봤다.
‘볼, 인사이드.’
심판의 말에 포수가 고개를 숙였다.
우기고 싶어도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한 개 반이 빠져 들어왔다.
포수가 고개를 숙이자 타이세이가 이를 꽉 물었다.
역시 제구가 문제다.
결국 송석현을 상대로 풀카운트 승부.
여기서 지는 건 더더욱 용납이 안 되지만, 이런 상황까지 몰렸다는 것도 용납이 어려웠다.
“와, 석현이 장난 아닌데요?”
“너는 저거 참을 수 있었겠어?”
“저는 3구째 포크볼에 이미 배트 돌았죠.”
“당연하듯이 말하네. 그걸 참았어야지.”
“참는 게 더 이상하죠. 저걸 어떻게 참아요?”
“쟤는 참았잖아.”
“아마 예상한 거 아닐까요? 그게 아니면 못 참죠.”
“그럼 이번 건 뭘 거 같냐? 직구? 포크?”
“저런 무리수까지 둬 가면서 석현이 타석에 불러 세웠으면 삼진 잡지 않을까요?”
“바깥쪽 직구라는 거지?”
“몸 쪽 공을 하나 보여 줬으면 바깥쪽 직구를 꽂아 넣기 딱 좋죠.”
“아냐. 난 반대일세. 포크다.”
“포크요? 여기서? 그럼 볼넷인데? 완전 자존심 구길 텐데요.”
“아니야, 아니야.”
김정률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여기서 포크를 안 던지는 게 더 자존심 구기는 거야. 자기 포크볼에 자신이 없단 얘기잖아.”
“포크볼이 지금 걸렀는데 또 던질까요? 전 직구라고 보는데.”
“난 포크볼. 한번 보자고, 어떤 공 던지는지.”
김인환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럼 석현이는 그걸 참을까요? 포크볼을?”
“그건 나도 모르겠다. 아마 80% 확률로 배트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포크볼 각이 좋아. 쉽지 않아.”
타이세이는 공을 만지작거렸다.
투수는 글러브 속의 공을 만지작거릴 때 투심 그립으로 잡는다.
직구 그립으로 공을 잡다가 다시 투심 그립으로 바꿀 경우 쿠세가 들키거나 그립이 제대로 안 잡히는 경우가 있다.
투심 그립에서 조금 더 벌리면 포크.
투심 그립에서 더 좁히면 직구.
타이세이는 공을 만지작거리면서 사인을 주고받았다.
‘직구.’
포수의 사인은 정석대로였다.
바깥쪽 직구.
몸 쪽 공 하나를 찔러 넣어서 상대를 몰아세웠다.
몸 쪽 공 이후로 바깥쪽 공 하나는 더 멀어 보이기 마련이다.
머리에 포크볼 생각이 가득 찼다면 더더욱 공이 멀어 보일 거다.
무엇보다 지금 포크볼에 속질 않으니 선택지도 없다.
절레절레.
타이세이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포크볼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상대는 포크볼을 예상하고 배트를 내지 않은 거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상대가 노리는 건 딱 하나.
바깥쪽 직구.
타자는 자신이 바깥쪽 직구를 던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후우, 후우.”
타이세이가 땀을 닦다가 피식 웃는다.
자신이 땀을 흘리고 있다.
저 어린아이를 상대로 땀까지 흘리며 투구를 하고 있다.
웃기는 일인데 입안이 바짝 마른다.
일을 이렇게 키워 놓고 안타를 맞으면 그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포크?’
끄덕.
포수가 마른침을 삼킨다.
투수의 고집이지만 여기선 믿어 줘야 한다.
연습 경기라지만 자존심 승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절대 질 수 없다는 투수의 호승심이 포수의 가슴에 옮겨 붙었다.
팡, 팡!
포수가 미트를 때렸다.
좋아.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투수는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지면 된다.
아직도 앳된 티가 가득한 타자를 상대로 뭐 그리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가?
“화이또!”
“간바떼!”
응원 소리와 함께 투수가 손가락을 벌렸다.
그리고…….
와인드업.